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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6 21:42

토니 타키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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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타키타니


단편소설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의 이 영화는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토니 타키타니>를 영상화한 것입니다. 다른 영화들에 비에 다소 짧은 편(76분)이지만 진지하고 무게감 있게 다가옵니다. 간결하고 경쾌한 문체에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주제를 담고 있는 하루키의 소설(읽는 것은 《상실의 시대(Norwegian Wood)》가 유일하지만)과 마찬가지로 경쾌하고 간결한 문체를 마치 눈으로 보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문장이 간결하면 경쾌해지고 또 스타카토의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단문과 단문사이의 여백은 ‘인상’을 만드는 유용한 공간으로 존재합니다. 선에 비유하자면, 점선이 완전한 선은 아니지만 더욱 인상적인 선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점과 점 사이의 공간 덕분입니다. 실선은 완전하나 점선보다 인상적이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이런 이유로 점선이 끊는 선을 상징하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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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http://www.dvdactive.com/news/releases/tony-takitani.html

인생에 비유하자면, 인간의 인생은 마치 점선과도 같습니다. 여러 사건들의 인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지요. 지나온 시간들은 하나의 긴 흐름처럼 느껴집니까, 아니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여러 사건(장면)들이 인상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그림이나 사진처럼 파편으로 남아 인상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기억은 인상을 만들 뿐 그대로 재연하지는 못하죠.) 모래를 생각해 보면 될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알갱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모래를 이루고 있습니다. 알갱이들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소설의 문장들이 아니라 인간들의 관계로 생각해 보면 사실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들이 간결하고 경쾌한 관계들로만 구성된다면 ‘인상’ 은 만들어 내겠지만 끈끈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지는 못하겠지요.

단문들로 쓰인 소설들은 대체로 차갑고 냉정합니다. 단편인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단편소설이란 이름처럼 인간들의 ‘단편적인 관계’가 되겠지요. 이 영화에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주 단편적인 접점만을 갖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 주인공 토니 타키타니(잇세 오가타)와 여자 주인공인 에이코(미야자와 리에)가 만나 이렇게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에이코: 옷이란 자신의 내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제 멋

           대로에요. 게다가 굉장히 사치스러워요. 그래서 급료의 대부분이 옷을 사

           는 비용으로 사라져버려요.

토 니 : 나는 그림도구 외에는 어디에도 돈을 쓸 일이 없어.


이렇듯 그들의 만남에는 인간적인 공감이라기보다는 단편적인 접점으로서의 옷과 돈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토니와 그의 아버지의 대화에서도 인간적인 공감이 아니라 단편적인 접점만을 확인해 줍니다.


토  니:머랄까, 사랑에 빠져 버린 것 같아.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

          어.

아버지:그래서 어디가 마음에 든 거야?

토  니:뭐라 말해야 할까? 옷을 입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

아버지:그것 참 굉장하군.



이러한 인간의 단편적인 관계에는 서로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공감할 수 없다는 그 사실에 의해 어떤 막연하고 근원적인 고독이나 외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토니 타키타니와 에이코는 운명에 순종하는 무기력한 인간처럼 여겨집니다. 마치 허수아비처럼 말입니다. 비록 함께 있지만 대책 없는 고독과 외로움이 그들 주위를 맴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인 것입니다. 단지 망각하는 것 밖에는 그것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일시적인 위로일 수는 있되 영원한 구원은 되지 못합니다. <토니 타키타니>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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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http://kr.image.yahoo.com/GALL

이렇게 보면 피상적인 관찰이기는 하지만 《상실의 시대》(1987)에서 우울하기는 하나 인간관계에 대한 희망이 단편 <토니 타키타니>(1997)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무기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소 안타깝습니다. 꼭 10년만입니다. 성숙인지 퇴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상실의 시대》에서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존재로서 공감하고 일체감을 갖는) 인간관계의 희망을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 <토니 타키타니> 를 보고나면 연민과 인간 실존, 그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체험입니다. 일본 영화라는 편견을 버리고 이러한 영화를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이제 이 영화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들을 몇 가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장면들 사이의 검고 두터운 벽들입니다. 이 벽은 인간을 가두고 차단시키는 외로움을 상징하고 있는 듯 합니다. ‘외로움은 감옥’ 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장면들 사이에 놓여있는 검은 벽들이 창살처럼 여겨집니다. 고독은 우리 인간이 깨기에는 너무나도 큰 벽처럼 여겨집니다.


둘째는 인간들이 남긴 흔적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다지 유쾌한 생각은 아닙니다만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오릅니다. ‘우리의 삶 뒤에 남게 되는 것은 흔적뿐’이라는 말 말입니다. 도대체 죽음 뒤에 우리가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종교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고, 환생이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죽음 뒤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직면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빠져 나간 자리에는 마치 뱀의 허물처럼 헐렁한 옷 몇 벌만이 덩그러니 남으리라는 상상은 쉬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남아있을 옷들에 발악적으로 집착하는 에이코에게 우리는 연민을 느낍니다. 에이코는 옷을 반품하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신호등에 걸려있는 중에 다시 그 옷이 생각나 차를 돌리다 사고로 죽습니다. 에이코를 죽인 것은 그녀의 옷인 셈입니다. 토니 타키타니의 아버지가 죽은 뒤의 흔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고작 낡은 레코드들이 전부입니다. 에이코의 옷들이 머물러 있던 텅 빈 방에 남겨진 그 레코드들은 에이코의 옷들과 함께 연민을 자아냅니다.


셋째는 인간에 대한 연민입니다. 토니 타키타니는 죽은 아내를 기억하고자 아내와 체형이 같은 여자를 비서로 채용해 아내의 옷을 입고 출근하도록 하는데, 바로 히사코가 그녀입니다. 히사코는 리에가 에이코와 함께 1인 2역을 맡습니다. 히사코는 에이코의 옷을 고르기 위해 에이코의 옷방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그녀는 에이코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느끼고 눈물을 흘립니다.


몇 백 벌이나 되는 아름다운 옷이 그 곳에 쭉 늘어서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옷을 잔뜩 남겨 놓은 채 죽어버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 들까?”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옷도 구두도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과 같이 정확히 사이즈가 맞았다.


그리고 그녀는 흐느껴 웁니다. 그녀의 눈물은 바로 연민의 눈물인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공감인 것입니다. 토니 타키타니는 아내의 옷 방에서 흐느껴 울던 히사코를 잊지 못합니다.


그는 때때로 아직껏 그 방안에서 아내가 남기고간 옷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잘 알지도 못한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의 흐느껴 울던 소리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이렇게나 많은 예쁜 옷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후에도 이상하게도 그 여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토니 타키타니 UK tra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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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기이한 만남과는 달리 헤어짐의 담담함은 이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며 그 메시지가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예상치 않게 만난 예상치 않은 존재는 우리의 일상에서 벗어나 있지만(숭고함에 가까운 감정이던 호기심이던), 헤어짐은 이러한 만남과는 달리 우리 일상의 한 단면을 통속적으로 보여줄 뿐이다(일순간의 동정이었을뿐). 꿈에서 깨어나는 아쉬움이라고 할까? 끝까지 조제를 책임져 주길 기대하는 우리의 상상적인 기대를 여지없이 배신해버리기 때문이다. 숭고함(또는 호기심)이 일상의 것으로 추락할 때 우리의 실망은 얼마나 클 것인가? 그러나 또 우리가 인정해야할 우리의 일상이기에 우리는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정의 변화에 솔직해 진다는 것은 일상으로의 귀환이며, 의지는 또 다른 숭고함인 것을...... 조제의 삶을 책임지리라는 확고한 의지가 없다면 코네츠의 조제에 대한 사랑은 휘발성이 강한 일시적인 사랑의 감정일 뿐이다. 아니면 동정이거나. 코네츠는 의지가 아니라 감정을 선택했다. 비통할 정도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코네츠의 가슴처럼이나 이 둘을 지켜보는 우리들의 가슴도 마찬가지긴 하다. 이 영화의 결말과 ‘영화가 끝난다는 사실’은 함께 이제 우리는 과장된 감정을 훌훌 틀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것은 인간적인 감정의 솔직함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엇으로 불리울까.



1.사랑의 감정들


<오아시스> 와 <나쁜 남자>의 경우. 이 영화 내내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떠올랐다. 아마 장애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물론 오아시스의 주인공들은  둘 다 사회로부터 정신적 육체적으로 소외된 인간들이다. 그들의 관계에 ‘사랑‘이란 진정성의 무게를 두고자 할 때,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으로 작용한다. 영화 내내 보는 이들이 부끄러웠던 것도 그런 진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잘 들어맞는 한 쌍이었고. 그것은 어느 일방의 동정심에 근거한 관계가 아니라 가식 없는 ’진정한 사랑‘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작 우리에겐 그런 진정성에 우리를 투신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위선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그 대상을 파멸시킬 수 있을까? 대상을 파멸시키는 <나쁜 남자>의 그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그 모든 것조차 초월하는 것을 김기덕 감독은 보여주는 것일까? 한 여자를 덫에 걸어 자신의 옆에 애완동물처럼 두고자 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 수 있을까? 아니면 나쁜 남자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영화임에도 내가 사랑이란 말을 잘못 갖다 붙이고 있는 것일까? 오아시스와는 달리 <나쁜 남자> 에서의 남녀의 관계는 부담스럽고 껄끄럽고 낯설기만 하다.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런 관계의 설정에서부터 <나쁜 남자>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하 <조제~>표기) 은 흡사하며 그 감정의 처리 방법에서도 흡사한 측면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은 극단적으로 다른데, 나쁜 남자가 감정을 폭력의 단계까지 극단적으로 과장하면서 끌어올리는 반면, <조제~’> 는 감정의 변화에 솔직히 반응하면서 감정의 가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조제를 포기하는 것도 실상은 감정에 솔직해 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제~>에서는 감정이 가변적이고 일시적이며 자연스럽다는 전제에서 감정을 쉽게 놓아버리지만, <나쁜 남자>에서는 강렬한 일시적 감정의  절대성을 포착하여 그 감정을 극단으로 수렴하는 병적이고 집착적인 모습을 보인다.


우리가 감정에 솔직해 진다고 했을 때 <나쁜 남자>‘나 <조제~> 는 진실일 수 있다. 그리고 진정성일 수 있다. 그러나 <조제~>에서의 코네츠의 사랑의 감정은 동정심에 가깝고 의지적이다. 이러한 감정은 의지가 약해질 때 더불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 있다. <나쁜 남자>에서의 사랑의 감정 또한 강렬하며 의지적이긴 마찬가지다. 다른점이라면, <조제~>에서의 동정심에 가까운 의지적인 감정이 쉽게 포기되는 반면, <나쁜남자> 에서는 감정대로 이루려는 의지가 너무나 강력해 조금도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폭력과 억압에 가까운 감정이 되어 상대를 파멸시킨다(이것에 진정성이란 이름을 달기에는 왠지 끔찍한 느낌이 들기는 한다.) 아마도 김기덕의 의도가 일반화된 사랑의 감정을 낯설게하기겠지만 이것은 일상적인 사랑의 진정성과는 솔직히 거리가 멀다. 낯설고 도발적인 사랑을 통해 인간에게 있어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별스러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겠지만......사랑은 이럴 수도 있다는...... 감정에 솔직해 진다는 면에서 <조제~’>와 ,나쁜 남자> 는 서로 극단의 방향이지만 동질성을 나타낸다. 



2. 사랑과 동정의 사이

이제,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사랑은 무엇인가? 일시적인 감정인가? 지속적인 감정인가? 아니면 감정을 초월한 어떤 것인가? 감정이 촉발시키는 행동인가? 그 어느 것에 사랑의 이름을 붙이던 개개인들의 정의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인간만큼의 사랑에 대한 정의들이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의 정의는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사랑이란 전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인 관계인 경우는 어떤가? 코네츠처럼 정상적이고 여자들에게 인기있는 대학생과 출생도 불분명한 뇌성마비인지 병명조차 모르는 장애인인 조제의 관계말이다. 코네츠의 조제에 대한 감정은 일시적인 감정일까? 지속적인 감정인가? 아니면 감정을 초월한 어떤 것인가?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영화의 파국으로는 판단해 보면 분명 일시적인 감정이다.  그렇다면, 코네츠의 감정에 사랑의 라벨을 달아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랑에 ‘일시적인’ 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주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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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21:54

[일본영화] 자토이치(3)



                                         이미지출처: www.sung-ho.pe.kr

 

 

자토이치(3)

-마이너리티 리포트


맹인 자토이치는 로닌(浪人)이다. 로닌은 사무라이의 위계질서에 편입되어 정착하지 못한 사무라이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로닌은 소속된 조직이 없는 소속 외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바람처럼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무라이라고 하면 된다.


자토이치는 외관상 어떠한 조직에 소속되기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아주 현대적인 외관을 하고 있다. 머리는 노란 염색에 가깝고, 의복 또한 마찬가지이다. 머리모양과 의복만을 놓고 보면 자토이치는 21세기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자토이치의 외관은 격식을 파괴하고 있다.   


약간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자토이치를 만나 자토이치를 통해 대리 복수를 하는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하나같이 사회의 비주류들이다. 우선 가족을 죽인 살인자들을 복수하려는 남매는 부모를 잃고 정처 없이 살인자를 찾아 헤맨다. 그런데 그 남매에게는 자토이치 이상의 이질적인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내인 남동생이 여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전도된 현상은 어린 시절의 충격(어른에 의한 아동 동성애, 경제적인 궁핍을 모면하기 위한 동성매매)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것은 소수 동성애자들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할 수 있다. 가족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여장하고 춤을 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이해를 호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는 하층민이다. 집단화된 도적 패에게 언제나 폭력을 당하는 경제적, 계층적인 약자이다. 자토이치가 신세지고 있는 집의 여주인과 거리의 상인들이 그러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집단화된 도덕 패들에 의해 자릿세를 뜯기고 폭행을 당하면서 하루하루를 영위해 가는 존재들로 삶이 핍박하고 고달프다. 이들은 소수라는 측면보다는 약자라는 측면에 더 강조점이 두어져야 하지만 절대적인 빈곤층이란 의미에서 마이너리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칼을 쓰지 못한다는 면에서 자토이치와 다를 뿐 실제적으로 사회적인 이방인으로 도박과 술과 여자에 빠져 죽은 둥 사는 둥 살아가는 중독자들이다. 이들은 자의적으로 사회를 일탈한 존재로서 마이너리티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 등도 이러한 사회적인 약자(사회로부터 냉대를 받는다는 의미에서)로서 동일한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하지만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냉대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격리는 범죄자에 대한 동일한 인식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범죄자가 감옥에 격리되듯이 병원 따위에 수용이 되는 것이다.


넷째는, 셋째의 부류와 다소 동일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같은 부류로 분류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바로 미친자들이다. 미친자는 자의적이지도, 어떤 지향성(술, 마약, 여자)도 갖지 않는 존재라는 면에서 중독자들과는 다르다. 자토이치가 머물고 있는 집 주위를 함성을 지르며 도는 이웃집 아들이 바로 미친자이다. 영화 <자토이치>에서 왜 이 미친자가 등장할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만들어 낸 캐릭터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하층민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들의 존재는 웃음만을 자아내기에는 서글픈 존재가 아닐 수 없으며 운명적으로 사회적인 냉대와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슬픈 존재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약자와 대척점에 있는 존재가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이다. 이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를 현재적인 시간에서 그 대응 집단들을 살펴본다거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본다거나 도적이란 본질을 위장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알레고리로 자리잡는 것이다. 자토이치의 시대 상황이 과거이지만 해석은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영화는 언제나 현재에서 만들어지듯이 현재의 시점에서 하는 해석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대척적인 존재들(사회적인 약자 vs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 사이에 놓여있는 자가 자토이치라고 하면 어떨까? 이 자토이치가 도박을 즐기고, 여자를 즐기고, 관습을 무시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다면 자토이치는 마이너리티에 관용적인 자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 자신이 육체적으로 맹인인 약자라면 어떠한가? 판단은 영화를 보는 개인 각자의 몫이지만, 분명한 것은 자토이치의 몰골은 그 당시의 시점에서는 결코 보편적이거나 관용적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는 사실이다. 자토이치가 칼을 휘두른 것은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회적인 약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질성을 말살하려는 관습의 편견인지도 모른다. 분명 자토이치는 이질적인 것, 사회적인 역자들의 편에 서있다.


영화가 끝나면 사회적인 약자들집단화 된 도적 패거리가 함께 모여 춤판을 벌린다. 이 춤판은 두 가지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영화내내 자행되는 칼질에 대한 살풀이의 마당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더욱 중요한 것으로써 사회적인 약자들의 신명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염원이다.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어 불탄 집을 다시 세우는 그 축제의 한마당은 바로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인 것이다.(*)    

(2008.4.20.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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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3 21:23

[일본영화] 자토이치



                                         이미지 출처:http://kr.blog.yahoo.com/jesse




자토이치

-복수의 카타르시스


어느 곳이고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또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아주 큰 잘못이 아니라면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서로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러나 때로 그 관계가 크나 큰 상처를 만들어 관계된 상대자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처가 아물어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져 원한이 쌓여가기도 한다. 복수가 피할 수 없는 행위가 되고 만다. 법의 구속이 약하고 무력이 지배하는 계급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명예를 위해서든, 가족을 위해서든 복수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복수는 약한 자들에게는 참 어려운 결단이다. 오히려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약한자들의 증오는 대체로 체념이 되기가 싶다. 집단, 특히 사악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저항은 너무나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집단과 집단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원시부족사회, 고대 국가 들간의 정복과 약탈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나 징기스칸의 정복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약한자들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특히 여성, 노약자, 사회빈곤층 등의 약자들인 경우는 증오의 감정이 집단적인 힘으로 승화되지 않는 한 복수를 꿈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약자들이 집단화 되었기에  동학혁명이나, 스파르타쿠스의 난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경우라면, 복수는 동류나 강한자들에나 가능한 행위에 국한되고 만다. 


바로 여기에서 체념에 빠져버린 복수에 대한 무수한 상상들이 발동하게 된다. 정의로운 대리자가 나타나 주기를 바라고, 자신이 영웅이 되기를 상상한다. 억울하고 비통한 감정을 대리자를 통해 상상적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들은 약자들의 한으로 응어리져 수많은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복수의 모티브는 영화의 영원한 소재이다. 아니 주제이기도 하다.


다소 벗어나는 이야기이지만, 문학의 경우, 20세기 모더니즘이 추구했던 주인공의 전형은 소외되고 고독한 개인이었다. 그것은 작가들의 예민한 시선이 근대화의 이면에서 고통 받는 소외된 인간들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도시를 떠도는 부랑자나 걸인이기도 했고 무기력한 남편이기도 했다. 고뇌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이 바로 그러한 전형이었다. 그들은 복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무기력한 인간 군상들이었다. 집단화되지 않으면 무기력한 개인으로 남아있어야 할 뿐이었다. 우리의 경우 20세기의 수많은 집단적인 투쟁이나 혁명이 바로 이러한 경우를 설명한다. 참으로 극단적인 시대였다. 집단과 개인이란 아주 이질적인 관계로 존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개인은 아주 강해졌다. 개인과 집단이 극단적이고 이질적인 성격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가 모호할 정도로 상호작용이 쉬워진 것이다. 인터넷이란 막강한 매체 때문이었다. 최근에 등장한 블로그 또한 마찬가지이다. 권력의 형성이 개인들이 모인 인터넷에 의해 탄생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www.sung-ho.pe.kr/?p=17679



다소 벗어난 글의 흐름에서 다시 돌아와, 그렇다면 영화는 어떠한가. 개인적인 판단으로, 20세기의 고전적인 권선징악의 스토리는 21세기에도 여전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보편화 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개인의 비극과 파멸을 다룬 영화도 많기 때문이다. <시민 케인>, 심지어 <람보>도 그런 부류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영화가 두드러진다. 아마도 실존주의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사회를 반영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폭력과 살인이 난무한다. 이데올로기로 다소나마 제어되던 인간의 잔인한 본성이 출구를 찾았기 때문일까? <양들의 침묵><한니발>이 그렇다. 무슨, 무슨 살인사건이니, 사이코 영화, 새디즘이니, 메조히즘이니 하면서 폭력이 난무한다. 전쟁영화와는 그 폭력의 격이 다르다. 참 잔인하다.


한국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잔인한 폭력과 살인이 빠져버리면 성립하지 못하는 영화가 부지기수이다. 복수라는 용어는 무수하게 나타난다. <복수는 나의 것><올드보이>가 그렇다. 칸느 영화제에서 그렇게도 격찬한 <올드보이>의 폭력신은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복수는 나의 것>의 경우 영화가 복수의 대중화를 선언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엄연히 법이 존재하는 민주주의의 세상에서 개인적인 복수를 용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을 선명한 영상으로 목격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화는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것일까? 아니면 법을 조롱하는 것일까? 아마도 법이 존재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조차도 인간은 상상적인 복수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소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억울한 약자들을 위해 복수를 해주는 정의로운 개인, 정의의 대리자가 나타나 사악한 집단을 보기 좋게 쓸어버리는 것을 소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 특히 약자들의 본성 속에 내재해 있는 특성이 아닐까 하며, 영화는 이러한 약자들의 소원인 복수를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충족시켜준다. 이것은 문학적인 결말이나 여운과는 다소 다른 방향이다. 바로 이러한 방향이 현실에 대한 영화의 발 빠른 반응이며 대중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토이치는 바로 이 복수의 이야기이며 복수를 위한 대리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복수를 소원하는 자들은 대체로 약자들이다. 여자들이고, 무기력한 남편이고, 사회의 빈곤층이다. 그런데 약자들 중에 약자라고 할 수 있는 맹인 낭인, 자토이치가 정의의 대리자라는 것은 약자들의 복수의 소원을 가장 극화시킬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가장 약한 자가 가장 강한자로서 복수의 칼을 날려준다는 사실은 얼마나 통쾌한 쾌감,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주는가. 즉, 복수의 대리자가 장님이라는 사실, 그의 검도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운 신비에 가깝다는 데 복수의 대리 만족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복수는 자토이치의 것! 그는 우리보다 더 불운한 장님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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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7 15:53

[일본영화] 무사의 체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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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의 체통(2)


일본이 진정으로 무사의 체통을 찾는 길은 군국주의에 대한 참회라고 강조한 글을 썼다. 이것은 영화외적인 상황을 영화 해석의 수단으로 이용한 경우이다. 그러나 영화를 지나간 과거의 틀로만 해석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니 바람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우리처럼 사무라이에 대한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나라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화 자체를 통해 일차적으로 영화를 해석할 것이다. 그러다 해석의 방법을 다양화해가다보면 일본의 군국주의와 대면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영화외적인 상황을 영화 해석의 근거로 삼든, 영화 자체를 해석의 근거로 삼든 보는 이의 다양한 시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영화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혼돈에서 질서가 생겼듯이 한 편의 영화도 수많은 해석에 의해 의미들이 생산되는 것이다. 해석에 의해 의미가 명료해 질수도 있고 더욱 불명료해 질 수도 있다. 전문가들의 이론에 기반을 둔 난해하고 현학적인 영화 해석이 후자의 경우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다양한 여러 해석들, 심지어 난해하고 현학적인 해석조차 하나의 텍스트로 귀를 기울이는 개방된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어느 민족이고 타민족에게 너그럽지 않다는 것은 역사의 수많은 전쟁들과 분쟁들이 증명해 준다. 심지어 민족 간에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다. 인간은 왜 같은 동족에게 칼을 들이대고 총부리를 겨냥하는가? 이 질문은 인류가 풀어야할 영원한 과제가 아닐까 한다.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도 결국은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정착한 것이다. 같은 동족에게 피를 요구하는 문화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가 오랜 전통이 된 것은 그 시대적인 상황을 배우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사무라이를 있게 한 시대적인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기에는 지식이 너무 짧다. 따라서 영화에 나타난 사무라이와 사무라이의 생활, 그리고 일반적인 일본 문화에 대한 몇 가지 인상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하나의 문화로 사무라이 문화를 이해하게 될 때 <무사의 체통>은 좋은 자료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 동시에 일본 문화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우선 <무사의 체통>을 통해 사무라이의 생활이 대단히 절제 있고 금욕적임을 알 수 있다. 미무라가 먹는 음식이나 입는 옷, 행동과 말씨를 통해 사무라이의 생활이 금욕적임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미무라의 식사가 스님의 탁발을 연상시킬 정도다. 이러한 사무라이의 금욕주의는 가마쿠라 시대(1192~1333)의 금욕적인 군사규율과 무로마치(1336~1573) 시대에 불교의 영향을 받아 사무라이 문화로써 무사도의 경지로 정착되는데 <무사의 체통>은 그러한 사무라이의 무사도(武士道)를 잔잔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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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http://www.news365.com.cn/wxzt

대개의 사무라이 영화가 그렇지만 사무라이의 위계질서와 규율은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다. <바람의 검>에서 사무라이의 그러한 엄격한 규율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사무라이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서의 작은 실수도 할복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만회한다. 주군의 식재료로 싱싱하지 못한 붉은 골뱅이를  선택한 식재료 담당자가 할복하는 것이 그렇다. 결과적으로 붉은 골뱅이를 먹은 독미역사인 미무라 신노조가 맹인이 되고 사무라이로서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러한 실의는 전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데서 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마다에게 복수를 불태우면서 비로소 사무라이로서 살아나는 듯하다. 맹인이지만 무사의 체통을 회복하려는 미무라의 모습에서 무사도를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맹인 무사의 주제는 <자토이치>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또한 검도 도장에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부탁하면서 스승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리고 미무라가 되풀이 하는 과거 스승으로부터 들었던 말에서 무사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알겠냐. 미무라. 목숨을 주고받는 진검승부는 도장에서의 검술과는 다르다. 상대는 무엇을 할지 몰라. 칼끝을 피하지 마라. …… 너는 죽을 각오가 되었고 상대는 사는 것에 집착하고 있어. 그것 밖에 없다. 네게 기예를 전수할 때 전해줬던 말이 있었다. 기억하느냐?”

“같이 죽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라. 승리는 그 가운데 있으니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산다.” 


그리고 시마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독미역사의 권태로움에서 깨어난 무사도의 외침이며 무사의 체통과 명예를 지키려는 사무라이의 전의인 것이다.


미무라에게는 토쿠헤(사사노 타카시)이라는 몸종이 있다. 토쿠헤이(천민)의 존재는 사무라이의 신분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초부터 사무라이는 지방귀족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농부, 장인, 상인들을 지배하는 계급으로 급부상한다. 실제로 부유한 상인이나 장인들이 사무라이와 혈연으로 맺어져 권력적인 기반을 닦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무라이 계급도 일반사병과 가신(家臣), 제후(諸侯)그리고 쇼군(將軍)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으로 분화되어 있긴 하나, 아무튼 사무라이가 존경의 대상이 된 것은 분명하다. <바람의 검>에서 몰락해가는 사무라이를 보게 되는데 사무라이의 몰락은 18세기 메이지유신으로 근대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 이르러서이다.


미무라는 주군으로부터 봉록을 받는 무사로 주군의 식사에 든 독을 감별하는 독미역사이다. 그런 하위 사무라이가 몸종을 이끌고 있는 것은 사무라이의 계급적인 위치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무사의 체통>에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절대적인 복종이 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는 분명하다. 아내 카요(단 레이)는 미무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이 보일 정도이다. 위계질서하의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카요의 바짝 엎드린 인사법을 통해 볼 수 있는 복종적인 여자의 이미지를 현대 일본 여성의 이미지와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사마다가 아내 카요를 성적으로 농락한 것은 맹인이 된 자신을 농락한 것과 같은 차원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자의 부정이 남편의 체통과 명예와도 관련이 되어 칼로 체통을 회복하는 것이 사무라이의 보편적인 방법인 것에도 무사도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또 하나의 것은 신사에서 발견한 스님의 존재이다. 카요가 남편의 건강을 위해 신사에서 기도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스님이다. 신사와 절이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지 아니면 신사와 절이 공존하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지만 토속적인 일본의 신앙과 외래 종교 불교가 만나 어떠한 형태의 종교를 만들어 내는지 호기심을 자아낸다.


지나쳐 버린 것들이 더 많을 것이다. 또한 이면의 의미를 통찰하기보다 표면의 인상만을 읽은 것이 안타깝고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이러한 호기심을 가지고 일본인과 일본 문화를 차근차근 알아보는 과정이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일본 영화를 보는 감동과 함께 재미중에 하나가 아닐까 한다. (*)


(2008.2.27.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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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7 00:10

[일본영화] 무사의 체통



 

무사의 체통

-일본이 진정으로 무사의 체통을 찾는 길


사용자 삽입 이미지http://kr.blog.yahoo.com/iamjina2000/

인간에게는 자신의 성격을 규정하는 명칭이 주어진다. 출생에서부터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성별(여자, 남자)과 가문․신분(양반, 평민, 천민 등)에서부터 다소 변화와 상승이 가능한 학벌(명문대 여부)과 경제력․직업(부자, 빈자, 과장, 사장 등)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고정된 사회 계급(계층)이 사라졌다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차별적인 관습이 여전히 개인의 삶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적인 계급(계층)이 당연시되던 시대에는 그 엄격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계급(계층)에 따라 사회적인 역할이 규정되어 있어 그 계급(계층)적인 틀을 깨기라도 하면 사회 질서의 파괴로 간주되었다. 계급(계층)이 사회의 질서고 사회적인 질서가 곧 계급(계층)이기 때문이었다. 서자인 길동이 적자가 될 수는 없었고 천민이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도 가문의 의지를 거스른 결과였다.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과 함께 생매장 당하기도 한다.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잔존한다. 심지어 원시 사회에서도 제사장, 추장, 남자, 여자, 아이에 따라 사냥물의 부위가 다르게 지급되었다. 이러한 계급(계층) 사회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개인의 삶을 규정하고 의식을 지배했다. 따라서 계급(계층) 사회는 차이를 무시하는 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차이에 따라 차별하는 비인간적인 계급 사회를 벗어나 개인이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무라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무사의 체통> 또한 그 내용을 떠나서 일본 사회의 전통적인 계급(계층)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일본의 사회의 계급(계층)에서 사무라이가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임진왜란과 일제 시대로, 세계사적으로는 태평양 전쟁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그 성격이 얼마나 호전적인가는 사무라이를 반영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전쟁 범죄를 통해 이미 주지하고 있는 바이다. 사무라이 영화를 보면서 그 잔인한 무력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당사국으로서 일본의 사무라이에 대한 특성이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우선, 대개의 사무라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무라이는 정의롭다. 정의가 언제나 승리한다. 그러한 정의가 일본을 벗어나서는 왜 잔인한 악의로 돌변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크게 두 가지 이유일 텐데, 하나는 영화가 실제의 사무라이의 성격을 왜곡하고 미화했거나, 다른 하나는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이다.


첫째로, 만약 일본이 사무라이 영화를 통해 사무라이의 성격을 왜곡하고 나아가 미화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 군국주의의 과오에 대한 정당성과의 관계를 충분히 의심해 보아야 한다. 사무라이 영화의 폭력성은 결코 군국주의의 폭력성과 혼돈되거나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은 존재할 수 있을까? 사무라이 영화에서는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복수)이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서부영화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은 인간성을 좀 먹는 잘못 된 생산물(가치)이다. 영화 속의 허구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고작 정당방위 정도일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공습은 정당방위조차도 아니었다.

  

둘째로, 일본의 경우 타 민족에 대한 배타성은 심각한 수준이다. 아마도 군국주의화된 사무라이의 가치보다도 어쩌면 타민족, 특히 한국인과 중국인에 대한 배타성이 일본 민족의 특이성을 잉태했는지도 모른다. 일본 근대화 시절의 탈아입구의 가치나 아시아 민족에 대한 야만적인 인식이 바로 그렇다. 아무리 민족주의라는 인류 보편적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군국주의의 유래 없는 잔인성이 인류 보편적인 특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만주에서 731부대의 생체실험이나 카미카제 특공대 그리고 북경 대학살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인성은 인류의 특이성이지 보편성으로 옹호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이러한 잔인성에서는 일본 민족만의 특이성이 존재하며 사무라이의 폭력성과도 이어지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ttp://www.kochinews.co.jp/cinema/06cinema35.htm

 


따라서 사무라이에 대해 일도양단이나 쾌도난마식의 명쾌하고 정의로운 측면만으로 무협의 재미와 복수와 정의의 감동만을 찾는다면 사무라이에 대한 미화에 전적으로 빠져드는 위험이 있다.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은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을 비롯해 재일 한민족에 대한 차별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일본은 독일을 배워야 한다.


무사의 체통은 일본적인 인식이다. 무사뿐만이 아니라  일본인은 체통이나 명예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사무라이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할복은 체통이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극단적인 표현이다. 물론 체통이나 명예라는 가치는 모든 인간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이다. 할복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체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에게는 더욱 숭고한 가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무사로서의 체통, 아니 일본인으로서의 체통은 사실상 군국주의와 태평양전쟁으로 수치스럽게 상실했다. 체통뿐만이 아니라 인간성마저 상실해 버렸다. 아주 불의하고 잔인한 전쟁을 일으키고 인류에게 해악을 끼쳤다. 이제 일본인이 인류에게 체통을 지키는 것은 일본 민족에 한정된 배타적인 체통이 아니라 전 인류로 향하는 개방된 체통이다. 아직도 일본인의 체통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무사의 체통> 운운하는 영화를 버젓이 만든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슬픈 현실이랄 수도 있다. 일본은 역사적인 과오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고 참회하면서 잃어버린 무사의 체통을 회복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해야 한다. 


무사의 체통을 지키려는 미무라 신조(기무라 타쿠야)는 사실상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의 심정을 반영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즉 사실상 강간당한 아내로 인한 무사의 체통을 지키려는 미무라의 의지는 36년 동안 침탈당한 한국인의 의지와 동일하다면 동일할 수 있다.  


“시마다는 카요를 가로에게 조언해 준다고 거짓말 하고 불쌍하게도…… 카요에게 강간이나 다름없는 일을 당하게 했다. 내 속은 아직도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다.”


만약 야마도 요지 감독이 수치스럽게도 무사의 체통을 잃어버린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이 영화 <무사의 체통>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8.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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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0 14:32

[일본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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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

영화가 끝날 무렵 조카인 쇼는 마츠코를 신이라 부른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종교적일 정도로 희생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성스러운’ 마츠코가 아니라 ‘혐오스런’ 마츠코이다.

그녀가 혐오스럽다는 단서는 강가의 낡은 아파트에서 한 마리 더러운 벌레처럼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곳에서 마츠코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먹고 마시고” 하면서 “화장도 치장하는 것도 청소도 하지 않고 숨 쉬는 것도 귀찮아져 이대로 죽는구나” 할 정도로 삶을 포기한 상태이다. 마츠코는 그녀의 인생 속으로 더 이상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다.

마츠코에 대한 혐오의 시선은 마츠코의 방 옆에 살고 있는 전위적인 메탈 밴드의 멤버인 듯한 오쿠라 슈지의 것이 대표적이다. 오쿠라 슈지는 마츠코에 대해 “사회의 법칙도 이웃에 대한 예의도 다 무시했지.” 라고 말하면서 그녀에게 혐오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 혐오라는 단어, 즉 오쿠라 슈지의 시선이 현재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시선은 기성 질서의 가치관이 그것이다. 여기서 잠깐 언급하자면 이러한 기성 가치관을 대표하는 존재가 항상 흑백사진처럼 존재하는 마츠코의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마츠코의 동화적인 세계와 접촉하는 유일한 방식은 고작 미소를 띠는 정도에 불과하다. 마츠코의 남동생, 즉 쇼의 아버지 또한 아버지의 흑백사진 속에 머무는 존재이다. 마츠코의 남동생은 마츠코의 유골함을 들고 2년 만에 쇼와 재회한 날 무덤덤하게 마츠코에 대해 이야기 한다. “어떻게 봐도 시시한 인생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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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코를 보는 이러한 두 시선은 동일하다. 방향은 다르지만 오쿠라 슈지나 마츠코의 남동생은 마츠코의 인생에 찍힌 혐오스런 타인들의 지문을 읽지 못하는 피상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마츠코의 일생에 담겨진 ‘혐오’ 의 정체를 마츠코에게만 조준해 버린 것이다. 마츠코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왜 고통스럽게 살아왔는가? 하는 이해는 전무한 것이다. 


“사회의 법칙도 이웃에 대한 예의도 다 무시했지.” 이 오쿠라 슈지의 말은 오히려 ‘사회의 법칙조차 이해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예의를 상실한 무지한 표현’ 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오쿠라 슈지가 보는 마츠코의 ‘현재’ 의 모습은 ‘혐오스럽겠지만’ 쇼처럼 마츠코의 일생에 대해 진지한 의문이나 물음 같은 것을 던지지는 않은 것이다. 만약 오쿠라 슈지가 예술(음악)을 한다면 그가 음악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지 의심스러워 지는 것이다. 단지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는 야메카와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마츠코를 ‘혐오’의 낙인을 찍은 오쿠라 슈지는 타인의 전생애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인간으로 낙인찍혀 마땅한 것이다.

글의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지만, 오쿠라 슈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색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오쿠라 슈지의 외모와 행동은 참 재미있고 웃음도 자아내고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오쿠라 슈지가 말한 ‘혐오’ 라는 단어가 마츠코를 수식하는 단어가 된다는 것은 현대의 대중문화의 속성을 말해준다고 하면 과장일까? 그 자신 혐오스런 몰골을 하고 있으면서 사회의 법칙이나 예의라는 말을 언급하며 마츠코가 혐오스럽다고 하는 태도는 대중문화의 건전성에 대한 긍정적인 변호로 읽혀짐과 동시에 대중문화의 깊이 없는 피상적인 모습으로도 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봐도 시시한 인생이었어.” 마츠코의 동생, 즉 쇼의 아버지는 가출한 마츠코와 간간히 접촉하면서도 마츠코의 일생을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시시한 인생” 이라고 못 박아 버린다. 이렇게 죽은 후에도 마츠코는 이해받지 못하고 남동생에게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처형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남동생의 오해는 현재의 마츠코의 모습만을 피상적으로 본 오쿠라 슈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세계와 가치관(기성의 가치관)으로만 마츠코를 본 결과이긴 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본 결과라는 면에서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의 삶이 마츠코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는 사실이다. 동화와는 거리가 먼 가부장적 남성의 질서에서 마츠코를 보았을 때 마츠코의 일생은 시시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남동생의 시선 또한 진지하기는 하나 전통과 기성의 가치관에 집착하는 불완전한 시선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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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다소 감상적이긴 하지만 쇼의 시선이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선으로 등장한다. 쇼는 마츠코 고모의 일생을 결코 혐오스럽다거나 시시한 일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신과 같은 존재’ 로 보는 것이다. 혐오와 시시함으로 못 박힌 고모 마츠코의 일생에서 그 오해의 못들을 빼버리는 것이다. 마츠코의 일생에서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오쿠라 슈지와 아버지의 시선은 쇼의 진지하고 성찰하는 시선으로 대체된다. 쇼는 ‘혐오스러움’ 의 이면을 관찰하고 그곳에서 마츠코의 신성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한 때  삶의 공허함에 빠져 음악, 술, 섹스로, 마침내는 자살로 현실을 탈출하고자한 쇼가 마츠코의 일생을 통해 인간과 대중문화(음악, 술, 섹스)의 공허한 속성을 성찰하고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추락하던 젊음의 자기 비상을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또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전통과 기성의 가치(속마음은 표현하지 않았지만 속 깊은 사랑)를 통해, 이러한 자기 비상이 현실을 저버린 이상만으로는 성취 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도 이해하게 된다. 쇼의 갑작스런 진지함과 성숙함은 바로 이러한 생각의 균형에서 싹튼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약간이나마 억지스럽게 <마츠코의 혐오스런 일생>에 대한 오해를 푼 듯하다. 어쩌면 죄책감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혐오스러운 세상을 위해 혐오스러움을 뒤집어쓴 한 여자의 일생을 위해서……(*)    

이미지 출처:http://www.koreafilm.co.kr/movie/today_movi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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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2 21:24

[일본영화] 클럽 진주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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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진주군(2)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진부한 표현이다. 일본영화 <클럽진주군>도 그 예외가 될 수 없다. 상상력도 현실과는 무관할 수 없으므로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틀린 말이 결코 아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세상 밖에서 현실과는 무관하게 상상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현실을 반영한다는 당연한 말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막연해 지기 쉽다. 도대체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가지고 있는 대답이 ‘문화’ 라는 단어이다. 문화가 현실 그 자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화를 이해한다거나 배운다고 한다. 사실 속임수다. 아니 거짓말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랴, 능력 부족인 것을.

문화는 사전적인 의미로 생활방식, 즉 삶속에서 드러나는 유무형의 방식을 의미한다. 영화를 통해 음식이 어떤가?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옷은 어떻게 입는가? 인간관계의 특성은 어떠한가?…… 등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것,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사실 일본영화를 접하기 시작한 이유도 일본 문화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주 가까이에 일본이 있고 그 일본을 대체로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정작 일본사람을 한 번도 만나 본적도 없고 일본이 어떻게 돌아가는 가에는 전무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러한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자기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도대체 일본을 보아 온 통로라고는 대개가 과거 식민주의 역사와 신문과 방송의 대체로 부정적인 단신들, 이를테면 역사왜곡, 교과서 왜곡들이었다.

이러한 오랫동안 관습화된 생각에서 살다가 일본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나의 시야에 구체적인 일본의 모습이 드러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이러한 감정은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거쳤던 생각일 테고 경험했을 체험 일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클럽 진주군>를 통해 어떠한 문화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었는가? 우선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반전사상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비극에 대한 성찰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전쟁을 다룬 모든 영화의 주제이기도하다. 언제나 반성은 하되 전쟁의 비극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추가하지만 말이다.

예술, 특히 음악의 힘을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들은 음악을 통해 교류하고 공감하면서 상처받은 서로의 영혼을 치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여러 추상적인 가치들이 있다. 삶이나 죽음이 그렇다. 미래 희망이나 꿈도 그렇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는 말이지만, 이 또한 인류 보편의 가치이며 달리 해석의 여지가 없다.

보편적인 것을 넘어서 일본을 이해하고자 하는데 중요한 것은 일본인만의 구체적인 무엇이다. 일본인들에게서 느끼는 이질적인 무엇이다. 전쟁을 보는 그들의 관점이나 태도를 이해하는 것이거나 영화 곳곳에서 나타나는 일본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러한 것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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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면에서, 가장 먼저 호기심을 일으킨 것은 원자 폭탄을 투하한 승전국 미국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였다. 필리핀의 정글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미군과 전투를 하던 켄타로가 귀향해서 (비록 생활의 방편이나 음악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미군의 클럽에서 연주하는 모습은 일본적인 무엇으로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카미카제(몽고군을 물리친 신의 바람이란 뜻으로 자살 특공대에 붙여진 이름), 옥쇄 등 극단적으로 미군과 싸웠던 일본군이 어떻게 이토록 하루아침에 순하게 될 수 있는지는 일본인들의 의식을 이해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그 원인이 신적 존재로서의 천황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에 덧붙여 스시와 할복의 명쾌한 칼, 즉 사무라이의 일도양단의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형과의 언쟁 후 히라야마 이치로가 벽장 같은 ‘밀폐’ 된 곳으로 파고드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 영화를 통해 몇 번 보면서 호기심을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란도리>에서 권투에서 진 등장인물이 자책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으로 세탁기에 들어가는 것이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여주인공 조제가 벽장 같은 밀폐된 곳에서 은신하는 것, 그리고 성격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사무라이 픽션>에서 방의 천정에 숨어있는 닌자들, 큰 덩치의 선수들에 비해 너무 좁아터진 원형경기장 등도 이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어령씨가 도시락, 쥘부채, 분재, 이레코인형, 하이쿠, 다다미 등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일본의 문화가 ‘축소지향적’ 이라고 분석하였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축소’ 와 더불어 ‘밀폐’ 또는 ‘은폐’ 의 성격을 발견하였다.(개인적인 인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이것은 쉽게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는 일본인의 특성이나 역사왜곡을 예로 삼아 봄직하다. 아마도  칼을 품고 있는 국화를 연상해 보거나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셋째는 이념이나 종교보다도 현실지향적인 삶의 태도였다. 이것은 영화의 영어제목을 <Out of this world>, 즉  세상 밖으로라고 붙였으나 내용은 다소 세상 안으로(into this world)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등장인물들이 내면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현실지향적인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따지고 보면 음악이란 것도 어려운 삶을 일시적으로 망각하거나 위로하는 수단으로 등장할 뿐이지 음악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식의 도피적이고 퇴폐적이거나 발악적인 느낌은 없었다. 음악은 세상 밖으로의 도피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자기 위안이나 위로로 여겨졌다. 켄타로의 음악적인 고뇌가 전부이며 음악은 현실로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돈을 벌기위한 현실적인 수단으로 음악을 한다. 소죠는 동생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서, 히로유키는 마약을 위해서, 아키라는 이복 동생을 찾기 위해서 드럼을 배우고 트럼본을 불고 피아노를 친다. 히라야마의 경우도 “군악대 사람들은 재즈로 먹고 산다” 고 말한다. 여기에서 예외적인 인물이 켄타로 정도이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음악에 대한 고뇌가 ‘음악을 배운다’ 는 것과 대체로 일치할 뿐 신의 구원 같은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종전 삐라는 믿지 못했어도 비행기에서 흐르는 재즈는 믿었어요.” 라고 말하는 켄타로의 태도에서 천황(신)의 자리에 음악을 세우려는 듯 했으나 사실상 음악에 대한 태도는 너무나 현실 지향적이었다. 또한 이념지향적인 형에 대한 히라야마의 조소적인 태도에서 그리고 처참한 삶의 가운데서도 신에 대한 의지나 저주 한 번 내뱉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 현실지향적인 모습은 떼놓을 수가 없었다. 재즈라는 현실적인 감각, 콜라나 아이스크림 같은 구체적인 사물, 형(이념)으로부터 “너처럼 타락한 놈”이라고 비난을 듣지만 오히려 이념이 몰락하는 현실은 일본인의 현실 지향적 태도를 반영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이상은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느낀 몇 까지 호기심이며 나름대로 이해하고 배우려고 노력한 것들이었다. 그 외 에도 이 영화에는 일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유무형의 구체적인 사물이나 인간, 그리고 사고와 의식들이 담겨있을 것이다. 재미와 감동과 더불어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고 배운다는 것이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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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1 20:24

[생각 돌아보기] 성욕의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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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성욕과 관련해서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일정한 나이, 대체로 사춘기에 접어들면 예외 없이 자연스럽게 성적 욕구가 생겨나게 되고, 따라서 내면의 본능적인 성적 욕구와 외부의 강제적인 도덕과 사회적인 요구와 기대 사이에서 찢어지고 흩어지는 분열된 자아로 고뇌하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성욕의 해소와 억압의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복잡하고 해결 난해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역사가 인간 중심의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고도의 문명을 형성하면서 본능이 억압받고 중심에서 배제되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도화되고 체제화 된 인간적인 이성의 ‘차갑고’ ‘냉정한’ 문명이 그 존속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물적 본능을 억압하거나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순화된 본능이 태양의 그림자같이 그 영역을 넓혀온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은 인간의 이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억압된 본능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순화된 본능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간의 문화를 억압된 본능(성욕)의 승화된 양상으로 파악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을 순화 시키는 것에는 예술과 더불어 교육제도가 많은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의 교육제도는 이성과 합리성의 계발과 더불어 인간성의 고취라는 명목 하에 동물적인 본능을 순화시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즉 인간성의 고취라는 것은 이 성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창조적으로 승화시킬 것이냐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을 것이다.  성욕이 창조적인 행위로 출구를 발산할 때 그것에 문화적, 교육적, 종교적인 라벨을 붙여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근의 영어에 대한 강조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국가의 존속을 위한 실용적인 인간상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파악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영어를 통해 국가 경쟁력과 실용적인 인간상을 강조하는 것은 본능을 강제하고 억압하는 국가주의의 극단적인 변형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순화된 본능은 고급이나 세련미의 고상한 이름으로,  동물적, 본능적이고 탐욕스런 성욕에 관해서는 ‘양심의 가책’ 이나 ‘수치심’ 이나 ‘위선’ 또는 ‘정신이상’ 이란 감정이나 인식을 갖게 만들어왔다. 승화되지 않은 본능(성욕)은 저질이고 더럽고 타락한 것이란 인식의 팽배가 사회를, 특히 아직도 유교의 영향이 큰 우리 사회를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성격으로 만들어 놓은 측면을 간과 할 수 없다. 의식의 이면으로 감추어지고 억압되어져야 할 성욕이 건전하게 형성된 듯한 의식층을 뚫고나와 타인에게 성욕을 탐욕적으로 발산하게 될 때는 영락없는 위선자의 딱지가 붙여지는 것이다.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경우가 그렇다. 피해자들은 평소 가해자들을 존경하고 믿었던 것이다. 존경받고 믿을 만한 사람이었기에 위선의 감정은 더 깊어지는 것이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10대들에게 있어 성욕은 그 자체로서 위선이란 죄책감을 갖게 하기도 한다. 솔직히 필자도 어린 시절 그런 죄책감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특히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숨어서 자위행위나 만원 통학 버스에서 여학생에게 몸을 밀착하는 행위 등을 했을 때는 어김없이 위선자란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일을 반복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괴롭고도 괴로운 성욕의 질곡이었다.          


바로 이 위선이란 감정의 사회 문화적인 경로를 추적해보면 아마도 사회적인 억압장치의 부산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동물을 인간이게 하는 거의 모든 장치들이 아마도 성욕을 죄악시했을 것이다. 특히 가족과 공동체등 가부장적인 질서는 혼란한 성욕을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성욕을 죄악시 한 것은 신에게 순종하는 종교적인 질서의 필요에 의해서일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의 선악과도 성욕의 통제라는 의미 해석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욕이 인간이게 하는 이 모든 제도와 체제의 원리와 반할 때 동물이라는 위선의 딱지가 붙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위선을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자연스러워야 할 성욕을 폭력적으로 병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성행위에는 질서와 정정당당한 경쟁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인간에게 성행위는 그 나름대로의 원칙과 정당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서로간의 동의와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위선은 순화된 본능이 억압해온 성욕에 대한 지나친 죄책감이다. 성욕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과 같다. 한 순간 막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홍수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의 10대들에게 충고하건대 성욕을 때로 자위행위나 이성과의 교제와 같은 방법으로 해소하는 경우 지나친 죄책감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위선이 아니다. 어차피 성욕에 대해 억압해야만 하는 환경이라면, 중요한 것은 성에 대한 건전한 의식이다. 그리고 임신과 낙태에 대한 정확한 정보, 건강, 교육, 경제적 여건 등 현실적 고려이다. 또한 성욕을 억제하는 것 그 자체도 괴로운 자기 수행이며 속과 겉이 다른 위선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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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본능이 억압되고 통제되어 왔지만 앞서 말했듯이 본능이 그 영역을 넓혀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 본능의 영역을 넓히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해 왔으며 예술은 인간 본능의 고귀한 산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성욕의 괴로움과 관련해서, 이제 인간은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해 있다.(아니 이것은 인간 일반의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개인들 각자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이며 양자의 공존도 가능하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언급해 보면, 그 하나는 성욕을 창조적으로 승화하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성욕의 직접적이고 동물적인 해소가 그것이다.

제도화된 결혼을 통한 성욕의 해소는 제외하고, 성욕의 직접적인 해소는 성범죄나 성상업주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매춘은 성상업주의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것이 성욕의 변질되고 왜곡된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러한 상업주의가 인간의 순수한 성욕해소는 무관하게 인간의 비극을 잉태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술, 마약, 범죄 등 성욕해소를 변질시킬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0대들의 원조교제는 이러한 변질의 전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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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에서 다소 무리한 주장이긴 하지만, 승화된 성욕이 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성상업주의보다 성욕 해소의 더 효과적인 방법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욕의 해소를 주로 직접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것 같이 보인다. 따라서 성욕으로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문화 보다는 직접적으로 성욕을 배출하는 성범죄나 성상업주의가 더 횡행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인류 문화는 성욕의 승화에서 창조되었다는 말처럼 창조적인 승화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과장된 표현인지는 몰라도 그야말로 성욕이 문화의 질을 높이느냐 저질로 만드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예민한 감수성이 있기에 많은 분야에서 창조적인 승화를 이룰 수가 있다. 예술, 스포츠, 컴퓨터 등이 그런 분야이다. 성욕의 괴로움에 빠져 범죄까지 저지르는 10대(사실 기성세대가 더 심각하며 10대들은 성범죄는 기성세대의 모방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들은 참으로 안타깝다. 분명히 창조적인 다른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미래 자산인 10대들이 성욕의 괴로움을 창조적으로 해소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와 기성세대의 노력이 절실하다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성세대가 성욕을 창조적으로 승화하여 바람직한 성문화를 이루려는 의지와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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