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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14:10

백댄서즈(バックダンサ-ズ,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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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댄서즈(バックダンサ-ズ, 2006)


젊음은 방황의 시기다. 수긍할 수 없는 기성세대에 대한 실망이나 분노에서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지만 조여 오는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사회의 구속에 반항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질풍노도의 시기이고, 주변인의 시기이며, 이유없는 반항기라 낙인 아닌 낙인이 찍히는 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백지에 가까운 시기이기도 하며 순수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상에 목말라하며 현실의 속됨에 야유를 보낸다. 아무리 불완전하고 비현실적이며 하찮은 사색의 결과에서 싹텄다고 하더라도 이상이야 말로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이러한 현실과 기성세대, 다른 무엇들에 대한 분노와 실망이 배출구 없는 막막함으로 다가올 때 그 막막함은 폭력이나 환각이나 환상, 그리고 예술이 되곤 한다. 마약이나 섹스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수단이 되고, 혁명안 파괴가 분노를 잠재우는 도구가 된다. 또한 예술을 통해 기성의 가치관에서 이탈하려는 노력을 한다. 예술은 환각과 결합하는 경우가 흔하다.


백댄서즈는 바로 이런 젊음이들의 영화이다(사실은 이런 젊음을 가장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상업주의의 스타 탄생의 경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대한 상업주의와 자본주의에 비록 달걀을 던지는 격이지만 그런대로 의미있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상업주의라는 바위가 워낙 견고하다 보니 이 정도도 가상하지 않을까?). 이런 젊음만이 아니다. 또한 나이를 초월해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늙은 젊은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느 사회에서나 기성세대의 대오에서 낙오한 늙은 젊은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젊은 백댄서들에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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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 젊은이들과 늙은 젊은이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영화의 제목이 <백댄서즈(Backdancers)>이므로 이 영화는 백댄서들을 구성하는 젊은 멤버들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록밴드를 구성하는 늙은 멤버들 또한 한물 간(?) 밴드라는 의미에서 영화의 제목과 상응할 수 있다고 보여 진다. 그들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교류하고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고 서로 이해하는 것은 바로 예술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더 나아가 백(back) 이라는 ‘중심에서 벗어나거나’ ‘한물 간’ 존재라는 사실이다. 누구로부터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특히 백대서들의 멤버들이 춤이라는 예술을 선택한 것은 자유로움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의지에 의한 삶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따라서 이런저런 이유로 백댄서인 자신들의 존재 가치가 위축되고 상실되는 것은 그들의 자유로운 삶과도 밀접하게 관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들의 자유라는 것이 도덕이나 선, 악 등의 사회 관습적인 가치판단에서 볼 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라 할 수 있을 지라도 그것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한 개인이 자유롭고 싶다는 그 사실 자체는 개인이 처한 상황의 맥락이 좀 더 더해진다면 그 자유의 추구가 더욱 구체화 될 것이다. 그들이 가출을 하면서, 호스티스 생활을 청산하면서, 사회로부터 받는 개인적인 수치심에서 모델을 그만두면서 선택한 춤을 더 이상 추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의 선택과는 관계없는 부자유한 삶을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현실적으로 판단해 볼 때, 그들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기를 누리고, 지명도가 높아지면서 그들의 사적인 자유에도 제약이 올 것은 분명하니까 말이다. 이것은 늙은 젊은이들이 젊은 시절 인기의 절정에서 음악을 그만 둔 사연을 추측해 볼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자유로서의 예술(춤)이 너무 상업주의와 결합되는 것도 자유의 성격을 회의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좋아서, 바래서 하는 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감동이나 의미의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이 영화의 인상을 두루뭉술하게 적어 보았다. 이 글이 너무 자의적인 생각에 근거해 적었다거나 찬사 일변도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이 영화를 단순한 오락이나 상업주의 영화라고 해도 맞는 말이다. 또한 작품성 자체에도 야박한 점수를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의 변두리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살아가야하는 삶보다, 비록 백댄서이기는 하나 자신이 선택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적어도 이 영화가 우리의 일상과 우리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미덕 정도는 있지 않을까? 특히 우리의 교육과 우리의 부모들에게도 의미있는 교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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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23:57

허니와 클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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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와 클로버


초원을 만들려면 꿀과 클로버가 필요하다

- 에밀리 디킨슨

젊은 시절이 아름다웠던가? 이 질문의 시점은 젊은 시절을 거친 자들의 질문이다. 그들에게 젊음이 사라지고 난 뒤, 젊음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향유할 수 없는 젊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결코 반복해서 누릴 수 없는 시간으로 추억이란 박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지만 그저 회상으로만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은 아름다운가? 정녕, 아름다운가? 지금 청춘들에게 이 질문은 불필요한 질문이다. 청춘이 아름답다는 말은 되돌아보는 자들의 회상 속에서나 가능하다. 삶이 완성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라면 청춘은 격렬한 붓놀림이다. 덧칠에 덧칠을 거듭하는 한계를 뚫으려는 욕망이다. 수많은 좌절과 상처를 끊임없이 덧칠하면서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나아가거나, 때론 부수거나, 무의미한 붓놀림으로 제자리에 맴돌기도 한다. 그림과 조각으로 정신을 승화하려 하지만 유형의 캔버스와 나무속에 젊은 영혼의 자유로움을 넣는 것은 참으로 고뇌가 아닐 수 없다. 자유를 부자유의 틀 속에 넣으려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역설이 있기에, 고뇌가 있기에 또한 젊음이 아름다워 지는 것이다.(이 영화조차 한 편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젊음의 순수와 서툼, 상처와 이해가 헝클어지고 복잡한 혼돈의 추상화를 이루어진 영화). 젊음의 시기를 지나 매너리즘에 빠진 기성세대들을 생각해 본다. 아주 부자유한 자연스운 삶과 자유로운 영혼이 고착의 상황에 처할 때 그림이나 조각은 한낱 물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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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초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한 파괴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질곡에 대한 혐오와 부자유에 대한 경멸에도 불구하고 젊음은 ‘젊음이란 시기’ 속에 박제된 된 시간으로 남는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시간은 젊음의 시기를 그들이 뒤돌아 추억해야할 시간으로 마련하기 위해 조용히 거두어 간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에서 젊음이 분리되고 나면 추억이란 이름으로 내보인다. 그것이 그림이라면 혼돈의 추상화일까? 꿀과 클로버가 있는 초원일까? 그 추억은 하나의 액자처럼, 그림처럼, 조각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부자유함과 질곡 속에 우리의 젊음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젊음은 아름다워진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워진다.

그러니 젊음은 아름답다고 하는 바로 그 ‘젊음’ 을 마음껏 향유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들에게 그토록 소중해 진다. 슬픔마저도, 상처마저도, 절망마저도, 상실마저도 순수하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젊음의 영화다. 순수함과 솔직함으로 장식되는 젊은 날의 그림들이다. 감정의 과장도 엿보이고 서툼도 보이지만 이것이야 말로 이 영화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정형화된 현실로 이 젊음들을 바라본다면 그야말로 한편의 넌센스가 되고 말 것이다. 눈물 겹지 않는가? 감정의 과장과 서툼들이. 영화 속의 저런 젊음들도 회상 속에 묻혀져 버릴 것이란 그 피할 수 없는 사실이. 그러니 속으로 눈물을 삼길 만한 영화라고 한 들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09.2.25.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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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인스파팅(Trainspotting), 젊음과 현실의 불협화음  (1) 200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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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9 00:11

트레인스파팅(Trainspotting), 젊음과 현실의 불협화음

트레인스파팅(Trainspotting), 젊음과 현실의 불협화음(1996)

왜 젊음은 현실로부터 도피를 꿈꾸는가? 생물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현상인가? 어쩌면 이러한 질문은 참 어리석은 질문인지도 모른다. 타락한 현실과 그 타락한 현실속에서 성장하는 젊음이 반항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자명한 것이니까.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위엄있고 고귀한 것으로, 젊음은 그 위엄과 고귀함을 더럽히고 추락시키려는 타락하고 파괴적인 존재로 전도되는 이 모순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현실은 자기 정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현실은 무엇으로도 상처받지 않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것에 저항하는 젊음은 참 한심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트레인스파팅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그들은 현실을 선택하지 않았고 현실의 일부로서의 자기 자신들을 철저히 부정했다.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단지 젊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들이 일상화된 삶을 거부하고 선택한 것은 마약과 술과 섹스였다.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도피의 세계였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보다도 더 지독하게 그것들로부터 파괴된다. 마약과 섹스와 술 중독. 그들이 선택한 것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며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통로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자신들을 파괴 할 수 있을 때만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에 도달한다. 자기 존재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곧 현실일까? 그렇다면 그들은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그들이 철저하게 타락할수록 현실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들 타락의 근원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들의 타락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현실이 그토록 삭막하고 인간성이 메말라 있음은 바로 현실의 무기력함이다. 현실이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경찰과 정신병원과 물기 없는 가족이다. 역설적이게도 파괴적인 그들에겐 인간 영혼의 상처와 고통이 스며들어 있지 않던가. 그들이 이유 없이 산으로 오르려는 장면과 아이의 죽음에 미쳐 흐느끼는 그들에게서 인간의 냄새가 스며있지 않던가. 그러한 상처와 고통은 바로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현실의 병적 징후를 반영하는 것이지 단순히 개인적인 병적 징후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곧 그들은 현실이 투영된 현실 그 자체이며, 현실의 제물인 셈이다. 그래서 그들을 보는 우리는 가슴이 아프다. 현실이 가슴 아프다.

트레인스파팅은 영원히 화해 할 수 없을 것 같은 젊음과 현실의 불협화음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또 다른 출구에 대한 탐색이 없는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다. 자기 파괴적인 양식만을 추구하는 그들이 왠지 어리석고 답답하게 보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선택의 범위가 그토록 좁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들은 자문해 보았으면 한다. 하지만 트레인스파팅이 젊음이라는 한 시기의 단편적인 관찰이기에 그 시기 이후의 현실과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진다. 불협화음의 진정한 의미는 결국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그 성숙함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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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9 16:52

젊음과 늙음







 

젊음과 늙음


이해하지 못할 무지(無知)같은 것이 있다. 젊음과 늙음이란 현상에 대한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너무나도 단단히 고정이 되어있어 마치 두 개의 사과처럼이나 독립된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젊음과 늙음 사이에는 연속하는 시간으로 이어져있고 미분할 수 있는 변화들이 연속적으로 내재한다. 결코 독립된 두 개의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선, 젊음은 인간들에게 맹목의 믿음 같은 것을 심어주는데 ‘젊음이란 현상’ 이 그것이다.  ‘젊음이란 현상’은 절대적으로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절대적인 젊음의 현상은 일종의 언어의 유희일 뿐이다. 단지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변화하는 ‘생명’의 긴 기간에서 좀 더 활동적이고 좀 더 생기있는 시기가 있을 뿐이다. 도대체 젊음이 있다면 그 젊음이란 어떻게 정의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늙음에 대해서는 더욱 더 무지한 인식이 존재한다. 늙음은 젊음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아주 초라하고 볼품없으며 실용성도 없는 어떤 현상이란 믿음이 그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통과해야할 일종의 의식으로서 늙음에 대해 특히 ‘젊은이’ 라고 자처하는 인간들은 극단적으로 거부하기를 즐긴다.


하지만 늙음과 젊음이 이토록 이분화된 현상은 근대 산업사회의 부산물이라 감히 주장하고 싶다. 특히 오늘날의 정보화시대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더욱 팽배해 있다. 사실 전통적으로 늙음에 대한 인식은 삶의 경험이 누적된 지혜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늙음이 결코 피상적인 현상으로 삶과 유리된 소외되고 무기력한 추상화된 관념적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나이던 어른들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인간에게 나이는 그 자체로서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늙음은 삶의 저 바깥으로 추방당해 버렸다. 우리의 삶과는 관계없는 덜떨어지고 낡은 것으로 말이다. 경험과 지혜 따위는 현대적 가치들과는 공존하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아도 이러한 때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늙음이 이토록 무시되어 버린 다는 것은 자기 학대인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늙음을 통해 사라진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젊음과 늙음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다른 실체가 아니다. 젊음과 늙음은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에 나타나는 다른 현상일 뿐 독립된 두 개의 현상이 아니다. 늙음을 동떨어진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젊음의 부정이며 삶의 부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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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9 15:45

[꽁트]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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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은 모든 파편들을 잉태한다. 그 자신이 부서지면서까지도......



자료출처:wvs.topleftpixel.com/archives/..

거울
-거울은 알까, 그들의 속삭임을

나는 지금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시간의 손아귀에 뜯기고 뜯겨 온갖 장식으로도 가릴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다 늙어 버린 한 노인인, 나를 지금 바라보고 있다. 나의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의 본질을 단 한마디로 나타낸다면 슬픔이란 것이다. 삶에 대한 달관으로 고요히 잠들게 하지 못한 노욕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슬픔은 주름으로 뒤덮인 노화된 육체 속에 구속된 나의 젊은 영혼 때문이다. 늙음이 모든 과거를 주름으로 삼켜버리고 거울 속에서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늙음으로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내 젊은 영혼은 젊음을 원한다. 젊은 육체를 원하고 젊음의 언어를 원하고 젊음의 시간을 원하고 젊음의 공간을 원한다. 그러나 늙은 육신의 각질은 이 모든 것을 단단히 구속한다. 시간은 육체와 더불어 고뇌와 방황의 몸부림을 끝내라고 영혼에게 속삭인다.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라! 죽음에 영혼을 맡겨라!’

나는 슬프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이 사실이. 시간은 내게 죽음을 재촉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 갈 길로 가버린다는 것이. 나는 본다. 거울 속 노화의 각질 속에 퀭하니 뚫린 두 눈에 잠긴 슬프디 슬픈 영혼의 그림자를. 제기럴!

나는 거울 밖을 본다. 화려한 색계이다. 싱그러운 여자의 육체가 있다. 푸르른 육체에 와 닿는 쾌감이 있다. 그 푸르른 육체를 부서질 듯이 안고 싶다. 그녀의 허리가 부서지도록 안고 싶다. 그녀는 귀에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듣고 있다. 포갠 다리와 몸을 흔들고 있다. 그녀는 껌을 씹고 있다. 반나의 상체가 너무나도 탐스럽다. 내 젊음에 어울리는 반나의 푸르디 푸른 육체이다.

나 자신 만이 늙은 육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젊음도 나의 늙어버린 육신을 거부한다. 거울 속의 나는 체념할 수밖에 없다. 구속된 육체를 뚫을 수 있는 것은 상상력과 두 눈과 두 귀 밖에 없다. 나는 여자의 날씬한 육체를 훑어 볼 뿐이다. 고혹적인 목소리를 들을 뿐이다. 그녀의 나신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주름에 파묻힌 각질의 무심한 표정 뒤에 끓어오르는 욕정을 삭여야 할 뿐이다. 내 젊은 영혼은 각질화 된 육체 속에서 미치도록 방황할 수밖에 없다. 이 영혼의 방황은 조용히 사그라지거나 공짜로 탄 지하철 화장실의 변기 속에 자위의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각질을 뜷고 나온 고뇌의 흔적일 것이다.

늙은 육신은 내겐 고문이다. 그 늙은 육신을 반영하는 거울은 일종의 고문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거울을 보는 것은 자학적인 행위이다. 그러니 거울은 깨어버려야 한다. 밟고 짓이겨야 한다. 세상에서 거울 따위의 쓸모없는 것은 사라져야 한다. 나의 늙은 육신을 반영하는 거울은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 그러나 비극이다. 아무리 거울로부터 달아나려 해도 사방은 거울로 넘쳐난다. 거울로부터, 아니 거울에 비친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눈을 감는 것이란 건 견딜 수 없는 모욕이고 비극이다. 시간은 철저하게 젊음을 농락하고 비극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니 말이다. 눈을 감는다. 검은 어둠속에서 시간의 혓바닥에 닳아 쩍쩍 갈라져 버릴 각질화 된 육체 속에 갇혀질 운명, 내 젊은 영혼의 운명을 본다.

“자기야 다왔어!”

게집애가 몸을 흔들어 댄다. 꽤 긴 잠을 잔 듯하다. 나의 정면에 앉아있는 노인이 아직도 나의 거울처럼 앉아있다. 깨어버리고 싶다. 박살을 내 버리고 싶다. 내 젊은 영혼이 머물러야 할 곳이 저 노인의 다 늙어빠진 주름투성이의 육신 같은 곳이라니. 나는 참을 수가 없다. 왜 나를 저 따위 주름투성이의 각질 속에 가두려고 하는가 말야! 자신의 분신처럼 나를 바라보는 저 노인은 미쳤음이 틀림없어! 슬픈 눈을 끔벅이고 있는 저 노인의 영혼은 썩어버린 것이 틀림없어! 저 주름투성이의 각질을 산산이 깨어버려야 해! 구속된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해! 젊음 육체와 쾌락을 마음껏 향유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도록 해야 해! 나는 거울을 박살내어야 해.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계집애의 비명 소리도 들려온다. 작은 거울 조각이 내 얼굴에 박혀든다. 그리고 나는 의식을 잃는다.

*

나를 미친 듯이 사랑한다고 했던 계집애가 내 곁을 떠났다. 나의 젊음에 눈부셔하던 계집이 나를 떠났다. 계집애들이 나로부터 떠난다는 건 흔한 일이다. 한 마리의 야수처럼 철창에  갇혀있는 나를 버리고 또 다른 젊음을 찾아 떠난 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작 단 한 번의 면회도 참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그러나...... 정말이지,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내가 박살내었던 거울 속으로 그녀가 스스로 걸어들어 갔다는 사실이다. 박살났던 거울은 직소퍼즐처럼 한 조각, 한 조각씩 붙어져 다시 반짝이는 거울이 되었던 것이다. 계집애는 나를 대신해, 그녀의 말대로라면 나의 죄를 대신해 노인을 가끔 문병한다고 했다. 그녀가 노인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노인의 주름투성이의 각질화 된 육체에 그녀의 나신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녀에게도 노인은 거울이었다는 것이다. 계집애는 담배 연기를 내 뿜으며 말했다.

“노인은 내게도 거울이었지. 소중한 거울말이야. 나의 모든 탐욕를 채워 줄 수 있는 재력이 그에겐 있었거든. 후후. 나는 그 거울을 통해 나의 호사스러운 미래의 행복을 보았거든. 너 처럼 젊음 하나로 날 뛰는 불쌍한 영혼이 이젠 싫거든. 잘 있어!”

(2008.1.24.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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