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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6 13:12

사토라레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미지 출처:www.koreafilm.co.kr/movie/revi





사토라레



한 인간의 머릿속 생각이 타인들에게 들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 타인들의 머릿속 생각이 한 인간에게 들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이러한 상상을 누구나 한 번쯤은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이런 상상은 상상으로서 끝나버립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가 왜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일까, 하고 그러한 상상의 의미와 관련된 질문은 던져 볼만 합니다. ‘사토라레’ 라는 영화가 이러한 상상을 조금 더 진전시켜 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은 호기심이 참 많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호기심이 미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 자신들에 대한 호기심도 그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의 호기심이 인간 스스로에게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도대체 인간(우리)은 무엇인가? 인간(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가? 인간(우리)은 왜 전쟁을 할까? 인간(우리)은 선한가, 악한가? 이러한 질문들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서 좀 더 진지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3박4일의 일본 후쿠오카로 팩키지 여행과 이후 자유여행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이 두번에 걸친 관광을 떠나기 전까지 일본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일본에 대한 제 머릿속 생각과 태도는 관광 전과 후를 비교하면 전혀 다릅니다.

일본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이 능동적인 노력으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다소 민족주의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늦게나마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제 식민지 과거사와 독도문제에 빠져 극일, 혐일이라는 일본에 대한 경직된 생각이 다소 바뀐 것입니다. 최근 일본 영화를 자주 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바로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 좀 더 일치된 생각을 갖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미지 출처:http://blog.naver.com/caek22?Redirect=Log&logNo=20028909648



 

일본과 일본인에 관련한 또 하나의 경험은 일본인들은 속과 겉이 다르다는 선입관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친절한 척을 해도 속으로는 이를 갈고 있다는 식의 생각이 왜 일본인들에게만 그토록 집요하게 강요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좀 더 다르게 표현하면 그것은 좀더 성숙한 인간의 자세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일본인들을 대하면서 그들의 속마음이야 어떻던, 형식적으로라도 친절과 예의가 몸에 박힌 태도에 차라리 호감이 갔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인간의 생각과 말의 불일치는 일치할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생각을 철저하게 숨기는 것이 오히려 불일치를 극복하는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일치 할 수 없는 것을 굳이 일치시키려 하기 보다 불일치를 철저히 숨기는 것 말입니다.


이렇듯 생각과 말이 불일치하는 인간 자신의 한계를 인간들은 부단히 일치시키려고 하거나 철저하게 숨김으로서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 일치와 숨김의 노력들은 우리 삶의 도처에서 보이는 형태로 또는 보이지 않는 형태로 강렬하게 또는 어렴풋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이러한 숨박꼭질 같은 인간 삶의 모습은 때론 우습기도, 절망스럽기도, 슬프기도, 역겹기도, 기쁘기도 한 여러 감정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감정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삶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어떠한 방식으로 바라보느냐는 우리의 태도이겠지요.   


인간의 안과 밖, 즉 생각과 말이 모순적이고 불일치하는 인간의 한계를 다루는 경우, 제가 접한 최근의 영화들은 그 모순이나 불일치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은 대체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 안과 밖의 불일치는 끝까지 극복하지 못한 채 비극적으로 오히려 그 한계로 인한 비극적이고 파국적인 인간을 드러내 관객들에게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듯 합니다.(물론 간절한 의도는 일치를 지향하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미지 출처: daiquiri.egloos.com/1641885



일치는 가능하지도 않으며 인간은 생각과 말의 불일치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모순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듯 합니다. 많은 영화에서 한 인간과 현실의 불일치는 메워지기보다는 끝까지 어긋나면서 비극적 파국을 맞이합니다. 예술의 도덕적, 교훈적인 역할이 약화 된 것은 오래전 일인 것입니다.

 



이제 사토라레로 돌아갑시다. ‘사토라레’ 는 생각이 타인들에게 들리는 기이한 특성을 가진 인간을 지칭합니다. 안(마음, 생각)과 밖(말, 언어)의 불일치와 모순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영화 ‘사토나레‘에서 이러한 안과 밖의 불일치를 접하는 시선들에는 비극적이라거나 진지함은 그다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왁자지껄하고 코믹하기까지 합니다. 사실 사토라레의 특이성은 놀랄만한 것이지만 생각과 말의 불일치는 당연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물론, 비극적 인식은 다소 드러나는 편이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성격을 좌우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교훈적인 장면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안과 밖 중에서 보이지 않는 것(마음)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말보다 안에 갇혀 드러나지 않는 마음에 대한 애정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말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마음이 더 소중하다는 교훈적인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의 생각(마음)이 외부로 들려 난처한 경우가 많지만 마음과 마음이 소통되는 것을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인상적이었던 마지막 대사입니다.         


“요즘 시대에는 말로서만 모든 일을 해결하려 하는 경향이 많아져서 도리어 다른 사람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일도 많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이런 시대가 사토라레들을 태어나게 하는지도...... 우리 모두가 사토라레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우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도 우리의 머리 속이 투명해 진다면 - 우리의 생각이 타인들에게 들린다면- 어떻게 될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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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변명




자기 변명

-언어의 독점 권력

신문을 볼 때마다 참으로 모르는 세상에 살고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보잘것 없는 한 개인과 신문사이에 얼마나 큰 벽이 가로 놓여 있는지 절감하게 된다. 신문 속의 언어는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불가시적(不可視的)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힘을 느낀다.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변화고 있다는, 그리하여 소외되고 있다는 절망감을 느낀다. 한 보잘 것 없는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은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모르는 언어들의 홍수. 도무지 그 언어들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스키마타(Schemata)도 형성되지 않는다. 그 언어들이 세상을 어떻게 뒤바꾸어 놓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저 세상 좋아지고 있다는 감탄사만 토해놓고 있다. 무식한 한 개인으로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특히 ‘물질적 생산 수단’으로 까지 공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컴퓨터 관련 언어들과 정보 기술 관련 언어들은 독점적 권력을 행사하면서 타 언어들을 소외시키고 인간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자본마저도 독점할 기세다. 마이크로소프트사와 인터넷의 사이버 세상을 보라. 저들이 독점적 권력으로 사용하고 있는 정보 기술언어들이 얼마나 인간들을 소외시키고 있는지. 오직 소수의 지식층만이 독점적 권력의 실체와 운동 매카니즘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는 어차피 그렇게 진행되어왔고 또 그렇게 진행될 것이지만 그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오늘 신문 속에서 한 보잘 것 없는 개인을 소외시키는 지배권력(?) 언어들을 보면서 가슴은 답답해진다. 몇 몇 엘리트들에게 독점되는 저 알 수 없는 언어들에 비감(悲感)을 느끼면서 그저 헛돌아 가는 바퀴처럼 살고 있는 자신을 다독거린다. 언어는 뼈다귀가 아닌가. 삶이야말로 진정한 살코기가 아닌가. 살코기를 보지 못하는 자들을 그저 웃어주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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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7 19:28

그 참을 수 없는 본능의 질주





 

 

그 참을 수 없는 본능의 질주


인간에겐 아주 강렬한 동물적인 욕구들이 있다. 바로 성욕과 식욕이다. 성욕을 좀 고상하게 말하자면 종족 보존의 욕구이며 식욕은 개체 유지의 욕구이다. 인간이 동물인 이상 이 두 가지 욕구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욕구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럽다는 이면에는 절제의 언어가 스며있어야만 한다. 만약 이러한 본능적인 욕구가 자연스러움을 이탈해 탐욕이 되어버린다면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쉽다. 사회적인 병리 현상이 이러한 탐욕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능의 굴레를 끊어버리기 위해 종교에서의 신적인 비약을 위해 노력하는 성직자들과 승려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존경받고 감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솔직히 이들에게조차도 이러한 욕구에 대한 번뇌와 유혹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동물로서의 인간의 단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상상키 어려운 자기 절제와 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속의 범인(凡人)들이 이루기에는 정말이지 고통스런 노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신성(神性)으로의 비약을 꿈꾸는 그들과는 달리 범인들의 세속은 그야말로 동물성(動物性)으로의 하향적 추락들이 광범위하게 확대되고 있다. 교회의 수와 세속적인 탐욕이 정비례 하는 관계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면 과장일까? 경건하고 단순한 종교적인 삶보다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삶이 보편화 된 것은 종교조차도 제어할 수 없는 인간들의 동물성이기 때문일까? 속단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세속의 여러 현상들을 보노라면 그러한 추측 또는 생각이 쉽게 싹튼다. 교회의 십자가만큼이나 성욕과 식욕의 탐욕적인 팽창의 물증들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욕에 대해 말하자면 연령이 낮아지고 광범위하게 퍼진 10대 매춘, 소위 원조교제가 그렇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어서는 러브호텔이나 모텔등 숙박업소들의 난립이 그렇다. 성욕의 대상과 공간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식욕에 대해 말하자면 우후죽순처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밀집되고 있는 식당들이 그렇다. 특히 도시의 근교나 농촌, 그리고 관광지 주변등에 난립하는 무수한 식당들은 식욕을 위해 자연이 황폐화되는 생존상의 모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식욕을 위해 자연이라는 생존의 공간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 식욕을 채워야 하지만 동시에 생존의 공간으로써의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식당이 취급하고 있는 음식을 보면 식욕의 대상 또한 확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한 소고기와 돼지고기에서부터 개고기, 흑염소, 뱀, 개구리등 온갖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성욕과 식욕은 그 물리적인 강렬함과 빈도는 확인 할 수 없으나 낮아지는 연령과 숙박업소와 식당의 난립으로 환경보전과 교육적 차원에서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이 인간들의 동물적인 성욕과 식욕은 너무나도 강렬하여 도시계획의 불균형과 자연파괴의 주범이 되고 있다. 최근에 문제시되고 있는 러브호텔의 신축은 성욕이 도시 기능의 마비를 초래할 수 있는 하나의 예가 되는 것이다. 즉, 학교와 러브호텔의 공존은 모순의 공간을 잉태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를 일종의 유기체로 볼 때 병적인 징후가 아닐 수 없다. 인간들의 성욕과 그것을 이용한 탐욕이 조금은 자제될 수 있다면 이러한 현상은 불거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상업주의와 성욕이 뗄 수 없는 관계임을 확인해 주기도 한다. 성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 축적의 모범(?)적인 동기가 되는 것이다.


성욕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회의 기능들이 창출된다. 사실 성욕은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방향으로 승화될 수 있다. 이러한 승화를 촉진하기 위해 그리고 그러한 승화의 결과로 도시 곳곳에 도서관들과 박물관 그리고 미술관 등 문화, 예술적인 공간들이 많이 마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흥적이고 일시적인 성욕의 해결은 그러한 목적을 위한 러브호텔과 같은 숙박업소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욕과 식욕의 절제가 자연 보전과 도시 생활조건의 개선을 가져온다는 것은 과장된 논리가 아니다. 도시의 구조적인 불균형과 자연파괴를 막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도시의 구조적, 정서적인 불균형이란 주거지와 학교에 모텔이나 러브호텔등이 들어서는 등의 모순적 공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순되는 것들의 혼란스러운 공존은 조화로운 삶의 질을 깨트린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자연 속에 그럴듯하게 자리 잡고 있는 화려한 식당들은 식욕의 찌꺼기들을 끊임없이 방류하여 자연을 파괴하는 한 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의 성욕과 식욕이 조금이라도 절제되어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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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9 19:10

인간의 굴레




 

인간의 굴레, 중심과 이탈


인간에겐 야성(野性)이 있다. 아프리카의 초원을 뛰노는 사자나 기린 같은 동물적인 야성이 있다. 그 야성 중에는 물론 온화한 초식성과 사나운 육식성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과 인간이 생존을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걸 보여준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과 살인이 끊임없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동물적인 야성간의 문제로 생각해 봄직도 하다.  


문제는 인간의 육식성이 초식성보다 비대할 때였다. 힘과 무력이 지배하는 경우이다. 존재하는 인간의 제도와 법과 종교를 보면, 인간의 야수적인 육체를 지배한 정신의 성과물처럼 여겨진다. 인간의 그 사나운 육식성이 어떻게 순화되고 있는지를 제도와 법과 종교는 잘 보여준다. 만약 제도와 법과 종교의 등장에 근거해서 '인간의 역사는 야수성과 순화(純化)로 얼룩진 역사이며 또 그렇게 전개 될 것이다' 라고 한다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된 것은 스스로에게 중심(中心)을 제공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었다. 도덕과 윤리와 신과 이념을 마치 오뚜기의 중심 추처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인간을 다잡는 그 자기 희생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인간은 인간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심(中心)은 권위와 권력과 결합하여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야수적(?) 억압으로 변질되면서 인간은 자기 내부의 야수성의 통제와 조절과 억압과 더불어 자기 외부의 거대한 권력과 권위라는 감당할 수 없는 억압에 직면한 것이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한다면 내면의 욕구를 억압하고 외부의 권력과 폭력에 의해 억압당하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면에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권력과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을 온전히 맡겨버리거나 중심(中心)으로부터 이탈하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이탈은 악덕과 미덕을 다 포함한다. 먼저, 인간의 야수성에만 국한해 본다면 나쁜 의미가 선명히 드러난다. 중심에서 이탈한 새로운 야수성이 개인적인 살인과 집단적인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구속적인 중심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미덕으로 간주 될 수 있으나 동시에 가장 극단적으로 인간의 야수성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악덕으로 간주 될 수 있는 것이다. 이탈이 이러한 범죄적인 양상으로 변질되고 새로운 억압과 권위주의를 낳는 것은 인간의 정신 속에 내재된 동물적인 야수성이 잉태한 가장 최악의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경우로, 은둔과 세상과 인연을 끊는 이탈이거나 중심의 해악에 순수 비판적 이탈이라면 그는 온전히 자유로운 이탈을 이루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은 바로 이러한 이탈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탈은 인간의 야수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된다. 즉, 순화(純化)는 완전한 질적(質的) 변화가 아니라 억압에 대한 일종의 반응 양식인 까닭에 더 근본적인 질적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한 질적 변화의 중심에 종교와 부단한 자기 수양이 있다. 


사족이지만, 그렇다면 현실이 완전한 파라다이스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인가? 가당한 결론인지는 모르지만 ‘불가능’ 하다. 억압은 끊임없는 이탈을 낳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 ‘완전’ 하고 절대적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그것은 수많은 철학자들의 좌절이기도 했다. 완전과 절대란 <관념>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지 현실은 결코 완전과 절대적인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해 현실에 대한 실망과 도피가 그러한 관념을 만들어 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에서 실존적으로 주어진 이 구심력(중심)과 원심력(이탈)의 충돌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인간들을 피곤하게 할 것이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굴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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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3 02:36

[생각 돌아보기] 숨은 그림 찾기



 

숨은 그림 찾기


숨은 그림 찾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교묘하게 숨겨진 그림들을  찾아내고 좋아하던 적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쉽게 찾아내지만 한 두 개의 그림은 찾기가 꽤 까다로워 시간이 많이 걸린 적도 있을 것이다. 그림 속에 기발하게 사물을 숨긴 화가의 재주에 감탄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는 찾아내고 뿌듯해 했을 것이다.


인간 세상도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라면 그림 속에 숨어있는 그림들이 있을 법하다. 그리고 인생 자체도 숨은 그림 찾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숨 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 해도 숨겨진 그림, 좀 더 말을 붙이자면 설계도가 있지 않겠는가. 콘크리트 덩어리의 건물을 하나 짓는 데도 정교한 설계도가 필요한데 콘크리트의 무기질 덩어리와는 차원이 다른 인간이란 존재에 더 정교한 설계도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자.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은 또 어떤가. 우리는 당연하게 살아가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무에 가깝다. 그야말로 우리가 찾지 못하는 숨은 그림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가시적인 현상불가시적인 본질로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골이 타분한 말이다. 현상이니 본질이니 하는 용어를 좀 더 현실적인 용어로 바꾸어 본다면 아마도 ‘그냥 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한 해석’ 이라고 하자. 어차피 본질이란 보이는 것에 대한 인간 해석의 한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에서의 신의 의지나 무(無) 등은 인간 해석의 산물인지 아닌지의 논란이 없지 않겠지만 이데아니 절대정신이니 존재자니 하는 것들은 결국 인간들의 보이지 않는 것, 즉 숨어있는 것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하지만 숨은 것을 찾아보려는 인간의 이러한 노력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다. 그저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게 할 수 있는 것, 성찰의 깊은 곳에서 인간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음미해 본다는 것, 여기에서 보이는 것에 대한 진지하고 엄숙한 태도가 싹트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이는 것을 무시하고 허튼 꿈만을 꾸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보이는 것에만 몰입하면서 숨어있는 것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그 얼마나 동물적인 존재로 추락하고 말 것인가. 숨어있는 것에 대한 성찰, 즉 숨은 그림 찾기를 할 수 있기에 인간은 위대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을 보이는 것에의 몰입의 시대로 규정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보편화된 성형수술이 그 좋은 예가 아닐까 한다. 즉흥성과 말초성에 근거한 감각에 삶을 의존하고 있는 것이 절정에 달해 있음을 부정할 수 있을까? 보이는 것, 즉 표피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감각에 대한 믿음이다. 예를 들면 대중문화가 깊이 있는 사색과 성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고도화된 과학 기술(컴퓨터와 카메라, 편집과 이미지) 에 의존하여 감각적인 자극을 극대화 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연예 프로그램의 감각적인 쾌락의 제공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관습화되고 일반화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는 것이다. 감각적인 쾌락이라는 그 화려한 꽃의 이면에 감추어진 숨어있는 삶의 그림을 찾으려는 노력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과학과 기술은 보이는 것을 더 잘 보이게 하고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조차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기에 더 이상 숨은 그림 찾기는 의미가 없는 일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종교의 영역조차 과학이 축소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인간에게 꼭 꼭 숨어있어야 할 것조차 과학은 유별나게 드러내 보여주는 느낌이다. 심지어 인간의 감정이나 감수성마저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되고 감정을 가진 로봇이 만들어지기까지 한다. 이제는 숨어있는 것이 자꾸만 드러나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얼마나 즉흥적이고 감각적이고 표피적인가. 과학과 기술이 제공하는 모든 것들은 대체로 감각적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놀랍도록 차갑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그렇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합리주의가 극대화되면서 이제는 [보고 즐긴다, 고로 존재한다]는 과학에 기반을 두는  과학적 합리주의가 입증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져다준다.


입증하고 볼 수 있는 것에 의지한다는 것, 다시 말해 과학과 기술, 그리고 세속적인 감각주의(이러한 표현이 가능하다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허상에 사로 잡혀 보이는 것조차 보지 못하는 이상주의 보다 보이는 것을 좀 더 합리적으로 보고 즐기는 현실주의가 뭐 나쁘고 사악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가슴이 빠진 머리처럼 머리 없는 맹목적인 가슴에 있는 것이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지나친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이 소외되는 세계에서 합리성이 유익한 역할을 할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성은 브레이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우리는 과학적인 합리주의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사색과 성찰도 없고 보이는 것에 대한 합리성도 없다. 무지가 있다. 무지하기에 고리타분한 것은 싫은 것이다. 놀고, 놀고 또 놀거나 자기중심의 미몽에 쉬 빠진다. 타인과 사회와의 관계성에 어떤 합리성도 부여하지도 못한다. 이 어정쩡한 현실 속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자. 숨은 그림을 찾아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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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9 16:52

젊음과 늙음







 

젊음과 늙음


이해하지 못할 무지(無知)같은 것이 있다. 젊음과 늙음이란 현상에 대한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너무나도 단단히 고정이 되어있어 마치 두 개의 사과처럼이나 독립된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젊음과 늙음 사이에는 연속하는 시간으로 이어져있고 미분할 수 있는 변화들이 연속적으로 내재한다. 결코 독립된 두 개의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선, 젊음은 인간들에게 맹목의 믿음 같은 것을 심어주는데 ‘젊음이란 현상’ 이 그것이다.  ‘젊음이란 현상’은 절대적으로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절대적인 젊음의 현상은 일종의 언어의 유희일 뿐이다. 단지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변화하는 ‘생명’의 긴 기간에서 좀 더 활동적이고 좀 더 생기있는 시기가 있을 뿐이다. 도대체 젊음이 있다면 그 젊음이란 어떻게 정의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늙음에 대해서는 더욱 더 무지한 인식이 존재한다. 늙음은 젊음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아주 초라하고 볼품없으며 실용성도 없는 어떤 현상이란 믿음이 그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통과해야할 일종의 의식으로서 늙음에 대해 특히 ‘젊은이’ 라고 자처하는 인간들은 극단적으로 거부하기를 즐긴다.


하지만 늙음과 젊음이 이토록 이분화된 현상은 근대 산업사회의 부산물이라 감히 주장하고 싶다. 특히 오늘날의 정보화시대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더욱 팽배해 있다. 사실 전통적으로 늙음에 대한 인식은 삶의 경험이 누적된 지혜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늙음이 결코 피상적인 현상으로 삶과 유리된 소외되고 무기력한 추상화된 관념적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나이던 어른들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인간에게 나이는 그 자체로서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늙음은 삶의 저 바깥으로 추방당해 버렸다. 우리의 삶과는 관계없는 덜떨어지고 낡은 것으로 말이다. 경험과 지혜 따위는 현대적 가치들과는 공존하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아도 이러한 때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늙음이 이토록 무시되어 버린 다는 것은 자기 학대인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늙음을 통해 사라진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젊음과 늙음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다른 실체가 아니다. 젊음과 늙음은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에 나타나는 다른 현상일 뿐 독립된 두 개의 현상이 아니다. 늙음을 동떨어진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젊음의 부정이며 삶의 부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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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7 20:57

[생각 돌아보기] 자동차 문화는 선진국의 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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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문화는 선진국의 척도


한국에 자동차 문화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한국의 자동차 문화는 어떠한가? 만약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되면 당황하지 말고 침착해야 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 요령에 앞서 우선 문화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국어대사전(금성판)에 의하면 문화란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양식 내지 생활양식의 총체‘ 라고 정의되어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자동차 문화는 곧 ‘자동차에 관한’ 사회 구성원이 습득하고 공유하며 전달하는 행동양식 내지 생활양식으로 정의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한 나라의 자동차 문화 수준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형편없는 자동차 문화가 존재한다면 차라리 문화가 없다 라고 하는 편이 국가나 개인을 위해서 이익이 될법하다.


따라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국외용과 국내용 답변을 나누어 살펴보자. 우리에게 자동차 문화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자동차 문화는 어떠한가? 의 질문에 먼저 국외용 답변인 경우 자동차 문화가 존재하며 저질이다, 더럽다, 지저분하다, 야만스럽다, 폭력적이다, 이기적이다, 위협적이다, 살인적이다, 불법적이다, 무식하다, 독살스럽다고 하는 것 보다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국가 이익을 위해 좋을 듯싶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 보다 때로 악의 없는 거짓말이 편하고 나은 것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자동차 문화가 없다거나 조금 더 양보해서 형성되고 있는 중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하도록 권하고 싶다. 그러나 국내용 답변인 경우 입을 닫고 직접 경험해 보라고 답하던지 가능하면 지하철을 타라고 권했으면 한다. 이 때에는 조금 솔직해 지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인이 직접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 이익을 위해 참으로 중요한 답변 요령이다.


참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자동차 문화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문화가 존재치 않는다. 도대체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양식이라 하기에는 도무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습득하고 공유하고 전달할게 없어 음주운전, 불법운전, 신호위반, 차선위반, 불법주차, 경적, 불친절 등을 습득하고, 공유하고 전달하고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우리가 형편없는 것들을 습득하고, 공유하고, 전달하고 있는 꼴이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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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0 22:28

인듀어런스호와 새클턴



 

부빙에 갖힌 인듀어러스호


인듀어런스호와 새클턴


“1915년 11월 21일 P.M. 4:50: 인듀어런스호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문명세계와의 마지막 끈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P.102)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 강인해 질 수 있을까? 자연이 가하는 위협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의연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인듀어런스호와 새클턴을 비록한 27명의 선원들이 답을 해준다. 2년에 가까운 극지에서의 잔인한 ‘전투‘에서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기적을 새클턴과 인듀런스호의 승무원들은 이루었던 것이다. 그들의 고투의 나날들은 그야말로 죽음과 맞닿은 잔인하고 살벌한 시간들이었다. 창고 책임자 오들리의 말처럼, 그들은 영락없이 “얼어버렸다, 초콜릿 바속에 박힌 아몬드처럼.”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지만 또 참으로 낙천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그 낙천성이 그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었을까? 어찌 초코렛이나 아몬드에 비유할 수 있을까? 죽음이요, 고통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숭고함의 실체는 아주 평범하고 소탈한 것이었다.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이었다. 신의 모습도 아니었고 영웅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바로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비극 앞에서 당당히 선 인듀어런스호의 선장인 새클턴과 그의 대원들의 인간애가 아닌가 한다.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서로를 격려해주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 미쳐버릴 듯한 극한 상황에서 고통에 맞섰다.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비극에 맞섰던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인 욕설로 고통에 맞섰다. 그들은 저주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저주했다. 바, 배, 물보라, 추위, 바람 그리고 가끔씩은 서로를. 그들의 욕설에는 간절한 말투가 담겨있었다. 마치 이 축축하고 추운 고난에서 해방되길 간절히 기도하는 것처럼” 


비록 동상에 걸려 몸은 썩어 팔 다리를 잘라내는 고통과 허기에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했지만 그들은 그들의 희망만은 꺾지 않았다. 그린스트리트 대원의 말처럼, ......썩어가며 하루를 보낸다. 빌어먹을! 썩은 하루가 또 지나갔지만, 끝내 그들의 운명은 ‘법칙이 틀렸음을 입증해주었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을 그들은 어떻게 이겨낼 수 수 있었을까?  비슷한 시기에 북극에서 조난당한 칼 럭호 승무원들이 몇 개월 만에 모두 숨진 것과 비교해 본다면 분명 인듀어런스호 대원들의 생존은 인간이 구현한 숭고한 모습이 숨어있음이 분명하다.  


1916년 4월 엘리펀트 섬의 부빙에 갇혀있던 인듀어런스호와 남은 대원들을 뒤로하고 선발대로 새클턴과 몇 명의 대원들은 800 마일 쯤 떨어진 스트롬니스 기지(Stromness station)가 있는 사우스 조지아섬(the island of South Georgia)를 향해 출발하는데 조악한 항해도구에 의지한 17일간의 사투의 항해였다. 그들의 사우스조지아 섬으로의 항해 중 그들의 희망을 솟구치게 해 준 존재는 가마우지 한 마리였다. 가마우지는 보통 육지에서 20-30km 이상을 날지 않는 새였기 때문이었다. 5월 10일 그들은 사우스 조지아 섬에 발을 내딛지만 여전히 장애는 도사리고 있었다. 약 10일쯤 뒤인 5월 19일 그들은 빈약한 장비에 고통스런 몸을 이끌고 22마일 떨어진  스트롬니스 기지를 향해 36시간의 강행군을 해 그곳에 도착했다. 이후 4번의 실패를 겪으며 8월 30일 칠레 정부로부터 빌린 쇄빙선으로 인듀어런스호가 있는 엘리펀드 섬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고 대원들을 구조하게 되었다.


상상하기에도 힘든 이 극한 상황을 이겨낸 새클턴과 인듀런스호의 대원들에게 경의 표한다. (*)     



(참고 서적: 살아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알프레드 랜싱, 유혜경 옮김)

(참고 사이트:  http://www.amnh.org/exhibitions/shackleton/home.html)




* Expedition Members

Sir Ernest Shackleton Sir Ernest Shackleton
leader

Frank Wild
second-in-command

Frank Worsley
captain

Lionel Greenstreet
first officer


Hubert T. Hudson
navigator

Thomas Crean
second officer

Alfred Cheetham
third officer

Louis Rickinson
first engineer

A. J. Kerr
second engineer

Dr. Alexander H. Macklin
surgeon

Dr. James A. McIlroy
surgeon

James M. Wordie
geologist

Leonard D. A. Hussey
meteorologist

Reginald W. James
physicist

 

 

            *인듀어런스호의 조난 일지도













 

   






Robert S. Clark
biologist

James Francis Hurley
official photographer

George E. Marston
official artist

Thomas Orde-Lees
motor expert and storekeeper

Henry McNish
carpenter

Charles J. Green
cook

Walter E. How
able seaman

William Bakewell
able seaman

Timothy McCarthy
able seaman

Thomas McLeod
able seaman

John Vincent
able seaman

Ernest Holness
fireman

William Stevenson
fireman

Perce Blackborow
stowaway (later ste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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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2 20:39

[생각 돌아보기] 영어 몰입교육과 'Korea State'


                         


                                        영어 몰입교육과 Korea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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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교육 완성 프로젝트 로드맵


요즘 영어 몰입식 교육이니 공용어니 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고 있다. 그 와중에 대통령까지 뛰어들어 몰입식 영어교육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자기주장을 피력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왜 이러한 주장을 피력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영어교육 전문가도 아닌 대통령까지 몰입식 영어교육 운운하는 것을 보면 영어가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임을 실감하게 된다. 미국인의 시각에서 한국 대통령의 이러한 언급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아마도 아프리카의 어느 빈곤국 국가가 한국어 몰입식 교육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한국민이 느끼는 실망감과 가히 다르지 않는 감정을 느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실상은 영어에 대한 의식은 ‘몰입식 영어교육‘ 이전에 이미 보다 더 강력하게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보이지 않는 유령으로 존재해온 터라 미국인들은 그다지 섭섭하다거나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끼어들어 다소 복잡(?)해 지긴 했으나 몰입식 영어교육이고, 공용어이고 간에 이러한 문제에 관한 찬, 반의 주장들이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서로 맞서 있는 형국이다. 대체로 지식인들이 내놓는 논의, 주장이고 보면 정말이지 일관된 논리를 견지하고 있다. 이런 사이에서 일반 서민들은 어느 하나의 주장을 선택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까지 끼어들었으니 더욱 그리하리라 생각이 든다. 그리고 더욱 어리둥절한 것은 대통령이 언급한 ‘현실적’ 이란 말의 의미이다. 몰입식 영어교육이 가능해 지는 ‘현실‘ 은 어떤 모습일까?  


일반 서민의 한사람으로서 이러한 판단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으며 몰입식 영어교육이 가능한 ‘현실‘ 이 도대체 어떠한 현실인지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몰입식 영어가 가능한 현실을 생각해 본다. 


첫째, 영어 몰입식 교육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필요성을 절실하게 주장한다. 글로벌 시대의 경제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좀더 솔직히 경제적인 이익을 가장 극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이 영어라는 판단이다. 단언하건대 이러한 주장은 분명히 틀렸다. 경제적인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몰입식 영어교육이나 영어 공용어화는 겨우 차선이거나 실패작일 수 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동시에 교체해야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즉, 소프트웨어로서의 ‘영어’ 뿐만 아니라 하드웨어로서 대한민국이란 ‘국가’ 자체를 미국의 주(state)로 편입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란 생각이다. 미국화 된 푸에르토리코의 경우가 바로 그 그 좋은 예이다. 차라리 미국의 주(州)인 Korean State의 탄생이 영어 몰입식 교육의 가장 현실적인 조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째, 글로벌 시대에는 경직되고 폐쇄적인 민족주의는 글로벌 시대의 경제 전쟁에 적합치 않다고 주장한다. 민족주의의 울타리에 안주한다면 글로벌 시대의 혜택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일민족을 포기하고 백인과 흑인을한국민과 더불어 제2의 민족이나 ‘공용인화’ 해야 한다고 본다. 백인이 내 민족이요, 흑인이 내 민족이 되는 혼합민족 구성이 몰입식 영어 교육의 가장 최고의 현실적인 조건이라고 상상해 본다. 


셋째, 영, 미인들이 전혀 사용하지 않는 한국어는 글로벌 시대에 의사소통 수단으로 무의미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한국어는 필요 없는 지엽적인 언어에 불과하다. 몰입식 영어교육과 영어 공용어를 찬성하는 지식인들은 직접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전제를 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글로벌 시대에 올바른 영어 구사에 장애가 되는 한국어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도록, 아니면 부분적으로 금지하는 법령을 실시하는 것이 몰입식 영어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인 조건이 아닐까 판단된다.


차선책을 주장하지 않았으면 한다! 일류선진 국가, 실용주의 국가, 경제적인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국가라면 굳이 한국이란 국가로 남아있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미국의 주로 편입하여 영어문제 뿐만이 아니라 사교육 문제까지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실용이 아니겠는가?


대통령이 언급한 현실이 너무나도 궁금하다. 대한민국을 미국의 연방에 편입하고, 단일민족을 포기하고, 다인종국가를 주장하며 효과적인 실용영어의 구사를 위해 영어 알파벳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영어습득을 저해하는 한국어를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사용 제한하는 현실일까?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실상은 이것이 가장 실용적이고 가장 효과적일 수 있는 현실임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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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31 21:16

[생각 돌아보기] 돈과 신경증



                                                           돈과 신경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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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회의 동기는 궁극적으로 경제적인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가 아니라 프로이트였다고 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노동의 가혹한 필요성이 쾌락과 만족에 대한 욕구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즉 현실원리가 끊임없이 쾌락원리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도한 억압은 곧 인간들의 신경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신경증을 앓는 동물’ 이란 말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적절하게 해석하는 표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실원리와 쾌락원리의 억압 정도는 ‘돈’ 에 의해 대체로 정해지는 것 같다. 우리의 교육과 윤리와 종교는 돈에 대해 절제와 봉사나 심지어 악의 근원으로 까지 규정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의 돈의 의미는 사실 절대적이다. 교육보다도 윤리보다도 종교보다도 절대적인 신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노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따라서 쾌락원리을 억압해야만 할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쾌락의 원천인 까닭이다. 물론 돈 이외에 다른 원인들이 있을 수 있다. 복지 국가인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의 높은 자살율이 그것을 입증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복지의 단계가 아니라  아직도 ‘경쟁적 자본주의 사회’ 의 단계이므로 돈에 의한 상대적인 박탈감이 주요한 원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프로이트 이론을 다시 상기해 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가진자들이 못가진 자들에 비해 신경증을 덜 앓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쾌락원리가 억압된 채 신경증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떠들썩한 대포 집의 샐러리맨들과 시장에서 배추 한 포기, 감자 한 소쿠리를 팔기 위해 고함을 질러대는 중년의 아줌마들과 한끼의 끼니를 위해 공사판에서 몸을 내던지는 아저씨들이 가혹한 노동의 필요성 때문에 신경증을 앓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를 적용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신경증은 이제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 사회적인 차원에서 심각한 증세를 나타내고 있다. 최근의 주식투자와 벤쳐투자와 돈과 관련된 사회범죄는 사회적인 차원의 증세라고 할 수 있다. ‘신종 한탕주의’ 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이겠지만 그 만큼 돈에 대한 욕구가 크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물론 신경증이 창조적인 욕구로 승화될 수도 있으나 주식투자의 경우는 ‘승화’의 차원이 아니며 벤쳐의 경우도 도태의 두려움이 상시적으로 도사리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 주위의 신경증을 앓고 있는 신음소리들이다. 소수의 가진자들을 제외하고 돈 때문에 신경증을 앓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의 모습들. 이들은 언제쯤 돈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을까. 신경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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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8 22:19

[생각 돌아보기] 나의 정자는 몇 등급



                                           당신의 정자는 몇 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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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먹는 소고기에 등급을 매기듯이 인간의 정자에도 등급을 매긴다면 소고기의 상품성과 거래만큼이나 정자의 상품성과 거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정말이지 인간 두뇌의 탁월함이란 한계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윤추구를 위한 상품의 생산으로 ‘정자’ 까지 선택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인간이 상품이 되는 경우는 합법적으로 상업성이란 이름으로 당연한 듯이 이루어져왔으며 불법적으로는 지하 거래로 이루어져 왔다. 미국 흑인 노예나 여성들의 매매춘을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위해서라면 인간까지도 자본의 대상으로 삼는다. 자본주의의 물신주의는 사실 한계가 없다. 마치 회춘을 위해 정력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던지 먹어치우는 어느 50대 중년의 사고방식처럼 자본주의 또한 자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던지 먹어치운다. 자본 앞에서는 도덕이고 양심을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오직 더 많은 자본, 자본의 축적만이 있을 뿐이다. 정자는 인간 생명의 씨와 같은 것인데, 자본주의는 그 생명의 씨 마저도 상품화 한 것이다. 물론 더 나은 인종을 위해서 인간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정자마저 사고 팔면서 까지 인간의 품종을 개량(?)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자 수출에도 국가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 정자 수출시장 규모는 약 1억 달러(2000년)로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나 정자에 대한 수요가 급격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고 보면 덤핑이나 관세문제, 불량품으로 인한 클레임 문제도 국가간의 분쟁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이다. 또한 WTO 체제하에서 정자간의 수요 불균형으로 인한 정자 다국적 기업의 독점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덴마크의 정자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기부자가 많아 유럽 시장을 거의 석권하고 있으며 세계 25개국으로 수출 판로를 확대해왔다. 이와는 반대로 흑인들의 정자인 경우 수요가 거의 없음으로 해서 인종간의 불화와 대립이 심각해 질 수도 있는 것이다.


‘자본’ 이란 말과 ‘민주’ 란 말은 마치 쌍둥이처럼 존재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 두 단어가 잘 어울리는 말인지 때때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과 인간의 역학관계에서 ‘인간이 자본의 주인이 된다’ 는 의미에서 자본주의(Capit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는 화해할 수 있으나 ‘자본이 인간조차 앞선다’ 는 의미에서는 납득키 어렵다. 정자까지 경제적인 이윤 추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본이 인간에 앞서는 전형적인 예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아무튼 인간이 자본 앞에서 더 이상 추악해지지 않기를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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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2 19:19

[생각 돌아보기] 휴대폰 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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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http://kr.news.yahoo.com/servi



휴대폰 저 너머


하나의 발명품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혜택은 발명품 자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휴대폰을 예로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편리한 통신 기능 외에도 시간의 절약에서부터 편안함 등 많은  부수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휴대폰의 의미를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편리에 있다고 해도 그리 무리는 아니지 싶다. 업그레이드라는 발상 자체가 성능의 향상과 사용의 편리성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성능의 향상과 사용의 편리성이라는 것이 결국 사용자의 편리를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나 휴대폰의 진화가 가져 온 것처럼 인간은 얼마나 편해질 수가 있을까? 그 편리함의 끝은 어디일까? 인터넷이나 휴대폰의 진화를 보면 우리는 지금 인간이 궁극적으로 편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과학적인 편리는 궁극(窮極)적인 종교의 평온함 또는 경건함과 통할 것 같이 여겨질 정도다. 과학과 종교가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이나 교의에 대한 과학적인 논증이 아니라, 종교적인 정적 묵상의 평온함이 과학이 만드는 편리와 상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끊임없는 업그레이드와 기능의 향상이 정신과 육체의 편안함을 제공해 준다면 그것이 곧 종교적인 평온과 다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팽배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학이 추구하는 세상은 진정 파라다이스가 될 수 있을까?  


인간이 육체적으로 가장 편해지는 세상은 어떠한 세상일까? 아마도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세상일 것이다. 휴대폰이 없었던 세상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과학이 발달한 지금이 더욱 편해진 세상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과거에는 생명을 앗아간 아주 심각했던 질병들이 의학의 발달로 사라져 버린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푸닥거리로 질병을 고치려고 했던 무당의 권위를  의학이 대체하고 신화속의 신들의 자리를 과학적 이론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편안함의 성격이고, 그  끝이 있을까의 문제이고 그 끝이 종교적의 궁극과 상통할까의 문제인 것이다.


과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 세상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음에 반해 종교적으로는 천당이나 극락과 같은 궁극적인 내세를 제시하고 있다. 만약 과학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편안함이라면 천당과 극락 이 과학적인 현세로 제시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차이라면 내세와 현세라는 차이가 될까?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와 과학은 상통한다고 말해도 될까? 물론 이러한 생각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지만 천당과 극락이 어떤 긴장이 완화된 상태로써 과학의 궁극적인 편리와 편안과 연결 된다는 약간은 과장된 추론의 일부를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글의 서두에서 <과학적인 편리의 궁극(窮極)은 종교와 통할 것>이라고 하는 발언의 의미는 연속적인 흐름이 아니라 획일화되고 기계적인 과학에 대한 회의로 인한 종교로의 도약이나 내세의 천당이나 천국이라는 종교적 가치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 즉, 과학에 대한 회의가 종교로의 도약을 가져다 줄 것이란 측면에서 종교와 과학의 접점을 언급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육체의 편리와 더불어 정신의 편안함을 함께 제공해 주지는 못하리라는 우려 때문이다. 오히려 과학이 인간의 정신을 황폐시킬 것은 물론이고, 자연의 균형을 깰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존층의 파괴, 엘리뇨 현상, 온실효과, 산림 파괴 등 자연의 황폐화가 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적인 인간의 편리함이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세의 디스토피아나 지옥처럼 궁극적으로 지구의 멸망을 앞당길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의 편리함의 끝에 정신적인 불편이 존재하게 되고 그 정신적인 불편이 종교를 요구할 것이라는 가능성 있는 추측에서 과학과 종교의 접점을 언급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과학적인 편리가 불편이 되고 자연의 황폐함 앞에서 위기의식을 느끼는 절박함에 처할 때 종교는 더욱 가치를 발산하게 될 것이다.


과학은 계속해서 발달에 발달을 거듭할 것이다. 휴대폰은 계속해서 만들어 질 것이고 더 새롭고 편리한 것이 이전 것을 대체할 것이다. 신이 역사의 태엽을 감아놓은 이상 인간의 역사는 계속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한숨 한 번 돌리고 잠깐 쉬어가자고 한다고 해서 순순히 따를 것 같은가? 인간은 이미 브레이크 페달을 상실한 상태이다. 카지노에 빠져 돈을 탕진하듯이 편리함의 가치에 빠져 결국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저 그 엄청난 현실로서의 과학의 도덕성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는 막막한 생각뿐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종교의 가치를 음미했으면 좋겠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정적인 묵상의 미덕을 인간의 편안함으로 여겨보자는 것이다. 온갖 유행들과 버전들과 업그레이드로 정신없이, 빠르게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편안함이라면 ‘정적인 묵상’ 이 지극한 편안함임을 깨닫자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추구하는 것이 빠름이지만 결국 그 빠름은 인간의 편안함, 즉 인간 삶의 평안함, 쾌적함이라는 것, 그리고 그 평안함과 쾌적함이라는 것은 곧 여유 있고 느린 삶이라는 것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결국 느림을 위한 빠름이란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과학이 이토록 빠르게 발전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과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끊임없는 발전의 추구에만 있다면 도대체 인간은 왜 살아가는 것이며 과학은 왜 발전해야 하는 것인지 한 번 쯤 심각하게 고민해 보기도 해야 하리라고 본다. 빠름 속에서 느림을 찾아보는 것, 느림 속에서 빠름을 되돌아보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에 중요한 화두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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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8 23:50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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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트를 보낸곳              이미지 출처:http://kr.image.yahoo.com/GALL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인간은 미생물(Homo microorganism)이다. 스스로를 미생물이라 정의할 수 있는 미생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우주에 존재하는 아주 유익한 미생물이다.>


크고, 작음이란 상대적인 비교의 부산물이다. 절대적인 큼과 작음이 없다는 말이다. 크기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수준 또한 마찬가지이다. 더 잘났다, 더 우수하다 등도 상대적인 비교의 부산물이며 절대적인 기준이나 근거가 없다. 항상 비교의 대상이나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개미는 인간 보다 작다거나, 인간은 사고를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라고 하는 상대적인 비교대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는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생물체들을 비교대상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지 않거나 비교를 하는 경우에 자신을 중심에 놓는 좋지 않는 버릇이 있다. 아니, 좋지 않은 버릇이라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버릇이다. 그 비교는 항상 ‘우등비교’ 이거나 ‘절대적인 우위’, 또는 유일성 등으로 표현된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라거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라는 정의가 바로 그런 경우들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는데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정의에 동의할 수 있는가? 이렇게 ‘인간은 …… 이다’ 라는 식의 정의는 아주 인간중심적인이며 절대적인 사고이다. 이러한 잘못된 정의 자체가 인간이 이성적이지 않으며 만물의 영장도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정의들을 남발하는 인간이 어떻게 이성적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잘못된 인간에 대한 정의가 인간을 오만하게 만들어 온 역사임을 인간은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한다. 만물의 영장이기에 독단적인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해 온 것이다. 이것은 아리안 족이 우월성을 보존하기 위해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생각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인간의 우월한 문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자연을 학살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이 살아남아 학살 원흉들을 단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은 인간에게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단죄의 형벌을 내릴지도 모른다. 이러한 징조가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고 과학자들이 경고하고 있다. 지구 멸망의 영화가 유난히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야 말로 인간다운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를 점유하고 있으며 공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2008년으로 정의하는 현재의 시간과 인간이 건설한 도시들이 우주의 중심적인 공간이라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습관이 너무나도 단단하게 굳어져 버렸다. 인간이 정의한 인간 중심적인 잘못된 인간에 대한 정의 때문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2008년이란 시간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지구라는 공간은 거의 사라지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도 초라하고 작은 인간이 그 스스로를 너무나도 과대하게 과장되어 버린 것이다. 작은 좁쌀이 확대된 뻥튀기에 불과한 것이다.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면서 인간 자신이 이 우주라는 유기체속의 작은 미생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비상식적인 왜곡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이것은 당장 실행해야 할 인간의 과제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너무나도 오만에 갇혀버려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식의 정의를 반복하고 있고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러한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는 위기의식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 스스로가 정의하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라는 식의 정의를 폐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주의 입장에서 보는 ‘인간에 대한 정의’ 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인간 은 미생물이다.‘ 라는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지구는 광활한 우주 속의 작은 행성에 불과하며 인간은 작은 미생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인간이라는 미생물은 지구상의 다른 미생물들과는 달리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정의 할 수 있는 미생물’ 인 것이다. 이 정의는 우주적인 관점으로써 인간의 왜소함과 동시에 겸손을 드러내는 참으로 인간적인 정의가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인간중심적인사고나 지구중심적인 사고를 버리고 우주 중심적인 사고로 자신을 정의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우주 중심적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겸허한 생물이길 바란다.


이렇게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다시 선언하고 싶다; ‘인간은 미생물(Homo microorganism)이다. 스스로를 미생물이라 정의할 수 있는 미생물이다.‘


인간이 유기체의 균형을 파괴하는 미생물을 박멸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우주는 자신의 균형을 파괴하는 인간이란 미생물을 박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겸허한 생각을 해야 한다. 만약 인간이 우주라는 유기체의 균형을 깬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솔직히 인간들은 우주라는 전체 유기체의 관점에서 보면 쓸데없고 잘못된 짓을 너무나도 많이 하고 있다. 지나친 상업주의가 낳는 자원 고갈과 쓰레기 배출을 통한 환경파괴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업그레이드되는 문명의 이기들이 인간의 편리만을 추구하면서 디스토피아적인 문명으로 변이되고 있다. 오존층의 파괴, 각종오염 등…… 인간이 지구에 미치고 있는 영향이 어쩌면 태양계, 더 나아가 우주 전체의 질서와 조화를 깨고 있다면 미생물인 인간은 박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주가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 둘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지겹게 반복하는 소리이지만 인간은 과학의 성과물에 얼마나 기고만장해 있는가. 마치 이 우주의 주인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위해 우주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거만하고 기고만장한 태도는 가장 비인간적인 태도이다.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혁명적인 정의로 과거의 모든 잘못된 정의를 대체해야만 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의를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인간은 미생물이다(Homo microorganism).’ 그러나 인간이란 미생물이 우주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로 불리어 지기를 바라자.


이것이 인간을 정의하는 새로운 혁명적인 정의의 완결판이다: ‘인간은 미생물(Homo microorganism)이다. 스스로를 미생물이라 정의할 수 있는 미생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우주에 존재하는 아주 유익한 미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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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8 12:33

[꽁트] 1더하기 1이 4가 되는 이유

 

1 더하기 1이 4가 될 수 있는 이유


K와 S는 연인 사이라고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알짜배기 연인 사이랄 순 없다. 여기서 알짜배기 연인 사이라 함은 흔히들 진실한 사랑, 즉 사랑의 힘을 삶의 중심에 놓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포용하는 연인 사이를 말한다 할 수 있는데, 그들 사이가 알짜배기 연인 사이가 아니라 함은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연인 사이가 아니다란 말이 되겠다. 겉보기의 화려함과는 달리 그들의 속마음에는 진실한 사랑보다는 온갖 술수가 얼룩져 있으니 서로의 속마음을 모르는(모르는 체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서로 속이고 속고 있는 셈이다.




명문대를 나와 동 대학원의 조교로 있는 K가 교수 자리와 함께 만만찮은 재력을 소유하기 위해 모교 원로교수이자 대학원장인 S교수의 둘째 딸이며 다른 명문대 출신으로 벤처 사업에 뛰어들어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은 여성 재력가인 S를 야심의 타깃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교수라는 명예와 재력을 목표로 하고 있는 K에게 S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의 목표물이었던 것이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S의 외모와 몸매였는데, 깨놓고 말하자면 토할 것 같은 얼굴에 아줌마 수준의 몸매가 흠이라면 흠이었다. 


한편 S도 자신이 끝내지 못한 학업에 대한 욕구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외모가 받쳐주는 장래의 남편을 통해 성취하고자 했다. S의 사정권에 들어 온 사내는 자신의 아버지인 S 교수를 통해 알게 된 학문적으로 촉망받고 외모가 수려한 K였다. K는 자신이 평소 이상형으로 생각해 오던 한 탤런트와 닮아 마음속에 점찍어 둔 인물이었다. 그런 차에 은근히 그녀에게 접근해 오는 K를 놓칠 수는 없었다. S는 교수직과 재력 만이라면 어떤 사내라도 휘어잡을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여자의 외모보다도 재력과 명예를 더 중요시하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솔직히 얼굴이야 좀 뜯어고치면 되잖은가.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외모도 어느 정도 받쳐주고 실력도 있지만 재력과 집안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K라면 얼마든지 떡 주무르듯이 주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난하고 뼈대 없는 집안 콤플렉스는 재력과 명예가 약이지 않겠는가.


그들의 표면적 이해관계는 이렇게 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하지만 속마음은 너무나도 달라  대화는 언제나 표면 말과 심층 말로 나뉘어졌다. 다시 말해 표면 말이란 그들의 혀끝에서 만들어지는 말로 그들의 표면적 의도에 충실한 감언(甘言)을 의미하며 심층 말이란 혀끝에서 말이 만들어 질 때마다 동시에 반발적으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이 만나면 두 사람이 아주 정적(靜的)으로, 아주 정상적으로, 아주 사랑하는 연인처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 보였지만 실상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면 아주 역동적으로 마치 네 사람이 앉아 대화, 아니 극단적인 인신공격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그들이 만남에 만남을 거듭하고 결국엔 결혼 약속을 하게 되는데 참 가관인 그들의 한 대화를 소개하면 1 더하기 1이 4가 되는 이유를 쉽게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화는 도심에 있는 인테리어가 최고급인 화려한 카페의 가장 전망 좋은 공간의 최고급 좌석에 앉아 칵테일을 주고받으며 나눈  것으로 S가 턱을 갸름하게 성형하고 만나 처음 나눈 대화이기도 했다.


S가 30분을 먼저와 앉아 있었고 K가 헐떡거리며 뒤늦게 자리에 앉았다. K가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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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로 알려진 고대 이집트의 기록. 이곳에 세계 최초의 성형 수술 기록이 남아 있다.



“많이 기다렸지 차가 막혀서 말이야.”

[차는 무슨 차, 네 얼굴 보기 참 지겹다 지겨워. 꼴에 턱은 깎는다고......]


“쬐끔, 고작 30분.”

[뭐, 차가 막혀. 놀고 자빠졌네.]


“아니, 테이블에 웬 프렌치 키스. 오늘 분위기 좀 잡을려구?”

[꼴깝을 떠는 군. 우욱, 프렌치 키스! 생긴 대로 놀아라, 놀아.]


“내가 먼저 주문했어. 프렌치 키스, 전에도 마셨잖아. 바로 여기서 말야”

[너 참 많이 컸다. 프렌치 키스도 다 알고. 하기야 꼴에 교수지.]


“장인어른이 이번에 신경을 너무 많이 써셨어. 교수 사위 보려구 말야”

[교수자리는 기본 혼수 품목 중에 하나일 뿐이지. 희생정신으로 결혼해주는데 교수 자리는 기본이지, 기본. 암~~]


웨이터를 불러 프렌치 키스 한잔을 더 주문하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동안 두 사람의 심층 말들이 불을 뿜었다.


[교수가 된다고 뼈대 없는 가문에 뼈대가 생기냐? 쯧쯧, 좋아하긴.]

[저 얼굴만 보면 나의 희생정신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턱을 깎아도 길긴 마찬가지군.]

[반반한 얼굴 때문에 용서해 준다. 하지만 너무 까불진 마!]

[헌데 저 비위 느글느글한 속을 알 수 없단 말야. 어떻게 저런 얼굴로 나를 넘볼 수 있을까. 하기야 내가 먼저 껄떡거리는 척을 했으니......낄낄. 일단은 명예와 재력이 문제지. 그 다음엔 권력......흐흐. 널리고 널린 게 여자고 말야. 사랑 타령은 당분간 중지.]

[개 뼈도 없는 게 주먹만한 야심은 있어 가지고. 네 속을 다 안다 알어. 돈과 명예가 아니더냐.]

[널린 게 여잔데 뭐]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턱 수술이 잘 되었네. 몰라 보겠는 걸. 당신이 어떻게 하던 당신 모든 걸 사랑해.”

[턱 뼈 깎는 기계가 한심하다 한심해. 깎을게 없어서 뭐 저런 걸 다깎냐.]


“고마워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해해 주시니 정말 고마워요.”

[너 보기 좋아라고 깎은 거 아니다. 오해하지 마라. 성형한 걸 모르는 인간들하고 재미를 봐야지 안 그래? 결혼이 내 삶의 무덤이 아니야.]


내가 타고난 재능인지 신기(神技)인지 인간들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때론 슬프고 가슴 아프다. 그들의 대화를 여기에서 끊은 것은 부분의 소개에 있을 뿐 전부의 서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은밀한 구석은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더하기 1이 4가 될 수 있는 이유를 이 정도만으로 짐작하기만 하면 되잖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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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사이트;http://blog.daum.net/psy10379/ (성형수술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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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4 00:06

[꽁트] 우주를 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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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http://blog.daum.net/kkjw2010/13138414 



우주를 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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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kkjw2010/13138414

신종 암은 100% 정복이 가능한가? 초기 신종 암의 경우 100% 치유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이미 초기의 증세를 넘어서 버렸다. 현재로선 확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신종 암을 치유할 수 있는 물질이 어디엔가 존재는 하지만 아직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다. 분명 신은 신종 암세포를 죽일 수 있는 항체의 존재를 마련해 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종 암의 저항도 만만찮은 상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면역력을 높이고 있다. 신종 암은 고도로 지능화 되어서 파괴적인 속성을 숨기기 위해 아름다운 위장물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독버섯이 독성을 숨기기 위해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는 것과 같다. 온갖 고상함과 화려함으로 위장을 하고 있지만 신종 암의 결정적인 속성은 파괴임은 분명하다. 원래 아름다운 것과 독성을 감춘 아름다움은 분명 구별이 되어야 한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신종 암이 발생 반경을 넓히고 있다는 것이다. 신종 암의 발생 영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는 것은 생물체의 생존이 그 만큼 위협받을 가능성이 커다는 것이다. 신종 암은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면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과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그곳의 원주민이 학살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은 것처럼 신종 암은 새로운 영역을 황폐시키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지금 효과적인 치유의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우주의 균형은 깨어질 것이다. 미세한 피부층이기는 하나 그 곳의 여러 세포들에 신종 암이 지속적으로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현재 세 가지 방법이 연구되고 있는데 1) 신종 암을 외부에서 붕괴시키거나, 2) 신종 암의 내부를 혼란시켜서 자멸케 하거나, 3) 신종 암의 발병 영역을 제한하고 격리시키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초-레이저 치유법(Ultra-Laser Therapy)이며 두 번째 방법은 신종 암세포 균형체계 교란술(Cancer Cell System Destruction: CCD)이다. 마지막으로 신종 암의 영역을 격리시키는 격리법(Isolation Method)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신종 암을 격리시키는 방법은 어려운 실정이다. 이미 전이와 발병의 케이스가 새로운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 레이저 치유법과 암세포 체계 교란술을 상황에 맞게 유효적절하게 사용해 근본적인 신종 암의 퇴치를 기대하는 것뿐이다.


특히 현재 가장 기대할 수 있는 치유방법은 신종 암 내부의 균형을 교란하여 신종 암을 자멸시키는 방법인데 이 방법은 실제로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되고 있다. 신종 암도 일종의 유기체로 생명을 유지하는 기관들(organs)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기관들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교란하여 파괴하는 것이다. 이것은 큐피드의 화살(Cupid's Arrow)로 명명되는 신종 암세포 균형체계 교란술(CCD)이다. 이 방법은 신종 암세포의 중추에 해당하는 백유기세포(White Organic Cell:WOC) 와 흑유기세포(Black Organic Cell:BOC) 간에 적대적 파괴 관계를 형성하고 미세하게 조정되어있는 줄기형(Branch-typed) 축 내부의 알파 황소립자(Alpha Yellow Subtle Particle:AYSP) 을 파괴하므로써 유기적 세포(Oraganic Cell)간에 균형을 깨어 궁극적으로 신종 암을 제거하는 최신의 치유법이다. 양 유기세포 간에 균형을 깨는 방식은 백유기세포(WOC)에 증오유발 호르몬(hatred-led hormone)을 주입하고 흑유기세포(BOC) 에 적대 유발호르몬(hostility-led hormone)을 투입해 증오와 적대를 유발하여 상호 파괴(mutual destruction)을 유도하는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러한 상호 파괴의 정도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균형 축으로 작용하고 있는 알파 황소립자(AYSP)를 파괴하는 것이다


현재 호르몬 투입 이후 이 우주의 신종 암, 즉 인간에게는 증오와 적대감으로 상당한 교란이 일어나 자멸직전에 있다. 우려되는 것은 그 부작용에 의해 연쇄적으로 자연이 황페하게 되고 생태계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이다. 반드시 암적 존재인 인간을 지구로부터 도려내고 아름다운 지구는 살려야 한다. 지구가 죽으면 우주의 균형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생로병사에 의한 자연적인 소멸이 아닌 인간에 의한 지구의 멸망은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우주의 유기체 속에서 암적 존재인 인간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이 글은 본인의 글이 아님을 밝힌다. 인간의 우주를 향한 침략계획(일명 우주 탐사 계획)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는 우주 종합병원(Universe General Hospital)의 원장인 하머니 박사(Dr. Harmony)로부터 기고 받은 글을 전재한 것이다. 따라서 전문 의학용어, 기술용어에 대한 무단 도용이나 모방을 절대 금하며 그러한 행위에 따른 피해에 대해서는 일체 책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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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3 19:50

인간, 그 슬픈 삐에로

 

인간, 그 슬픈 삐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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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컴속의 나



                                         사진출처:컴속의 나


인간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지구의 공전 궤도가 조금만 삐거덕해도 공멸(共滅)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지구라는 둥근 공위에서 궤도의 줄을 타고 있는 슬픈 삐에로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삐에로 같은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인위적으로 지구의 공전을 줄타기에 비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상 인간은 삐에로와 같은 희․비극적 모습을 삶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삶 속에 죽음, 젊음 속에 늙음이 깃들어 있는 모순적인 사실, 삶의 조건인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여러 아이러니한 사실, 개인과 집단과의 끊임없는 삐걱거림, 현세와 내세에 대한 분열적인 고뇌, 전쟁과 평화, 사랑과 증오의 극단적인 감정의 변주, 풍요와 빈곤이라는 현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줄타기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줄타기는 너무나도 오래 지속되고 있어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다는 인식을 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나약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모습에 대해 언제나 겸손해야 균형과 조화를 유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리혀 오히려 위치를 망각하고 증오와 분노로 조화와 균형을 깨드리고 과신의 오만함에 빠져있다. 삐에로가 삐에로의 위치를 상실하고 전지전능한 초월자로 줄 아래를 향해 경멸적인 조소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자아를 상실한 가엾은 삐에로. 신이 되어 버린 삐에로. 신을 죽여버린 삐에로.


삐에로가 스스로 우주의 중심이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삐에로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가는 현실을 인간은 자랑스럽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곳곳에서 삐에로임을 주지시키는 경종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울려대기도 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 예술, 문화의 영역에서 마초적인 삐에로의 심성을 부드러운 여성적 삐에로의 심성으로 돌려놓으려는 노력을 피눈물 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길 La Strada>의 길 위의 그 슬픈 삐에로의 모습을 삶의 구석구석에서 상기해야 하는 것이다. 숭례문의 전소를 삐에로의 슬픈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삐에로가 삐에로의 처지를 애써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대견스러운 일이지만 삐에로의 매력은 사실 슬픔과 연민을 자아내는 그 애틋한 모습에 있다.



 아돌프 히틀러:스스로 신이 된 인간


그러나 인간들은 어렵게 줄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삐에로의 그 슬픔과 연민을 자아내는 표정과 몸짓 그리고 속마음 사이의 깊이 있는 역설을 잊고 있다. 서로의 비극을 헤아려주는 연민이나 동정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빠져 나와 이제는 그 마음속에 삐에로를 잊은 우주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엄과 허세가 들어차 있다.


니체는 삐에로를 너무 오만하게 만든 상징적인 인간은 아닐까?

찰리 채플린은 삐에로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 상징적인 인간은 아닐까?


인간이 비극적 존재이니 희극적 존재이니 하는 따위는 물론 인간 스스로의 주관적인 해석이겠지만 이 막막한 우주에서 그야말로 작디 작게 존재하는 지구라는 땅위에서 근원적인 고독을 되씹으며 버겁게 살아간다는 것이 그저 희극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더 크다. 그런데 작디 작은 존재이며 근원적으로 고독한 인간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잔인한지를 보라, 인간들이 숱하게 저질러온 전쟁들을 보라. 이 세계화의 시대, 이 실용주의의 시대에 아프리카 대륙의 구석에서 굶주림에 죽어 가는 아이들의 모습들을. 하찮은 인간들이 얼마나 다른 인간들을 멸시하고 하찮게 여겨왔는지를, 얼마나 비극에 비극을 더해 왔는지를. 삐에로의 위치를 망각한 인간들이 저지른 잔인한 행위들이다.


인간 스스로 삐에로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이 광활한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전쟁과 기아에서 그 숱한 비극을 싹트게 하고 무관심해 왔겠는가. 인간이 스스로 초인으로 행세하고 스스로를 구원하는 메시아로 자처하곤 했고 종교의 힘을 빌려 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의 고독과 비극성 때문이다. 줄 타는 슬픈 삐에로의 모습처럼 말이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면서 동시에 신에게 용서를 구하며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성을 외친다는 것, 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인간의 부끄러움인가? 


인간의 본질적이고 실존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 벌거벗은 삐에로의 모습을 보고 싶다. 오만하고 과시적인 삶의 방식을 초월해 있는 진정 삐에로, 그 슬픈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싶다. 이 광활한 우주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만이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초라함을 깨닫을 수 있기에 기댈 수 있는 곳은 오직 인간들 스스로라는 분명한 사실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 줄을 타고 있는 그 슬픈 삐에로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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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6 12:22

[꽁트] 잡글 인간




잡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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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별명은 잡글 인간이다. 그의 삶이 잡글처럼 잡스럽기만 해서 그가 쓰는 글도 장르불명의 잡글처럼 잡스럽기만 하기 때문이다. 이 별명은 다른 사람이 붙여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붙인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서다. 그에게 유감인 점은 자신이 꽁트라고 생각하는 글이 소설, 더 나아가 웅대한 서사소설로 확대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더 축소되어서  꽁트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잡글이나 쓸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인식과 사고의 얄팍함에 대한 자조인 셈이다. 즉, 그에게 잡글 인간이란 말은 그렇게 잡글 밖에  쓸 수없는 운명과 동격인 것이다.


그의 삶이 잡글 처럼 잡스럽기만 하다는 말은 서사보다는 단편적인 에피소드, 아니 에피소드라 하기에도 좀스러운 짓들로 삶이 구성되어 있다는 것과 같다. 깊이가 없고 무게 없이 살아왔다는 것이기도 하다. 인과의 꼬리를 물고 무는 삶의 이야기, 즉 서사가 진행되지 못하고 단편적인 파편들로 흩어진 삶이었다는 것이다. 항상 우연적인 삶에는 인과가 반드시 있다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인과로 엮으려는 상상력을 발동해 보지만 잡글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고, 그는 결심을 했다. 잡글 인간을 긍정하는 것이다. 삶의 편린들을 인과로만 연결시키지 말자. 삶에는 우연성이 인과의 고리를 맺은 필연성 보다 더 많이 존재한다고. 특히 그의 삶을 언급하고자 한다면 우연을 개입시키지 않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


삶을 되돌아보면 지나간 사건들이란 반드시 그러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필연으로 받아들여지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사실 잘못되었다. 순전히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너무 관용적인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사건과 사건, 인간과 인간을 인과로 맺어주는 어떤 실재란 존재 않지도(신의 부정은 아니다) 않고 따라서 동시에 필연 또한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필연이란 이름을 고상하게 달고 있는 것들 ― 필연적인 만남이니 필연적인 사랑이니 필연의 인연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 ― 은 단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필연처럼 보이는 것은 그저 일시적이거나 자의적인 해석의 결과일 뿐이다.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그는 비록 잡글이 될 망정 그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꽁트를 쓰기 시작했고 자신의 삶과 의식을 단편적으로 반영하는 꽁꽁트들과 꽁트들 간의 인위적인 연결 고리를 찾아 이어 꽁트를 다시 모방적으로 확대재생산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하고 그저 그의 우연 한 토막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내 삶 전체가 그렇지만 그 날은 특히 잊을 수가 없어. 아침에 잠에서 깨었는데 말야, 낯선 장소가 아니겠어. 아무리 술을 많이 마신 날에도 이런 일은 없었거든. 그런데 전날은 술도 마시지 않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와 침대에서 잠을 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거든. 그런데 낯선 곳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 정말 기가 막혔어. 마법이나 꿈도 아닌데 말야.


놀란 중에서도 방안을 둘러보았지. 벽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난 기절을 할 뻔했어. 그 액자 속의 인물이 말야, 내가 쓴 꽁트 속의 인물과 똑 같지 않겠어. 뒤통수가 담겨있는 사진 액자였거든. 그래서 창가로 달려가 거리를 내다보니 사람들이 다 뒤로 걷고 있는 거야. 이게 바로 내 꽁트 <뒤로 걷는 사람들>의 세팅과 똑 같았어. 이제야 내가 쓰고 있는 꽁트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인간들은 엉덩이에 눈이 붙어 있다. 하의(下衣)는 언제나 큰 구멍이 두 개가 뚫어져 있다. 그 구멍으로 큰 두 눈이 깜빡거린다. 눈의 형태는 같지만 그 기능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눈알이 360도 회전이 가능하다. 바깥은 물론이고 몸의 내부도 볼 수 있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 수 있다. 음식물이 식도를 따라 위로 내려와 위액과 뒤섞이고 다시 대장 소장을 통해 똥이 되는 과정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눈이 엉덩이에 붙어있다 보니 입으로 음식을 먹고 똥을 눈다. 항문은 없다. 식도와 분뇨도가 입으로 통해서 입에서는 언제나 악취가 난다. 그들은 너무 익숙해져 악취라는 인식자체가 없다......<뒤로 걷는 사람들, P.1>


한 인간이 이런 세상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육체가 그야말로 터무니없이 비실용적으로 설계된 구조에 당황하지 않겠니. 아니 당황할 정도 그 이상이겠지.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지지 않겠니. 음식과 똥이 입으로만 들락거리는 것을 어떻게 참을 수가 있어. 음식물과 똥이 뒤섞이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물적인 구조는 그야말로 너무나 고역이고 최악이야. 상상만 해도 최악이야. 오직 꽁트 따위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다행스럽게도 거울을 보니 얼굴은 그대로였어.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어. 상상조차도 해보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현실적인 행동이 가능할 수 있겠니. 내가 쓴 꽁트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어.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자살이었어. 나를 너무 비관론자로 생각지는 말아. 자살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글의 감옥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 말야.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겠니. 또한 이 지옥 같은 곳에서의 삶 자체가 죽음이 아니겠니. 너라도 나와 마찬가지 결론에 이르렀을 거야


나는 자살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어. 침대의 카버를 찢어 연결해 방 천장에 연결하고 침대에 앉아 마지막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았지. 나의 행동이 너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에 말야. 이게 과연 나의 자유의지인가고 혼란스러워 진 것이지. 꽁트 속의 등장인물이 된 내가 스스로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가 하고 말야. 이 꽁트를 쓴 작가로서, 아니 내가 쓴 꽁트의 등장인물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그런 고민으로 하고 있을 때 짜증스런 고함 소리와 함께 갑작스러운 충격이 뒤통수로 전해져 왔어.


“이런 글을 꽁트라고! 완전히 잡글이구만! 에이~~.


이어서 충격은 뒤통수를 거쳐 머리로 다음에는 어깨로 그리고 배로 점점 아래로 전해서 발가락에 이르러 멈추었어. 책이 덮이면서 나는 책 속에서 압사당하고 만 것이지. 자살만이 아니었어. 압사도 있었던 거지. 나는 한 편으로는 행복했어.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야.


그러나 나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지. 어떤 꽁트 작가도 자신이 쓴 꽁트 속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단 걸 말야. 독자가 꽁트가 아니라고 하면서 책을 덮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거든. 행복감이 사라지면서 슬픔이 몰려왔지. 그러나 또 한편으론 희망이 엿보였어. 우연이란 그 사실 때문이었지. 내가 이렇게 우연하게 압사당하리라고 어떻게 생각했겠어. 결국 꽁트는 내가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이란 놈이 쓰고 있었어.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 따위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일이 일어 날 수 있는가 말야. 이것에는 어떠한 필연성도 인과성도 이성이니 과학적인 합리성이니 객관성도 없어. 그래서 분명하게 한 마디 하고 싶은 건, 내 꽁트에서 깊이나 진지함 따위를 잊어 달라는 것이지. 형식 따위도 너무 따지지 말란 것이지. 우연이고 파편이고 그저 똥이나 누면서 시간이나 때울 수 있는 존재로 보아 달라는 것이지. 좀 더 친근한 존재였으면 더 좋고 말이야.


그는 그렇게 죽었다. 아무도 그를 찾지 못했다. 그는 행방불명되고 만 것이다. 이 처럼 그의 꽁트는 필연이나 인과와는 거리가 먼 우연에 불과한 파편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의 죽음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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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4 00:09

[생각 돌아보기] 간판


 

간판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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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지나면서 간판을 보지 않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각 장애인들이면 모를까 멀쩡히 두 눈을 달고 있는 사람이라면 간판을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자체가 간판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과장일까? 심산유곡에 들어가도 간간히 볼 수 있는 것이 간판이다. 그러나 또 너무나 흔하기에 쉽게 지나치는 것이 간판이다.



간판들을 볼 때마다 우리사회가 얼마나 광고에 의존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나 치열한 경쟁사회인지 알 수 있다. 거의 엇비슷한 가게들이 엇비슷한 간판들을 내걸고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야 말로 치열한 경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거의 주택가와 상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간판이 널려있는 지경이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인 모든 나라가 다 그럴 것이고 우리나라만이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디를 가나 널려 있는 게 간판이니 말이다.



치열한 간판 경쟁은 낮보다 밤에 더 선명해진다. 특히 향락문화와 간판은 일종의 공생적인 관계로 어울려 더 휘황하고 찬란하다. 향락문화와 휘황한 간판은 은유의 관계로 까지 자리하고 있을 정도다. 화려한 네온 간판들은 어둠을 밝히며 온갖 인공적인 불빛들을 토해낸다. 불꽃놀이 보다 더 화려한데 역시 그 이면에는 이윤의 욕망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치명적인 독이 있는 아름다운 버섯처럼 아름답게 피어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인간들의 유혹과 탐욕도 더 깊어진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그렇게 날개 짓을 퍼덕거리는 것이다.


또한 간판하면 떠오르는 것이 출세지향적인 인식이다. 간판이 좋아야 한다는 말은 한 인간의 물질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이 또한 자본주의 경쟁의 단면이 언어에 까지 스며든 경우이다. 누구는 간판이 좋다는 표현은 경쟁에서 이겨 우월한 자리를 확보했다는 의미이다. 즉, 남들보다 좋은 간판을 가졌다는 것은 다소 거친 표현으로 돈을 잘 번다거나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좋은 간판이 양심적이고 순수하며 인간적인 내적 가치를 은은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직업과 재력 같은 외적 가치를 호사스럽게 나타내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간판이란 말이 예외 없이 인간들 자신조차도 물화시킨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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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6 13:47

[꽁트] 거시기를 위하여


거시기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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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某年) 모월의 어느 여름 전국을 강타한 태풍이 지나가자 그 작은 마을의 주민들이 서서히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주민이라고 해봤자 고작 200명 안팎이지만 놀랍게도 그들 모두는 졸부들이었다. 최근 마을 근처에서 발견된 세계 최대의 금광 때문이었다. 가난한 산촌 마을에 내려진 횡재라면 횡재였다. 자신들의 땅과 집 밑에서 금 덩어리가 솟아져 나와 적게는 수억에서 수 십억이 굴러들어 왔으니 갑작스러운 돈벼락이었다.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는 다소 이상스런 표현은 순박하던 촌사람들이 처음에는 그 돈벼락에 어리둥절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개의 졸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행태들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는 의미이다. 그들의 돈을 유혹하는 온갖 검은 마수들이 달려들면서 마을은 과거의 순수하고 순박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온갖 잡스럽고 불미스러운 일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의, 식, 주와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서부터 도시적인 치정(癡情)문제는 물론 일상의 작은 꼴깝과 지랄과 발광에 이르기까지 밑바닥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 마을 사람들 중에 우리의 ‘껄떡’ 씨와 ‘딸꾹’ 씨도 당연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졸부가 되기 이전부터 껄떡씨와 딸꾹씨는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는 단짝이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바람난 마누라들이 야반도주한 동병(同病)의 아픔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그들 마누라들에 대한 넋두리와 취기가 오른 그들이 자주 내뱉던 한탄조의 말들을 종합해 볼 때 문제는 바람난 여편네들 보다 그들에게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버들가지처럼 죽도 못 쑤는 물건이 문제였던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부르는 ‘껄뚝‘과 ’딸꾹‘ 이란 그들의 별칭만 보더라도 그저 질질 침이나 흘리는 ’껄뚝’에 놀란 ‘딸꾹’ 질이 전부이니 각자에게 붙여진 별칭으로 제격이었다. 그 좋은 이름 두고 동네 꼬마 녀석들까지 ‘껄떡’이니 ‘딸꾹’이니 불러댈 뿐 아니라 무자식에다 여편네들까지 도주한 그들이고 보면 ‘거시기’ 에 맺힌 한은 남다른 데가 있었던 것이다. 졸부가 된 그들이 총을 갈고 닦고 기름칠하는 데 헌신하리라는 것을 모두들 쉬 추측할 수 있으리라. 그야말로 ‘껄떡’ 과 ‘딸꾹’ 의 사슬을 끊는 것이야말로 지상과 지하, 이 우주의 과제였다. 미확인이지만 그들이 제일 먼저 어슬렁거린 위인들이지 싶다. 그들은 산천 초목 누비며 구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으리라는 신념으로 사생결단 전국과 세계(?)를 누비며 돌아다녔다. 동남아의 대부분 국가들, 유럽, 일본 미국, 캐나다등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이 많았다. 자신들의 폐물(廢物)을 보물(寶物)로 바꾸어 놓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노력의 결실이었든지 그들의 폐물(廢物)이 아직 보물(寶物)은 아니었지만 물건다운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고 몇 달 간격으로 싸구려 물건은 거들떠 볼 것 같지 않게 생긴 호색한 여자들과 재혼까지 한 것이다. 그러자 제법 남자 흉내를 내는 그들에게 마을 사람들은 격상된 별칭을 달아주었는데 껄떡씨는 헐떡씨로 딸꾹씨는 빨딱씨로 불리여졌다. 그들은 주로 토속적으로 보다는 고상한 모던풍으로 ‘허니 헐떡’ 과 ‘미스터 빨딱’ 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는데 달라진 마을의 공기 탓이었다. 모텔, 카페와 단란주점들이 들어서면서 토속적인 분위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세련된 도시풍이 만연한 탓이었다. 아무튼 그들의 별칭은 용맹스런 군인들에게 주어지는 무공 훈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타고난 재능은 아니었지만 후천적으로 총을 갈고 닦아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는 그들이 어찌 무공의 전사가 아니겠는가.



그들에게 아프리카 바람이 분 건 [단란주점 쿨]의 미스 강 때문이었다. 자칭 서울의 명문대학교를 나왔다는 미스 강은 여느 아가씨들과는 달리 뭇사내들이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어떤 기운을 뿜어내었다. 그 기운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어쩌면 학력이 변변치 않는 마을 사람들이 갖는 고학력에 대한 위축과 함께 날카롭게 쏘아대는 요염함이 그 정체이리라. 이 남자 저 남자들이 쉬 꺽을 수 있는 노류장화가 아니라 춘향이처럼 절개있는 행실도 또한 그 정체의 일부가 아닐까 싶다. 그런 미스 강이 첩첩한 산중의 마을 구석에 들어 온 것이 순전히 돈 때문이 아니라고 하니 또 희안한 일이 아닌가.


“금광 졸부촌이라구요? 한 밑천 잡은 졸부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라구요? 내가 그런 썩어 빠질 금광과 졸부 때문에 이 구석으로 찾아든 것 같아 보여요. 천만예요. 내게도 꿈이 있다구요, 왜 이래요.” 


어느 술자리에서 했다는 말인데 졸부보다는 그녀 자신의 꿈을 쫓는 태도에 모두들 숙연해지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허나 그런 미스 강을 달갑지 않게 보는 사내들이 있는 건 당연했다.


“제깟게 무신 고상은 고상이여. 꼴깝이제. 술 팔고 웃음 팔먼서 뭔 절개는 지켜댄다꼬 생 날리여 날리는. 지가 이 산골 금광촌에 기어들어왔으믄 뻔한기지 안그려. 한 밑천 잡을라 카는기 아이고 뭐란 말이여. 여시야 여시. 무신 꼼수가 있을끼여. 고년 조심해야 되겠어.”



특히 아낙들이 더 그랬다. 고상하다 고상하다 추켜세우는 사내들의 말을 들으면서 아낙들의 오해와 경계는 더 두터워져만 갔던 것이다.


“미시 강 고년 고거 사내들을 그리도 잘 홀린다면시”

“고 잡년이 사내들을 다 잡아묵을라 카나”

“고년 고거 고단수여.” 


자칭 고고하길 바랬던 미스 강의 뜻과는 달리 그녀는 아래녁 장수의 나락에 떨어졌고 유언 무언의 압력이 미스 강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여편네들의 입방아질에 자유로워 질 수 있는 사내는 아무도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미스 강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악사천리라고 작은 마을의 소문은 절구방아 찧듯이 하루가 멀다하고 찧어대어졌기에 미스 강이 버텨내기란 어려웠고 급기야 마을을 떠나야만 하는 비운까지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 소문에 우리의 헐떡씨와 빨딱씨는 감회가 남달랐다. 평소 미스 강과 술친구가 되다 시피한 그들인지라 그녀의 떠남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자신들을 등지고 짝짝이 야반 도주한 과거의 아내들과는 달리, 그리고 현재 재혼한 색골의 여편네들과는 달리 미스 강은 색다른 여자였던 것이다. 솔직히 미스 강 앞에서는 과거의 그 기막힌 ‘껄떡’ 과 ‘딸꾹’ 으로 돌아가는 신세가 되기도 했지만 그녀와의 격의 없는 분위기의 대화만은 언제나 좋았던 것이다. 그들이 재무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대화에서 기인한 바 컸다면 컸던 것이다. 미스 강의 고언(?)이 한 몫을 했다면 했고.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세상 근심 걱정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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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기에 그녀가 떠나기 얼마 전 허니 헐떡와 미스터 빨딱씨가 미스 강과 술판을 벌린 것은 당연했다.  이별을 위한 밤이었기에 마시고 또 마셨고 붓고 또 부었다. 그들 셋은 취해 떠들고 노래했다. 횡설수설,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미스 강에게도 쉬 보이지 않던 취기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여편네들이 문제예요. 남편 간수, 남편 간수, 하는데, 사내들이 밖으로 도는 것은 여편네들 탓이에요. 그걸 제대로 못하면서 사내들만 타박하는 거라구요. 사내들도 마찬가지구요. 집안에서 죽여줘야 불만이 없고 밖에서도 자유로울 수가 있는거라구요. 말만 그럴싸하고 떠들썩한 남정네들은 무게중심이 없어 가벼운 거예요.”


헐떡씨가 꼬부라진 혀로 입을 열었다.


“고거는 말이제, 우리가 오래 전에 깨달은 것이라카이. 사내 구실 고거 중요한 것이제. 고런데 말이데이, 미시 강. 인자 미시 강이 떠나뿌먼 우리는 마 어짜노. 미시 강 설움은 누구 보다도 잘 알제. 미시 강도 알겠지만서도 이 촌구석에 있는 인간들은 다 엿놈, 엿년들인기라. 우리 거시기 문제를 저것들 문제 맨치로 개지랄 병들을 다 안틀었나 마. 미시 강도 마 들어서 쪼금 알끼다.”


빨딱씨가 맞장구를 쳤다.


“이 촌구석은 마 빨리 떠뿌는기 좋타카이. 시발 우리가 빙신 개나발 소리들으면서 얼매나 생똥을 쌌는데. 시원컸다, 미시 강. 암. 시원쿠 말구로.” 


취기가 올라 발그스름해진 미스 강의 얼굴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흐느낌도 함께했다.


“이제 아프리카로 돌아갈 거예요.”


예기치 않게 느닷없는 흐느낌과 함께 흘러나온 미스 강의 말이었기에 헐떡씨와 빨딱씨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흐느낌으로 보아 이곳에서의 수모에 대한 울분의 표현인 듯도 했지만 아프리카란 말에는 영 감(感)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아프리카. 아프리카. 두 사람의 혀 끝에서 아프리카란 말이 계속 맴돌기만 했다.


“아프리카에 제 남편과 아이들이 있거든요. 제가 버리고 온 남편과 자식들이 말이에요.”


헐떡씨가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기 무신 말이고, 미시 강. 아쁘리까라이?”

미스 강이 수건으로 눈을 훔치며 나즈막히 말을 이어나갔다.


“저 명문 대학 나왔다는 거 거짓말이에요. 이 바닥에서 저를 지키는 것은 고고한 척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거예요. 처음에 이 촌구석에 들어올 때는 흙과 함께 살다 죽으려고 들어왔었어요. 헌데 어찌 이 단란주점으로 빠지게 된거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자꾸만 아프리카에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 고통스러웠어요.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죠. 그래서 돈도 벌어야 했던 거죠. 하지만 두 사장님들께서도 아시다시피 전 이곳에서 깨끗하게 돈을 벌었어요. 졸부들이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마음만 먹으면 한 밑천 잡을 수 있는 이곳에서, 전 정말이지 깨끗해지고 싶었어요. 그것이 아프리카에 있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저의 떳떳함이라 생각했던 거죠. 그들과 함께 돈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죠.”


빨딱씨가 호기심을 빨딱하고 일으켰다.


“그라믄 아쁘리까로 이민을 간기가, 미시 강.”


미스 강이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흑인과 결혼을 했어요. 공장에서 일하다 만난 흑인이었는데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죠. 솔직히 그때 저는 미국을 동경하고 있었거든요. 공순이 소리를 들으며 희망없이 살 바에야 국제 결혼이라도 해서 미국에서 살고 싶었어요. 참 그땐 허영이 심했죠. 그 흑인과 동거를 시작했고 자식들을 줄줄이 낳기 시작했어요. 5남매를 낳았어요. 1년에 한 명 꼴로 낳아대었죠. 전 솔직히 자식들을 인질로 삼을 셈이었어요. 그래도 지 자식들인데 도망이야 가겠나 하고 말이죠. 정말이지 도망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절 끔찍이도 사랑해 주었어요. 자식들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일이 터지고 말았어요. 미국 흑인이 아니라 아프리카 흑인이었던 거예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건 말짱 거짓말이었고 그저 불법 입국자였던 것이었죠. 경찰에 체포되어 강제 송환된다니 하늘이 무너질 것 같더군요. 하지만 자식들이 문제였어요. 흑인은 내게 빌며 매달렸고 아이들은 엄마라고 울어대고 어쩔 수가 없었어요. 우리 정부에 선처를 호소하고자 했지만 그다지 내키지가 않았죠. 아이들에 대한 편견과 생활이 염려가 되었죠. 함께 아프리카의 고국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미기로 결심을 했던 거예요. 그 때처럼 모진 각오를 했던 적도 없을 겁니다. 남편도 남편이지만 자식들에 대한 책임을 끝끝내 지울 수가 없었던 거죠. 어디 아프리카의 생활이 호락호락하겠습니까. 내 한 몸 던져 자식들 만이라도  살리리라 각오를 했던 것이죠.”


빨딱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양주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쁘리까에서 그런 각오가 싹 오그라들던 가배, 미시 강. 그래서 아쁘리까를 떠났나?”              

미스 강이 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분노 때문이었어요. 아프리카에 마누라들이 셋 이나 더 있지 뭐예요. 그기다 아이들은 스물명이나 더 되었어요. 그것도 손바닥만한 집에서 바글바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꼭 개집 같았어요. 어떻게 제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생활할 수 있었겠어요. 솔직히 저 일주일만에 야반도주했어요. 일부다처제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생활을 접하게 되니 분위기가 너무나 싫었어요. 분노도 함께 치밀었고요. 왜 흑인 남편은 한국까지 와서 일부다처제 속으로 저를 끌어들였는지 꾀심 했어요. 너무 타문화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주의라고 생각했죠. 성적으로도 인정하기 어려웠어요. 아마 그래서 아프리카에는 에이즈가 만연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타고도 후회는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한국에서 얼마동안 생활하면서 아이들의 얼굴이 아른거리기 시작했어요. 미칠 것 같더군요. 이곳으로 찾아들은 것은 바로 그런 그리움을 잊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흙에 묻혀 과거를 다 잊고 살아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안되더라구요. 이곳에서 술동무가 되어 돈도 꽤 벌었으니 이제 아프리카로 가서 모든 것 사죄하고 함께 살아 갈려는 거예요. 이제 아프리카가 왜 등장했는지 아시겠죠.”


참으로 헌신적인 한국의 여인상이랄까. 논픽션에서도 가능한 이야기일까? 미스 강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참으로 어리석으리 만치 희생적인 사랑이요 모성애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헐떡씨와 빨딱씨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고 미스 강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분명 취기 탓이었다. 솔직히 헐떡씨와 빨딱씨는 너무 취해있었다.  

미스 강의 심기를 괴롭힌 건 빨딱씨의 이런 말 때문이었다.


“미시 강, 그 흑인 말이제~ 어짜믄 그리도 셀수가 있노, 응.”


헐떡씨는 한 수를 더 떴다.


“깜디들이 마 거시기 하나는 끝내준다 아이가. 마, 미시 강도 정신 차리래이. 거시기 하나로 인생을 다 살아가는 기 아인기라. 딸꾹~~ ”


미스 강의 얼굴에 분노랄까, 동정이랄까, 한심하다는 걸까 뭐 그런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미스 강의 목소리에 약간의 콧바람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과 자연산 아르마딜로의 날개와 캥거루의 거시기가 등장 한 건 바로 그때쯤이었다.


“사장님들, 요새 힘이나 제대로 쓰시고 계세요? 집안에서 사모님들이 편안해야 벌려 놓은 사업들이 잘 돌아가는 거예요. 아르마딜로 날개나 캥거루 거시기 한 번 잡숴 보세요. 제 흑인 남편도 그걸 많이도 먹었대요...”


헐떡씨가 헐떡거리며 말허리를 잘랐다.


“뭐, 아리마...골로...뭐 그 날개 하고 캥가리 거시기라! 미스 강, 거기 증말이가. 거기 진짜 죽이주나 응?”

    

“아니 아르마 골로가 아니라 딜로에요. 그럼요. 자연산 아르마딜로 날개와 캥거루 거시기는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대인기래요. 비아그라보다도 약효가 더 끝내준대요. 최근에 미국에서 임상 실험이 다 끝났다는 군요.”


빨딱씨가 괴성을 내질렀다. 


“뭐라, 그 머시기...비아그라보다도! 히안하대이(신기하네)!”


미스 강의 눈가에 어떤 서글픔의 감정이 맺혀있는 듯 했다.


“사장님들도 이 번에 저와 함께 아프리카 가요. 좋은 물건 제가 가감 없이 소개해 줄테니.”


빨딱씨가 무엇이 그리 신이 났는지 맥주 잔에 작은 양주잔을 힘있게 처넣으며 말했다.


“그렇제,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이고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도 아쁘리까는 생각도 안해봣째. 마, 이번 기회에 미시 강하고 아쁘리까에 함 가볼까. 가마이(가만히)생각해봐도 아프리카 거가 시커머이 힘 쓸만한 기들은 다 모이가 안있겠나. 맛다 맛다.”


미스 강이 맛장구를 쳤다. 단단히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조금 있어 보세요. 우리 나라에 아르마딜로 날개하고 캥거루 거시기 소문이 쫙 퍼질 거예요. 값 뛰기 전에 아프리카 관광도 하고 보조식도 한 번 잡숴보세요. 저도 덕 좀 보게요, 호호”



다음 날 미스 강이 흘린 그 정보에 대해 헐떡씨와 빨딱씨는 진지한 논의 끝에 이런 결론을 도출했다.


‘밑지봐야. 본전 아이가. 그라고 미시 강이 이때까정 좋은 거는 많이도 소개 안해줏나. 아르마딜로 날개하고 캥거루 거시기도 함 무보자(먹어보자). 이 참에 마 안 가본 아프리카 관광도 하고 다른 건강보조식도 묵어보먼 안되겠나. 그라고 보이 아프리카 하이 힘있게 느끼지네 시꺼머이 마. 껌디들이 죽이 주는 거는, 마, 다 이유가 있다 아이가. 둘 만이 가는기다. 아무도 모리게 말이다. 미스 강은 아쁘리카에서 합류하고 말이제.’


그리고 사흘 뒤 그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르마딜로 날개와 캥거루 거시기를 상상하며 아프리카로 떠났다. 명분은 아프리카 기아체험으로 말이다.(*)


그림출처:세계일보&세계닷컴(www.segye.com)
사진출처:www.delarg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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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3 15:04

[꽁트]청국장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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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

 

청국장의 맛


이 간단한 진리를 부모들은 왜 이다지도 모르는지 몰라. 식빵에 이렇게 치즈와 햄을 놓고 다시 식빵 한 조각을 올려먹는 것이, 포크로 돌돌 말아 쪽쪽 빨아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를 말야. 악취(?)가 나지도 않고 얼마나 좋아. 그리고 먹으면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설거지 따위의 노동이 필요 없어 시간을 유용할 수 있고 말야.


그런데도 우리나라 음식의 위대성만을 주입하려는 그 얼빠진 부모들이, 아니 모든 한국인들이 난 정말이지 싫어. 아주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음식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지고 케케묵은 것인지 몰라.


밥과 국그릇을 비롯해서 그 많은 반찬그릇들이 얼마나 공간적, 시간적으로 비효율적인가 말이야. 자원의 낭비는 물론이고, 이동성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부수적으로 따르는 노동의 양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야. 제사를 예로 떠올려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이동성이라는 말을 하면 혹 김밥이 우리나라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얼빠진 인간들은 없겠지. 이왕 김밥이란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스시도 얼마나 좋으냐 말야. 이 세계화의 시대에, 일분 일초도 아까운 이 속도의 시대에 밥과 국, 반찬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그 정신 사나운 장면을 상상해봐. 갓 쓰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것 같지 않니.


이렇게 본다면 또한 우리나라 음식문화는 야만의 상징이 아닐 수 없어. 허위의식과 권위주의는 물론이고 자원낭비와 환경파괴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음식문화는 종적으로 횡적으로 많은 부작용만을 잉태하고 있으니 말야.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런 음식 문화 하나만 봐도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다른 문화들이 갖는 성격들을 고스란히 짐작해 볼 수 있지 않겠니. [빨리 빨리 문화]가 그런 것 아니겠어. 그 많은 밥과 국과 반찬에 여유롭게 반응할 수 있겠니. 빨리 빨리 먹어야 모든 반찬을 한 번씩이라도 먹을 수가 있지 않겠니. 귀신은 뭐하고 있는지 몰라. 이런 음식 문화를 개혁하지 않고 말야. 무슨 무슨 개혁들이다 말들이 많은데 도대체 왜 우리나라 음식문화 개혁은 안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난 밥이 정말 싫어. 국이 정말 싫어. 김치가 무지하게 싫어. 청국장이나 된장찌개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난단 말야. 한국 사람인 나에게도 구역질이 날 정돈데 뭐 김치가 세계인들의 음식이 되고 있다고 떠드니, 나 원 참. 김치에 들어있는 젓갈의 효능과 발효를 과학이란 이름을 빌려 두리 뭉실하게 신비화시키기 전에 좀 더 냉정하게 김치의 실용성과 김치에 대한 세계인의 의식을 알아 볼 수는 없을까.


아직도 지동설처럼 대한민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으려는 한심한 인간들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이라니. 가관인 것은 한국 사람은 김치 아니면 못산다는 그 얼토당토않은 세뇌공작이지. 민족의 동질감이니 공동체 의식이니 하며 음식부터 내세우는데 정말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어. 내 부모들이 매일 똑같은 밥에 국과 반찬을 식탁에 올려놓는 것은 이런 세뇌의 결과인지도 모르지.


도대체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밥과 김치가 주식이 되어야만 하고 국이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다녀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어. 다른 것들은 다 바뀌는데 왜 이 식탁 위의 음식들만은 바뀌지 않는지 말야. 정보의 시대에 인터넷이 가정에 속속 들어와 앉아있는 이 마당에 패스트푸드나 일식이나 양식으로 식사를 할 법도 하잖아.


세계화의 시대에, 개방의 시대에 식탁에 수저 대신에 나이프와 포크를 올려놓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구. 부모들은 언제나 밥과 김치와 된장찌개를 왜 주식으로만 고집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야. 난 집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미쳐버릴 것만 같아.


특히 아빠가 즐겨먹는 청국장과 젓갈이 식탁에 오르기라도 하면 구역질을 참지 못해 화장실로 뛰어가기가 일쑤였지. 언젠가는 엄마가 임신으로 오해한 적이 있었지 뭐야. 구역질을 하며 뛰쳐나가는 나를 보고 그런 의심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어. 한참을 화장실에서 토하고 나서도 여전히 콤콤하고 썩은 듯한 냄새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지.


그날 난 엄마에게 모진 취조(?)를 당해야만 했어. 요즘 신세대론을 쉴 새 없이 내뱉어대지 뭐야. 하지만 그런 잔소리는 청국장 냄새보다는 쉽게 참을 만 했어. 나는 엄마의 잔소리가 끝나자 청국장 때문에 구역질을 했다고 말했지. 나의 그런 말에 엄마는 의심을 쉬 뿌리치지는 못했지만 임신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안도하는 듯 했어. 하지만 청국장 때문에 구역질을 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지.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어. 아마 대한민국의 청국장 옹호론자들은 내게 벼락이라도 내리고 싶겠지. 엄마도 예외는 아니었던 거지.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엄마는 막무가내로 나를 나무라기만 하셨어.


“망할 년, 넌 한국 사람이 아니냐?”


그런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나의 식성은 조금도 고려하지도 않고 청국장이다 젓갈이다 된장 등을 식탁에 꾸준하게 올려댄 건 두말할 나위가 없어.


한참 사춘기의 예민함으로 고민하는 나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어. 물론 엄마는 간혹 샐러드나 햄, 샌드위치나 포크커틀릿을 해주시기도 했지만 영 엉성하기만 했지. 샐러드 옆에 된장찌개가 놓이고 샌드위치와 함께 김치를 올려놓고 포크커틀릿에 미역국을 함께 먹어야했으니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있었겠니.


난 집에서 밥을 먹을 때면 언제나 다이어트를 핑계로 양을 줄이곤 했는데 이유는 바로 우리의 위대한(?) 주식 때문이었다는 걸 눈치는 챌 수 있겠지. 내가 제일 행복할 때는 말야,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햄버거나 닭고기를 먹으며 천천히 맛을 음미하는 것이지. 물론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여 먹는 다거나, 아니면 스시에 샤브샤브를 먹거나 이탈리안 식당에서 스파게티나 피자를 먹는 것은 더 행복한 일이지만 흔치 않은 일이라 안타까울 뿐이지. 마치 탈옥한 죄수가 세상의 공기를 호흡하듯이 말야.


난 이런 음식들을 진정으로 사랑해. 찌꺼기가 남아도니, 아니면 밥그릇이다 국그릇이다 반찬그릇이다 하며 그 많은 그릇들이 필요하니. 그러니 설거지가 없어 물이 절약되고 환경에 해로움을 덜 미치지 않니. 이렇게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음식 문화를 난 진심으로 사랑해. 패스트푸드라고 하며 아주 눈을 깔고 대하는 우리나라 음식 옹호 골수분자들은 도대체 이러한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건지 말야. 그저 콜레스테롤 타령이나 하면서 비만이다 고혈압이다 위협과 협박을 해대기만 하고 말야. 무식해도 너무 무식하단 생각이 들어.


대한민국이란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고 그 한국 사람은 한국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나와 있는 법이니. 물론 외식집들이 번창하고 있긴 하지만 가정에서의 한국 음식 집착은 여전하기만 하지. 한국 음식만을 고집하는 고리타분한 부모들의 혓바닥하고는......


어쩌면 난 대한민국이란 땅을 떠날지도 몰라. 그 지긋지긋한 음식문화 때문에 말야. 난 정말이지 청국장 냄새나 된장 냄새, 젓갈 냄새나 김치냄새 따위와는 함께 살수가 없어. 한국 사람 운운하며 동일한 미각을 가질 것을 강요하는 넓게는 대한민국이, 좁게는 부모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니 솔직히 말하면 증오스럽기까지 해.


하지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음식들과 음식문화를 나 하나 저항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일이고 보면 개인적인 선택으로 한국 음식을 피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것이 나의 한계이며 우리 10대들의 한계가 아니겠니.


내가 집을 뛰쳐나온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어. 가출이 유일한 대안이었어. 내가 이 나라를 떠나려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지. 난 한계를 뛰어넘고 싶었어. 진정으로 말야. 난 패스트푸드를 위해 내 가족을 버렸어.


남들은 내 가출의 이유를 이성문제다 학업문제다 연예인 문제다 뭐 그런 것 따위에 초점을 맞추나 본데 결코 그런 것 때문은 아니었어. 지긋지긋한 밥과 김치와 청국장과 된장과 젓갈 때문이었지. 무엇보다도 청국장이 결정적인 음식이었어. 가출을 하던 날도 말야, 그 역겨운 청국장 냄새를 정말이지 참을 수 없었거든.


이제 그런 지옥으로부터 도피를 했으니 내 마음대로 음식을 선택해서 먹을 수 있어 너무나도 행복해. 다시 말하건대 가출 이후에는 이 나라를 미련 없이 떠날 거야. 청국장과 된장과 김치가 없는 세계로 말이야.  


이랬던 그녀였다. 패스트푸드의 나라 미국으로 이민 후 청국장과 김치와 고추장과 젓갈이 먹고 싶어 거의 미쳐버린 그녀는 한국 음식 예찬론자가 되어 한국으로의 역이민을 다시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 기회에 그녀의 한국 음식 예찬론을 들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사진 출처:http://kr.blog.yahoo.com/qkrgudwns011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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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6 14:16

[일본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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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인간의 삶이란 한 편의 서사(긴 이야기)와도 같다. 그러나 의도한데로 구성하고 전개할 수 없는 서사이다. 동화적인 상상과 환상으로 서사를 이끌어 갈 수도 없다. 언제나 폭죽을 터트리고 꽃이 만발하고 음악으로 가득 찬 동화의 세상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없다. 이 세상 어느 인간도 작가가 소설을 쓰듯이 자신의 삶을 의도대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겨우 불확실한 미래를 추측가능하게 하려고 노력하거나 지뢰밭을 걷듯이 조심스럽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 원고지에 쓰다가 찢어버리고 다시 쓸 수는 없는 것이 인생이다. 마츠코의 남자중 하나인 소설가 야마카와 처럼 삶의 원고를 찢어버린 다는 것은 바로 죽음인 것이다. 아무리 불행한 삶이라도 다시 번복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넝마처럼 끌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꽃동산이나 폭죽은 아니더라도 의도대로 조차 삶을 살아갈 수 없을까? 왜 원치도 않는 고통을 감당해야만 할까? 인간의 삶을 비틀어 버리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마츠코의 일생은 바로 그러한 질문에 대한 진지한 대답처럼 여겨진다. 마츠코의 비극적인 죽음에 부단하게 영향을 미친 크고 작은 이유들은 비록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가벼운 사회면 신문 한 장이 이를 잘 입증해 준다. 그러나 신문은 알량하게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사회면 단 몇 줄의 기사에 무감각하게 싣는다. 비일비재하게 기사화되는 일상이지만 동시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게 된 일상이기도 하다. 약간의 동정으로 얼마의 적선만을 던져주면서 좀 더 감각적이고 색다른 뉴스에 시선을 집중한다. 아니면 애당초 시선을 빼앗겨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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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속 요정이 된 마츠코


모든 생물체가 커져가는 성장의 과정을 거치듯이 마츠코의 일생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여기에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과거에 아주 귀여운 마츠코의 가족에서 시작된다. 아주 사소한 오해 그러나 어린 마츠코에게는 강박에 가까운 의식이었다. 아버지가 어린 동생만 사랑한다는 오해였다. 그러한 오해는 외로움이 되었고 동생에 대한 증오로 변해갔다. 아버지가 표현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오해는 이렇게 커져만 갔다. 아버지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일기장에 마츠코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루 일기를 아버지는 꼭 ‘오늘도 마츠코 연락 없음’ 이란 말로 끝맺음을 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은 마츠코의 삶이 뒤 틀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너무나도 사소한 듯이 보이는 이 오해가 삶을 빙빙 돌아 해소가 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놀이동산 무대에서 배우들이 짓는 묘한 얼굴 표정을 보고 아버지가 웃자 그런 표정을 흉내 내면서 아버지를 웃게 만들려는 마츠코의 마음은 그저 동심이었다. 그러나 동생에 빼앗긴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끊임없이 아버지 앞에서 표정을 지은 결과 그것이 씻지 못할 버릇이 되어 더 큰 불행을 가져 오게 된다.

마츠코의 일생은 가정에서 비롯된 부녀간, 자매간의 오해에서 부조리한 학교 현장, 비현실적 예술 공간, 맛사지 클럽, 미용실, 감옥, 야쿠자, 변두리 아파트로 이어지면서 고단한 부침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마츠코의 일생을 비틀어 놓는 것은 모두 남자들이란 사실이다. 이것은 감독이 철저하게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여자들은 대체로 수동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제의 가족, 남교사 중심의 학교, 남성중심의 성문화, 문학의 변태성과 폭력성, 야쿠자, 교도소, 남성 아이돌 등 전부 남자들이 마츠코의 삶에 끼어들어 영향을 미친다. 아직도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요소가 똬리를 틀고 있는 듯 보인다. 좀 더 정형화해서 남성 중심의 사회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마츠코와 교도소에서 만나 유일하게 우정을 나누는 포르노 배우인 메구미의 말이 남성적인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여성의 위치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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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강을 바라보는 마츠코



“여자라면 누구나 백설공주, 신데렐라 그런 동화같은 이야길 동경하지.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백조가 되고 싶었는데 눈을 뜨면 새까만 까마귀가 되있다나 어쩐다나. 오직 한 번 뿐인 두 번 살 수 없는 인생인데 이게 동화라만 너무 잔혹해.”

백마탄 왕자가 나타나는 동화이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백마가 아닌 권위적인 남성의 폭력이 지배하는 곳일 뿐이다. 영화에서는 마츠코의 심상이 후광처럼 동화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지만 현실과는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 의도라 하더라도 마츠코의 비극적인 일생에 동화적인 요소, 즉 화려한 색채와 발랄한 음, 그리고 과장된 행동과 인물 등을 끼워 넣은 것은 다소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가 종교적인 엄숙성(저녁노을)이나 성화의 인상을 엿보이게도 하지만 너무 과장되어 있다. 결국 마츠코의 아름다운 동화는 동화를 잃어버린 아이들에 의해 비참하게 깨어지는 파국을 맞이한다. 아이들이 작은 현실의 동화마저도 부수어버리는 이 각박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종교적인 영역에 내 맡겨야만 할까? 영화는 조카인 쇼가 마츠코를 신이라 부르게 하지만 신을 이토록 타살한 현실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마츠코와 그녀를 둘러싼 삶의 조건들을 돌아보면서 삶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건들이 삶을 살게 만드는 굴레의 측면을 본다. 인간의 삶이라는 서사 장르 중에서 동화는 저 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이 영화를 한 편의 성인 동화라고 볼 수 있다면 그 나마 다행이다 싶다. (*)

이미지출처(링크):www.monadist.com/5?TSSESSIO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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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4 13:03

[꽁트] 바람의 신화


 

영화 바람의 파이터 중에서



바람의 신화


K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건 여름방학을 일주일쯤 앞두고였다. 사회의 통념을 깨려고 부단히  온 몸으로 발버둥 쳐왔던(?) K이고 보면 방학을 앞두고 무단결석, 아니 행방을 알 수 없는 가출을 한 것이 처음에는 그다지 심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패싸움으로 머리가 깨지고, 오토바이를 몰다 중상을 입고, 여자 친구 낙태를 시키고, 가출을 다반사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학교로 돌아왔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처음의 무던한 생각과는 달리 이번 가출은 그저 기우로만 여겨지지가 않았다.


정말이지 K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K의 사라짐은 말 그대로 완벽한 사라짐이었다. 집에도, 학교에도, 여자애들과 어울리는 클럽에도, 비디오방과 만화방에도, 그 어느 곳에서도 K의 자취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K가 바람처럼 사라진 사건은 한동안 편모에게, 담임에게, 친구들에게, 심지어 경찰에게도 지우지 몰할 슬픔과 충격처럼 다가왔지만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드디어는 잊어야 할 불필요하고 기분 나쁜 기억이나 물건처럼 여지없이 망각의 강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다 K가 바람처럼 홀연히 다시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고 바람처럼 나타난 것이다.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K가 다시 나타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사회와 학교에 반항적이고 도전적인 K였기에 K 스스로 떠나던 쫓겨나던 학교를 그만두리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K가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운동화를 신고 바람처럼 다시 나타난 것이다. 교복도 가방도 헤어스타일도 학교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 한 듯 했지만 여전히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K의 외모는 급하게 정리한 흔적들이 많았다. 그러나 바람 같은 변덕과는 다른 단호한 모습이 서려있었다. 신산했던 K의 뒷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그런 모습은 신비하고 경이롭게 여겨질 정도였다. 무어라 할까, 이전의 K가 모나고 달구어진 돌이었다면 이젠 바닷가 흰 포말로 깨어지는 갯바위 같았다. 이전의 K가 삭이지 못한 분노로 몸부림치던 폭죽 같은 인간이었다면 이젠 숯불 같은 그윽함이 서려있었다.


K가 학교로 돌아 온 날 담임은 K에게 딱 한마디만을 했다. 좀 잘해보자! K는 아무런 말없이 이전의 호전적인 눈빛으로가 아니라 온화해진 눈빛으로 담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라운 변화였다. 사실 담임은 K를 퇴학 처리하려던 참이었다. K에 대한 원망보다는 다른 학생들을 위해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경찰에서 신원을 찾지 못하는 상태에서 학적을 유지시키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달라진 K의 눈빛을 보는 순간 담임은 K에게 중간고사를 치도록 허락하고 말았다.


중간고사를 치고 K가 또 홀연히 떠나버렸다. 아니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버렸다. 중간고사를 치고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람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속에 칼을 꽂고 떠나갔다. 영웅의 칼이었다. 전교 1등이라는 칼이었다. K의 칼은 우리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예리한 고통으로 박혀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이자 이변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충격과 이변의 감정은 전설이 되어갔고 신화가 되어갔다.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의 부모들에게, 그렇게 세상의 신화가 되어갔다. 그리고 영원히 교육이란 것이 존재하는 한 신화로 남을 것 같았다. 이 신화을 사리사욕에 의해 왜곡시키는 인간들-사교육을 부채질하는 인간들과 학원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영웅의 고고하고 신선한 회오리 바람에 형체 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영웅의 신화는 인간의 가슴에서 꿈틀거리며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에 오아시스가 되어 주었다.


사족: K를 이용하는 사악한 인간들은 K의 신화와 더불어 늘어만 갔고 동시에 K의 신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악한, 괴물)들이 되어갔다. K가 그들 학원 출신이라고, 그들 출판사의 교재로 공부했다고, 그들 학용품을 사용했다고, 그들 학습지로 학습했다고……. 그렇게 허위 광고는 눈덩이처럼 커져 이 또한 바람 아닌 거품 같은 전설이 되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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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1 20:24

[생각 돌아보기] 성욕의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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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성욕과 관련해서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일정한 나이, 대체로 사춘기에 접어들면 예외 없이 자연스럽게 성적 욕구가 생겨나게 되고, 따라서 내면의 본능적인 성적 욕구와 외부의 강제적인 도덕과 사회적인 요구와 기대 사이에서 찢어지고 흩어지는 분열된 자아로 고뇌하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성욕의 해소와 억압의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복잡하고 해결 난해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역사가 인간 중심의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고도의 문명을 형성하면서 본능이 억압받고 중심에서 배제되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도화되고 체제화 된 인간적인 이성의 ‘차갑고’ ‘냉정한’ 문명이 그 존속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물적 본능을 억압하거나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순화된 본능이 태양의 그림자같이 그 영역을 넓혀온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은 인간의 이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억압된 본능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순화된 본능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간의 문화를 억압된 본능(성욕)의 승화된 양상으로 파악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을 순화 시키는 것에는 예술과 더불어 교육제도가 많은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의 교육제도는 이성과 합리성의 계발과 더불어 인간성의 고취라는 명목 하에 동물적인 본능을 순화시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즉 인간성의 고취라는 것은 이 성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창조적으로 승화시킬 것이냐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을 것이다.  성욕이 창조적인 행위로 출구를 발산할 때 그것에 문화적, 교육적, 종교적인 라벨을 붙여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근의 영어에 대한 강조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국가의 존속을 위한 실용적인 인간상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파악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영어를 통해 국가 경쟁력과 실용적인 인간상을 강조하는 것은 본능을 강제하고 억압하는 국가주의의 극단적인 변형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순화된 본능은 고급이나 세련미의 고상한 이름으로,  동물적, 본능적이고 탐욕스런 성욕에 관해서는 ‘양심의 가책’ 이나 ‘수치심’ 이나 ‘위선’ 또는 ‘정신이상’ 이란 감정이나 인식을 갖게 만들어왔다. 승화되지 않은 본능(성욕)은 저질이고 더럽고 타락한 것이란 인식의 팽배가 사회를, 특히 아직도 유교의 영향이 큰 우리 사회를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성격으로 만들어 놓은 측면을 간과 할 수 없다. 의식의 이면으로 감추어지고 억압되어져야 할 성욕이 건전하게 형성된 듯한 의식층을 뚫고나와 타인에게 성욕을 탐욕적으로 발산하게 될 때는 영락없는 위선자의 딱지가 붙여지는 것이다.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경우가 그렇다. 피해자들은 평소 가해자들을 존경하고 믿었던 것이다. 존경받고 믿을 만한 사람이었기에 위선의 감정은 더 깊어지는 것이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10대들에게 있어 성욕은 그 자체로서 위선이란 죄책감을 갖게 하기도 한다. 솔직히 필자도 어린 시절 그런 죄책감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특히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숨어서 자위행위나 만원 통학 버스에서 여학생에게 몸을 밀착하는 행위 등을 했을 때는 어김없이 위선자란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일을 반복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괴롭고도 괴로운 성욕의 질곡이었다.          


바로 이 위선이란 감정의 사회 문화적인 경로를 추적해보면 아마도 사회적인 억압장치의 부산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동물을 인간이게 하는 거의 모든 장치들이 아마도 성욕을 죄악시했을 것이다. 특히 가족과 공동체등 가부장적인 질서는 혼란한 성욕을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성욕을 죄악시 한 것은 신에게 순종하는 종교적인 질서의 필요에 의해서일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의 선악과도 성욕의 통제라는 의미 해석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욕이 인간이게 하는 이 모든 제도와 체제의 원리와 반할 때 동물이라는 위선의 딱지가 붙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위선을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자연스러워야 할 성욕을 폭력적으로 병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성행위에는 질서와 정정당당한 경쟁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인간에게 성행위는 그 나름대로의 원칙과 정당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서로간의 동의와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위선은 순화된 본능이 억압해온 성욕에 대한 지나친 죄책감이다. 성욕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과 같다. 한 순간 막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홍수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의 10대들에게 충고하건대 성욕을 때로 자위행위나 이성과의 교제와 같은 방법으로 해소하는 경우 지나친 죄책감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위선이 아니다. 어차피 성욕에 대해 억압해야만 하는 환경이라면, 중요한 것은 성에 대한 건전한 의식이다. 그리고 임신과 낙태에 대한 정확한 정보, 건강, 교육, 경제적 여건 등 현실적 고려이다. 또한 성욕을 억제하는 것 그 자체도 괴로운 자기 수행이며 속과 겉이 다른 위선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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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본능이 억압되고 통제되어 왔지만 앞서 말했듯이 본능이 그 영역을 넓혀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 본능의 영역을 넓히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해 왔으며 예술은 인간 본능의 고귀한 산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성욕의 괴로움과 관련해서, 이제 인간은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해 있다.(아니 이것은 인간 일반의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개인들 각자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이며 양자의 공존도 가능하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언급해 보면, 그 하나는 성욕을 창조적으로 승화하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성욕의 직접적이고 동물적인 해소가 그것이다.

제도화된 결혼을 통한 성욕의 해소는 제외하고, 성욕의 직접적인 해소는 성범죄나 성상업주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매춘은 성상업주의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것이 성욕의 변질되고 왜곡된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러한 상업주의가 인간의 순수한 성욕해소는 무관하게 인간의 비극을 잉태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술, 마약, 범죄 등 성욕해소를 변질시킬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0대들의 원조교제는 이러한 변질의 전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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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에서 다소 무리한 주장이긴 하지만, 승화된 성욕이 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성상업주의보다 성욕 해소의 더 효과적인 방법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욕의 해소를 주로 직접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것 같이 보인다. 따라서 성욕으로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문화 보다는 직접적으로 성욕을 배출하는 성범죄나 성상업주의가 더 횡행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인류 문화는 성욕의 승화에서 창조되었다는 말처럼 창조적인 승화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과장된 표현인지는 몰라도 그야말로 성욕이 문화의 질을 높이느냐 저질로 만드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예민한 감수성이 있기에 많은 분야에서 창조적인 승화를 이룰 수가 있다. 예술, 스포츠, 컴퓨터 등이 그런 분야이다. 성욕의 괴로움에 빠져 범죄까지 저지르는 10대(사실 기성세대가 더 심각하며 10대들은 성범죄는 기성세대의 모방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들은 참으로 안타깝다. 분명히 창조적인 다른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미래 자산인 10대들이 성욕의 괴로움을 창조적으로 해소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와 기성세대의 노력이 절실하다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성세대가 성욕을 창조적으로 승화하여 바람직한 성문화를 이루려는 의지와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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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31 11:11

[꽁트] 꽁트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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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선언서




꽁트 선언

글을 읽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그건 당연하다는 반발도 만만치 않다. 글을 대체하는 수많은 매체들이 등장했고, 이제 글은 낡은 전축과 LP 레코드판처럼 시대와는 걸맞지 않다고들 한다. 글이 문학의 유일한 매체였을 때 문학은 문화 그 자체로서 인식되곤 했다. 그러나 수많은 매체들의 등장으로 문화의 영역이 확대되고 대중화됨으로써 이제는 문학이 문화의 하위 개념으로 저 한 구석을 자치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의문이다. 왜 짧은 꽁트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가? 단숨에, 가볍게 읽을 수 있고 부담 없이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꽁트가 왜 그 가치와 유효성을 인정받지 못하는가 말인가? 화장실에서 똥을 누는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분량인 꽁트가 왜 똥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할까? 이건 정말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꽁트가 재미있고 유쾌하면서, 경박하지 않고 진지하기까지 하다면 속도의 시대에 적합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말이다. 문학비평가나 문화 비평가들은 왜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을까? 저속한 통속소설이나 저질문화를 강하게 비판하기는 해도 꽁트에 대한 적절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꽁트가 비평가의 애정 어린 관심 대상이 되지 못해왔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의 위기 운운하면서도 순수의 노스텔자에 빠져 대하소설이나 장편소설, 그리고 순수소설을 옹호하거나, 마지못한 현실과의 타협인 냥 문학 영역의 확장으로써 판타지 소설이나 유사 역사소설 등 대중소설에 관심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왜 꽁트는 아닌가? 도무지 이러한 현상을 이해 할 수가 없다. 비평가들은 꽁트는 문학 위기의 시대에 애정과 관심을 보낼 수 있는 장르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진지함과 깊이가 없다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의문은 풀리지가 않는다.

그러나 비평가들만을 탓을 것도 아니지 싶다. 정작 당사자인 소설가들의 꽁트에 대한 태도 또한 비평가들의 무관심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한 것은 아니다. 그들 또한 꽁트가 작품을 쓰는 중에 간간히 빼내는 배설물 정도로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여간 가슴 아픈 일이 아니다. 왜 이러한 비극적인 일이 백주대낮에 태연하게 자행되고 있는가? 이건 테러고 강간이다. 소설을 쓰면서 억눌린 욕정을 푸는 강간행위에 다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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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독립선언서



대중들은 또 왜 변덕스럽고 괴팍스러운가? 다매체시대의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진지함을 부여하면서 읽기의 편리성을 고려한 적정한 길이와 읽기의 재미를 왜 인정하지 않는가? 코미디나 개그에 빠져들면서도 짧은 꽁트에는 왜 그토록 무관심한가? 똥을 누지 않는가? 똥을 누면서 꽁트 정도는 느긋하게 읽을 수 있지 않는가? 적어도 중급의 문학의 질을 보장 할 수 있는 꽁트가 순수와 대중, 고급과 저급의 중첩부분으로 양자를 만족 시킬 수 있는 장르가 될 수 있지 않는가? 양극단, 이를테면 고급과 저급, 고질과 저질, 순수와 비순수로 양분되는 문화의 극단적인 분리현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 장르가 될 수 있지 않는가?

꽁트는 소설 엘리베이트의 1층이다.

이 말은 꽁트를 위한 중요한 선언이다. 대중들은 위로는 꽁트와 연속적인 선상에서 순수소설과 더 많은 접점을 가지게 될 것이며, 동시에 아래로는 꽁트와 연속선상에서 대중소설과 더 많은 접촉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비평가와 소설가와 독자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꽁트 자체에 대해 무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비평가, 작가, 그리고 대중들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꽁트를 시대의 한 트렌드로 세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부지런히 꽁트를 쓸 것이다. 경멸과 멸시의 시선도 감수 할 것이다. 박쥐같은 처세라고 비난도 할 것이다. 그러나 꽁트를 문학의 지평 확대를 위한 튼실한 기반으로 세워 놓고 말 것이다.

*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정권접수위원장님에게 간곡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바입니다. 차기 정부에서는 문화부의 명칭을 문화꽁트부로 추진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학교의 정규교과에 꽁트 과목도 신설해 주셨으면 합니다. 문학의 세계화란 차원에서 영어로 꽁트를 쓰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동시에 기러기나 펭귄 아빠와 사교육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영어교육의 일대 혁명적인 방법으로 정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소 황당하고 사소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아주 중차대한 조치로써 모든 건물의 엘리베이트 1층을 [꽁트층]으로 표기할 수 있도록 건축법으로 명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4층을 F층으로 표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꽁트를 통한 문화 진작에 거대한 기여를 할 것입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기를 앙망합니다.

*

당신이 보낸 선언서 답잖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좀 무리가 아닐까 합니다. 당신의 꽁트에 대한 그 열정은 치하합니다. 우선 당신이 간과한 사실 하나를 언급하자면 언론의 관점입니다. 당신의 그 의미있는 발상을 언론은 얼마나 유치하게 치부해 버릴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는 충고이니 언론에는 이런 선언서 따윈 보내지 말았으면 합니다. 당신이 정신병자나 사기꾼이나 위선자로 매도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꽁트 따윈 이 세상에 별 상품성이나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우리의 대중문화의 우상인 나모씨 같은 가수와 꽁트를 결코 동일한 가치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거니와 진심어린 충고 반드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꽁트 부지런히 써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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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31 10:50

[생각돌아보기] 영어광고, 과장인가 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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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광고, 과장인가 사실인가?

요즈음 신문 지면을 보면 영어회화 광고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있다. 학원 광고와 학습 교재는 물론 영어 학습 관련 서적을 비롯해 각종의 다양한 학습법들이 선보이고 있다. 정말이지 눈이 어지러울 정도이다.

대부분의 광고가 그렇듯이 영어 광고 또한 긍정적으로는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준다고 할 수 있겠지만 부정적으로는 오히려 절망감과 좌절을 안겨주지 않을까 걱정이다. [영어회화를 단기 완성]하고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될 것]처럼 떠벌리고 [최고의 학습법이라 단언]하는 광고들이 과연 과학적으로, 아니 양보를 해서 현실적으로 사실일까.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만약 광고대로 라면 필자는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단기]와 [저절로]와 [최상의 학습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필자 자신의 지능에 대한 절망감이며 투자한 시간들에 대한 절망감이다. 도대체 [나는 지금까지 무얼 했는가] 하는 절망감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대개의 영어 광고들이 진심으로 영어회화의 [습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 [돈]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과장이고 실현성이 희박하다면 어느 정도 안도가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에겐 그러한 광고들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것을 밝혀낸다면 자신의 지능에 대해 절망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지만 무슨 수로 과장임을 밝혀 낼 수 있는 것인가? 솔직히 학습이란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증명해낼 도리가 없을뿐더러 혹 결과가 광고의 사실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다른 요소들에 핑계를 댄다면 어쩌겠는가. 이를테면 영어에 흥미가 없다거나 성격상의 문제 등 심리적인 측면으로 말이다. 이것 또한 증명해 낼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만약 학문적으로 이론적으로 광고의 내용을 뒤엎고자 한다면 두루 이론을 섭렵해야 하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 또한 완전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 습득이론 자체가 완전히 객관화시킬 수 있는 과학이 아니라 추론과 가설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머릿속에서 언어를 습득하는 것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실험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렵다. 필자의 절망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것만 같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추론과 가설은 어느 정도 해석상의 유연함이 가능하기에 터무니없는 논리만 아니라면 과장이라 지적한들 논박을 받을지언정 거짓이라 손가락질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종의 능력 없는 자신의 위안으로서 필자 혼자만이라도 이렇게 단언하는 것이다.   

과장 광고에 대한 문제가 심심찮게 보도되기도 하지만 영어광고는 과장의 지적은 커녕 시류에 편승해서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광고의 규모도 신문의 한 모퉁이가 아니라 전면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회화의 학습 광고가 때대로 마치 신문의 광고면을 점령한 듯 보이기도 해 영어의 중요성이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혹 이것은 영어 공용화가 공론(c�의 대상이 되게 한 정부의 세계화 정책과 상응하기 때문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과장 광고라고 지적한다면 세계화 전략에 차질을 빗을 것을 염려해서 일까. 과장이라 했다가 영어 학습 열기에 찬물이라도 끼얹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일까(돈도 많이 날아가겠지). 그렇다면 지나친 아부이지 싶다.

지금의 과열되고 맹목적인 영어 학습열을 살펴볼 때 학부모들은 이성을 잃은 듯(?)하다. 사이비 종교에 맹목적으로 빠지는 것과 같이 과장의 여부를 확인조차 않고 교육이란 이름으로 자녀들을 맡겨버리니 이 어찌 사이비 종교에 대한 맹신과 다를 수 있겠는가. 학부모들은 영어회화라는 사이비 물신에 빠진 정신나간 신도들은 아닐까. 고작 해댄다는 것이 학교에서 공부 제대로 안시키고 교사들 안이함만 타박하니 정작 자신들의 잘못은 보이는지 안보이는지. 그저 영어 하나에 사생결단으로 뛰어들어 학생들의 재능과 자질은 무시하고 수백에서 수천 만원까지 하는 유학이나 연수를 보내거나 좀 못한 경우는 수 십만원하는 국내의 학원에 보내니 이것이 진정한 교육인지 이기주의고 탐욕인지는 구분하지 어려울 정도다.

또한 사회는 영어를 통한 돈벌이에 혈안이 된 듯한 느낌이다. 세계화의 고상한 겉옷을 입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교육과는 거리가 먼 상업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느낌이다. 공권력도 정치의 눈치를 살피는 것과 같이 팽배한 영어회화의 폐해에 대해 학부모들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장이라고 지적하므로써 이러한 과열과 맹목과 이성상실을 완화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작은 좀도둑 보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가치관을 싹트게 하는 큰 문제인지를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도 못하는 듯하다. 누군가가 [벌거숭이 임금님]이라고 소리쳐 주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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