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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08:44

목욕탕의 추억(5)



이미지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11732355&code=210000



지금 내가 사는 작은 서민 아파트에서 보면 강 너머로 거대한 최신식 리조트 건물이 보인다. 이전에는 파라다이스 사우나였던 그 건물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아니 단 둘 밖에 없다. 나와 때밀이 이모 단 둘 밖에.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서민 아파트는 오래 전에는 달동네였다. 슬레이트 지붕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던 작은 동네였다. 바로 지금의 최신식 리조트 건물인「복합 리조트 단지」는 1980년대초에는 우리 집이 있던 산 중턱에서 멀리 바라보면 주위의 나지막한 건물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우뚝 솟아 있는 건물 — 사실 건물은 4층 밖에 되지 않았고 굴뚝이 무척이나 높았기 때문에 그런 인상으로 남아있을 것인데 — 인 파라다이스 사우나였다. 즉 파라다이스 사우나는 「복합 리조트 단지」의 전신인 셈이다. 그 부근에서는 하나 밖에 없던 기존의 목욕탕을 확장 개수해 세련된 파라다이스 사우나란 이름으로 재개업을 한 것이다. 밤에 보면 그 파라다이스 사우나는 너무나도 화려해서 마치 아이들의 놀이동산을 연상시켰다. 당시에는 공중목욕탕이 꽤 호황을 누리던 때였다. 그리고 한 몇 개월 뒤쯤에 우리 동네에도 낙원탕이란 공중목욕탕이 생겼던 걸로 기억한다.


두 목욕탕은 이름부터가 희한하기도 해서 한 동안 동네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동네를 가로 질러 흐르는 작은 하천의 남쪽에 파라다이스사우나가, 하천의 북쪽에 낙원탕이 서로 마주하고 자리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천지남(川之南) 사우나, 천지북(川之北) 탕이라고 불렀다. 또 그 형세가 서로 마주하고 으르렁거리는 기세라 하여 사우나 ‘사’ 자와 탕의 ‘탕’ 자를 따서 사탕지기세라고 부르기를 즐겨했다. 하지만 이것은 동네사람들이 재미삼아 붙여 준 것일 뿐 워낙 동네 인구에 비해 목욕탕의 숫자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가정 내의 목욕이나 샤워 시설이 일반화 되지 않아 서로간의 과다한 경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남의 사우나나 천북의 탕이 서로 상업적인 과다 경쟁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보이지 않는 갈등의 자력권을 형성했다. 그것은 천남 지역과 천북 지역의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 차이를 ‘사우나’ 와 ‘탕’ 이란 말이 대변해 주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동네는 고래로부터 천의 북은 산이 많아 토질이 척박한데다 전쟁 피난민들이 산기슭 곳곳에 정착하면서 판자촌을 형성했다. 이와는 달리 천의 남은 평야지대로 농사를 지으며 천석꾼, 만석꾼들이 많았다. 그래서 천남에는 농사일을 돕는 천북 사람들이 많이 옮겨가 살았다. 설상가상으로 평지에다 천(川)을 끼고 있는 천남은 대규모 위락단지와 주거단지가 들어서면서 알토란 같은 돈을 챙기는 주민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났던 것이다. 파라다이스 사우나는 바로 이런 변화와 더불어 리모델링된 것이다.


파라다이스 사우나의 주인은 상호와는 달리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쪽의 기독교인이라고는 할 수 있었다. 그가 사우나의 이름을 파라다이스로 붙인 이유는 세계에서 제일 큰 「대망교회」가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주일마다 뻔질나게 교회를 드나들면서 형제, 자매, 자녀 같은 단어들을 불러대는 것도 파라다이스 사우나가 세례의 장소로 이용되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그는 예수의 존재는 믿지 않았지만 천국은 믿었다. 신은 믿지 않았지만 파라다이스는 믿었다. 즉 그는 사후에 그 자신이 가야할 천국의 존재만을 믿었을 뿐 그 외의 것들은 깡그리 부정하는 단세포적인 위인이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그는 원래 외지인으로 패밀리를 거느리고 천남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사업적인 역량을 발휘해 파라다이스 사우나의 사장에 이르게 된 것이다. 패밀리에 대한 오해가 있을 것 같아 조금 부가하면 그들은 여자라고는 한 명도 없는 모두 건장한 사내들로 구성된 검은 선글라스에 검은 양복을 즐겨 입고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약간은 혐오스러운 사람들이었다. 등짝에 그려진 용문신이 인상적이었다.


이와는 달리 천북의 낙원탕 주인은 전쟁 피난민으로 판잣집에서부터 슬레이트집 다시 시멘트, 콘크리트 집으로 이어져 마침내 낙원탕의 굴뚝을 우뚝 세움으로서 성공의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천북 지역으로 국한해서만 가능한 표현이었다. 천의 남 파라다이스 사우나와 비교를 한다면 그 초라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낙원탕의 주인은 반쪽짜리 종교인이 상대조차 할 수 없는 진실한 불교신자였고 선량한 위인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식솔에서 차이가 났다. 선량한 얼굴의 아내와 부모의 마음을 항상 헤아리고 이웃들을 공경하는 착한 두 남매가 그들이었다.


물론 나는 천북 지역에 살았다. 판자집이나 천남지역에서 일품을 파는 집은 아니었지만, 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족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외항선을 탔고 엄마는 천남 지역에 있는 작은 가내공장에서 일했다. 그 공장은 파라다이스 사우나와 낙원탕, 그리고 숙박업소들의 목욕용 타월을 세탁했다. 당시에는 세탁기가 일반화 되지 않아 엄마는 그곳에서 타월 손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정리를 했다.


엄마는 나를 낙원탕에 자주 맡겼다. 낙원탕에는 엄마 친구가 때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를 ‘때밀이 이모’ 라고 불렀다. 때밀이 이모는 천남에 살았다. 원래부터 천남에 산 것은 아니고 천남 사내와 결혼을 해서 천남으로 이주를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천남에 사는 부자 집안에 시집을 간 것은 아니다. 결혼할 당시 때밀이 이모의 남편은 파라다이스 사우나의 전신인 천남탕 보일러실에서 일했다. 이후 파라다이스 사우나로 재개업을 하면서 보일러실의 책임자가 되었지만, 말이 책임자지 여탕, 남탕 각각 두 명씩 있는 보일러실의 고참 사원격이었을 뿐이었다. 때밀이 이모도 원래 천남탕에서 때밀이를 하다가 파라다이스 사우나로 바뀌면서 낙원탕으로 옮겨왔다. 외모와 학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보일러실과는 달리 때밀이 이모는 때밀이가 요구하는 학벌과 용모에 적합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벼락부자들과 벼락 부자들인 외지인들이 모여들면서 천남탕의 고객들과는 달리 파라다이스 사우나의 고객들의 수준이 벼락의 진원지처럼 높아진 탓이었다고 한다. 때밀이 이모에게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마치 불가촉 천민이기라도 한 것처럼 파라다이스 사우나의 고객들이 때밀이 이모를 경원시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괴로워 하던 때밀이 이모는 다행이도 천남탕에서의 경력을 발판 삼아 낙원탕으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때밀이 이모가 낙원탕으로 옮겨 온 이유에는 외모와 학벌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때밀이 이모 대신에 파라다이스 사우나의 때밀이로 취업이 된 여자가 박사 학위 소유에 출중한 미모를 가진 20대의 아가씨라는 사실이 입증하는 것이다.


사실 때밀이 이모는 낙원탕으로 옮기기 전 한 달 정도 파라다이스 사우나에서 계속 일했다. 당장 때밀이가 구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고달픈 나날들이었다고 한다. 그 한 달 동안 때밀이 이모는 천남 귀부인들로부터 갖은 설움과 수모를 받은 모양이었다. 때밀이로 대우해 주기 보다는 하녀처럼 부려 먹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설상가상 그녀들이 하는 이야기들이 죄다 때밀이 이모와는 다른 별 세계의 이야기들로 가득하였으니 참으로 참기 어려운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재력이나 명예에 대한 이모 자신의 열등감 또한 속으로 삭이기 힘들 정도로 컸을 것이다.


때밀이 이모가 겪었던 이런 다른 세상(파라다이스 사우나)을 그녀는 마치 갈 수 없는 동화나라라도 되는 것처럼 내게 들려주었다. 일하러 나가는 엄마가 나를 때밀이 이모에게 맡겨 놓을 때면 때밀이 이모는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마치 동화를 이야기 하듯이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한 것 같았다. 그것은 어린 나의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반복되어 아직도 생생한 영상처럼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때 때밀이 이모는 이렇게 말했다.


“파라다이스 사우나에는 악어들이 많이 산단다. 욕탕은 아주 넓어서 악어들이 느리게 헤엄을 치고 논단다. 악어들은 말을 할 수 있는 데 목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단다. 주인님, 어디를 밀어 드릴까요? 그러면 목욕하는 사람들, 아니 악어의 주인들은 이렇게 말한단다. 황금 이쑤시개 2개를 줄 테니 등껍질로 등을 좀 밀어봐! 그러면 옆에 있는 또 다른 주인이 이렇게 말하지. 난 말야, 발바닥을 네 꼬리로 좀 문질러죠. 황금 물고기 세 마리를 주마. 그런데 악어는 그 주인의 냄새, 즉 황금의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잡아 먹어 버린단다.”


그리고 또 이런 이야기를 했다.


“파라다이스 사우나의 체중계의 숫자와 발판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단다. 귀여운 원숭이들이 체중계의 발판을 항상 눈이 부실 정도로 깨끗하게 닦는 단다. 원숭이들은 말할 수 있는 데 이렇게 말한단다. 주인님, 갈수록 몸매가 날씬해 가시네요. 그러면 주인들은 원숭이에게 황금 과일 꾸러미나 황금으로 된 소고기를 준단다. 원숭이들은 그 주인의 냄새, 즉 황금의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들은 ‘흥’ 하고 무시를 해버린단다.”


때밀이 이모가 내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저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마치 동화를 이야기 하듯이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한 것이라고 말이다. 때밀이 이모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본적도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화책 하나 없는 내게 들려준다고 한 게 그렇게 지어낸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모의 이야기는 참 재미있었다. 파라다이스 사우나에 악어와 원숭이가 있고 황금물고기와 황금 이쑤시개, 그리고 황금 과일 꾸러미와 황금 소고기가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했다. 황금을 던져주는 그 주인들도 어떻게 생겼을지 정말 궁금했다.




이모는 내게 이런 사실을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하면 엄마, 아빠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때밀이 이모가 그렇게 내게 겁을 준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때밀이 이모의 그런 말만 없었더라도 나는 엄마에게 파라다이스 사우나에 대해 물었을 것이고, 드물게 보는 아빠이지만 파라다이스 사우나에 데려달라고 생떼를 섰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내게는 크나 큰 고통이었다. 6살 밖에 되지 않는 꼬마에게 말하는 악어와 원숭이는 함께 놀아야 될 대상이었다. 가슴 설레는 동화나라였다. 지금도 그 감정은 너무나도 강렬하다. 파라다이스 사우나에 대한 호기심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세상에, 내가 사는 마을 산 중턱에서 멀리 보이는 파라다이스 사우나의 거대한 건물에 말하는 악어와 원숭이가 있다니!


내가 모험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악어와 원숭이와 말하고 싶었다. 모험을 떠난 첫날로 그 모험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그 모험은 참담한 실패였다. 우리 마을에서 바라보던 손에 잡힐 듯한 그 건물이 내가 막상 찾아 나서는 순간 어딘가로 사라지고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어둠이 밀려왔고 방향감각은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그 화려하던 파라다이스 사우나의 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다 좁은 골목길의 전봇대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잠이 들고 말았다.


깨어보니 때밀이 이모의 무릎 위에 머리를 배고 누워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시간이 흐물거리는 듯한 느낌이었고 뒤죽박죽 혼돈된 느낌이었다. 이 이해하지 못할 현상은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 놓은 무뎌진 내 기억 탓인지는 모르겠다. 이제 이 기억 속을 다시 헤집고 들어가기에는 지나온 시간이 너무나 긴 듯하다. 파라다이스 사우나의 그 말하는 악어와 원숭이를 만나 함께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파라다이스 사우나의 기억은 그렇게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말하는 악어와 원숭이와 함께.


사족: 2010년에 파라다이스 사우나는 최신식 리조트, 즉 「복합 리조트 단지」로 재개발 되었다. 그 건물의 21층에 있는 아이들의 놀이시설인 「Children's Playground 」에는 말하는 악어와 원숭이가 있다. 아니 말하는 자동차와 로봇도 있다. (*)

(2009.5.9.01:30)

위의 사진 모든 이미지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11732355&code=2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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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1 14:45

공공의 적 2009, 강철중에게 묻는다.


목욕탕의 추억(4)

― 공공의 적 2009, 강철중에게 묻는다


가끔씩 늦게 목욕탕을 가서 혼자서 목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 목욕탕 문을 닫는 시간이 가까워져 마지막으로 혼자 남거나, 이상하게 목욕탕에 사람이 없는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그날도 그런 경우였다. 한 사람 두 사람 빠져 나가면서 나 혼자만 남았다. 혼자일 때는 부담스러웠다. 마칠 시간도 아니고 나가야 할 이유도 없건만,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이 괜히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벗겨내어야 할 몸의 때는 많이 남았는데 이런 경우가 생기면 때에 대한 집착 보다는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더 앞섰다. 텅 비어 있어야 할 곳에 불필요한 존재처럼 혼자 있어야 한다는 몹쓸 생각까지 더해졌다.


그러나 다행이었다. 내가 머리를 감고 있는데 욕탕문 여닫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비록 욕탕문을 등지고 앉아 머리를 감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내게 마치 구원소리처럼 들렸다. 순간 나는 마음이 편해져 왔다. 다시 때를 편하게 벗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희망에 다시 부풀었다. 내가 머리를 두 번 감고 있는 동안 그는 잠시 몸에 비누칠을 하고는 탕 속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발길질로 생긴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내가 머리를 들고 뒤로 힐긋 돌아다보니 그는 욕탕에 머리만 내놓고 굵은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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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의 추억(3)


참 오랜만에 목욕탕을 갔다. 보일러가 고장 나 온수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참석해야할 행사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오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여동생을 전송하고, 오후에는 사촌의 결혼식과 대학원 논문 프레젠테이션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물론 뒷풀이까지도...... 굳이 목욕을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목욕을 의무감처럼 해야 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오랜 기간 동안 보지 못할 여동생에 대해서는 내 몸을 씻지 않고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어떤 우울함이 큰 작용을 했다. 물론 결혼식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결백증이라는 것일까, 하고 생각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작은 웃음이 나왔다.


평일 날이었는데도 그날은 이상하게 목욕탕이 만원이었다. 도시 변두리 작은 마을에 하나 밖에 없는 공중목욕탕이었지만, 그렇게 만원인 적은 없었다. 갑작스런 만원이 어떤 복선이었을까? 귀중품을 카운트에 맡기지 않은 나의 잘못이 현실화 되고 말았다. 목욕을 하고 나오니 사물함이 열려있었고 양복의 안주머니 속 지갑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내 지갑에서는 적지않은 현금과 신용카드 2장이 들어 있었다. 그런 것은 그래도 괜찮았다. 그러나 내가 오랜 동안 간직해 온 내 첫사랑의 징표만큼은 꼭 되찾아야만 했다. 바로 잃어버린 지갑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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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20.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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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의 추억(2)




이미지의 출처는 http://kr.news.yahoo.com/servi

터키목욕탕(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이미지 출처: http://kr.blog.yahoo.com/vsv12






목욕탕의 추억(2)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목욕탕 가는 것이 두려웠던 때가 있었다. 그 두려움은 뜨거운 물에 대한 두려움이라거나, 피가 나도록 까칠한 때밀이 타월로 등껍질이 벗겨지도록 박박 문질러대던 시력 나쁜 엄마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라거나, 욕탕에서 물속으로 머리를 강제로 밀어 넣곤 하던 삼촌의 잔인성에 대한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목욕탕 자체에 대한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아버지가 하던 작은 떡집이 망하고 말았다. 사업이 망한 결정적인 이유는 보증을 잘못 선 탓이지만, 그 이전부터 아버지의 가게는 내리막길이었다. 떡에서 쥐꼬리가 나왔을 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은 이해해주었다. 그러나 두 달 뒤 바퀴 벌레가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세 마리가 나오자 동네 사람들은 발길을 다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빚보증까지 뒤집어쓰고 만 것이다. 우리 가족은 길바닥에 한 동안 나앉아 있어야만 했다. 나는 바퀴 발레가 한 없이 원망스러웠다. 아버지는 어디 한적한 시골 마을의 외양간에라도 정착할 수 있을 만 한 돈을 구하려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셨다. 아빠의 그런 노력으로 길바닥에서의 생활을 그나마 일찍 끝낼 수가 있었다. 다행히도 여름이었기에 비록 짧은 기간이라도 견딜 수가 있었다.

이사를 간 곳은 북쪽으로는 폐광이 있고 남쪽으로는 6.25때 미군의 오폭으로 마을 주민들이 몰살되어 이제는 지명조차 사라진 곳으로 대규모 개사육장이 있었다. 동으로는 높은 산들로 막혀있고 서로는 큰 사과 과수원이었다. 나는 사과 과수원이 있는 마을 학교로 매일 아침 30분을 걸어 다녔다. 그 곳에서 정착하고 아빠와 엄마와 누나는 개사육장과 과수원으로 일하러 나갔다. 아빠와 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체 개 사육장에서 개밥과 오물을 처리하는 누나가 너무 안쓰러웠다. 그것이 생계를 위한 수단 전부였다. 물론 계절에 따라 약간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사는 마을은 집이라고는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서로 외떨어진 10호의 초가와 슬레이트집들이 전부였다. 작은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이런 곳에 공중목욕탕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물이 귀한 작은 마을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이었다. 그 온천수 위에 지어진 목조의 목욕탕이었다.

그 때 목욕탕은 내게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제는 그런 목욕탕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외관을 하고 있었다. 방금이라도 쓰러질 듯한 목조벽에 슬레이트 지붕이 덩그러니 놓여 진 단층 구조물이었다. 그 구조물을 정면에서 보면 시골의 여느 재래식 화장실의 문짝처럼 사개가 맞지 않아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삐거덕, 삐거덕거리며 을씨년스런 소리를 내는 두 짝의 볼품없는 나무문이었다. 그 문에는 붉은 페인트로 각각 남, 녀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욕실 안에는 나무 바닥에 온천수가 퐁퐁 솟아나는 작은 샘이 있고 그 샘 주위의 편편한 돌 위에 두 개의 비누와 그 옆으로 목욕용 수세미 바가지가 몇 개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마을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공중목욕탕이었다니! 그나마 공짜로 목욕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목욕다운 목욕을 하기 위해서는 그곳이 아니면 1시간을 걸어서 읍내로 나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불편을 감수하지는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곳은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산중의 음산한 폐가보다도 나에겐 더욱 무서웠다. 도대체 나는 그런 목욕탕을 한 번도 본적도 없거니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그곳에서 나는 혼자 목욕을 해야만 했다. 엄마는 저녁을 먹은 후 누나와 나를 거의 강제적으로 목욕탕으로 쫓아내곤 했다. 그것은 아빠 때문이었다.

처음 산골 마을에 정착을 하면서 아빠는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사과 농원에서 잡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빠는 술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방에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고 술만 마셔대었다. 엄마와는 언쟁이 끊이지 않았다. 알콜 중독에 무능력해진 아빠와 생활력이 강했던 엄마 사이에 고요한 샘물이 솟아날 수는 없었다. 사나운 물살에 누나와 나는 휩쓸려가지 않으려고 매일 매일 안간힘을 다해야 했다. 아빠는 술 만 마시면 신세 한탄에 엄마와의 언쟁에 폭언에 폭행을 일삼았다. 그 해 겨울, 아빠는 삶을 포기한 것 같았다.

그렇게 엄마에게 떠밀려 밖으로 나가면 사방은 흰눈으로 덮여있었고 목욕탕 외에는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 불행이었다. 목욕하는 것도 싫었지만, 이미 말한 것처럼 목욕탕 그 자체가 정말 끔찍이도 싫었던 나로서는 너무나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목욕탕까지 흰 눈을 밟으며 누나와 함께 걸어가면서 나는 누나에게 같이 목욕하자고 졸라대기도 했다. 그러면 누나는 내가 사내답지 못하다고 타박했다. 나와는 9살 터울인 누나는 내게 언제나 부드럽게 대해주었지만 목욕을 함께 하자는 말에는 완고하게 거절했다. 또한 마을 주민이라고는 10여명이 전부다 보니 나는 혼자서 목욕을 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가끔 누군가가 먼저와 있으면 내 마음이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너무나 드물었다. 아무도 없는 음산한 욕실에서 혼자 목욕하는 어린 아이의 심정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목욕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목욕이 부수적인 활동이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몸에 물을 끼얹고, 머리를 감는 동안 오싹해지는 등짝을 몇 번이나 추슬러야 했는지 모른다.

바로 그런 곳, 나의 육신과 정신을 사납게 물어뜯던 그 음산한 공중목욕탕을 떠나는 것은 내 기도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마침내 그토록 시달리던 공포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왔다. 2년 후 그 산골 마을을 떠나 한 작은 도시 변두리로 이사를 하였다. 정말 너무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허물어진 폐가 같던 공중목욕탕을 떠나게 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그 마을을 떠날 무렵 그 공중목욕탕은 전국에서 제일 큰 온천으로 변했고, 그 산골 마을은 한 순간에 벼락 부자촌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에게는 누울 수 있는 손바닥만한 작은 땅 한 평조차 없었다. 어쩌면 개발이 가져다온 더 커나 큰 불행이었는지 모른다. 더해, 아빠는 죽음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변하는 산골 마을을 보면서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 산골 마을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온천파크가 될 지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도대체 그들이 슬퍼해야 할 이유를 나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소중한 자식의 해방감에 대해서 무관심한 그들이 그저 못마땅할 뿐이었다. 오직 내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공중목욕탕을 떠나는 것이 그저 다행스럽기만 했다. 나는 정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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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14:47

목욕탕의 추억(1)



 

순결한 수산나, 헤너


목욕탕의 추억

어린 시절 목욕탕은 놀이터와도 같은 곳이라 생각할 것이다. 오늘날의 수영장을 대체하는 의미가 있었다거나, 엄마와 함께 여탕으로 가던 추억이나, 목욕후 아빠가 사주던 짜장면에 대한 추억들 따위로 어린 시절과 목욕탕을 낭만적으로 연결 지으려고도 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런 추측은 9할 정도는 맞을지도 모른다. 목욕탕이 낭만적인 곳이었다는 생각은 보편적인 생각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목욕탕에 대한 기억이 그리 낭만적이지 못하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엄마와 함께 여탕을 이용했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간혹 여탕에서 목욕하기도 했다. 이건 내겐 낭만이 아니라 차라리 악몽이었다. 엄마의 편리를 위해 희생된 비극적인 결과였다. 빈도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심지어 나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도 엄마와 함께 여탕을 들락거렸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애가 여탕에 가기에는 좀 커지 않나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면서도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여탕으로 향했다. 엄마는 억척같고 생활력이 강한 여자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상하게 내가 엄마 손을 잡고 여탕의 탈의실에서 옷을 벗는 순간부터 같은 반 여학생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나의 초등학교 1, 2학년 여학생들은 나의 나신에 꽤 익숙해 있을 것이다. 남자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드물게 보았기에 나는 여탕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더욱 부끄러웠다. 그 아이들은 어디에서 목욕을 할까? 아빠를 따라 남탕으로 가겠지? 여자 아이들을 볼 때면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고추가 뻣뻣해져 얄궂은 수치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탈의실에서부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여자 아이가 있는가부터 살폈던 것이다. 만약 여자 아이가 있으면 아예 등을 돌리고 후다닥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욕실에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참 단순한 행동이었다. 작은 욕실은 더욱 더 피할 곳이 없었으니 말이다. 공간의 제약이 더욱 심해서 함께 나란히 앉아야 할 경우도 있었다. 작은 목욕탕은 가끔 악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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