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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6 09:45

녹차의 맛(3)








이미지 출처:http://kr.image.yahoo.com/GALLERY/read.html?img_filename=44e56fc0f103


녹차의 맛(3)
-사춘기의 내상(內傷) : 손자 또는 하루노 하지메

영화의 첫 장면은 하루노 하지메의 뜀박질로 시작된다. 전학 가는 짝사랑, 스즈이시가 타고 가는 기차를 보기 위해서 뛰고 또 뛴다. 그녀에게 마지막 작별의 손짓이라도 보여주기 위한 필사의 뜀박질이다. 기차는 하지메의 이마를 뚫고 지나간다. 떠나가는 기차를 보는 하지메의 이마에는 떠나간 기차의 뻥 뚫린 흔적이 남는다. 엽기적인 표현이지만, 그 이상의 큰 아픔일 것이다. 만개한 벚꽃 나무, 들판 풍경, 나지막한 산, 개울이 정물처럼 나타난다. 하루노 하지메의 내면의 풍경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동시에 그 내면을 위로하는 자연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메의 여동생 사치코, 낙원을 상실한 그 사치코가 밀려가야 하는 곳은 사회라는 신대륙이다. 황량한 신대륙, 실낙원의 초입에서 주저하고, 당황해하고, 어쩔 줄 몰라 할 때, 하지메는 신대륙의 좀 더 깊은 곳을, 으슥한 곳을 탐색하고 조심스럽게 더듬는다. 사치코는 그렇게 하지메가 된다.

이로써 우리는 지나간 시절의 또 다른 액자 하나를 갖게 된다.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있다. 눈처럼 서럽도록 내리는 벚꽃 나무가 있다. 눈물처럼 애잔히 흐르는 개울도 있다. 서러움 풀어 놓아야 할 두 눈 시리도록 푸르른 들판도 있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그 둘 사이, 아니 하지메 혼자만의 소름 끼치도록 전 육체의 감각 세포들을 돋아나게 하고 고양시키는 이성에 대한 순수한 감정이 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혼돈과 격정을 고스란히 보듬고 있는 풍경화 같은 한 폭의 그림이다.


이미지 출처:http://kr.image.yahoo.com/GALLERY/read.html?img_filename=44e56fc0f103


이걸 좀 더 넓혀보면, 젊은 날을 거친 모든 인간들의 추억들 속에서 강렬한 인상으로 남을 만한 한 폭의 그림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전제가 있다. 이러한 강렬한 인상은 쌓여있는 현실의 먼지를 털어내어 야만 도드라져 나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할 것이다. 우리의 감정이 그만큼 무뎌져 버린 탓이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얼마나, 얼마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가! 우리가 순수하게 아름다워 질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그림이지 않는가? 우리의 감정을 이토록 순수하고 소름끼치도록 고양시켜주는 것들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영화의 첫 시작은 인상적이다.

사랑이라 부르기에는 아직 영글지 않은 감정이고 우정이라 하기에는 이성적 호기심이 강렬한 감정이겠지만, 아무튼 스즈이시의 작은 날갯짓이 하지메에게는 지축을 흔드는 크나 큰 충격으로 다가 온다. 스즈이시가 전학 온 날 교실을 맹렬히 휘젓던 돌풍보다도 칠판 앞에 서있던 스즈이시에게 넋이 나간 채 빠져들던 하지메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한다. 스즈이시는하지메에게 돌풍보다도 더 강렬하게 그의 넋을 빼앗아 놓는 존재가 되고 만다.

하지메는 중성같은 외모를 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영화의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직은 사랑이라고 불리기에는 애매모호한 순수한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에 가장 무지하고 순수하면서도 그 설레임의 감정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느 시기보다 야릇하고 강렬하게 고양된 감정으로 지배되는 시기. 이러한 감정은 사춘기라는 신대륙상에서의 새로운 발견이다. 새로운 발견이란 성장의 과정이고 단계이다. 이러한 새로운 발견들 중에 ‘이성에 대한 눈뜸, ‘ 바로 이것은 파열되고 단절된 실낙원에서 결합과 완전으로 향하려는 성적 호기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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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http://kr.image.yahoo.com/GALLERY/read.html?img_filename=44e56fc0f103

문제는 헤어짐이다. 성적인 호기심의 당사자, 스즈이시가 주위에서 볼 수 있다는 것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이다. 스즈이시가 떠남으로써 그녀를 중심으로 궤도를 돌던 하지메는 졸지에 궤도를 이탈한 별이 되고 만다. 그것이 바로 하지메에게는 사춘기의 내상으로 자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 내상이 상처만으로 끝난다면 성장은 멈추고 말 것이다. 애틋한 감정을 삭여야 하는 법 또한 배워야 한다. 내상은 오래 가겠지만 치유해야만 한다. 현대 문명에서 이 내상에 의해 발생하는 숱한 후유증을 목격한다. 내상을 차분하게 치유하는 여유보다는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를 수 없이 많이 목격한다. 마치 그것이 권리인양 말이다. 치정에 얽힌 수많은 범죄, 자살, 중독 등이 그것을 입증한다. 때로 실수와 치기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차분하고 한 박자 느린 호흡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이다. 바로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의 하지메의 바로 그 모습처럼 말이다. 녹차처럼 차분한 마음으로 음미해 볼 일이다. 자연이 상징하는 것의 의미를 음미해 볼 일이다. 그래서 첫 장면은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메의 이성에 대한 감정의 촉수는 점 점 더 섬세해 질 것이다. 또 섬세해 질수록 그 감정은 무뎌지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성장의 과정이다. 스즈이시가 떠났지만 사회는 하지메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시달리게 할 것이다. 추근거리고 스캔들을 만들어 내기도 할 것이다. 국수집 사건과 편의점 사건이 바로 그런 예이다. 그렇게 하지메는 이성 문제를 비롯한 사춘기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조금씩 성숙한 안목을 갖게 될 것이다. 녹차의 맛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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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5 12:37

녹차의 맛






이미지 출처:http://www.koreafilm.co.kr/movie/review/nokcha.htm



녹차의 맛

녹차의 맛을 한 편의 영화로 표현한다면 어떤 영화가 될 수 있을까?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녹차의 맛을 어떻게 우려 낼 수 있을까? 녹차의 맛은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떫고 쓴맛이 나다가 달콤하고 짠맛이 나기도 하는 오묘한 맛이랄 수 있다. 한마디로 인공이 느껴지지 않는 자연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녹차의 맛이 단순히 차 잎에서 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녹차의 맛을 단순히 미각적인 테두리로 설명하는 것은 부족한 구석이 있다.


자연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차는 필수적이지만, 또한 녹차를 마실 수 있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하고, 녹차를 우려내기 적합한 적당히 뜨거운 물이 빠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구운 다기(茶器)도 있어야 하며, 녹차의 맛을 함께 음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다. 아니 혼자여도 좋다.


그러니 녹차의 맛은 이성보다는 감성적이며 분주함보다는 여유로움이며 외면적인 표현이기 보다 내면적인 성찰이요, 채움보다는 비움이고 번잡함보다는 단순함이다. 그래서 녹차는 도시의 빌딩과 자동차와 도로보다는 자연의 나지막한 집들과 들판과 오솔길이 더 어울린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 보다 크고 느리게 돌아가는 페리스 휠과 어울린다.


이제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녹차의 맛을 한 편의 영화로 표현한다면 어떤 영화가 될 수 있을까?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녹차의 맛을 어떻게 우려 낼 수 있을까? 그것은 결국 은은한 사람들의 맛이고 오묘한 삶의 맛이 될 것이다. 녹차의 맛처럼 미각적으로 오묘하며 정서적으로 감성적이며 내면적이며 단순하고 자기 성찰적인 사람들의 따뜻하고 은은하며 고요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며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페리스 휠을 타며 조용히 자연을 관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나하나의 차 잎들이 모여 오묘한 맛을 내듯이 여러 개인들이 모여 삶의 쓰고, 떫고, 달고, 슬픈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보여주는 삶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짙은 커피향에 익숙한 이들에게 녹차의 맛은 너무나 무미건조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액션과 폭력이 난무하는 이야기에 익숙한 이들에게 녹차의 맛은 자극과 재미가 없는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녹차의 맛은 아득한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본질적인 맛이라는 것이다. 인공의 미각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마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그 내면을 성찰하도록 하게 하는 맛이라는 것이다. 성찰이란 말 자체도 번거로울 정도로 비움의 맛이라는 것이다.


녹차의 맛을 위해 대가족의 구성원들을 주된 등장인물들로 설정한 것은 참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관계 중에서 가족처럼 본질적인 관계가 어디에 있을까?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알고 있는 그대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관계가 또 있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지막까지 지켜져야 할 가족조차 그 본질적인 관계가 해체되고 있는 현실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다. 의도가 개입되고, 자본이 개입되고, 사회적인 체면이 개입되면서 가족의 관계도 갈등을 겪으며 허물어지고 있다. 자식의 영어 공부를 위해 ‘기러기 아빠’ 가 되고, 때로 외로움에 자살을 하는 비극적인 아버지의 모습. 자식들로부터 버려진 노부부의 모습. 자연적이고 건강한 성장통을 겪으며 자라나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공부와 과외에만 시달리며 맹목적으로 내달려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 맛으로 따지자면 가족의 본질적인 맛을 상실하면서 인공적이고 비본질적인 맛이 색소처럼 자극을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녹차의 맛>의 가족 구성원들은 녹차 잎에서 우러나오는 불립문자의 오묘한 맛처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성장통을 겪으며, 성인들은 성인들대로 나름의 상처와 고통과 기쁨 등 틀에 박힌 일상에서도 삶에 체념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녹차의 맛 같은 은근한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녹차의 맛>은 본질적인 가족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도록 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대가족으로 형성된 <녹차의 맛>의 가족들은 그래서 우리에게 깊은 의미, 녹차의 맛으로 다가온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바로 이 대가족과 그 구성원들의 삶을 통해서 인간의 삶과 관계와 그리고 더불어 자연과 인간의 관계(녹차의 맛을 음미하는)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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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댄서즈(バックダンサ-ズ, 2006)




이미지 출처는 여기입니다.



백댄서즈(バックダンサ-ズ, 2006)


젊음은 방황의 시기다. 수긍할 수 없는 기성세대에 대한 실망이나 분노에서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지만 조여 오는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사회의 구속에 반항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질풍노도의 시기이고, 주변인의 시기이며, 이유없는 반항기라 낙인 아닌 낙인이 찍히는 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백지에 가까운 시기이기도 하며 순수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상에 목말라하며 현실의 속됨에 야유를 보낸다. 아무리 불완전하고 비현실적이며 하찮은 사색의 결과에서 싹텄다고 하더라도 이상이야 말로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이러한 현실과 기성세대, 다른 무엇들에 대한 분노와 실망이 배출구 없는 막막함으로 다가올 때 그 막막함은 폭력이나 환각이나 환상, 그리고 예술이 되곤 한다. 마약이나 섹스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수단이 되고, 혁명안 파괴가 분노를 잠재우는 도구가 된다. 또한 예술을 통해 기성의 가치관에서 이탈하려는 노력을 한다. 예술은 환각과 결합하는 경우가 흔하다.


백댄서즈는 바로 이런 젊음이들의 영화이다(사실은 이런 젊음을 가장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상업주의의 스타 탄생의 경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대한 상업주의와 자본주의에 비록 달걀을 던지는 격이지만 그런대로 의미있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상업주의라는 바위가 워낙 견고하다 보니 이 정도도 가상하지 않을까?). 이런 젊음만이 아니다. 또한 나이를 초월해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늙은 젊은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느 사회에서나 기성세대의 대오에서 낙오한 늙은 젊은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젊은 백댄서들에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미지 출처는 여기입니다.



이 애 젊은이들과 늙은 젊은이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영화의 제목이 <백댄서즈(Backdancers)>이므로 이 영화는 백댄서들을 구성하는 젊은 멤버들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록밴드를 구성하는 늙은 멤버들 또한 한물 간(?) 밴드라는 의미에서 영화의 제목과 상응할 수 있다고 보여 진다. 그들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교류하고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고 서로 이해하는 것은 바로 예술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더 나아가 백(back) 이라는 ‘중심에서 벗어나거나’ ‘한물 간’ 존재라는 사실이다. 누구로부터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특히 백대서들의 멤버들이 춤이라는 예술을 선택한 것은 자유로움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의지에 의한 삶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따라서 이런저런 이유로 백댄서인 자신들의 존재 가치가 위축되고 상실되는 것은 그들의 자유로운 삶과도 밀접하게 관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들의 자유라는 것이 도덕이나 선, 악 등의 사회 관습적인 가치판단에서 볼 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라 할 수 있을 지라도 그것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한 개인이 자유롭고 싶다는 그 사실 자체는 개인이 처한 상황의 맥락이 좀 더 더해진다면 그 자유의 추구가 더욱 구체화 될 것이다. 그들이 가출을 하면서, 호스티스 생활을 청산하면서, 사회로부터 받는 개인적인 수치심에서 모델을 그만두면서 선택한 춤을 더 이상 추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의 선택과는 관계없는 부자유한 삶을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현실적으로 판단해 볼 때, 그들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기를 누리고, 지명도가 높아지면서 그들의 사적인 자유에도 제약이 올 것은 분명하니까 말이다. 이것은 늙은 젊은이들이 젊은 시절 인기의 절정에서 음악을 그만 둔 사연을 추측해 볼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자유로서의 예술(춤)이 너무 상업주의와 결합되는 것도 자유의 성격을 회의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좋아서, 바래서 하는 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감동이나 의미의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이 영화의 인상을 두루뭉술하게 적어 보았다. 이 글이 너무 자의적인 생각에 근거해 적었다거나 찬사 일변도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이 영화를 단순한 오락이나 상업주의 영화라고 해도 맞는 말이다. 또한 작품성 자체에도 야박한 점수를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의 변두리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살아가야하는 삶보다, 비록 백댄서이기는 하나 자신이 선택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적어도 이 영화가 우리의 일상과 우리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미덕 정도는 있지 않을까? 특히 우리의 교육과 우리의 부모들에게도 의미있는 교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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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23:57

허니와 클로버

 
이미지 출처는 여기입니다.


 
허니와 클로버


초원을 만들려면 꿀과 클로버가 필요하다

- 에밀리 디킨슨

젊은 시절이 아름다웠던가? 이 질문의 시점은 젊은 시절을 거친 자들의 질문이다. 그들에게 젊음이 사라지고 난 뒤, 젊음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향유할 수 없는 젊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결코 반복해서 누릴 수 없는 시간으로 추억이란 박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지만 그저 회상으로만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은 아름다운가? 정녕, 아름다운가? 지금 청춘들에게 이 질문은 불필요한 질문이다. 청춘이 아름답다는 말은 되돌아보는 자들의 회상 속에서나 가능하다. 삶이 완성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라면 청춘은 격렬한 붓놀림이다. 덧칠에 덧칠을 거듭하는 한계를 뚫으려는 욕망이다. 수많은 좌절과 상처를 끊임없이 덧칠하면서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나아가거나, 때론 부수거나, 무의미한 붓놀림으로 제자리에 맴돌기도 한다. 그림과 조각으로 정신을 승화하려 하지만 유형의 캔버스와 나무속에 젊은 영혼의 자유로움을 넣는 것은 참으로 고뇌가 아닐 수 없다. 자유를 부자유의 틀 속에 넣으려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역설이 있기에, 고뇌가 있기에 또한 젊음이 아름다워 지는 것이다.(이 영화조차 한 편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젊음의 순수와 서툼, 상처와 이해가 헝클어지고 복잡한 혼돈의 추상화를 이루어진 영화). 젊음의 시기를 지나 매너리즘에 빠진 기성세대들을 생각해 본다. 아주 부자유한 자연스운 삶과 자유로운 영혼이 고착의 상황에 처할 때 그림이나 조각은 한낱 물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지출처는 여기입니다.



그래서 초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한 파괴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질곡에 대한 혐오와 부자유에 대한 경멸에도 불구하고 젊음은 ‘젊음이란 시기’ 속에 박제된 된 시간으로 남는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시간은 젊음의 시기를 그들이 뒤돌아 추억해야할 시간으로 마련하기 위해 조용히 거두어 간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에서 젊음이 분리되고 나면 추억이란 이름으로 내보인다. 그것이 그림이라면 혼돈의 추상화일까? 꿀과 클로버가 있는 초원일까? 그 추억은 하나의 액자처럼, 그림처럼, 조각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부자유함과 질곡 속에 우리의 젊음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젊음은 아름다워진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워진다.

그러니 젊음은 아름답다고 하는 바로 그 ‘젊음’ 을 마음껏 향유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들에게 그토록 소중해 진다. 슬픔마저도, 상처마저도, 절망마저도, 상실마저도 순수하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젊음의 영화다. 순수함과 솔직함으로 장식되는 젊은 날의 그림들이다. 감정의 과장도 엿보이고 서툼도 보이지만 이것이야 말로 이 영화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정형화된 현실로 이 젊음들을 바라본다면 그야말로 한편의 넌센스가 되고 말 것이다. 눈물 겹지 않는가? 감정의 과장과 서툼들이. 영화 속의 저런 젊음들도 회상 속에 묻혀져 버릴 것이란 그 피할 수 없는 사실이. 그러니 속으로 눈물을 삼길 만한 영화라고 한 들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09.2.25.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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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9 00:35

생일 선물(Birthday Present)



사진출처:http://www.maxmovie.com/



생일선물(Birthday Present)



인간은 관계와 더불어 살아간다. 그래서 사회적인 동물이란 말도 있다. 관계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관계의 대상보다 우위적인 위치를 점하고자 한다. 인간은 그 관계 속에서 보다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바로 그것이 사회적인 신분이랄 수 있다. 그러한 노력에 더해 현실적으로 도달하고 획득한 사회적인 신분을 넘어 과시나 과장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이미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인 신분에 더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또 상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모습으로 과시하고 과장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이성과의 사랑이라는 다소 동물의 본능에 가까운 관계에 처하는 경우 이러한 과시나 과장은 더욱 강해진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액세서리를 하는 등 보다 화려한 치장에서부터 직업등을 과시하고자 한다. 더해 사회적 신분이나 자신의 생물적인 조건을 과장하기까지 한다. 이런 과시와 과장이 이성간의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선사시대 남녀들의 문신이나 장식도 과시와 과장에 속할 것이다. 현실은 인간과 인간의 꾸밈없는 관계가 아니라 과시와 과장이 게재된 불필요한 요소들로 거품이 이는 곳인지도 모른다.

인간을 판단하고 관계를 맺을 때 인간 그 자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아니 판단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아주 비중있는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대신 직업과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인간 그 자체를 판단하는 것이 관습처럼 일반화되어있다. 이것은 순환적인 상승을 일으키면서 사회를 경쟁의 관계로 몰아넣고 있다. 보다 나은 신분을 위해, 직업을 위해 남들보다 앞서고 우위에 서야 하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사진출처:http://www.maxmovie.com/



<생일선물(Birthday Present)>은 이러한 과시와 과장의 경쟁적인 사회 속에서의 관계(특히 이성간의 관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있게 본 영화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전도연을 닮은 영배우가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경해 마지않는 파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도 그렇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바로 이성간의 관계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 보다 크지는 않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 마사요시(키시타니 고로)나 아키코(와쿠이 에미) 모두 관계에 대해 인간 그 자체보다는 현실에서 이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인 신분과 직업이 만들어 내는 과시와 과장된 모습에 익숙해져 있다. 그들이 속물적인 것이 아니라 속물적인 현실에서 지속적으로 강요되고 쇠뇌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곡에서 예외적일 수 있는 인간이 우리중에서 과연 몇이나 될까?

마사요시는 여행사의 관광안내원으로 영화내내 자신이 관관관안내원이란 사실을 숨긴다. 우연히 화가로 자처하게 되었지만 의도적으로 화가라고 신분을 속인다. 이것은 화가로서의 사회적인 지위가 관광안내원보다 낮았다면 계속해서 화가라고 속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솔직하게 들러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신분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 우연히 식당에서 아키코의 약혼자였던 변호사와 조우하게 되고 아키코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은 변호사를 향해 주먹을 날리긴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혼이 나는 것은 변호사라는 신분이 호락호락하지 않는 직업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키코에게 사랑의 상처를 심어준 것이나 아키코가 그렇게 당한 것은 알고 보면 변호사라는 신분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아키코는 어떤가? 아키코는 비행기 여승무원이다. 그녀의 신분은 그다지 낮은 것이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비행기 여승무원에 대한 인식이 낮지 않은 것을 보면 일본 또한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본다. 또한 관관안내원인 마사요시가 다소 부담을 느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사요시와는 달리 아키코는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거나 고과장하기 보다는 상대의 신분을 너무 높이 잡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물질적인 보상을 위한 설득력 있는 이유가 존재하지만, 결국 인간을 그 자체로 보는 관점과는 먼 인간에 대한 판단이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차라리 사랑과 물질을 동시에 추구한다면 더 나을 것이다. 사랑은 온데, 간데없고 물질적인 보상만을 바란다는 것에서 아키코도 속물적인 관습에 익숙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성간의 사랑이라는 좁은 영역에서가 아니라 인간 일반의 관계로 넓혀서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 영화의 갈등은 과시와 과장에 가려진 관계에 의해 일어난다. 또 이러한 과시와 과장을 벗어버리고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고, 그 진실을 바라보는 가운데 갈등은 해소된다. 그러나 영화속의 이러한 갈등의 해소가 우리의 마음속에 동요를 일으키기에는 다소 부족한 것 같다. 한 순간의 감동이나 위로를 제공하고 그칠 것 만 같다. 왜 그런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쩐지 현실의 높은 벽과 싸우기에는 이 영화가 다소 무기력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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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00:43

일본영화 음악 3곡(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오늘의 사건 사고, 도쿄 맑음)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18+>은 사회와 인간과 남성과의 관계에서 겪는 여성들의 마음 상처의 결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또 보여줍니다. 그리고 공감하기도, 때론 오해하고 소통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보여줍니다. <오늘의 사건 사고>는 사라져 버리는 시간 속에 인간의 삶은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상적이거나 무덤덤한 사실들이 되기도 하고, 또 그러한 사실들이 서로 거미줄처럼 관계를 맺으며 사건이나 사고로 우리들의 뇌리에 박혀 듭니다. 시간 속에 사라져 갈 것들 이지만, 사라지는 시간들 속에 희미하거나 때론 짙은 흔적이나 인상을 남깁니다. 이런 우리의 삶에 대해 환기시켜 줍니다. <도쿄 맑음> 은 위 두 영화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독은 도둑처럼 우리의 삶 속으로 찾아옵니다. 그리고 웃음을 앗아가고, 행복을 앗아가고, 소중한 기억들을 앗아갑니다. 대신 상실감과 공허감으로 메워놓습니다.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감정은 너무도 모순 투성이라서, 변덕스럽기도 해서 때로 설명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학이 헤집고 들 수 없는, 이성이 메꿀 수 없는 모순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Strawberry Shortcakes)




오늘의 사건사고(きょうのできごと, a day on the planet )




도쿄 맑음(Tokyo Biyori, 東京日和), 터키행진곡




도쿄 맑음(Tokyo Biyori, 東京日和), MihoKomatsu
영화제목과 동명의 노래로 감상하세요 




도쿄 맑음(Tokyo Biyori, 東京日和), Van Tomiko (伴 都美子)
영화제목과 동명의 노래로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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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9 02:27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 誰も知らない)



이 영화를 보기 바로 전 조금 언짢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언짢은 기분 때문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 영화를 보았으니 그러한 연관이 필연적인 것인지 우연의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요.

그 언짢은 기분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11시 쯤 가족 모두가 잠자리에 다 누웠습니다. 잠들기 전에 보통 한 두 마디씩 하게 되거나 장난도 치는데 어쩌다 기독교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마도 큰 아이가 저의 종교가 무엇인지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아직 자아 형성도 덜 된 어린 아이들을 교회로 데리고 가는 기독교 신자들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아내와 생각이 달라 조금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행위에 호의적인 아내가 못마땅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아직은 어리니 교회에 따라갈 필요는 없다. 좀 더 자라서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아이들을 과자나 학용품등을 이용해 교회로 데리고 가는 선교 행위를 싫어했습니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유치하고 악의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종교란 어떤 비극적이거나 절망적인 인생의 경험 뒤에 찾게 되는 근엄하고 경건한  무엇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이끌고 선교를 시작한 나이도 30세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대상들도 주로 가난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받은 어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맹목적이기 보다는 절실한 무엇이기에 적어도 성숙한 나이에 어울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직 자아 형성도 덜 된 초등학교 학생을 교회에 데려가 예수만을 믿으라는 것은 지적인 살인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교도들의 구원이 절실할 것이고 저주 받은 인간을 살려내는 행위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선교의 대상이 나이에 의해 제한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면 구원받지 못하는 이교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인 기독교의 교리 앞에서 왜 신성함이나 두려움 보다는 어떤 속박감이 먼저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양자 택일의 강요가 너무나도 모진 이 기독교에 대해 우유부단해지는 제 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한 선택의 강요가 너무나 모질고 확신에 차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러한 잡념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 컴퓨터를 켜고 우연히 아무도 모르게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모태 신앙처럼 종교는 빠를수록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삶의 체험 속에서 신을 절실하게 찾게 되는 그러한 나이에 다다를 때가 좋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기독교를 꼭 믿으라고 전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와 기독교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물론 굳이 연결을 지으려면 불가능한 것 아닙니다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기독교 운운하며 이 영화를 본 소감을 시작했을까요?


사진 출처  http://www.livedio.com/ImgPool/ImgPool.aspx?MediaID=693396


또 한 가지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 훨씬 이전의 경험입니다. 지인과의 식사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 적이 있습니다. 먼저 식사를 끝낸 아이들이 식당을 돌아다니려고 하기에 제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납니다: “실내에서 남들에게 피해주지 말고 어른스럽게 행동해라!” 그런데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지인이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에게 가능한 요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정말 가능하지도 않는 요구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스러울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이들이 어른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들은 아이스러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아무도 모른다>는 영화에 대해 소감을 말하기 전에 이러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바로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좀 과장이긴 하지만 인간은 아이와 어른으로 나누어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모든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어른은 아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언의의 유희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여자와 남자처럼 명확한 구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른과 아이의 사이에는 시간의 연속성과 역사성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명확한 구분이 아니라 변화상의 구분정도가 가능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편의적인 구분일 뿐이며 결국 아이는 어른으로 변화할 뿐인 것입니다. 아이였던 어른이며 어른이 될 아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이의 시기를 경험한 어른들은 그 시기를 자주 망각합니다. 남, 여 간의 오해나 편견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다른 실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아이였던 어른들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현실은 이 망각 때문이 아닌가도 합니다. 이 망각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아이들과 관련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모든 어른들에게는 아이일적의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정작 자기  주의에 존재하는 아이들의 세계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솔직히 우리에게 단절된 것은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아닌가도 싶습니다.

 
쿄코와 유키    사진 출처 http://www.joycine.com/service/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참 좋은 영화입니다. 잊고 있었던 아이들의 세계를 환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단절된 아이들과 어른들의 세계를 이으려는 진지한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자기 성찰을 진지하게 유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에서 어른의 존재가 없다면 아이들은 생존이 어렵습니다. 첨단 과학의 21세기에도 무기력하게 태어나는 인간은 원시인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아이와 어른들의 세계는 원시(자연)와 문명, 본능과 문화, 순수와 오염(타락), 환상과 현실등의 구분이 가능할 것입니다. 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인류 문명의 축소판이라거나, 문화의 창조적인 전수라거나 세속에의 적응 같은 알레고리로 파악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원시의 모습으로, 본능만으로, 순수하게만 살아갈 수 없도록 조직화된 세상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또한 역설적이게도 아이들의 세계(동심의 세계)가 필요한 것이 오늘날의 세계입니다. 문명과 문화와 순수함을 잃은 어른들은 아이들을 통해 원시와 본능과 순수를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이와 어른은 공생의 관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아이들의 세계를 망각해버린다는 것은 어쩌면 끔찍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뿌리를 상실한 나무처럼 근원과 단절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망각된 아이들의 끔찍한 모습들이 바로 우리 어른들의 모습임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요? 결코 과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아무도 모른다>는 단순히 ‘아이들의 세계‘ 만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결코 영화 속의 4남매들처럼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눈물 없는 아이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영화 속의 아이들은 너무 어른스럽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을 통해 망가진 어른들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피가 다른 4남매가 그리는 비극의 세계는 어른들의 썩어가는 환부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무도 모른다>는 아이들의 비극적인 실존을 통해 어른의, 더 나아가 문명과 문화와 타락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세계와 관련해서 이점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아이들이 그토록 감정을 철저하게 절제할 수가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일본인들의 특성을 잘 알지 못해서 그럴까요? 사실 일본인들의 감정 절제는 대단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속 다르고 겉 다르다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이들의 불행한 일상이 다루어진 <아무도 모른다>가 병들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지만 아이들의 세계 그 자체를 다루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감독의 의도가 의미심장하다고 하더라도 또 영화의 리얼리티가 그럴 듯 하다 하더라도 아이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이들이 너무 어른스럽기 때문입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세계가 있다’ 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른들이 감정을 강요한 감정적 살인을 저지른 듯한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2004년 칸느 영화제에서 영화제 사상 최초의 아역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훌륭한 영화입니다. 아마 <아무도 모른다>가 아니었더라면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연기력을 높이 평가받은 우수한 영화입니다. 하드 보일드한 문체나 스타일이 예술적인 경향의 대세를 이룬다고 하지만 아무리 비극적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들의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세계를 눈물 한 방울 없는 냉혹한 세계로 묘사한들 그리 탓할 일은 아닙니다. 앞서도 애기했지만 망각된 아이들의 끔찍한 모습들이 바로 우리 어른들의 모습임을 감독은 의도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돌아와 아이들이 환한 웃음을 짓게 되었다면 이 영화는 분명 실패했을 것입니다. 청중들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스토리를 전개한다면 영화는 신선함이 없이 진부해지고 마는 것이니까요. 영화감독들이 고민하는 세계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일 것이니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사진출처: http://www.myphototv.com/PhotoMagazine/


아이들에게 그들의 세계를 돌려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입니다. 그들의 얼굴에 웃음을 돌려주는 것은 어른들의 책임입니다. 타락한 어른이 투영된 아이들의 눈물 없는 냉혹한 세계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어른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서로를 치유하는 방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 의해 그들의 세계를 보호받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통해 좀더 평화롭고 순수한 세계를 꿈꾸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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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4 04:51

일본영화 음악 3곡(같은 달을 보고 있다,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 무지개 여신 )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같은 달을 보고 있다> 은 참 매력적인 영화였습니다. 인간의 마음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의사의 매스가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져지지도 않는 사랑이라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랑이란 감정이 표현된 예술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듭니다. 진관희를 보면서 연예인들의 사생활과 영화와의 관계를 조금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는 약간 진부했습니다. 엇비슷한 주제에 조금 다른 의상을 입힌 듯한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록 진부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수긍해야만 할 우리 자신들의 내면의 풍경이 아닐가 합니다. 그래서 또 가치있는 것일 테구요. 아사노 타다노부의 개성적인 연기가 인상에 남습니다. <무지개 여신> 은 슬픈 영화이긴 하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영화였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 자체의 흠이라기 보다는 제 감수성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君のそばに, 久保田 利伸, 같은 달을 보고 있다 






Gravity,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






Rainbow Song, 무지개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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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0 18:15

일본영화 음악 3곡(녹차의 맛, 우동,칠석의 여름)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녹차의 맛> 은 담백한 녹차의 맛처럼 덤덤하게 지나치는 인간의 일상이지만 또한 동시에 녹차의 맛처럼 깊이 우러나오는 인생의 맛이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우동> 은 <녹차의 맛>처럼, 꿈이란 어딘가 훌쩍 뛰어 넘어 있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소박한 무엇일 수 있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동시에 전통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칠석의 여름> 은 영화의 작품성을 떠나 대동아공영이란 탈을 쓴 일제의 폭력과 억압, 고통스런 과거에서 진정으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아주 뜻깊은 영화였습니다. 자 이제, 영화음악과 함께 영화 속으로 푹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녹차의 맛(2003)
LITTLE TEMPO & 藤田陽子, 茶の味



Mountain Song




우동(2007)




칠석의 여름(2003)
엔딩곡 나고리유키(なごり雪)(철지난 눈) / 이루카(イル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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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4 22:40

♥한국, 한국인과 관련된 일본영화

일본 영화계에 한국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최양일 감독이나 이상일 감독 의 경우는 최근 일본영화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포스트는 단순히 한국인 배우들이 등장하는 일본영화가 아니라 최양일감독이나 이상일 감독의 비중있는 작품들과 민족적인 정체성이 강한 작품을 포함해서 한국을 다루거나 한국적인 색채가 완연하게 드러나는 일본영화를 정리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정리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좀 더 알아가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필자 주)  

작중 김준평으로 열연했던 기카노 다케시가 인상적이었던 <피와 뼈> (2004)는 감독이 재일 한국인인 최양일이다. 또한 원작이 된 동명 소설의 작가도 재일 한국인인 양석일이다. 한때 기타노 다케시 자신이 외할머니가 한국인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만약 이러한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실제로 이 영화는 일본영화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그러나 정작 기타노 다케시는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으며 오히려 한국을 조소하는 일본영화감독으로 알려져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수가 없다. 

이미지 출처:www.japonsko.tnet.cz/kultura_k

이미지 출처http://kr.blog.yahoo.com/mr732

이미지 출처:http://kr.image.yahoo.com/GALL





<박치기> (2004)는 이즈츠 카즈유키(井筒和幸) 감독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제로 재일 한국인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한국인과 밀착된 영화라 할 수 있다. 특히 영화음악으로 등장하는 ‘임진강’은 한국인 박세영이 작사하고 고종한이 작곡한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본에서는 1968년 ‘더 포크 크루세더스’ 가 일본어로 번역하여 음반을 내었으나 금지곡으로 선정되어 화제를 낳았던 곡이다. ‘더 포크 크루세더스’ 는 1960년대, 70년대에 인기절정을 달리던 밴드로 카토 카즈히코가 영화음악을 직접 맡았다.

이 <박치기>와 <피와뼈>는 한국에서 만든 어떠한 영화 못지않게 '민족의 분단' 이나 '남북분단'의 가슴 아픈 현실을 이념이나 국가주의라는 감정에 함몰없이 민족의 문제를 좀 더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볼 수 있다는 면에서 일본인들 보다 우리에게 더 감동으로 다가오는 역작들이다. 이러한 면에서 이 영화들은 독립된 포스트에서 독립적으로 다루어질 만 하다.



이미지 출처:http://www.maxmovie.com



영화 <박치기> 중 한 장면


임진강


이상일 감독은 <69 식스티 나인> (2004) 과 <훌라걸스> (2006)로 유명한 한국인 감독이다. 물론 이 영화들은 한국적인 정서가 스며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특히 <훌라걸스>는 한국인 감독 이상일 뿐만 아니라 제작도 재일 한국인 제작자 이봉우 선생이 한 작품으로  일본 거대 영화 제작사가 석권하던 일본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최우수상등 11개 부분을 석권한 사실은 개인적인 영광을 넘어 무언의 민족적인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는 면에서 무엇보다도 더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또한  2006년 최고의 화제를 모았던 영화에 주어지는 특별상인 ‘화제상’ 을 수상함으로써 이상일 감독의 <훌라걸스>가 2006년 일본 최고의 영화임을 보여주었다.



이미지 출처:http://www.maxmovie.com



이미지 출처:http://www.maxmovie.com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 (2004)는 일본 후지 TV가 ‘아시아의 스트라디바리우스’로 불리는 재일 한국인 바이올린 제작자 진창현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2부작 특별 드라마이다. 비록 영화가 아니지만 포스트에 추가한다. 

"일제 치하에서 경상도 시골에서 태어난 진창현(74)은 어린 시절 일본인 선생님으로부터 들어봤던 바이올린 음색에 푹 빠져 14살 때 혼자 일본 유학길을 떠난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때론 좌절하기도 했지만, 거의 독학으로 바이올린 제작법을 터득한다. 마침내 그는 76년 국제 바이올린ㆍ비올라ㆍ첼로 제작 콩쿠르 6개 부문 중 5개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출처:주간한국 http://weekly.hankooki.com/lpage/culture/200411/wk2004113011252045210.htm
 

이미지 캡처 출처: 야후, 코리아 검색. 검색을 하시려면  여기 를 클릭하세요

 

<고(GO)> 는 재일 한국인의 정체성을 다룬 일본영화로 조연으로 김민과 명계남이 잠깐 나와 열연한다. 이 영화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인 고교시절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며 방황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재일 한국인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미지 출처:http://www.maxmovie.com




<칠석의 여름(チルソクの夏: Summer Of Chilsuk> (2003) 은 시모노세키와 부산간 정기 고교 육상 대회를 통해 만난 한국의 남학생과 일본 여학생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하이틴 청춘물이다. 영화 자체의 구성이 엉성하고 줄거리가 판에 박은 듯하며 촬영은 부산에서 상당 부분 이루어졌지만 연기자들이 모두 일본인인 탓에 연기와 언어가 너무나도 어색한 그다지 수준높은 영화는 아니지만 우에노 주리가 조연으로 열연한다. 이 영화는 단순히 한국을 다루고 있다는 측면을 넘어 전후 세대 한, 일 양국의 십대들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김인덕씨가 쓴 '우리는 조센진이 아니다(격랑의 민족사가 낳은 재일조선인 이야기)'를 보면 "스포츠계에서 많은 재일조선인이 활동한 것처럼, 일본 연예계에도 많은 한국계갸 예전에는 물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대중매체는 이런 사실을 감추고자 하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나온다.

김씨는 "영화쪽에는 스가와라 분타, 다카쿠라 켄, 가네다 겐이치, 마츠자카 게이코, 이시다 히카리, 미야시타 준고, 야스다 나루미, 구도 유키 등등이 있다"고 밝혔다. 다카쿠라 켄은 국내 개봉한 일본 영화 '철도원'의 주인공을 맡아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joins! 연예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417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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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3 02:45

일본영화 음악 3곡(환상의 빛,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유레루)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환상의 빛(幻の光)> 은 고레이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뷰작으로 알고 있습니다. <환상의 빛>은 개인적으로 참 감동적으로 본 작품입니다. 안타깝게도 리뷰를 적어놓았다가 날려버린 영화이기도 합니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인 <아무도 모른다>가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서 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을 떼어놓고 보더라도 문학성이 있는 영화라는 그런 느낌이 든 영화였습니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일상의 지루상을 아주 기발하고 상상적이며 재미있게 벗어나고 있습니다. <유레루>  '흔들리다' 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흔들리는 인간의 심리, 흔들리는 가족, 특히 형제간의 관계와 남녀간의 사랑을 진지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살인 사건을 둘러싼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한 영화입니다. 자 이제, 영화음악과 함께 영화 속으로 푹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환상의 빛, trailer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南風
レミオロメン(레미오르맨)



南風, LIVE Version
レミオロメン(레미오르맨),





유레루, 집으로 가자(うちに帰ろう)
 Cauliflo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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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7 13:16

일본영화 음악 3곡(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좋아해)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은 개인적으로 아주 감동적으로 본 영화입니다. 영화 리뷰는 잘 쓰지 않는 편인데도, 3번에 걸쳐 영화 리뷰를 쓰게 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있다면 보시기를 권합니다.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좋아해> 는 너무  순수해서 서툰 사랑이지만 다시 돌아가게 하는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자 이제, 영화음악과 함께 영화 속으로 푹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비디오 클립을 3~4개씩 넣으니 화면이 부숴지는데 저만 그런건지 아니면 이웃님들도 그런 건지 궁금합니다. 댓글로 좀 알려주시구요, 실제 그렇다면 비디오 클립을 1~2개로 줄여야 겠습니다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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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5 22:45

마츠코에게 보내는 편지(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마츠코에게 보내는 편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스런 내 딸, 마츠코!

마츠코, 세상의 어느 아비도 자식의 불행을 바라지 않는단다. 행복하기만을 바란단다. 세상 모든 부모의 심정이 그렇다. 자식의 불행을 지켜보아야 하는 그 사실 만큼 가슴 아프고 고통스런 일이 어디 또 있겠니.


그런데 마츠코, 난 널 지켜주지 못했구나. 불행하게 만들고 말았구나. 이 못난 아비로 인해 네가 불행해 지고 말았다니, 나 자신이 용서되지가 않는구나. 이 아비의 부덕한 탓이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고통스런 일이다. 아비의 굳어버린 입장에서 새싹 같은 마츠코 너의 가슴에 피멍 맺히게 하고 말았구나. 그러나 믿어주렴. 처음부터 네 불행을 바란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이 아비의 가슴 깊숙이에 마츠코 너에 대한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네 동생은 병든 아이였다. 사랑과 관심이 특별히 필요한 아이였단다. 그러나 이 아비가 네 동생에게 보여준 사랑은 네게서 빼앗은 것은 결코 아니란다. 마츠코, 네 동생이 더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불쌍하고 가여웠기 때문이란다. 그 당시에 마츠코 네가 그렇게 생각했듯이, 결코 네 동생에 대한 편애는 아니었단다. 그러나 어린 네 마음에는 아비의 사랑이 그리웠고 외로움이 참기 어려웠겠지. 이 애비가 네 아픈 동생만 편애 한다는 오해는 어린 마츠코 너의 마음엔 지울 수 없는 상처였겠지. 이 애비가 네게 조금만이라도 더 따스하게 대했더라면 네 삶이 그토록 힘들게 되지는 않았겠지. 마츠코 네가 이 애비의 웃음을 얼마나 필요로 했는가를 진심으로 알았더라면 비극적인 오해는 생기지 않았겠지. 이 애비는 너의 그 깊은 슬픔을 안단다. 이 애비가 아픈 네 동생만큼이나 마츠코 너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졌다면 너의 삶은 얼마나 순탄했을까, 하고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온단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별 대수롭지도 않는 일들이 당시에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란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이 아비도 어린 날의 삶의 과정을 거쳐 왔으면서도 미처 네게만은 이해의 따스한 손길을 내보이지 못했으니 인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어버리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구나. 어린 내게는 아비의 무관심이 절대적인 고통이란 걸 미처 깨닫지 조차 못했다. 이 아비가 살아 온 방식으로 마츠코 너의 삶을 속박하려 했구나. 나에게는 살아온 시간이 더 많았고 너에겐 살아 갈 시간이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지나간 과거의 방식으로 너에게 부단하게 영향을 끼치려고 했구나. 결국 아비의 굳어버린 머리 탓이었단다. 용서해 주렴 마츠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교사직에서 해고된 것이 이 아비의 무관심과 관련이 되어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단다. 이 아비의 웃음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이 아비를 웃기기 위해 익살스런 표정이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을까. 결국 그것은 이 아비의 굳어진 표정이 초래한 희극적인 동시에 비극적인 습관이라고 생각하니 아비의 무관심이 뼈에 사무치는 구나. 그 굳어진 익살스러운 표정이 네 학교에서의 사건을 더욱 악화시키고 마침내는 사표로 이어지는 불행과 그 이후의 비극을 초래하는 단초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쉬움이 있다면, 마츠코야, 병들어 누워 있는 네 동생에 대해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마츠코, 네가 학교에 사표를 내고 동생을 저주하면서 목을 조르고 가출하는 행동도 충분히 이해를 한단다. 그러나 마츠코, 어린 시절의 너와는 달리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교사였던 너의 행동에 조금은 지나친 데가 있었다.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에 전적으로 지배받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너는 성인이 아니었니. 그런데 여전히 동생을 원망하며 동생의 목을 조르고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마츠코야, 네 삶이 너무 가엾고 가슴이 아파 이 아비가 뒤늦게 하는 넋두리라고 생각해라. 너를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인데 지나쳐 온 시간들을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마츠코, 이 세상 어느 누구가 너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해도 넌 내 자식이다. 마츠코, 네가 이 아비를 탓해도 언제까지나 넌 내 자식이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어린 자식일 뿐이다. 마츠코, 너에 대한 이 아비의 사랑이 너무 가슴 깊숙이에 있어 서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어쩌면 아주 사소한 오해였던 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감정을 쉬 내보이지 않으려는 이 아비와 너무 깊어 보이지 않던 이 아비의 사랑을 갈구하던 어린 마츠코 네가 서로 빗어놓은 어처구니없는 오해 말이다. 너무나도 긴 시간 후에 서로의 진실이 해후한다는 그 사실과, 그 오해와 해후 사이에 마츠코 네 비극적인 삶이 놓여 버렸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가슴을 찢는 고통으로 다가오는 구나. 늦었지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네가 이제는 이 아비의 사랑을 이해하듯이 이 아비 또한 네 진실을 알고 있단다. 이 아비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이 세상에 보여주려 했던 네 진실을 말이다.


마츠코, 이 세상엔 별 만큼이나 많은 오해들이 존재한단다. 그러나 이 애비와 너의 오해만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오해들은 다 사라졌으면 좋겠구나. 마츠코 너로 인해 이 세상에 그런 오해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그런 작은 오해로 큰 불행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기 때문이란다.  아주 작은 오해 하나가 마츠코 너의 삶을 휘감는 큰 불행과 비극을 낳았다는 데 이 애비는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괴롭단다. 이제 긴 시간을 우회해서 우리의 오해도 풀렸지만 아직도 마츠코 네가 혐오스러운 존재라고 오해하고 그렇게 부르는 인간이 여전히 많은 듯하다. 작은 오해로 비롯된 네 삶을 빗대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혐오스러운 마츠코라 불러도, 이제 더 이상 넌 결코 혐오스러운 마츠코가 아니란다. 이 아비에게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내 자식이란다.


마츠코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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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9 18:46

일본영화 음악 3곡(태양의 노래, 내일의 기억,박사가 사랑한 수식)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태양의 노래> 는 영화의 주제와는 별개로 삶의 조건이 어떠하더라도 음악은 아름다운 위안이고 감동적인 치유의 방식임을 느끼게 합니다.  <내일의 기억> 이 약간은 진부하고 식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치명적인 병을 구심점으로 비슷하게 나타나는 행동과 그 행동에 반응하는 엇비슷한 감정들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의 단어가 50% 이상의 스포일러로 작용할 정도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헐리웃 액션일까요. 아무튼 이러한 부분을 떼놓고 좀 더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보면 이 영화의 의미는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원작이 소설이기도 해서 더 그런 의미로 연결되기도 하겠습니다. 아무튼 모든 영화가 예외없이 관객과 소통을 추구한다면 이 영화는 마음 속  깊숙이에  상처를 담고 살아야 하는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더 큰 의미로 와닿을 것 같습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 은 수학의 여러 공식들이 수학에서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의 삶 속에서 절묘하게 적용되고 또 삶의 의미를 해석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서, 수식을 사랑하는 박사가 곧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자신의 기억은 사라지고 있으나 타인들에게는 어쩌면 사라지는 기억만큼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닌지, 수학적으로 따지만 박사의 삶은 자신에게서 마이너스를 한 부분들을 타인들게는 플러스를 해주는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는(값을 동일하게 하는) 존재가 아닐까 또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자 이제, 영화음악과 함께 영화 속으로 푹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태양의 노래,
Goodbye Days(MV)




It's Happy Line




Goodbye Days(Live)







내일의 기억,
Trailer






박사가 사랑한 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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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9 23:18

일본영화 음악 3곡(눈에게 바라는 것,란도리,눈물이 주룩주룩)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눈에게 바라는 것> 은 인간의 삶에 비극은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의 삶에 필요한 이유를 잔잔하게 느끼게 하는 수작입니다. 비극을 통해 인간은 성숙해진다는 근엄하고 무거운 주제를 잔잔한 감동으로 보여줍니다. <란도리>는 정신연령이 떨어지는 한 청년의 순수하고 해맑은 모습을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 우리가 위안 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영화입니다. 마지막으로 <눈물이 주룩주룩>  가족이란 애정으로 묶어진 이루어 질 수 없는 남녀간의 사랑을 애잔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자 이제, 영화음악과 함께 영화 속으로 푹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눈에게 바라는 것
trailer





란도리
Under the sun, Bonnie Pink





눈물이 주룩주룩
나츠카와 리미, 눈물이 주룩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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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8 19:07

젊은 날의 초상, 하나와 앨리스

 

이미지 출처:  http://kr.n2o.yahoo.com/NBBS/1


 


하나와 앨리스




☞하나와 앨리스 영화 음악 감상하러 가기☞


‘우정’ 과 ‘사랑’ 은 젊은 날의 추억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말들입니다. 아마 젊은 날을 지탱하는 두개의 큰 기둥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과의 우정과 이래저래 알게 되는 여학생(남학생)들과의 풋풋한 사랑은 감수성 예민한 그 시기에 가슴 설레게 하는 감정들입니다. 이성(理性)이나 이해(利害)보다는 감성과 맹목이 처녀림처럼 오염되지 않은 시기에 마음과 마음으로 투명하게 교감하는 우정과 소름 돋도록 황홀해 하던 순수의 사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보석들이라 할만 합니다. 하늘에 떠있는 별들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추억들은 지금은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지만 그 이면에는 서툴고 어눌했기에 생긴 부끄러운 일들이 시행착오들처럼 동시에 얼룩으로, 그림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별들이 반짝이는 것은 어두운 밤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성(異性)에 관한한, 젊은 시절의 고통은 처절(?)할 정도였습니다. 별을 출산하기 위한 의례적인 통과였겠지만, 육체적인 감정과 죄의식 사이에서의 갈등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처절하다는 표현이 정말이지 적당합니다. 내부 깊숙한 곳에서는 성적 본능이 솟구치는데 이 본능을 순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아무도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가정과 사회나 학교가 만들어 놓은 도덕적 규율과 죄의식이 거의 다였습니다. 만약 이 시기에 누군가 이 성적 욕구를 예술이나 다른 창조적인 것으로 승화시켜주거나, 본능에 솔직하도록 죄의식을 부수어주었다면 아마도 저는 양극단의 삶 중 어느 하나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상황이다 보니 분열되고 깨어진 자아는 사회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깨어진 유리의 날이 날카롭듯이  신경질적이고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기성의 제도나 가치에 대한 젊은 세대의 비판과 저항도 이런 맥락일까요? 비판과 저항이 낭만적이거나 환상적인 건 이런 때문이 아닐까요?

이미지 출처:  http://kr.image.yahoo.com/GALL

 

이러한 분열된 자아를 그나마 위로해 준 것이 친구였습니다. 우정이었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몇몇 친구가 왜 그토록 힘이 되고 위안이 되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공유하는 생각이 비슷했기 때문이었겠죠. 우정은 제가 순화되는 유일한 출구 중에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하나를 더 들자면 도스토예프스키(Fedor Dostoevsky)와 비틀즈(The Beatles)입니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중학교 2학년 때 저에게 아주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집 근처의 서점에서 ‘이중인격’ 이란 제목의 문고판(‘삼중당’ 문고인 듯한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책을 샀는데 그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였습니다. ‘이중인격’ 이란 책 제목이 저를 완전히 압도했는데 바로 제가 이중인격자라는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중인격’ 이란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둡고 분열된 심리를 반영하는 책 제목을 주로 골랐습니다. 어둡고 부적응적인 정신 상태를 잘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그 이후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의 책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밤을 새워 가며 읽었던 ‘죄와 벌’ 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은 읽긴 했지만 음산한 분위기와 인물들에 막연히 공감했을 뿐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스토예프스키 외에는 접한 작가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왜 이토록 하나만 우상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틀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집 근처의 골목 어귀 레코드 방에서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촘촘히 꽂혀있는 카세트테이프 중에서 흰 와이샤츠에 까만 넥타이를 매고 까만 양복을  입은 4명의 젊은이들이 훈장을 들고 있는 사진이 저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멋져 보였습니다. 또 훈장들이 호기심을 자아내었습니다. 그 테이프를 꼭 사야만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음악이 있는가?  그 테이프는 복사판으로 20곡 정도의 곡이 들어있었고 듣자마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도스토예프스키와 비틀즈는 내게 작은 아니 큰 위안으로 찾아온 것입니다.(아집의 탄생이라고 할까요? 우상의 탄생이라고 할까요? 도스토예프스키와 비틀즈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제게 작은 축복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저주였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마음은 황량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kr.image.yahoo.com/GALL


이제 ‘하나와 앨리스‘ 의 얘기를 해볼까요? ’하나와 앨리스’ 는 10대들의 우정과 사랑과 상처의 치유를 다룬 영화입니다. 아라이 하나(스즈키 안)와 앨리스[아리스가와 테츠코](아오이 유우), 그리고 미야모토(카쿠 토모히로)가 펼치는 순수한 우정과 사랑과 고민과 관용과 이해를 담은 젊은 날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명랑하고 쾌활하고 낙천적인 분위기가 마냥 부러웠던 것은 아마도 칙칙하기만 했던 제 개인사에 기인할 것입니다. ‘하나’와 ‘앨리스’는 왜 이토록 성숙하고 어른스러운지! 아마 젊은 세대가 이토록 낙천적이고 밝기만 하다면 이 세상에는 문제가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와 앨리스는 그들이 가진 문제들을 스스로 잘 극복해갔으니까요.


또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하나와 앨리스’ 는 10대들의 ‘역할 모델’ 영화로 적합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직 여물지 않은 머리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문제와 더불어 살아야하는 사춘기의 10대들에게 여유와 낭만과 관용이란 삶의 방식을 선사해주는 것은 교육적으로 소중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 시기의 사랑과 우정이 너무나도 가슴시리도록 뭉클한 것은 자기 한계에 대한 질곡이 너무나도 깊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육체적, 환경적 변화와 불안정에 따른 자기 혼돈의 시기인 것입니다. 이럴 때 자신과 동질적인 누군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커나큰 기쁨입니다. 또한 혼란스런 가운데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천국처럼 특별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와 앨리스’는 이러한 사랑과 우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과 우정에 대한 따스한 시선, 만담(발레, 사진) 등의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활동들을 통해 극단적인 방식들이 순화된 성숙한 10대의 모습들, 그 모습들에 아와이 순지 감독의 10대들에 대한 애정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영화의 끝부분에 발레의 장면 이 지루하게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영화가 교육적으로도 힘든 작업을 대신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10대들과 관련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화들(두사부일체,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 동갑내기 과외하기, 우리형 등)은 과연 이러한 방식들이 순간의 감정 분출을 의도한 것 외에 무엇일까 하고 회의하게 합니다. 인간성 상실과 삭막한 사회 현실을 고발하기 보다는 혹 일조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시인인 유하 감독이 만든 ‘말죽거리 잔혹사’ 의 경우 ‘과거 향수의 향유’ 라는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지만 이 영화가 15세 이상 등급이란 면에서는 그 잔인한 폭력으로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빨간딱지가 붙는 18세 이상 관람 등급이 주로 에로 영화에 국한되는 것도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10대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문제의 접근이나 해결의 측면에서 더 깊이 있고 진지하다고 주장한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와 앨리스’ 류를 전적으로 두둔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 영화들에도 10대들과 관련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화들은 존재합니다. 아니 더하다면 더할지도 모릅니다. (최근에 본 일본 영화 ‘바운스’ 가 그랬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는 ‘폭력적’ 이거나 ‘부정적‘ 이라기보다는 ’고발적‘ 인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나 폭력이 상업성과 결합되면서 마치 영화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소재라는 데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폭력을 비판한다는 미명하에 폭력을 이용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차라리 폭력을 연구하려 했다거나 상업성을 고려했다고 좀더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과연 10대의 학창 시절이, 보편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시기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나와 앨리스 영화 음악 감상하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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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6 13:12

사토라레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미지 출처:www.koreafilm.co.kr/movie/revi





사토라레



한 인간의 머릿속 생각이 타인들에게 들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 타인들의 머릿속 생각이 한 인간에게 들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이러한 상상을 누구나 한 번쯤은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이런 상상은 상상으로서 끝나버립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가 왜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일까, 하고 그러한 상상의 의미와 관련된 질문은 던져 볼만 합니다. ‘사토라레’ 라는 영화가 이러한 상상을 조금 더 진전시켜 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은 호기심이 참 많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호기심이 미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 자신들에 대한 호기심도 그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의 호기심이 인간 스스로에게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도대체 인간(우리)은 무엇인가? 인간(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가? 인간(우리)은 왜 전쟁을 할까? 인간(우리)은 선한가, 악한가? 이러한 질문들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서 좀 더 진지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3박4일의 일본 후쿠오카로 팩키지 여행과 이후 자유여행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이 두번에 걸친 관광을 떠나기 전까지 일본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일본에 대한 제 머릿속 생각과 태도는 관광 전과 후를 비교하면 전혀 다릅니다.

일본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이 능동적인 노력으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다소 민족주의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늦게나마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제 식민지 과거사와 독도문제에 빠져 극일, 혐일이라는 일본에 대한 경직된 생각이 다소 바뀐 것입니다. 최근 일본 영화를 자주 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바로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 좀 더 일치된 생각을 갖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미지 출처:http://blog.naver.com/caek22?Redirect=Log&logNo=20028909648



 

일본과 일본인에 관련한 또 하나의 경험은 일본인들은 속과 겉이 다르다는 선입관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친절한 척을 해도 속으로는 이를 갈고 있다는 식의 생각이 왜 일본인들에게만 그토록 집요하게 강요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좀 더 다르게 표현하면 그것은 좀더 성숙한 인간의 자세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일본인들을 대하면서 그들의 속마음이야 어떻던, 형식적으로라도 친절과 예의가 몸에 박힌 태도에 차라리 호감이 갔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인간의 생각과 말의 불일치는 일치할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생각을 철저하게 숨기는 것이 오히려 불일치를 극복하는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일치 할 수 없는 것을 굳이 일치시키려 하기 보다 불일치를 철저히 숨기는 것 말입니다.


이렇듯 생각과 말이 불일치하는 인간 자신의 한계를 인간들은 부단히 일치시키려고 하거나 철저하게 숨김으로서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 일치와 숨김의 노력들은 우리 삶의 도처에서 보이는 형태로 또는 보이지 않는 형태로 강렬하게 또는 어렴풋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이러한 숨박꼭질 같은 인간 삶의 모습은 때론 우습기도, 절망스럽기도, 슬프기도, 역겹기도, 기쁘기도 한 여러 감정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감정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삶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어떠한 방식으로 바라보느냐는 우리의 태도이겠지요.   


인간의 안과 밖, 즉 생각과 말이 모순적이고 불일치하는 인간의 한계를 다루는 경우, 제가 접한 최근의 영화들은 그 모순이나 불일치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은 대체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 안과 밖의 불일치는 끝까지 극복하지 못한 채 비극적으로 오히려 그 한계로 인한 비극적이고 파국적인 인간을 드러내 관객들에게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듯 합니다.(물론 간절한 의도는 일치를 지향하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미지 출처: daiquiri.egloos.com/1641885



일치는 가능하지도 않으며 인간은 생각과 말의 불일치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모순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듯 합니다. 많은 영화에서 한 인간과 현실의 불일치는 메워지기보다는 끝까지 어긋나면서 비극적 파국을 맞이합니다. 예술의 도덕적, 교훈적인 역할이 약화 된 것은 오래전 일인 것입니다.

 



이제 사토라레로 돌아갑시다. ‘사토라레’ 는 생각이 타인들에게 들리는 기이한 특성을 가진 인간을 지칭합니다. 안(마음, 생각)과 밖(말, 언어)의 불일치와 모순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영화 ‘사토나레‘에서 이러한 안과 밖의 불일치를 접하는 시선들에는 비극적이라거나 진지함은 그다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왁자지껄하고 코믹하기까지 합니다. 사실 사토라레의 특이성은 놀랄만한 것이지만 생각과 말의 불일치는 당연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물론, 비극적 인식은 다소 드러나는 편이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성격을 좌우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교훈적인 장면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안과 밖 중에서 보이지 않는 것(마음)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말보다 안에 갇혀 드러나지 않는 마음에 대한 애정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말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마음이 더 소중하다는 교훈적인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의 생각(마음)이 외부로 들려 난처한 경우가 많지만 마음과 마음이 소통되는 것을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인상적이었던 마지막 대사입니다.         


“요즘 시대에는 말로서만 모든 일을 해결하려 하는 경향이 많아져서 도리어 다른 사람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일도 많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이런 시대가 사토라레들을 태어나게 하는지도...... 우리 모두가 사토라레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우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도 우리의 머리 속이 투명해 진다면 - 우리의 생각이 타인들에게 들린다면- 어떻게 될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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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5 23:08

일본영화 음악 3곡(자토이치,사토라레,전차남)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자토이치>는 키타노 다케시 감독의 맹인무사 자토이치 기행적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토라레>는 타인들의 속마음이 들리게 된 사토라레(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청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차남> 은 일본 사회의 고독한 섬이 되어가고 있는 오타구와 그 세계를 이해 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자토이치
스즈키 케이지, Festivo





사토라레
Crystal Kay, Lost Child




전차남


전차남 trailer




전차남
Orange Range, Love Parade





*관련랑크: 자토이치 1        자토이치 2       자토이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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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2 20:14

일본영화 음악 3곡(토니 타키타니, 냉정과 열정사이, 연애사진)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토니 타키타니>는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영화한 것입니다. 70여분이란 상대적으로 짧은 영화이지만 무게감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사랑의 감정을 복구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예술품의 마모와 복원을 테마의 은유로 녹여놓은 것이 돋보입니다. <연애사진> 사진의 흔적을 더듬으며 사랑하는 이의 시선을 통해 다시 하나가 되려는 사랑의 간절함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니 타키타니(2004년)
류이치 사카모토, Solitude


Tony Takitani UK Trailer




냉정과 열정사이(2003)
조수미, History








연애사진(2003년)
Fan MV


영화 <연애사진>의 스코어는 아닙니다. 팬이 만든 뮤직비디오라고 합니다.    이 음악을 알고 계시면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연애사진> OST 곡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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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8 02:35

피와 뼈



피와 뼈


낯선 삶이었다. 영화의 역사적 배경이나 공간등 간과 할 수 없는 여러 주제들, 이를테면 광기의 역사적 상징성, 불행한 가족사의 부조리함, 개인의 병적 심리 등 역사라는 거창한 주제에서부터 가족사의 비극과 한 개인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감상의 자료를 제공해주었지만, 나의 생각은 인상적인 한 인간의 괴물 같은 삶(연기)에 주로 매달렸다. 아마도 낯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 내내 김준평(기카노 다케시)의 ‘괴물성‘ ’야수성‘의 근원이 어디에서 있는지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괴물성‘ 과 영화의 어디에도 그 인과성을 찾지를 못했다. 김준평의 괴물성을 일본 제국주의에 항의하는 메시지로 읽고자 했으나, 그것은  넌센스 같았다. 아니 관객인 내가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를 이해하기에는 김준평은 너무 속물적이었다.


그냥 다소 낯선 한 한인 가족사가 1920년대 초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이란 배경만을 달리하며 기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해 보였다. 그냥 즐기면 되는데 괜한 헛수고를 한 듯했다. 가족들과의 관계조차도 파괴하는 가장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 가장을 사실적으로 묘사를 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만 넘어가자니 어딘지 허전하고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미지 출처:http://www.slrclup.net/Common/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상처’ 라는 단어였다.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트였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관계들이 엮어놓고 있는 인간들의 실존이었다. 역사도 이데올로기도 어쩔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모습이었다. 절망을 만들고, 절망에 순응하고, 절망에 저항하는 삶들은 깨어진 관계 속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절망들은 전 근대적인 인간관계 속에 처해진 실존들의 상처이고 절망들이기에, 과거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해준다. 특히 김준평으로 상징되는 억압적인 한국의 유교적인 가부장제와 그것에 얽힌 문제들에 대한 성찰이 그랬다.


그리고 죽음이 있었다. 죽음이 끝인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한 장의 유서일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제법 긴 유서를 쓰고 있다는 오싹한 느낌이 몰려왔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죽음들이 인상적인 까닭이기도 했다. 딸의 주검 앞에 김준평이 나타났을 때, 상가에는 큰 소동이 벌어지고 그 소동을 피해 딸의 시신을 이리저리 옮기는 장면은 현실의 고통을 피해 죽음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고통스런 현실은 죽음과 현실의 끊임없는 악순환을 느끼게 했다. 현실은 좀더 아름다운 곳은 될 수 없는가? 인간은 좀더 선한 존재가 될 수는 없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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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6 21:42

토니 타키타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


토니 타키타니


단편소설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의 이 영화는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토니 타키타니>를 영상화한 것입니다. 다른 영화들에 비에 다소 짧은 편(76분)이지만 진지하고 무게감 있게 다가옵니다. 간결하고 경쾌한 문체에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주제를 담고 있는 하루키의 소설(읽는 것은 《상실의 시대(Norwegian Wood)》가 유일하지만)과 마찬가지로 경쾌하고 간결한 문체를 마치 눈으로 보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문장이 간결하면 경쾌해지고 또 스타카토의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단문과 단문사이의 여백은 ‘인상’을 만드는 유용한 공간으로 존재합니다. 선에 비유하자면, 점선이 완전한 선은 아니지만 더욱 인상적인 선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점과 점 사이의 공간 덕분입니다. 실선은 완전하나 점선보다 인상적이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이런 이유로 점선이 끊는 선을 상징하게 되었을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미지 출처:http://www.dvdactive.com/news/releases/tony-takitani.html

인생에 비유하자면, 인간의 인생은 마치 점선과도 같습니다. 여러 사건들의 인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지요. 지나온 시간들은 하나의 긴 흐름처럼 느껴집니까, 아니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여러 사건(장면)들이 인상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그림이나 사진처럼 파편으로 남아 인상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기억은 인상을 만들 뿐 그대로 재연하지는 못하죠.) 모래를 생각해 보면 될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알갱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모래를 이루고 있습니다. 알갱이들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소설의 문장들이 아니라 인간들의 관계로 생각해 보면 사실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들이 간결하고 경쾌한 관계들로만 구성된다면 ‘인상’ 은 만들어 내겠지만 끈끈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지는 못하겠지요.

단문들로 쓰인 소설들은 대체로 차갑고 냉정합니다. 단편인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단편소설이란 이름처럼 인간들의 ‘단편적인 관계’가 되겠지요. 이 영화에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주 단편적인 접점만을 갖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 주인공 토니 타키타니(잇세 오가타)와 여자 주인공인 에이코(미야자와 리에)가 만나 이렇게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에이코: 옷이란 자신의 내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제 멋

           대로에요. 게다가 굉장히 사치스러워요. 그래서 급료의 대부분이 옷을 사

           는 비용으로 사라져버려요.

토 니 : 나는 그림도구 외에는 어디에도 돈을 쓸 일이 없어.


이렇듯 그들의 만남에는 인간적인 공감이라기보다는 단편적인 접점으로서의 옷과 돈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토니와 그의 아버지의 대화에서도 인간적인 공감이 아니라 단편적인 접점만을 확인해 줍니다.


토  니:머랄까, 사랑에 빠져 버린 것 같아.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

          어.

아버지:그래서 어디가 마음에 든 거야?

토  니:뭐라 말해야 할까? 옷을 입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

아버지:그것 참 굉장하군.



이러한 인간의 단편적인 관계에는 서로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공감할 수 없다는 그 사실에 의해 어떤 막연하고 근원적인 고독이나 외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토니 타키타니와 에이코는 운명에 순종하는 무기력한 인간처럼 여겨집니다. 마치 허수아비처럼 말입니다. 비록 함께 있지만 대책 없는 고독과 외로움이 그들 주위를 맴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인 것입니다. 단지 망각하는 것 밖에는 그것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일시적인 위로일 수는 있되 영원한 구원은 되지 못합니다. <토니 타키타니>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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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http://kr.image.yahoo.com/GALL

이렇게 보면 피상적인 관찰이기는 하지만 《상실의 시대》(1987)에서 우울하기는 하나 인간관계에 대한 희망이 단편 <토니 타키타니>(1997)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무기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소 안타깝습니다. 꼭 10년만입니다. 성숙인지 퇴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상실의 시대》에서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존재로서 공감하고 일체감을 갖는) 인간관계의 희망을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 <토니 타키타니> 를 보고나면 연민과 인간 실존, 그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체험입니다. 일본 영화라는 편견을 버리고 이러한 영화를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이제 이 영화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들을 몇 가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장면들 사이의 검고 두터운 벽들입니다. 이 벽은 인간을 가두고 차단시키는 외로움을 상징하고 있는 듯 합니다. ‘외로움은 감옥’ 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장면들 사이에 놓여있는 검은 벽들이 창살처럼 여겨집니다. 고독은 우리 인간이 깨기에는 너무나도 큰 벽처럼 여겨집니다.


둘째는 인간들이 남긴 흔적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다지 유쾌한 생각은 아닙니다만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오릅니다. ‘우리의 삶 뒤에 남게 되는 것은 흔적뿐’이라는 말 말입니다. 도대체 죽음 뒤에 우리가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종교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고, 환생이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죽음 뒤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직면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빠져 나간 자리에는 마치 뱀의 허물처럼 헐렁한 옷 몇 벌만이 덩그러니 남으리라는 상상은 쉬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남아있을 옷들에 발악적으로 집착하는 에이코에게 우리는 연민을 느낍니다. 에이코는 옷을 반품하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신호등에 걸려있는 중에 다시 그 옷이 생각나 차를 돌리다 사고로 죽습니다. 에이코를 죽인 것은 그녀의 옷인 셈입니다. 토니 타키타니의 아버지가 죽은 뒤의 흔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고작 낡은 레코드들이 전부입니다. 에이코의 옷들이 머물러 있던 텅 빈 방에 남겨진 그 레코드들은 에이코의 옷들과 함께 연민을 자아냅니다.


셋째는 인간에 대한 연민입니다. 토니 타키타니는 죽은 아내를 기억하고자 아내와 체형이 같은 여자를 비서로 채용해 아내의 옷을 입고 출근하도록 하는데, 바로 히사코가 그녀입니다. 히사코는 리에가 에이코와 함께 1인 2역을 맡습니다. 히사코는 에이코의 옷을 고르기 위해 에이코의 옷방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그녀는 에이코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느끼고 눈물을 흘립니다.


몇 백 벌이나 되는 아름다운 옷이 그 곳에 쭉 늘어서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옷을 잔뜩 남겨 놓은 채 죽어버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 들까?”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옷도 구두도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과 같이 정확히 사이즈가 맞았다.


그리고 그녀는 흐느껴 웁니다. 그녀의 눈물은 바로 연민의 눈물인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공감인 것입니다. 토니 타키타니는 아내의 옷 방에서 흐느껴 울던 히사코를 잊지 못합니다.


그는 때때로 아직껏 그 방안에서 아내가 남기고간 옷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잘 알지도 못한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의 흐느껴 울던 소리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이렇게나 많은 예쁜 옷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후에도 이상하게도 그 여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토니 타키타니 UK tra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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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6 06:52

일본영화 음악 3곡(스윙 걸즈, 하나와 앨리스, 4월 이야기)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Swing girls>는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재기발랄하고 왁자지껄한 여고생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와이 순지 감독의 <하나와 앨리스>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청소년들의 우정과 사랑과 예술을 담고있는 아름다운 성장소설입니다. 마지막부분 쯤에 나오는 아오이유우의 솔로발레 장면은 이 영화의, 아니 청소년들의 갈등과 고뇌를 아름답게 승화하는 장면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역시 이와이 순지 감독의 <4월 이야기>입니다. 마츠 다카코의 섬세한 연기가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Swing Girls(2006년)
러브 사이코델리코, Everybody needs somebody




하나와 앨리스(2004년)
워아이니 아라베스크




4월이야기(2000년)
April fr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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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5 00:33

일본영화 음악 3곡(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박치기, 아무도 모른다)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세상의 중심에서사랑을 외치다>은 카세트 테입에 담긴 젊은 날의 상처를 테입을 재생시키듯 다시 찾아가는 성찰의 영화이며 동시에 성장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박치기>는 일본영화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화입니다. 우리 민족을 다룬 영화이며 분단을 다룬 영화입니다. 우리의 슬픈 역사가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 교포들에게 한 처럼 맺혀있는 영화입니다. <임진강>으 너무도 감동적인 노래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입니다. 이 영화는 일본영화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보시면 어떨가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만난 것이 참 행운이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2004년)
瞳をとじて(눈을 감고)



                  히라이 켄(平井 堅,ひらい けん)의 원곡이 아닌 마사미 버전





박치기(2006년)
임진강



영화 <박치기> 중 한 장면


임진강




아무도 모른다(2005년)
보석

                                                 타테 다카코 <보석>




다른 일본영화음악 3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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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0 02:11

일본영화 OST 3곡(키쿠지로의 여름, 하울의 성, 러브레터)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키쿠지로의 여름>은 참 재미있게 본 영화였습니다. 잊고 있던 동심의 세계를 마구 일깨워 주더군요. 다음이 <하울의 성> 메인 테마곡이고, 마지막으로 이와이 순지 감독의 <러브 레터> MV입니다. 


 
키쿠지로의 여름(1999년)
히사이시 조, 메인 테마곡







하울의 성(2004년)
히사이시 조, 메인 테마곡







러브 레터(1995년)
Winter Story 메인 테마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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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9 00:39

일본영화 OST 3곡(조제,호랑이,그리고 물고기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말은 삼각, 마음은 사각> 이 노래는 작년 여름에 접하고 참 좋았던 음악입니다. 쿠루리의 <Highway> 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엔딩 스코어로 흘러 나올 때는 잔잔한 여운이 계속 남았던 기억이 나는 군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쿠루리,  Highway






 
마을에 부는 산들 바람
쿠루리, 말은 삼각 마음은 사각







지금 만나러 갑니다
Orange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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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8 17:32

무사의 체통(3)




무사의 체통(3)

― 누구의 사랑이고 명예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武士の 一分>의 영어 제목 <Love and honour>은 영화의 내용을 왜곡하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우리나라 제목 <무사의 체통>이 영화의 내용에 적확하다고 여겨진다. 영화의 내용으로 볼 때 사랑은 무사의 명예(체통)에 종속되기 때문에 그렇다. 일본의 전통적인 미덕을 love 와 honour라는 단어로 소개하려고 한 듯 하지만 기실 영어 단어 love와 honour의 의미를 변질시키고 왜곡시킨 일면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의 영제를 <Love and honour>라는 기만적인 미화보다는 일본어 제목과 마찬가지로 사무라이라는 한정사를 붙이는 것이 보다 솔직하다고 본다. 그것은 ‘사무라이의 사랑이고 명예’ 이지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이나 명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냐 무사의 사랑이냐를 떼어놓고 볼 때, ‘무사의 관점‘ 에서 보는 사랑은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좁게는 한 개인으로서 사무라이의 사랑과 명예에 대한 태도일 수 있으나, 좀 더 공간을 넓혀 보면 의미 또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완고한 계층질서에서 <남, 녀 간의 사랑>이란 감정이 주변으로 밀려난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또는 사랑과 명예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때 사랑이 무사의 명예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더욱 더 넓게는 국가주의에 부속화 되는 개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무력에 압살당하는 사랑(일본군국주의에 희생당한 위안부 할머니처럼)의 일그러진 모습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무사의’ 라는 한정사는 내용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영화 <색계>의 예를 잠시 빌려오면, 이 영화는 사랑과 애국이라는 선택에 흔들리는 한 개인의 감정, 특히 한 여자의 감정이 밀도 있게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이안 감독이 집단이나 국가 이전에 사랑이라는 한 인간의 감정을 유연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고 애국과 민족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매국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다). 애국(민족, 국가)라는 중력과 개인의 일탈적인 힘이 부딪히면서 동정과 이해, 공포와 용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들의 약한 모습이고 단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무사의 체통>은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명예가 존중되는 국가주의나 군국주의의 초개인적인 냄새만을 맡을 수 있다. 마치 심오한 무언가가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맹목적인 개인과 개인들이 집단(사무라이, 더 나아가 국가)의 중력에 흐물흐물 떠다니고 있는 것이다. 신파조의 사랑타령이 조금 등장하기도 하지만 양념일 뿐 오직 하나의 중심에 수렴되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무사의 명예에 사랑을 주변적인 것으로 종속시켜버린 다는 것은 사무라이 영화의 당연한 특성의 일부로 전통적인 미덕이나 영화 자체로도 사무라이의 남성성을 멋지게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어딘지 무서운 일면을 뿌리 칠 수가 없다. 무사와 칼에 여성과 사랑이 종속된다는 것은 아무리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인류 보편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일본의 과거도 미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역사의 경우도 가족을 몰살하고 전쟁터로 나아가는 장군의 이야기나 다소 성격을 달리하긴 하나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이 그러한 예로 들 수 있다. 칼과 무사, 사랑과 여성을 좀 더 단순화해서 인류 보편적인 상징으로 표현한다면 여러 가지 추상적인 단어들과 구체적인 존재들과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중심주의, 가부장제도, 부자유와 복종 등의 단어들이 아닐까 한다.

장님이 되어버린 한 가난한 무사의 체통과 권위주의 아래에 사랑, 헌신, 봉사가 종속되면서 순수하고 희생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관계는 얼마나 삭막해질 것인가? 아니 삭막한 정도가 아니라 관계 자체가 두절되고 파괴되면서 비민주적이고 폭압적이며 비상식적인 어두운 통로들만이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닐까? 바로 남성중심주의요, 가부장제도이며 부자유와 복종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리 무사도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영화에 나타나는 남성중심주가 미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사도는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였으니 말이다. 이러한 무사도가 <love and honour>라는 이름으로 그럴듯 하게 포장되고 상품화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21세기의 일본 영화에 아직도 이러한 사무라이의의 전통적인 미덕이 칭송되고 있다는 것은 현대 일본인의 마음에 내재에 있는 의식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사랑보다도 사무라이의 명예를 추켜세우는 것은 결국은 국가에 종속되는 개인과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로 확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해석이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최근의 독도 문제를 보면서 영화와 현실이 별개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미지출처: http://kr.blog.yahoo.com/iam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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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7 23:43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기이한 만남과는 달리 헤어짐의 담담함은 이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며 그 메시지가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예상치 않게 만난 예상치 않은 존재는 우리의 일상에서 벗어나 있지만(숭고함에 가까운 감정이던 호기심이던), 헤어짐은 이러한 만남과는 달리 우리 일상의 한 단면을 통속적으로 보여줄 뿐이다(일순간의 동정이었을뿐). 꿈에서 깨어나는 아쉬움이라고 할까? 끝까지 조제를 책임져 주길 기대하는 우리의 상상적인 기대를 여지없이 배신해버리기 때문이다. 숭고함(또는 호기심)이 일상의 것으로 추락할 때 우리의 실망은 얼마나 클 것인가? 그러나 또 우리가 인정해야할 우리의 일상이기에 우리는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정의 변화에 솔직해 진다는 것은 일상으로의 귀환이며, 의지는 또 다른 숭고함인 것을...... 조제의 삶을 책임지리라는 확고한 의지가 없다면 코네츠의 조제에 대한 사랑은 휘발성이 강한 일시적인 사랑의 감정일 뿐이다. 아니면 동정이거나. 코네츠는 의지가 아니라 감정을 선택했다. 비통할 정도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코네츠의 가슴처럼이나 이 둘을 지켜보는 우리들의 가슴도 마찬가지긴 하다. 이 영화의 결말과 ‘영화가 끝난다는 사실’은 함께 이제 우리는 과장된 감정을 훌훌 틀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것은 인간적인 감정의 솔직함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엇으로 불리울까.



1.사랑의 감정들


<오아시스> 와 <나쁜 남자>의 경우. 이 영화 내내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떠올랐다. 아마 장애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물론 오아시스의 주인공들은  둘 다 사회로부터 정신적 육체적으로 소외된 인간들이다. 그들의 관계에 ‘사랑‘이란 진정성의 무게를 두고자 할 때,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으로 작용한다. 영화 내내 보는 이들이 부끄러웠던 것도 그런 진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잘 들어맞는 한 쌍이었고. 그것은 어느 일방의 동정심에 근거한 관계가 아니라 가식 없는 ’진정한 사랑‘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작 우리에겐 그런 진정성에 우리를 투신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위선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그 대상을 파멸시킬 수 있을까? 대상을 파멸시키는 <나쁜 남자>의 그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그 모든 것조차 초월하는 것을 김기덕 감독은 보여주는 것일까? 한 여자를 덫에 걸어 자신의 옆에 애완동물처럼 두고자 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 수 있을까? 아니면 나쁜 남자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영화임에도 내가 사랑이란 말을 잘못 갖다 붙이고 있는 것일까? 오아시스와는 달리 <나쁜 남자> 에서의 남녀의 관계는 부담스럽고 껄끄럽고 낯설기만 하다.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런 관계의 설정에서부터 <나쁜 남자>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하 <조제~>표기) 은 흡사하며 그 감정의 처리 방법에서도 흡사한 측면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은 극단적으로 다른데, 나쁜 남자가 감정을 폭력의 단계까지 극단적으로 과장하면서 끌어올리는 반면, <조제~’> 는 감정의 변화에 솔직히 반응하면서 감정의 가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조제를 포기하는 것도 실상은 감정에 솔직해 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제~>에서는 감정이 가변적이고 일시적이며 자연스럽다는 전제에서 감정을 쉽게 놓아버리지만, <나쁜 남자>에서는 강렬한 일시적 감정의  절대성을 포착하여 그 감정을 극단으로 수렴하는 병적이고 집착적인 모습을 보인다.


우리가 감정에 솔직해 진다고 했을 때 <나쁜 남자>‘나 <조제~> 는 진실일 수 있다. 그리고 진정성일 수 있다. 그러나 <조제~>에서의 코네츠의 사랑의 감정은 동정심에 가깝고 의지적이다. 이러한 감정은 의지가 약해질 때 더불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 있다. <나쁜 남자>에서의 사랑의 감정 또한 강렬하며 의지적이긴 마찬가지다. 다른점이라면, <조제~>에서의 동정심에 가까운 의지적인 감정이 쉽게 포기되는 반면, <나쁜남자> 에서는 감정대로 이루려는 의지가 너무나 강력해 조금도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폭력과 억압에 가까운 감정이 되어 상대를 파멸시킨다(이것에 진정성이란 이름을 달기에는 왠지 끔찍한 느낌이 들기는 한다.) 아마도 김기덕의 의도가 일반화된 사랑의 감정을 낯설게하기겠지만 이것은 일상적인 사랑의 진정성과는 솔직히 거리가 멀다. 낯설고 도발적인 사랑을 통해 인간에게 있어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별스러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겠지만......사랑은 이럴 수도 있다는...... 감정에 솔직해 진다는 면에서 <조제~’>와 ,나쁜 남자> 는 서로 극단의 방향이지만 동질성을 나타낸다. 



2. 사랑과 동정의 사이

이제,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사랑은 무엇인가? 일시적인 감정인가? 지속적인 감정인가? 아니면 감정을 초월한 어떤 것인가? 감정이 촉발시키는 행동인가? 그 어느 것에 사랑의 이름을 붙이던 개개인들의 정의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인간만큼의 사랑에 대한 정의들이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의 정의는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사랑이란 전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인 관계인 경우는 어떤가? 코네츠처럼 정상적이고 여자들에게 인기있는 대학생과 출생도 불분명한 뇌성마비인지 병명조차 모르는 장애인인 조제의 관계말이다. 코네츠의 조제에 대한 감정은 일시적인 감정일까? 지속적인 감정인가? 아니면 감정을 초월한 어떤 것인가?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영화의 파국으로는 판단해 보면 분명 일시적인 감정이다.  그렇다면, 코네츠의 감정에 사랑의 라벨을 달아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랑에 ‘일시적인’ 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주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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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0 00:42

[일본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기쿠지로의 여름 (菊次郞の夏)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기쿠지로의 여름>은 기타노 다케시(영화명은 비트 다케시)의 명성에 걸맞는 영화입니다. 역시 다케시라는 감탄사가 튀어나오게 합니다. 감독, 각본, 편집은 물론 마사오 역의 유스케 세키구치와 함께 주연을 맡아 열연합니다.

꼭 외형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 내용의 측면에서도 사무라이와 야쿠자 일색의 기존 다케시 영화와는 달리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놀라운 일이지만(이 말은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폭력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다케시가 만드는 영화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뜻에서입니다. 물론 이 영화는 폭력이 전혀 필요 없는 영화이긴 합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어린아이들이 보는 만화 영화만큼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것도 없습니다. 폭력이 나쁘다고 하지만 만화영화의 폭력을 보면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는 느낌이 듭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에서는 폭력이 거의 사라집니다.

물론 다케시의 ‘폭력’ 이 한, 두 군데 등장하고 있지만 그리 심각하지도 않고 인간적이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면, 트럭의 앞 유리창을 깨고 도망가지만, 뒤쫓아 온 기사와 싸우는 장면은 트럭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한 마을의 축제에서 야쿠자 일당과 맞서지만 폭력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얻어터진 키쿠지로의 모습만을 보여주어 싸움이 치열했음(?)을 대충 짐작케 할 뿐입니다. 야쿠자인 ‘기쿠지로‘ 에게서 완전히 폭력을 금지하기엔 불가능하겠지요.

아무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야쿠자에게서 폭력적인 요소를 배제했을 때 어떤 인물이 될까요? 예를 들면 야쿠자를 유치원의 보모 자리에 앉혀봅시다. 또 야쿠자를 전업주부로 만들어 봅시다. 사실 이러한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은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조폭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의 여지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의 대상을 부조화/불균형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웃음이나 감동을 유발하는 것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두사부일체><조폭 마누라><달마야 놀자>등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 야쿠자를 관광버스의 관광 안내원으로 내세운다면 이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따라서 기쿠지로를 엄마를 찾는 마사오의 길 안내자로 만드는 것도 기발하고 의외의 상상이랄 수 있겠습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만약 동화 속에 야쿠자가 등장한다면 그 야쿠자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것도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입니다. 좀 사내다운 관객이라면 “야쿠자가 그럴싸한 폭력물에나 어울리지, 무슨 이런 장난을 치나!“ 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전 제 경험상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 다소 유치한(?) 노래를 부를라 치면 분위기 깬다라는 냉소적인 표현(?)을 짓는 군자들이 꼭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들이란 설운도, 태진아, 조용필, 남진, 나훈아, 이미자 류의 그 애끊는 고상한 트로트들이었습니다. 분위기 띄우기의 정수를 보여주겠다는 자세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트로트 일색의 노래방 분위기에서 갑자기 유치한 ‘마법의 성’ 이 등장한다면 분위가기 썰렁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야말로 마법에 걸린 듯 얼어붙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어떠한 종류의 분위기도 인정하는 노래방의 성숙한 문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달마야 서울 가자>의 노래방 장면이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만약 이렇게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객이라면, ”야쿠자가 백마를 탄 기사가 되었군. 아주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인데......“ 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동화 속에 등장한 야쿠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두 입장 중에서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 서고 싶습니까? 저는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습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제가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부조화/불균형)을 비일상적으로 보는 관습적이고 경직된 태도, 즉 우리가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익숙해져온 편견이나 획일화된 사고를 지양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관습을 벗어난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이 영화를 더 재미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야쿠자가 리얼하게 폭력을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동화의 나라에서 백마 탄 기사가 되는 것은 더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여러 관계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이란 말 자체에 그런 뜻이 있습니다. 관계는 지속적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다 그 관계들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저를 나아준 부모의 존재가 사라지면 그 관계도 소멸합니다. 제가 자식을 낳으면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 집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사라질 때 인간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죽는다는 것은 모든 관계의 소멸을 뜻합니다. 마치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들이 확정적이고 경직되는 것은 그다지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새삼 언급하면 잔소리로 들릴 정도로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현실은 관습화되고 경직된 관계들로 구획되어 있는 듯 합니다. 영화는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을 통해 이러한 관습화되고 경직된 관계들을 변화시키는 측면이 아주 강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친구의 관계로 유연화 되기도 합니다. 유교의 경직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으로서 말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비일상적인 남녀의 관계가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전도되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인간의 여러 관계들이 일상적인 역할을 벗어나 작동합니다.그것은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영화와는 달리 허구를 통해 현실을 허물려는 영화의 본질과도 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쿠지로와 마사오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영화 내내 느끼는 것이지만 도대체 누가 더 정신적으로 성숙한지? 도대체 누가 더 진정한 안내자인지? 도대체 누가 더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지? 이 두 사람의 여행을 통해서 더 깊이 감동을 받고 정신적으로 변화한 존재를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마사오의 여름>이 아니라 <기쿠지로의 여름>이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마사오의 여름을 위해 기쿠지로가 떠밀려 동행을 했고 안내자와 보호자의 역할을 하지만 정작 여행을 통해 변화한 쪽은 기쿠지로인 것입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조금 강요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자의 입장, 즉 “장난치나!“ 같은 냉소적인 입장은 이 글을 읽으면서는 누그러트려 주었으면 합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의 구성은 여행의 시간 흐름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전개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서 보기가 편합니다. 이러한 단순함은 영화의 재미와도 연관되면서 지루하지가 않은데, 아이의 시선을 배려한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이 영화는 소설처럼 각각의 장들이 존재하는데 마치 추억의 앨범이나 여행 기록 또는 일기장을 넘기는 듯한 효과를 줍니다. 각 장마다 영화의 압권이랄 수 있는 장면들이 숱하게 나옵니다. 여러 장으로 구성된 <기쿠지로의 여름>은 [할머니의 친구들]로부터 시작합니다.


마사오(유스케 세키구치)는 부모가 없이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9세 된 아이입니다. 여름 방학이 되었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친구들은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고 축구 교실도 여름방학 동안은 활동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학교에 찾아갔다가 축구 코치로부터 “방학인데 바다에나 다녀오렴. 재밌을거야.”란 속 모르는 소리만 듣는데, 이 학교 신(scene)에서 헛발질을 하고 넘어지고 혼자 운동장에 서있는 마사오의 모습이나 혼자 남은 집에서 밥을 먹는 마사오의 뒷모습은 아이의 작은 어깨에 드리워진 무거운 외로움 느끼게 합니다.

외로운 마사오에게 어는 날 엄마의 소포가 찾아듭니다. 그리고 소포의 겉봉투에 적힌 주소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치 현, 토요하시 구’ 주소를 가방에 넣고 엄마를 찾아 떠나지만 불량배들에게 잡히는데 이때 나타나는 기쿠지로와 그의 아내가 할머니의 친구들입니다(할머니의 친구들 치고는 너무 젊은데......) 이런 인연으로 아내로부터 여행 비용으로 5만엔을 받은 기쿠지로와 마사오는 토요하시로 떠나게 됩니다. 이 장면의 압권은 유흥가와 경륜장에서의 해프닝으로 누가 어른이고 어린이인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웃음을 자아냅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그리고 이어지는 [무서운 아저씨] 장에서는 유흥과 경륜으로 돈을 다 탕진해 버리고 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기쿠지로는 마사오가 없어진 것을 알고 근처 공원으로 찾아 나섭니다. 어린이 마사오를 전혀 고려치 않는 무지막지한 어른인 기쿠지로가 공원에서 목격하는 것은 마사오에게 이상한 짓거리를 강요하는 변태 대머리입니다. 변태 대머리는 무서운 세상의 암시로 이로서 마사오를 지켜야하는 기쿠지로의 필연적인 운명(?)이 시작된다고 할까요? 그 다음 날 아침 택시를 타고 ‘토요하시‘ 로 떠나게 됩니다. 이 후로 [이상한 아저씨][실패였다][천사의 종][아저씨가 놀아 주었다] 등의 장들이 이어집니다.



다 이야기를 해버리면 재미가 없겠지요. 자, 이제부터는 기쿠지로가 마사오와 함께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 일기장을 직접 넘겨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재미있어 눈을 떼지 못할 것입니다. “장난치나!“ 같은 냉소적인 입장만 갖고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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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21:54

[일본영화] 자토이치(3)



                                         이미지출처: www.sung-ho.pe.kr

 

 

자토이치(3)

-마이너리티 리포트


맹인 자토이치는 로닌(浪人)이다. 로닌은 사무라이의 위계질서에 편입되어 정착하지 못한 사무라이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로닌은 소속된 조직이 없는 소속 외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바람처럼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무라이라고 하면 된다.


자토이치는 외관상 어떠한 조직에 소속되기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아주 현대적인 외관을 하고 있다. 머리는 노란 염색에 가깝고, 의복 또한 마찬가지이다. 머리모양과 의복만을 놓고 보면 자토이치는 21세기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자토이치의 외관은 격식을 파괴하고 있다.   


약간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자토이치를 만나 자토이치를 통해 대리 복수를 하는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하나같이 사회의 비주류들이다. 우선 가족을 죽인 살인자들을 복수하려는 남매는 부모를 잃고 정처 없이 살인자를 찾아 헤맨다. 그런데 그 남매에게는 자토이치 이상의 이질적인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내인 남동생이 여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전도된 현상은 어린 시절의 충격(어른에 의한 아동 동성애, 경제적인 궁핍을 모면하기 위한 동성매매)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것은 소수 동성애자들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할 수 있다. 가족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여장하고 춤을 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이해를 호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는 하층민이다. 집단화된 도적 패에게 언제나 폭력을 당하는 경제적, 계층적인 약자이다. 자토이치가 신세지고 있는 집의 여주인과 거리의 상인들이 그러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집단화된 도덕 패들에 의해 자릿세를 뜯기고 폭행을 당하면서 하루하루를 영위해 가는 존재들로 삶이 핍박하고 고달프다. 이들은 소수라는 측면보다는 약자라는 측면에 더 강조점이 두어져야 하지만 절대적인 빈곤층이란 의미에서 마이너리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칼을 쓰지 못한다는 면에서 자토이치와 다를 뿐 실제적으로 사회적인 이방인으로 도박과 술과 여자에 빠져 죽은 둥 사는 둥 살아가는 중독자들이다. 이들은 자의적으로 사회를 일탈한 존재로서 마이너리티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 등도 이러한 사회적인 약자(사회로부터 냉대를 받는다는 의미에서)로서 동일한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하지만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냉대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격리는 범죄자에 대한 동일한 인식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범죄자가 감옥에 격리되듯이 병원 따위에 수용이 되는 것이다.


넷째는, 셋째의 부류와 다소 동일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같은 부류로 분류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바로 미친자들이다. 미친자는 자의적이지도, 어떤 지향성(술, 마약, 여자)도 갖지 않는 존재라는 면에서 중독자들과는 다르다. 자토이치가 머물고 있는 집 주위를 함성을 지르며 도는 이웃집 아들이 바로 미친자이다. 영화 <자토이치>에서 왜 이 미친자가 등장할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만들어 낸 캐릭터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하층민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들의 존재는 웃음만을 자아내기에는 서글픈 존재가 아닐 수 없으며 운명적으로 사회적인 냉대와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슬픈 존재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약자와 대척점에 있는 존재가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이다. 이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를 현재적인 시간에서 그 대응 집단들을 살펴본다거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본다거나 도적이란 본질을 위장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알레고리로 자리잡는 것이다. 자토이치의 시대 상황이 과거이지만 해석은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영화는 언제나 현재에서 만들어지듯이 현재의 시점에서 하는 해석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대척적인 존재들(사회적인 약자 vs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 사이에 놓여있는 자가 자토이치라고 하면 어떨까? 이 자토이치가 도박을 즐기고, 여자를 즐기고, 관습을 무시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다면 자토이치는 마이너리티에 관용적인 자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 자신이 육체적으로 맹인인 약자라면 어떠한가? 판단은 영화를 보는 개인 각자의 몫이지만, 분명한 것은 자토이치의 몰골은 그 당시의 시점에서는 결코 보편적이거나 관용적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는 사실이다. 자토이치가 칼을 휘두른 것은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회적인 약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질성을 말살하려는 관습의 편견인지도 모른다. 분명 자토이치는 이질적인 것, 사회적인 역자들의 편에 서있다.


영화가 끝나면 사회적인 약자들집단화 된 도적 패거리가 함께 모여 춤판을 벌린다. 이 춤판은 두 가지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영화내내 자행되는 칼질에 대한 살풀이의 마당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더욱 중요한 것으로써 사회적인 약자들의 신명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염원이다.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어 불탄 집을 다시 세우는 그 축제의 한마당은 바로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인 것이다.(*)    

(2008.4.20.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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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4 18:12

[일본영화] 자토이치(2)





자토이치(2)


서부 영화에서 맹인 총잡이를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상상이라고 하면 건방진 표현처럼 들린다. 아니 무지한 표현처럼 들린다. 세상에 불가능한 상상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거나, 이성적인 합리성을 신봉하는 서양의 인식에서 맹인이 총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식의 상상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상상의 한계라기 보다는 문화의 한계에 속한다.


사무라이 영화에서 맹인 검객을 상상한다는 것은 가능하다. 상상의 무한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성격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맹인 검객을 가능하게 하는 일본적인 문화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우선 <무사의 체통>이란 일본 영화에서 맹인이 된 미무라의 정신 상태를 살펴보는 것은 맹인 검객의 탄생과 관련하여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고 하겠다. 미무라가 맹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바로 정신이었다.


“같이 죽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라. 승리는 그 가운데 있으니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한 생즉사의 정신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미무라가 스승의 도장을 찾아가 들은 이 말속에는 죽음을 무릎 쓴 결의 이상을 읽을 수는 없다. 이러한 결의가 실상 맹인 검객의 미묘한 신기를 설명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즉 미무라에서 자토이치로 이어지는 미묘한 신기를 생즉사라는 정신력 하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또는 복수심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불타오르는 복수심이 정신을 고취시킨다고 해도 맹인이 정상적인 검객을 당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분노가 정신을 혼란시키고 흐트러뜨리는 요소로 작용하기가 더 쉽다. 


그렇다면 맹인 검객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일본의 긴장의 문화와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일본 문화를 축소지향적인 문화라고 말을 하지만 이 축소의 지향은 긴장감을 동반한다. 상식적인 생각으로도 확대는 이완을 축소는 긴장을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작은 공간에서 긴장을, 넓은 공간에서 이완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우가 아니겠는가?


일본 특유의 긴장문화를 만들어 낸 모체로 이어령씨는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의 사상과 세이자(일본특유의 정좌법으로 무릎을 꿇고 않는 좌세)를 들고 있다. 이어령씨는 “시간의 축소지향인 이치고이치에의 문화와 공간의 축소지향인 세이자이 문화가 일상적인 생활어에 나타난 것인 ‘잇쇼켄메이’ 라는 말이다”(축소지향의 일본인,p.215) 라고 했다.


[잇쇼켄메이(一生懸命)는 한 곳을 생명을 걸고 지킨다는 뜻으로 일본인의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정신이다. 좋은 의미로는 자신의 맡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이지만, 일본의 침략주의와 맞닿아있는 정신이기도 하다.]


정신의 축소지향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이치고이치에의 사상을 이어령씨는 ‘다도’ 와 ‘죽음’ 의 예로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도 문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넓은 공간을 축소해 다다미 4조 반의 좁은 공간으로 만든 ‘다실’ 은 두말할  것 없이 ‘공간적 축소지향’ 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응하는 ‘시간적 축소지향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다도에서 말하는 ’이치고 이치에(一期一會)‘ 라는 정신이다. 시간을 축소하면 일순이 된다. 단 한 번 밖에 없는 시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창백한 번갯불. 다도란 그 일순의 빛 속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만남이요, 그 마음이다.“(축소지향의 일본인, p, 210).


이치고이치에의 사상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이어령씨의 글을 좀 더 인용해 보기로  하자.


“다회의 만남이 일생에 단 한 번의 만남이라는 ‘이치고이치에’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곧 다실에 끌어들인다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이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단절의 벼랑이며, 다시는 재현이 불가능한 일순간의 섬광이므로 그것을 느끼며 만나는 사, 람들은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축소지향의 일본인, p.212)


이러한 긴 인용은 다도와 마찬가지로 검도, 즉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를 설명해 보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치고이치에의 정신만으로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본다. 또한 검도 지식 외적인 것으로 검도를 논하는 우스운 꼴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어령씨의 글에서 받은 어떤 통찰이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를 일부분 해석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또한 일본인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으로 유용하다는 판단이다.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는 일본적인 긴장감 또는 비장감, 즉 이어령씨가 언급한 이치고이치에의 정신과 맞닿아 놓는다는 것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고 본다. 다도(茶道)와 마찬가지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검도(劍道)의 세계에서 이치고이치에의 정신은 더욱 더 정합성을 띈다고 할 수도 있다. <무사의 체통>에서 미무라의 생즉사의 정신이란 이치고이치에의 긴장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고이치에의 정신은 자토이치에서는 더욱 세련되게(영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검을 휘두르는 행위가 차를 마시는 행위처럼 이치고이치에의 정신 속에서 일순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축소된 시간, 즉 일순, “단 한 번 밖에 없는 시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창백한 번갯불‘을 응시하거나 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검으로 ’베어내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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