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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23:57

허니와 클로버

 
이미지 출처는 여기입니다.


 
허니와 클로버


초원을 만들려면 꿀과 클로버가 필요하다

- 에밀리 디킨슨

젊은 시절이 아름다웠던가? 이 질문의 시점은 젊은 시절을 거친 자들의 질문이다. 그들에게 젊음이 사라지고 난 뒤, 젊음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향유할 수 없는 젊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결코 반복해서 누릴 수 없는 시간으로 추억이란 박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지만 그저 회상으로만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은 아름다운가? 정녕, 아름다운가? 지금 청춘들에게 이 질문은 불필요한 질문이다. 청춘이 아름답다는 말은 되돌아보는 자들의 회상 속에서나 가능하다. 삶이 완성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라면 청춘은 격렬한 붓놀림이다. 덧칠에 덧칠을 거듭하는 한계를 뚫으려는 욕망이다. 수많은 좌절과 상처를 끊임없이 덧칠하면서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나아가거나, 때론 부수거나, 무의미한 붓놀림으로 제자리에 맴돌기도 한다. 그림과 조각으로 정신을 승화하려 하지만 유형의 캔버스와 나무속에 젊은 영혼의 자유로움을 넣는 것은 참으로 고뇌가 아닐 수 없다. 자유를 부자유의 틀 속에 넣으려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역설이 있기에, 고뇌가 있기에 또한 젊음이 아름다워 지는 것이다.(이 영화조차 한 편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젊음의 순수와 서툼, 상처와 이해가 헝클어지고 복잡한 혼돈의 추상화를 이루어진 영화). 젊음의 시기를 지나 매너리즘에 빠진 기성세대들을 생각해 본다. 아주 부자유한 자연스운 삶과 자유로운 영혼이 고착의 상황에 처할 때 그림이나 조각은 한낱 물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지출처는 여기입니다.



그래서 초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한 파괴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질곡에 대한 혐오와 부자유에 대한 경멸에도 불구하고 젊음은 ‘젊음이란 시기’ 속에 박제된 된 시간으로 남는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시간은 젊음의 시기를 그들이 뒤돌아 추억해야할 시간으로 마련하기 위해 조용히 거두어 간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에서 젊음이 분리되고 나면 추억이란 이름으로 내보인다. 그것이 그림이라면 혼돈의 추상화일까? 꿀과 클로버가 있는 초원일까? 그 추억은 하나의 액자처럼, 그림처럼, 조각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부자유함과 질곡 속에 우리의 젊음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젊음은 아름다워진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워진다.

그러니 젊음은 아름답다고 하는 바로 그 ‘젊음’ 을 마음껏 향유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들에게 그토록 소중해 진다. 슬픔마저도, 상처마저도, 절망마저도, 상실마저도 순수하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젊음의 영화다. 순수함과 솔직함으로 장식되는 젊은 날의 그림들이다. 감정의 과장도 엿보이고 서툼도 보이지만 이것이야 말로 이 영화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정형화된 현실로 이 젊음들을 바라본다면 그야말로 한편의 넌센스가 되고 말 것이다. 눈물 겹지 않는가? 감정의 과장과 서툼들이. 영화 속의 저런 젊음들도 회상 속에 묻혀져 버릴 것이란 그 피할 수 없는 사실이. 그러니 속으로 눈물을 삼길 만한 영화라고 한 들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09.2.25.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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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3 19:34

술은 아름답다.

모든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인식하는 바다. 모든 인간이 추잡스런 것은 아니다. 이 또한 상식적으로 인식하는 바다. 세상은 아름답다거나 추잡스럽다. 이 또한, 또한 상식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서, 취하고서 인간을 비난하는 인간들, 세상을 추잡하다고 하는 인간들은 상식적인 인식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술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인간을 아름답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욕이 필요하다. 세상은 delagatory words  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fuck you 가 필요하다. 그런데 또한 증오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세상이다. 세상을 욕하면서도, 세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소통을 거부하는 인간들을 나는 조소한다.  술을 마시고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을 나는 증오한다. 술은 소통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통을 거부한다면 술을 마실 하등의 이유가 없다. 술을 마시고 소통을 거부하다면 그는 인간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100%이다. 소통을 거부한다면, 순수한 마음을 되찾으려 하지 않은다면, 술은 마시면 안된다. 술은 그런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세상을 사랑한다.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미워도 증오스러워도, 원망스러워도 세상은 내가 몸담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공간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세상을 증오할 수가 없다.

술을 마시고 세상에 욕을 퍼부어라! 미친듯이 외쳐라! 세상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안다. 그나마 그렇게 외치는 인간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술은 그렇다. 밖을 시끌벅적하게 한다. 그러나 속을 , 속을 아프게 하는 것을 진실로, 진실로 소통을 바라게 하는 것을! 이 진실이 없다면, 껍데기로 노딘다면 껍데기는 가라!


나는 술이 좋다. 술 그 자체가 좋다. 취하는 것이 좋다. 내 더러운 껍질을 벗겨내고 내 가식을 벗겨내고, 내 찡그린 표정을 벗겨내기 때문이다. 술은 취할 수록 좋다. 취하니 좋다. 내가 아니기에 좋고, 껍질을 벗겨놓기에 좋고, 흥겨웁기에 좋다. 나를 이 팍팍한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하기에 좋다.

그래서 술은 아릅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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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0 00:11

사랑이 저 만치 가네!

사랑이 저만치 가네요.  남아 있는 사람의 심정조차 이해하고는 있는지요. 사랑이란 참 아픈 거죠. 완전한 이해란 존재하지않으니까요. 사랑이 저만치 가네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따라가 붙잡고는 싶지만 조용히 보내드리는 것이 바로 순리! 사랑이란 추상일뿐 현실에서 그 사랑을 찾기란 힘이 들죠. 그 현실의 사랑에는 이상보다는, 맹목보다는, 눈물과 아픔보다는, 계산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당신도 그렇게 떠나는 가요! 사랑이 저 만치 갈 정도로 당신의 발걸음이 그렇게 빠른 이유도 바로 그런 계산 때문인가요. 사랑이 저 만치 가네요! 저 만치 가는 사랑에 약은 시간이겠지요! 시간이 흐르면 저 만치 가던 당신의 뒷모습도 잊혀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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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8 00:51

사랑은 아프다

사랑은 아프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 날은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극적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나를 떠났고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녀는 막 비행기를 탔다고 휴대폰에 메일을 남겼다. 퇴근 후 나는 그녀에게 나오라고 한 카페의 화장실에서 똥을 누면서 그녀가 남긴 메일을 읽고 말았으니, 운치 없고 분위기를 모르는 휴대폰이었다.

남녀 사이에 흔히 벌어지는 결말의 한 방식일 뿐이었지만 나는 가슴속에 마침표를 찍고 나서도 몇 방울의 눈물을 더 떨어뜨려야만 했다. 나는 치질이 심했고 그 통증은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치질의 쓰라림. 그녀와 나란히 앉아 어렵게 영화를 보던 시간들, 나의 속사정도 모르고 똥침을 놓던 그녀의 천진난만함, 공원 벤치에서 그녀가 내 허벅지에 앉아 하늘의 별들을 세며 꿈과 사랑을 이야기하던 그 기나긴 시간들, 돼지고기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날이면 몰래 화장실에서 여성용 생리대를 차야만 했던 기억들...... 이렇게 그녀는 깊은 고통의 흔적을 남기고 떠났던 것이다. 변기 속을 내려다보니 붉은 핏물이 포도주처럼 진하 디 진했다. 악화 일로를 걷는 치질! 나는 물 내림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꾹 눌렀다.

내가 아파트에 도착한 시간은 9시. 나는 카페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술을 한 잔 더 하려다 그만두었다. 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비극적 사실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서글펐다. 사랑하는 그녀는 떠났고 나는 밤새 술이라도 들이키며 슬픔을 달래는 작별의 의식을 거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실적인 생각으로 나 자신을 설득했다. 치질 따위 생각하지 말자, 내일 업무관련 보고가 있으면 어때......하면서도 내 이성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나를 유혹했던 것이다.

나는 힘없이 아파트 입구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입구 왼쪽에 있는 경비실 창으로 창백하게 굳어있는 초로의 경비원 김씨 아저씨와 고개를 떨구고 있는 동년배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나는 목례를 하고 그들을 지나치면서 그들에게 서려있는 이상한 슬픔의 기운을 감지하고 말았다. 김씨 아저씨도 치질일까? 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10층 버튼을 부드럽게 눌렀다. 버튼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나는 신경질을 꾹 참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 카펫 위에 대자로 엎드렸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밀려왔다. 잊으려, 잊으려 해도, 후끈거리는 치질 덩어리가 느껴졌다. 아침에 차고는 시간이 없어 갈지 못한 축축해진 생리대가 불결한 느낌을 자아내었다. 아, 이런 상태 위에 더해진 처절한 사랑의 비극이라니! 이런 고통 위에 그녀와의 작별의 슬픔이라니! 그녀는 이런 착잡한 나의 심정을 알기라도 할까!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남긴 메시지는 얼마나 건조했던가, 철없었던가!

“나를 치질 같은 존재라 생각하고 그냥 니 머리 속에서 지워버려. 아니, 잘라버려. 나 보다 좋은 여자 만나.”

나는 카펫 위에 엎드려 고통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며 카펫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거실 벽면에 부착된 인터폰으로 혀가 꼬부라진 김씨 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실수로 인터폰의 전원이 켜진 것 같았다. 김씨 아저씨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아, 끝내 당신은 떠나는구나! 나이 들어 혼자서 살고 싶다고 하더니...... 자식들 다 컸겠다, 임자도 이제 자유를 누려야지, 암. 나 같은 사람 만나 고생만 실컷 하고는......젊어선 술에 절여 사는 남편한테, 늙어선 애먹이는 자식들 때문에 호의호식 한 번 못해 보고......딱(탁자 위에 병 같은 것이 부딪치는 소리.) 카~~. 아이구, 처량하구만. 그래, 뭐 혼자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뭐! ”

아저씨의 한탄은 마치 힙합처럼 흘러나왔다. 나는 아저씨의 힙합이 정말 좋았지만 아파트 입주자들은 황당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김씨 아저씨의 황당한 행동에 짜증을 내었을 것이다(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반응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재미있을 것이다. 나는 좀 더 구체적인 상상력을 발동해 보고 싶지만 치질의 고통이 워낙 깊어 그만두련다.) 사람들은 이별의 슬픔을 이겨내려는 아저씨의 모습, 그 모습을 아름다웠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이 후로 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는 그날로부터 3일 뒤에 있었던 반상회에서 아저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가 있었는데, 비난과 질책과 황당함과 짜증과 욕설과 매도가 반응의 전부였다. 그리고 아저씨는 해고가 되었다. 그의 해고나 나의 이별이 어찌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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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0 23:25

우리 시대의 역설


Paradox Of Our Times
우리 시대의 역설



We have taller buildings, but shorter tempers;
Wider freeways, but narrower viewpoints;
We spend more, but have little;
We buy more and enjoy it less.

우리는 더 높은 빌딩들을 가지고 있으나, 더욱 성미는 급해지고;
더 넓은 고속도로를 가지고 있으나, 더욱 좁아터진 견해를 가지고;
더 많이 소비하나, 아무것도 갖지 못하며;
더 많이 구입하고 덜 즐긴다.


이미지 출처: http://kr.blog.yahoo.com/dasol




We have bigger houses and smaller families;
More conveniences, but less time;
We have more degrees, but less common sense;
More knowledge, but less judgement;
More experts, but more problems;
More medicine, but less wellness.

우리는 더 큰 집을 소유하고 더 적은 가족을 가지며;
더 편리해졌으나, 여유는 더  없으며;
학위는 가지고 있으나, 분별력은 더 부족하며;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판단력은 더 미흡하며;
더 많은 전문가들이 있음에도, 더 많은 문제들이 생기고;
더 많은 약이 있음에도, 건강 상태는 더 좋지 않다.



이미지 출처 http://kr.news.yahoo.com/servi



We spend too recklessly, laugh too little,
Drive too fast, get too angry too quickly,
Stay up too late, get up too tired, Read too seldom,
Watch TV too much, and don't pray often enough.

우리는 너무 무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잘 웃지도 않으며,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쉽게 화를 내며,
너무 늦게 자고, 너무 피곤한 상태로 일어나고, 거의 독서를 하지 않으며,
TV를 너무 많이 보고,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


이미지 출처 http://kr.blog.yahoo.com/jh3ch



We have multiplied our possessions, but reduced our values.
We talk too much, love too seldom and lie too often.
We've learned how to make a living, but not a life;
We've added years to life, not life to years.

우리는 소유물을 엄청 늘리지만, 우리 자신의 가치는 줄인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사랑하지 않으며, 너무 자주 거짓말을 한다.
우리는 생계를 꾸려가는 법은 배우지만,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는 않고;
우리는 몇 년을 더 살려고 하나, 삶의 의미를 생각지는 않는다.


이미지 출처 http://kr.blog.yahoo.com/leesa



We've been all the way to the moon and back,
But have trouble crossing the street to meet the new neighbor.

우리는 달을 다녀왔지만,
새로운 이웃을 만나기 위해 길을 건너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We've conquered outer space, but not inner space;
We've done larger things, but not better things;
We've cleaned up the air, but polluted the soul;
We've split the atom, but not our prejudice;
We write more, but learn less.

우리는 외부의 공간을 정복했으나, 내면을 정복하지는 못했으며;
더 거대한 일들을 하나, 더 좋은 일을 하지는 않으며;
공기는 정화시키려 하지만, 영혼을 오염시키며;
원자를 쪼갤 수 있으나, 편견을 쪼개지는 못한다;
우리는 더 많이 쓰지만, 적게 배운다.


이미지 출처http://kr.blog.yahoo.com/jinju



We've learned to rush, but not to wait;
We have higher incomes, but lower morals;
More food but less appeasement;
More acquaintances, but fewer friends;
More effort but less success.

우리는 성급히 달리는 것을 배우지만, 기다리는 걸 배우지 않으며;
우리는 더 많은 수입에도, 도덕은 추락하며;
더 풍족한 음식에도 덜 양보하며;
아는 사람은 많으나, 친구들은 더 적으며;
더 많은 노력에도 성공의 기회는 더 줄어든다.




We build better computers to hold more information,
Produce more copies than ever, yet have less communication;
We've become long on quantity, but short on quality.
These are the times of fast foods and upset stomachs;
More kinds of food, but less nutrition.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갖기 위해 더 좋은 컴퓨터를 만든다,
유례없이 많은 복사본들을 생산하지만, 소통은 줄어들고;
양적으로는 풍족하지만, 질적으로는 떨어지고 있다.
이 시대는 패스트 푸드와 메스꺼운 위의 시대이다;
더 많은 종류의 음식이 넘쳐나지만, 영양은 줄어든다.


이미지 출처http://kr.news.yahoo.com/servi



These are the times of world peace, but domestic warfare;
More leisure and less fun;

세계 평화의 시대이지만, 국지전은 사라지지 않고;
더 많은 여가와 더 작아지는 재미;




These are the days of two incomes, but more divorce;
Of fancier houses, but broken homes;
Tall men and short character;
Steep profits, and shallow relationships.

맞벌이 수입의 시대이지만, 이혼은 더 늘어만 가고;
더 멋진 집을 소유하지만, 가정은 풍지박산이 나고;
키큰 사람들과 더욱 혐소해진 성격;
수익은 많으나, 얕아진 관계들.


이미지 출처 http://kr.blog.yahoo.com/qrepo



These are days of quick trips, throwaway morality,
One-night stands, and pills that do everything from
Cheer, to quiet, to kill.

이시대는 여유없는 여행, 일회용 도덕
하룻밤 즐기기와, 기운을 돋구는 것에서부터, 침묵케하고,
죽음에 이르게 까지 하는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알약들의 시대.




It is a time when there is much in the show window,
And nothing in the stockroom.

진열장에는 많은 것들이 진열되어 있으나 ,
창고는 텅빈 그런 때이다.




Think about it.

오역이 있을 것입니다. 지적해 주시면 사례  감사하겠습니다.

 
글출처: http://www.saddleback.edu/faculty/jfritsen/articles.html#parad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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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8 00:28

형제와 사탄사이



형제와 사탄사이


이미지 출처:뉴시스
이미지 출처: 뉴시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야후미디어 뉴스 에서 기사 내용 캡처

                               

기독교는 관용을 모르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배타의 종교이며 그 자체로 중심이다. 신의 섭리만이 존재한다. 기독교는 그 테두리에서는 모두가 형제이고 자매이며 사랑과 희생과 평화와 봉사를 부르짖지만 그 바깥 테두리의 이교들에게는 잔인하다. 함께 살아 온 이 자연과 전통과 민족이라는 테두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교도란 한낱 사탄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온화한 기독교인들이라고 해도 그 마음의 밑바탕에는 신의 섭리만을 믿는다. 관용이란 없다. 관용을 누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과, 그 독생자 예수와 성령의 존재를 믿는 신자들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 휴거를 예언한 목사가 있었다. 그 목사는 휴거 의 예언을 철저하게 성경을 근거로 했다고 했다. 교회의 신자들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밤새 휴거를 기다렸다. 제법 센세이션널한 뉴스거리였다. 방송도 신문도 앞 다투어 보도한 기억이 난다. 그러나 밤사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억하기에, 그 목사는 그런 소동을 일으키고 난 뒤 신조차 부정하는 소리를 했다. 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이후 기독교의 자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독교는 관대했던 것 같다. 적어도 그들은 사탄은 아니었다. 죄라면 신을 너무 맹목적으로 믿었다는 것뿐. 신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용서는 강물처럼 흐르고, 회개가 있으면 사랑은 바다처럼 깊어진다.

이런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 기독교내에서 또 일어났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나, 이교도들에 대한 관용은 없다. 오직 사탄일 뿐이다. 선교의 대상일 뿐이다. 스님들이 선교하기에 가장 힘든 존재들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야후미디어 뉴스에서 기사내용 캡처




관용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종교내의 관용 뿐만 아니라 종교간의 관용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종교는 이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본다. 자신만의 종교를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살육을 하면서 신의 섭리라는 궤변이 인간의 역사에는 수없이 많은 상처로 아로새겨왔지 않는가?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신의 섭리를 부정하는 사탄이라고 하면 도대체 기독교에 대해 기독교인들에게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하며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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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9 19:10

인간의 굴레




 

인간의 굴레, 중심과 이탈


인간에겐 야성(野性)이 있다. 아프리카의 초원을 뛰노는 사자나 기린 같은 동물적인 야성이 있다. 그 야성 중에는 물론 온화한 초식성과 사나운 육식성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과 인간이 생존을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걸 보여준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과 살인이 끊임없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동물적인 야성간의 문제로 생각해 봄직도 하다.  


문제는 인간의 육식성이 초식성보다 비대할 때였다. 힘과 무력이 지배하는 경우이다. 존재하는 인간의 제도와 법과 종교를 보면, 인간의 야수적인 육체를 지배한 정신의 성과물처럼 여겨진다. 인간의 그 사나운 육식성이 어떻게 순화되고 있는지를 제도와 법과 종교는 잘 보여준다. 만약 제도와 법과 종교의 등장에 근거해서 '인간의 역사는 야수성과 순화(純化)로 얼룩진 역사이며 또 그렇게 전개 될 것이다' 라고 한다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된 것은 스스로에게 중심(中心)을 제공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었다. 도덕과 윤리와 신과 이념을 마치 오뚜기의 중심 추처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인간을 다잡는 그 자기 희생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인간은 인간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심(中心)은 권위와 권력과 결합하여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야수적(?) 억압으로 변질되면서 인간은 자기 내부의 야수성의 통제와 조절과 억압과 더불어 자기 외부의 거대한 권력과 권위라는 감당할 수 없는 억압에 직면한 것이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한다면 내면의 욕구를 억압하고 외부의 권력과 폭력에 의해 억압당하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면에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권력과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을 온전히 맡겨버리거나 중심(中心)으로부터 이탈하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이탈은 악덕과 미덕을 다 포함한다. 먼저, 인간의 야수성에만 국한해 본다면 나쁜 의미가 선명히 드러난다. 중심에서 이탈한 새로운 야수성이 개인적인 살인과 집단적인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구속적인 중심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미덕으로 간주 될 수 있으나 동시에 가장 극단적으로 인간의 야수성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악덕으로 간주 될 수 있는 것이다. 이탈이 이러한 범죄적인 양상으로 변질되고 새로운 억압과 권위주의를 낳는 것은 인간의 정신 속에 내재된 동물적인 야수성이 잉태한 가장 최악의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경우로, 은둔과 세상과 인연을 끊는 이탈이거나 중심의 해악에 순수 비판적 이탈이라면 그는 온전히 자유로운 이탈을 이루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은 바로 이러한 이탈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탈은 인간의 야수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된다. 즉, 순화(純化)는 완전한 질적(質的) 변화가 아니라 억압에 대한 일종의 반응 양식인 까닭에 더 근본적인 질적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한 질적 변화의 중심에 종교와 부단한 자기 수양이 있다. 


사족이지만, 그렇다면 현실이 완전한 파라다이스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인가? 가당한 결론인지는 모르지만 ‘불가능’ 하다. 억압은 끊임없는 이탈을 낳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 ‘완전’ 하고 절대적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그것은 수많은 철학자들의 좌절이기도 했다. 완전과 절대란 <관념>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지 현실은 결코 완전과 절대적인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해 현실에 대한 실망과 도피가 그러한 관념을 만들어 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에서 실존적으로 주어진 이 구심력(중심)과 원심력(이탈)의 충돌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인간들을 피곤하게 할 것이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굴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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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9 18:09

[꽁트] 러브 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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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레터
 

당신을 떠나온 지가 몇 일이 되었군요. 겨우 몇 일인데 벌써 이렇게 당신이 그립기만 하니 어떻게 한 달이란 기간을 참아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군요. 사랑스런 당신의 얼굴이 그리워 지금 이 펜을 들고있어요. 정말이지 당신이 보고 싶어 한 순간의 호흡도 어려울 지경이오. 공기보다도 더 소중한 당신을, 당신을 떠나온 지금에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이 사악한 고독과 고통을 떨쳐버리고 싶어요.

지금은 늦은 밤, 모두가 잠이 든 밤이오. 창문 밖으로 잠에 겨워 졸고 있는 별들만이 눈을 깜빡이고 있어요. 잠이 많은 미인, 사랑스러운 당신은 지금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겠지만 나는 당신 생각으로 괴로움을 쓸어 내리고 있어요. 이 펜 끝이 얼마나 떨리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오. 이 펜 끝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이 편지지 위를 미끄러지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오. 나의 모든 체취와 마음을 이 펜 끝으로 전하고 있음을 당신을 알아야 할 것이오. 그랬기에 그 흔한 컴퓨터의 활자를 빌리지 않고 자필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라오. 자판기를 두드려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마치 큰 죄악을 저지르는 것만 같아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이건 정말이지 진심이오. 당신을 위해 오직 나의 가슴으로 이 편지지 위에 적고 있어요.

지금 당신이 없는 밤, 나는 너무나 고독해 위스키 잔을 홀짝이고 있어요.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의 그 아름다운 두 눈과 입술과 불그레한 두 귀와 흰 목덜미를 생각하며 술잔을 들고 있어요. 육감적이라 생각하지 말아주오. 당신을 내 가슴속에 꼭 껴안고 싶은 것은 타락한 육감이 아니라 순수한 바램인 것을......또 당신을 위해 노래를 틀어 놓았어요. 정말이지 당신을 닮은 아름다운 멜로디라오. [에브리딩 아이 두, 아이 두 잇 포유], [하우 딮 이즈 유어 러브] . 난 이 노래들을 들으며 당신을 느끼고 당신을 어루만지고 있다오. 혹 지금 당신이 어떤 이유로 깨어있다면, 잠들지 못하고 있다면 이 노래 소리들 때문일 것이오. 당신을 위해 틀어 놓은 이 노래들 때문일 것이오. 우리 둘은 하나이기에 당신의 귀에 이 노래들과 내 손길이 느껴질지도 모르겠소.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지금, 당신을 볼 수 없다는 그 사실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하고 있다오. 이 편지 속에 나의 사랑이 타고 있음을 느낄 것이오. 당신을 위해 모든 것들을 다할 수 있다오. 당신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아마도 그것들이 너무나도 은밀하기 때문일 것이오. 지금 나는 당신을 향한 사랑 보다 더 값진 것을 소유할 수 없어요.

오, 사랑하는 당신, 나의 구세주,  나는 은밀하게 내 사랑을 당신에게 바치고 싶기에 이렇게 깊은 밤, 이 어둠에 숨어 편지를 쓰고 있어요. 지금 눈을 감고 당신을 생각해요.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을 생각해요. 우리는 언제나 하나여야 하며 하나로 살아갈 것을 서로에게 맹세하지 않았소. 지금 내 곁에 당신은 없지만 분명 당신은 내 가슴속에 있다오. 당신을 내 심장보다 더 사랑하오. 당신 몸은 어때요. 부디 건강해야해요. 출산을 앞두고 말이오. 예쁜 딸아이면 좋겠어요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혁진이는 유치원에 잘 다니고 있는지 궁금하오. 녀석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미칠 것만 같아요. 혁진이는 내가 떠나는 날 가지 말라고 공항 바닥에서 떼를 쓰고 울었는데 그날 어떻게 녀석을 다독거렸는지 궁금하군요. 녀석 고집 센 것은 나를 닮은 듯 한데 조금씩 나아지리라 믿고 있어요. 어제 혁진이가 체육관에서 청색 띠를 땄다고 전화를 했더군요. 혁진이가 태권도에 재미를 붙이는 게 얼마나 가슴 뿌듯한지 모른다오. 또 당신을 닮아 눈망울이 초롱하고 재기가 번뜩이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오. 당신의 노력과 집념 때문일 것이오. 아버지로서 자식 교육에 약간은 소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당신은 무척 지혜롭고 슬기롭게 극복해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오. 내가 출장이나 연수다 해서 해외로 떠돌아다니는 사이에 당신이 혁진이에게 쏟은 사랑은 이루 헤아리기가 어려울 것이오. 당신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와 사랑의 키스를 보내오.
 
당신 배속에 있는 둘째 애 출산 예정일은 모레로 알고 있는데 건강하게 출산은 할지, 아니 어쩌면 지금쯤 출산을 했는지 정말이지 궁금해 미치겠어요. 딸애였으면 좋겠는데......하느님의 뜻에 맡길 수 밖예요. 당신도 언제나 딸이기만을 기도했지요. 당신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어요. 오늘 당신에게서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출산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내일 당신에게 전화를 하리라. 이 편지를 받게 될 때는 우리 둘째 아이 출산 얘기는 지난 얘기가 되어 있겠군요. 아무튼 내가 당신 떠나 온 동안 출산의 고통을 더해준 것만 같아 죄스럽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길 바랄 뿐이오. 혹 딸이 태어나면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딸아이를 사랑해 줄 것이오. 나 없이 당신 홀로 낳은 그 아이를 말이오. 물론 나 없이 산통을 겪었을 당신도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어요.


이제 밤이 너무도 깊어 사람들이 깨어날 시간에 이르렀어요. 내일을 기약하며 나도 잠 속으로 빠져들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펜을 놓기가 아쉽기만 하지만 앞으로의 시간을 위해 펜을 잠시 멈추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안녕, 내 사랑!



당신의 사랑하는 남편

프랑스 파리에서



추신: 당신과 태어날 아이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꼭 알려 주시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당신을 부
         르며......내 사랑, 복자!



“혹 당신 아내가 프랑스 파리에 함께 출장 온 여직원과 침대에 누워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진 않을까요.”


“어떻게 눈치채겠어. 여긴 프랑스 파린데. 마음 푹 놓으라구, 아가씨!”


“헌데 김 대리님 사모님은 참 행복하시겠어요. 이렇게 멋진 편지를 다 받으시니. 김 대리님의 사랑과 함께 말이에요.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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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13:05

[꽁트] 사랑은 아프다




                                       사진출처: www.flickr.com/photos/micti2007


사랑은 아프다


아름다웠다, 그 노래는. 박자나 음정 따위 가식적 장식에 불과할 뿐, 투박하고 거친 그 음악은 정녕 아름다웠다. 귀로 듣는 노래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야 하는 노래, 그랬다. 그랬기에 그 노래는 정녕 아름다웠다. 그 노래를 그토록 애잔하게 부른 그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잔인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 날은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극적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나를 떠났고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녀는 막 비행기를 탔다고 휴대폰에 메일을 남겼다. 퇴근 후 나는 그녀에게 나오라고 한 카페의 화장실에서 똥을 누면서 그녀가 남긴 메일을 읽고 말았으니, 운치 없고 분위기를 모르는 휴대폰이었다. 남녀 사이에 흔히 벌어지는 결말의 한 방식일 뿐이었지만 나는 가슴속에 마침표를 찍고 나서도 몇 방울의 눈물을 더 떨어뜨려야만 했다. 나는 치질이 심했고 그 통증은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치질의 쓰라림. 그녀와 나란히 앉아 어렵게 영화를 보던 시간들, 나의 속사정도 모르고 똥 침을 놓던 그녀의 천진난만함, 공원 벤치에서 그녀가 내 허벅지에 앉아 하늘의 별들을 세며 꿈과 사랑을 이야기하던 그 기나긴 시간들, 돼지고기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날이면 몰래 화장실에서 여성용 생리대를 차야만 했던 기억들...... 이렇게 그녀는 깊은 고통의 흔적을 남기고 떠났던 것이다. 변기 속을 내려다보니 붉은 핏물이 포도주처럼 진하디 진했다. 악화 일로를 걷는 치질! 나는 물 내림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꾹 눌렀다. 


내가 아파트에 도착한 시간은 9시. 나는 카페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술을 한 잔 하려다 그만두었다. 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비극적 사실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서글펐다. 사랑하는 그녀는 떠났고 나는 밤새 술이라도 들이키며 슬픔을 달래는 작별의 의식을 거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실적인 생각으로 나 자신을 설득했다. 치질 따위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일 업무관련 보고가 있으면 어때......하면서도 내 이성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나를 유혹했던 것이다. 나는 힘없이 아파트 입구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입구 왼쪽에 있는 경비실 창으로 창백하게 굳어있는 초로의 경비원 김씨 아저씨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연배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나는 목례를 하고 그들을 지나치면서 그들에게 서려있는 이상한 슬픔의 기운을 감지했다. 김씨 아저씨도 치질일까? 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10층 버튼을 부드럽게 눌렀다. 버튼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나는 신경질을 꾹 참았다.


나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 카펫 위에 대자로 엎드렸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밀려왔다. 잊으려 잊으려해도, 후끈거리는 치질 덩어리가 느껴졌다. 아침에 차고는 시간이 없어 갈지 못한 축축해진 생리대가 불결한 느낌을 자아내었다. 아, 이런 상태 위에 더해진 처절한 사랑의 비극이라니! 이런 고통 위에 그녀와의 작별의 슬픔이라니! 그녀는 이런 착잡한 나의 심정을 알기라도 할까!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남긴 메시지는 얼마나 건조했던가, 철없었던가!


“나를 치질 같은 존재라 생각하고 그냥 니 머리속에서 지워버려. 아니, 잘라버려. 나 보다 좋은 여자 만나.”


나는 카펫 위에 엎드려 고통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며 카펫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거실 벽면에 부착된 인터폰으로 혀가 꼬부라진 김씨 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실수로 인터폰의 전원이 켜진 것 같았다. 김씨 아저씨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아, 끝내 당신은 떠나는구나! 나이 들어 혼자서 살고 싶다고 하더니...... 자식들 다 컸겠다, 임자도 이제 자유를 누려야지, 암. 나 같은 사람 만나 고생만 실컷 하고는......젊어선 술에 절여 사는 남편한테, 늙어선 애먹이는 자식들 때문에 호의호식 한 번 못해보고......딱(탁자 위에 병 같은 것이 부딪치는 소리.) 카~~. 아이구, 처량하구만. 그래, 뭐 혼자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뭐! 두마안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배엣사아공~~]


나는 아저씨의 노랫가락이 정말 좋았지만 아파트 입주자들은 황당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김씨 아저씨의 황당한 행동에 짜증을 내었을 것이다(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반응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재미있을 것이다. 나는 좀 더 구체적인 상상력을 발동해 보고 싶지만 치질의 고통이 워낙 깊어 그만두련다.) 사람들은 이별의 슬픔을 이겨내려는 아저씨의 모습, 그 모습을 아름다웠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이 후로 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첨언: 나는 그날로부터 3일 뒤에 있었던 반상회에서 아저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가 있었는데, 비난과 질책과 황당함과 짜증과 욕설과 매도가 반응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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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7 21:58

[꽁트] 아픈 사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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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youkan.egloos.com/i13

아픈 사랑의 노래

아름다웠다, 그 노래는. 박자나 음정 따위 가식적 장식에 불과할 뿐, 투박하고 거친 그 음악은 정녕 아름다웠다. 귀로 듣는 노래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야 하는 노래, 그랬다. 그랬기에 그 노래는 정녕 아름다웠다. 그 노래를 그토록 애잔하게 부른 그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잔인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 날은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극적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나를 떠났고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녀는 막 비행기를 탔다고 휴대폰에 메일을 남겼다. 퇴근 후 나는 그녀에게 나오라고 한 카페의 화장실에서 똥을 누면서 그녀가 남긴 메일을 읽고 말았으니, 운치 없고 분위기를 모르는 휴대폰이었다. 남녀 사이에 흔히 벌어지는 결말의 한 방식일 뿐이었지만 나는 가슴속에 마침표를 찍고 나서도 몇 방울의 눈물을 더 떨어뜨려야만 했다. 나는 치질이 심했고 그 통증은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치질의 쓰라림. 그녀와 나란히 앉아 어렵게 영화를 보던 시간들, 나의 속사정도 모르고 똥 침을 놓던 그녀의 천진난만함, 공원 벤치에서 그녀가 내 허벅지에 앉아 하늘의 별들을 세며 꿈과 사랑을 이야기하던 그 기나긴 시간들, 돼지고기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날이면 몰래 화장실에서 여성용 생리대를 차야만 했던 기억들...... 이렇게 그녀는 깊은 고통의 흔적을 남기고 떠났던 것이다. 변기 속을 내려다보니 붉은 핏물이 포도주처럼 진하디 진했다. 악화 일로를 걷는 치질! 나는 물 내림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꾹 눌렀다. 


내가 아파트에 도착한 시간은 9시. 나는 카페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술을 한 잔 하려다 그만두었다. 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비극적 사실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서글펐다. 사랑하는 그녀는 떠났고 나는 밤새 술이라도 들이키며 슬픔을 달래는 작별의 의식을 거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실적인 생각으로 나 자신을 설득했다. 치질 따위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일 업무관련 보고가 있으면 어때......하면서도 내 이성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나를 유혹했던 것이다. 나는 힘없이 아파트 입구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입구 왼쪽에 있는 경비실 창으로 창백하게 굳어있는 초로의 경비원 김씨 아저씨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연배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나는 목례를 하고 그들을 지나치면서 그들에게 서려있는 이상한 슬픔의 기운을 감지했다. 김씨 아저씨도 치질일까? 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10층 버튼을 부드럽게 눌렀다. 버튼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나는 신경질을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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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www.flickr.com/photos/micti2007

나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 카펫 위에 대자로 엎드렸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밀려왔다. 잊으려 잊으려해도, 후끈거리는 치질 덩어리가 느껴졌다. 아침에 차고는 시간이 없어 갈지 못한 축축해진 생리대가 불결한 느낌을 자아내었다. 아, 이런 상태 위에 더해진 처절한 사랑의 비극이라니! 이런 고통 위에 그녀와의 작별의 슬픔이라니! 그녀는 이런 착잡한 나의 심정을 알기라도 할까!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남긴 메시지는 얼마나 건조했던가, 철없었던가! “나를 치질 같은 존재라 생각하고 그냥 니 머리 속에서 지워버려. 아니, 잘라버려. 나 보다 좋은 여자 만나.” 나는 카펫 위에 엎드려 고통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며 카펫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거실 벽면에 부착된 인터폰으로 혀가 꼬부라진 김씨 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실수로 인터폰의 전원이 켜진 것 같았다. 김씨 아저씨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아, 끝내 당신은 떠나는구나! 나이 들어 혼자서 살고 싶다고 하더니...... 자식들 다 컸겠다, 임자도 이제 자유를 누려야지, 암. 나 같은 사람 만나 고생만 실컷 하고는......젊어선 술에 절여 사는 남편한테, 늙어선 애먹이는 자식들 때문에 호의호식 한 번 못해보고......딱(탁자 위에 병 같은 것이 부딪치는 소리.) 카~~. 아이구, 처량하구만. 그래, 뭐 혼자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뭐! 두마안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배엣사아공~~"


나는 아저씨의 노랫가락이 정말 좋았지만 아파트 입주자들은 황당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김씨 아저씨의 황당한 행동에 짜증을 내었을 것이다(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반응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재미있을 것이다. 나는 좀 더 구체적인 상상력을 발동해 보고 싶지만 치질의 고통이 워낙 깊어 그만두련다.) 사람들은 이별의 슬픔을 이겨내려는 아저씨의 모습, 그 모습을 아름다웠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이 후로 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첨언: 나는 그날로부터 3일 뒤에 있었던 반상회에서 아저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가 있었는데, 비난과 질책과 황당함과 짜증과 욕설과 매도가 반응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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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6 14:16

[일본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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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인간의 삶이란 한 편의 서사(긴 이야기)와도 같다. 그러나 의도한데로 구성하고 전개할 수 없는 서사이다. 동화적인 상상과 환상으로 서사를 이끌어 갈 수도 없다. 언제나 폭죽을 터트리고 꽃이 만발하고 음악으로 가득 찬 동화의 세상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없다. 이 세상 어느 인간도 작가가 소설을 쓰듯이 자신의 삶을 의도대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겨우 불확실한 미래를 추측가능하게 하려고 노력하거나 지뢰밭을 걷듯이 조심스럽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 원고지에 쓰다가 찢어버리고 다시 쓸 수는 없는 것이 인생이다. 마츠코의 남자중 하나인 소설가 야마카와 처럼 삶의 원고를 찢어버린 다는 것은 바로 죽음인 것이다. 아무리 불행한 삶이라도 다시 번복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넝마처럼 끌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꽃동산이나 폭죽은 아니더라도 의도대로 조차 삶을 살아갈 수 없을까? 왜 원치도 않는 고통을 감당해야만 할까? 인간의 삶을 비틀어 버리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마츠코의 일생은 바로 그러한 질문에 대한 진지한 대답처럼 여겨진다. 마츠코의 비극적인 죽음에 부단하게 영향을 미친 크고 작은 이유들은 비록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가벼운 사회면 신문 한 장이 이를 잘 입증해 준다. 그러나 신문은 알량하게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사회면 단 몇 줄의 기사에 무감각하게 싣는다. 비일비재하게 기사화되는 일상이지만 동시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게 된 일상이기도 하다. 약간의 동정으로 얼마의 적선만을 던져주면서 좀 더 감각적이고 색다른 뉴스에 시선을 집중한다. 아니면 애당초 시선을 빼앗겨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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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속 요정이 된 마츠코


모든 생물체가 커져가는 성장의 과정을 거치듯이 마츠코의 일생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여기에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과거에 아주 귀여운 마츠코의 가족에서 시작된다. 아주 사소한 오해 그러나 어린 마츠코에게는 강박에 가까운 의식이었다. 아버지가 어린 동생만 사랑한다는 오해였다. 그러한 오해는 외로움이 되었고 동생에 대한 증오로 변해갔다. 아버지가 표현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오해는 이렇게 커져만 갔다. 아버지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일기장에 마츠코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루 일기를 아버지는 꼭 ‘오늘도 마츠코 연락 없음’ 이란 말로 끝맺음을 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은 마츠코의 삶이 뒤 틀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너무나도 사소한 듯이 보이는 이 오해가 삶을 빙빙 돌아 해소가 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놀이동산 무대에서 배우들이 짓는 묘한 얼굴 표정을 보고 아버지가 웃자 그런 표정을 흉내 내면서 아버지를 웃게 만들려는 마츠코의 마음은 그저 동심이었다. 그러나 동생에 빼앗긴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끊임없이 아버지 앞에서 표정을 지은 결과 그것이 씻지 못할 버릇이 되어 더 큰 불행을 가져 오게 된다.

마츠코의 일생은 가정에서 비롯된 부녀간, 자매간의 오해에서 부조리한 학교 현장, 비현실적 예술 공간, 맛사지 클럽, 미용실, 감옥, 야쿠자, 변두리 아파트로 이어지면서 고단한 부침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마츠코의 일생을 비틀어 놓는 것은 모두 남자들이란 사실이다. 이것은 감독이 철저하게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여자들은 대체로 수동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제의 가족, 남교사 중심의 학교, 남성중심의 성문화, 문학의 변태성과 폭력성, 야쿠자, 교도소, 남성 아이돌 등 전부 남자들이 마츠코의 삶에 끼어들어 영향을 미친다. 아직도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요소가 똬리를 틀고 있는 듯 보인다. 좀 더 정형화해서 남성 중심의 사회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마츠코와 교도소에서 만나 유일하게 우정을 나누는 포르노 배우인 메구미의 말이 남성적인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여성의 위치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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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강을 바라보는 마츠코



“여자라면 누구나 백설공주, 신데렐라 그런 동화같은 이야길 동경하지.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백조가 되고 싶었는데 눈을 뜨면 새까만 까마귀가 되있다나 어쩐다나. 오직 한 번 뿐인 두 번 살 수 없는 인생인데 이게 동화라만 너무 잔혹해.”

백마탄 왕자가 나타나는 동화이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백마가 아닌 권위적인 남성의 폭력이 지배하는 곳일 뿐이다. 영화에서는 마츠코의 심상이 후광처럼 동화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지만 현실과는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 의도라 하더라도 마츠코의 비극적인 일생에 동화적인 요소, 즉 화려한 색채와 발랄한 음, 그리고 과장된 행동과 인물 등을 끼워 넣은 것은 다소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가 종교적인 엄숙성(저녁노을)이나 성화의 인상을 엿보이게도 하지만 너무 과장되어 있다. 결국 마츠코의 아름다운 동화는 동화를 잃어버린 아이들에 의해 비참하게 깨어지는 파국을 맞이한다. 아이들이 작은 현실의 동화마저도 부수어버리는 이 각박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종교적인 영역에 내 맡겨야만 할까? 영화는 조카인 쇼가 마츠코를 신이라 부르게 하지만 신을 이토록 타살한 현실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마츠코와 그녀를 둘러싼 삶의 조건들을 돌아보면서 삶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건들이 삶을 살게 만드는 굴레의 측면을 본다. 인간의 삶이라는 서사 장르 중에서 동화는 저 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이 영화를 한 편의 성인 동화라고 볼 수 있다면 그 나마 다행이다 싶다. (*)

이미지출처(링크):www.monadist.com/5?TSSESSIO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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