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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봅시다

음식의 역사(6):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by 컴속의 나 2009. 1. 27.


6.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 대한 가단한 언급을 하고자 한다. 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인류의 음식 문화에 대한 서구적인 편견 벗기‘ 라고 할 수 있다. 마빈 해리스에 따르면 서구 문화의 관점에서 특정한 인류의 음식문화를 야만적이라거나 이해 할 수 없는 ’수수께끼‘ 라고 단정 짓는 것은 오만이라는 것이다. 서구인의 눈에 비치는 그 야만성이나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는 사실 환경과 생태에 적응하려는 이해할 만한, 또한 설득력 있는 행동이나 생각에 근거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야만적이고 납득할 수 없듯이 보이는 음식문화는 서구적인 문화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일뿐 음식 문화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합리적이고 냉철하게 풀어야 할 이해 가능한 ‘수수께끼’ 임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레이 태너힐의 이 책<음식의 역사> 또한 마빈 해리스의 저작의 관점과 상당히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물론 마빈 해리스의 저작이 문화생태학적이고 문화유물론적 입장에서 인류의 음식문화를 인종과 민족, 그리고 생태학적 환경에 근거해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면 레이 태너힐은 생태학, 사회학, 역사 전반을 아우르며 음식의 역사를 보다 개괄적으로 관찰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아무튼 그들에게 음식의 역사에 관해 관찰하는 태도에 대한 하나의 속담을 적용해 보자면 그것은 아마도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는 속담이 아닐까 한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인들에게 인도의 소 숭배는 참으로 기막히게 여겨질 것이다. 그렇다고 인도의 소를 아프리카로 보낼 수는 없다. 인도인에게 소는 신성한 숭배의 대상이지 굶주림을 채우는 식량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사실 이 말은 잘못되었다. 인도 내에서 소의 밀도살을 통한 식용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상황처럼 굶주려 죽는 이들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말해준다. 오히려 소의 신성화가 소의 값을 상승시키지 않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빈자들에게 은밀하긴 하지만 싼 값으로 유통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아프리카인의 입장에서 인도인의 소 숭배는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인도인들은 왜 소를 신성시 할까, 라는 질문 자체로 돌아가 보자.

힌두교에서는 소는 부, 건강, 풍요의 상징이다.

소고기를 먹는 이슬람교에 대항하는 반 이슬람 팜플렛



기원전 2,000년경에 아리아인들은 소를 몰고 인도로 들어왔다. “인도 토착민들은 유제품을 아주 열렬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소비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시기도 있었던 것 같다."(p.192).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정착한 후 종교적 율법을 강화하면서 소를 도살하는 것보다, 소를 통해 유제품을 얻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아리아인의 종교적인 율법인 『리그베다(Rigveda)』에 따르면 양, 말, 염소, 물소 등은 음식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소는 예외적인 동물이었다. 또한 암탉의 계란처럼 소의 젖을 소 그 자체를 도살해 먹는 것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고 생각한 듯하다. 인도의 열대 기후에서 염소나 물소가 젖을 제공해 주기는 했지만 기름지고 독특한 냄새가 나는 녹색의 액체를 싫어했을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염소나 물소의 젖은 환영받지 못한다. 기원전 1,000년 인도의 또 다른 문헌인『아타르바베다(Atharvaveda)』에는 고기를 먹는 행위를 조상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면서, 소를 먹는 것이 더욱 강력하게 금지되었다.

대개의 법이 그렇듯이 시대상의 변화와 함께 법의 적용이 사람들의 의식, 현실적인 삶과 괴리를 보이게 된다. 인도의 『리그베다(Rigveda)』나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기원전 700년경에 이르러 소 식육에 대한 금지는 현실적으로 사문화되면서 손님접대와 제사을 위해 가축 도살이 일반적으로 허용되었다. 브라만 사제들은 희생제의를 위해 지역사회에 더 많은 가축을 요구하게 되었다. 농업에 유용하게 이용되고 유제품의 공급원인 소들의 수가 줄어들자 반란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혼란은 불교와 자이나교의 위대한 지도자인 석가모니와 마하비라 등장의 사회적인 역사적인 출현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아리아인의 카스트 제도와 짐승도살에 반대하는 것을 그 교리로 삼았다. 석가모니는 살생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고, 자이나교는 야채, 과일에 들어있는 곤충을 엄격하게 가려내어서 먹었다. 이러한 채식주의적인 발상은 생태학적인 인식이나 단순한 종교상의 교리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배타적 계급 제도인 카스트와 제의적 희생에 대한 반대의 산물이었다.”(p.193) 이처럼 불교와 자이나교가 채식주의를 교의화하면서 소 도살은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이전의 소 살 금지에 대한 인식을 다시 일어나게 했다. 두 종교는 정통 베다신앙에도 영향을 미쳐 기원전 100년경에는 브라만 사제들이 동물 희생을 제의 포함하지 않는 규정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인도의 세 종교인 불교, 자이나교, 베다는 소를 신성시하게 되었다.

*위의 사진들은  영문판 위키피디아 에서 가지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