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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5 12:37

녹차의 맛






이미지 출처:http://www.koreafilm.co.kr/movie/review/nokcha.htm



녹차의 맛

녹차의 맛을 한 편의 영화로 표현한다면 어떤 영화가 될 수 있을까?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녹차의 맛을 어떻게 우려 낼 수 있을까? 녹차의 맛은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떫고 쓴맛이 나다가 달콤하고 짠맛이 나기도 하는 오묘한 맛이랄 수 있다. 한마디로 인공이 느껴지지 않는 자연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녹차의 맛이 단순히 차 잎에서 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녹차의 맛을 단순히 미각적인 테두리로 설명하는 것은 부족한 구석이 있다.


자연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차는 필수적이지만, 또한 녹차를 마실 수 있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하고, 녹차를 우려내기 적합한 적당히 뜨거운 물이 빠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구운 다기(茶器)도 있어야 하며, 녹차의 맛을 함께 음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다. 아니 혼자여도 좋다.


그러니 녹차의 맛은 이성보다는 감성적이며 분주함보다는 여유로움이며 외면적인 표현이기 보다 내면적인 성찰이요, 채움보다는 비움이고 번잡함보다는 단순함이다. 그래서 녹차는 도시의 빌딩과 자동차와 도로보다는 자연의 나지막한 집들과 들판과 오솔길이 더 어울린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 보다 크고 느리게 돌아가는 페리스 휠과 어울린다.


이제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녹차의 맛을 한 편의 영화로 표현한다면 어떤 영화가 될 수 있을까?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녹차의 맛을 어떻게 우려 낼 수 있을까? 그것은 결국 은은한 사람들의 맛이고 오묘한 삶의 맛이 될 것이다. 녹차의 맛처럼 미각적으로 오묘하며 정서적으로 감성적이며 내면적이며 단순하고 자기 성찰적인 사람들의 따뜻하고 은은하며 고요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며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페리스 휠을 타며 조용히 자연을 관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나하나의 차 잎들이 모여 오묘한 맛을 내듯이 여러 개인들이 모여 삶의 쓰고, 떫고, 달고, 슬픈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보여주는 삶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짙은 커피향에 익숙한 이들에게 녹차의 맛은 너무나 무미건조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액션과 폭력이 난무하는 이야기에 익숙한 이들에게 녹차의 맛은 자극과 재미가 없는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녹차의 맛은 아득한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본질적인 맛이라는 것이다. 인공의 미각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마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그 내면을 성찰하도록 하게 하는 맛이라는 것이다. 성찰이란 말 자체도 번거로울 정도로 비움의 맛이라는 것이다.


녹차의 맛을 위해 대가족의 구성원들을 주된 등장인물들로 설정한 것은 참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관계 중에서 가족처럼 본질적인 관계가 어디에 있을까?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알고 있는 그대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관계가 또 있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지막까지 지켜져야 할 가족조차 그 본질적인 관계가 해체되고 있는 현실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다. 의도가 개입되고, 자본이 개입되고, 사회적인 체면이 개입되면서 가족의 관계도 갈등을 겪으며 허물어지고 있다. 자식의 영어 공부를 위해 ‘기러기 아빠’ 가 되고, 때로 외로움에 자살을 하는 비극적인 아버지의 모습. 자식들로부터 버려진 노부부의 모습. 자연적이고 건강한 성장통을 겪으며 자라나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공부와 과외에만 시달리며 맹목적으로 내달려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 맛으로 따지자면 가족의 본질적인 맛을 상실하면서 인공적이고 비본질적인 맛이 색소처럼 자극을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녹차의 맛>의 가족 구성원들은 녹차 잎에서 우러나오는 불립문자의 오묘한 맛처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성장통을 겪으며, 성인들은 성인들대로 나름의 상처와 고통과 기쁨 등 틀에 박힌 일상에서도 삶에 체념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녹차의 맛 같은 은근한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녹차의 맛>은 본질적인 가족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도록 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대가족으로 형성된 <녹차의 맛>의 가족들은 그래서 우리에게 깊은 의미, 녹차의 맛으로 다가온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바로 이 대가족과 그 구성원들의 삶을 통해서 인간의 삶과 관계와 그리고 더불어 자연과 인간의 관계(녹차의 맛을 음미하는)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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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9 19:10

인간의 굴레




 

인간의 굴레, 중심과 이탈


인간에겐 야성(野性)이 있다. 아프리카의 초원을 뛰노는 사자나 기린 같은 동물적인 야성이 있다. 그 야성 중에는 물론 온화한 초식성과 사나운 육식성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과 인간이 생존을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걸 보여준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과 살인이 끊임없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동물적인 야성간의 문제로 생각해 봄직도 하다.  


문제는 인간의 육식성이 초식성보다 비대할 때였다. 힘과 무력이 지배하는 경우이다. 존재하는 인간의 제도와 법과 종교를 보면, 인간의 야수적인 육체를 지배한 정신의 성과물처럼 여겨진다. 인간의 그 사나운 육식성이 어떻게 순화되고 있는지를 제도와 법과 종교는 잘 보여준다. 만약 제도와 법과 종교의 등장에 근거해서 '인간의 역사는 야수성과 순화(純化)로 얼룩진 역사이며 또 그렇게 전개 될 것이다' 라고 한다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된 것은 스스로에게 중심(中心)을 제공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었다. 도덕과 윤리와 신과 이념을 마치 오뚜기의 중심 추처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인간을 다잡는 그 자기 희생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인간은 인간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심(中心)은 권위와 권력과 결합하여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야수적(?) 억압으로 변질되면서 인간은 자기 내부의 야수성의 통제와 조절과 억압과 더불어 자기 외부의 거대한 권력과 권위라는 감당할 수 없는 억압에 직면한 것이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한다면 내면의 욕구를 억압하고 외부의 권력과 폭력에 의해 억압당하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면에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권력과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을 온전히 맡겨버리거나 중심(中心)으로부터 이탈하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이탈은 악덕과 미덕을 다 포함한다. 먼저, 인간의 야수성에만 국한해 본다면 나쁜 의미가 선명히 드러난다. 중심에서 이탈한 새로운 야수성이 개인적인 살인과 집단적인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구속적인 중심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미덕으로 간주 될 수 있으나 동시에 가장 극단적으로 인간의 야수성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악덕으로 간주 될 수 있는 것이다. 이탈이 이러한 범죄적인 양상으로 변질되고 새로운 억압과 권위주의를 낳는 것은 인간의 정신 속에 내재된 동물적인 야수성이 잉태한 가장 최악의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경우로, 은둔과 세상과 인연을 끊는 이탈이거나 중심의 해악에 순수 비판적 이탈이라면 그는 온전히 자유로운 이탈을 이루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은 바로 이러한 이탈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탈은 인간의 야수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된다. 즉, 순화(純化)는 완전한 질적(質的) 변화가 아니라 억압에 대한 일종의 반응 양식인 까닭에 더 근본적인 질적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한 질적 변화의 중심에 종교와 부단한 자기 수양이 있다. 


사족이지만, 그렇다면 현실이 완전한 파라다이스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인가? 가당한 결론인지는 모르지만 ‘불가능’ 하다. 억압은 끊임없는 이탈을 낳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 ‘완전’ 하고 절대적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그것은 수많은 철학자들의 좌절이기도 했다. 완전과 절대란 <관념>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지 현실은 결코 완전과 절대적인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해 현실에 대한 실망과 도피가 그러한 관념을 만들어 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에서 실존적으로 주어진 이 구심력(중심)과 원심력(이탈)의 충돌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인간들을 피곤하게 할 것이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굴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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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1 15:31

[꽁트] 전어



 

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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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2.hani.co.kr/board/ns_world

나는 그 늦가을의 전어를 잊을 수가 없다. 맛 때문은 아니다. 그런 잊혀지지 않는 인상 속에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부조리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한 사건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고 부조리적이라 이름 붙였지만, 다른 이름을 달아주어야 하는 건 아닐런지 모르겠다.


흔하게 지나치는 자잘한 일상 속에서 역시나 흔하고 자잘한 일이 왜 그토록 돌발스럽게 내 가슴속에 각인 되었는지 모르겠다. 인간의 주위에는 부조리한 일들이 언제나 넘쳐나는데도 말이다. 인간인 나의 눈에 비치는 세상 속에는 수많은 부조리들로 우글거린다. 이를테면 전쟁에서 학살되는 인간들이나 도살장에서 도살되는 동물들의 운명 같은 것들이 그렇다. 부조리의 경우로 말한다면 도살되는 동물들이 그러한 경우에 가깝다. 전쟁이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의해 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차 대전도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피할 수 있는 것임에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부조리한 사실일까.) 그러나 인간의 식욕은 끊임없는 육고기를 원하고 끊임없이 동물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이 모순! 삶과 죽음이 서로를 집어  삼키는 이 순환의 부조리함.


내가 그 늦가을 어느 횟집의 수족관 속의 전어를 보면서 평화롭고 낙관에 가득 찬 이 세상에도 불구하고, 느닷없는 세상의 어찌 할 수 없는 부조리에 대한 강한 인상과 회의와 무기력은 이상할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내가 전어의 세계를 인간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전어로 <변신>이 되어 수족관에서 <이방인>의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었을까? 이전의 무수한 부조리 앞에서도 무감각하게 지나쳐 온 나 자신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 친구와 함께 전어회를 먹고 출입문 밖으로 나와 커피를 홀짝이며 수족관에 있는 전어를 보면서 친구가 내게 한 말이 그러한 감정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친구의 말은 그다지 대수로운 것도 아니었다.


“저 놈들은 저들의 운명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얼마나 큰 공포에 휩싸여 있을까? 모를 꺼야! 모르는 게 약이란 이런 경우에는 딱 어울리지 않을까.”


그 친구의 그 말을 듣고 나는 강한 전류에 휩싸인 듯 전율했던 것이다. 나는 저 놈들의 어미나 새끼들을 맛있게 먹고 나왔을지 모르며 저 놈들의 눈에 비친 현실은 얼마나 부조리하며 나의 모습이 얼마나 가증스러울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던 것이다. 불고기집, 보신탕집, 곰장어집, 횟집 등등의 앞에서는 전혀 느껴보지 않았던 그러한 감정이었다. 친구는 계속해서 수족관의 전어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불쌍한 자식들. 한 치 앞 제 운명도 내다보지 못하는 구나. 하지만 그게 낫지. 이렇게 유유한 것이 나아. 저 유유함에 은근히 화까지 나는데.”


나는 그때 전어들이 ‘살육 청부업자‘ 인 나와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전어가 한다고 한들 뭐 대수냐! 전어가 그 따위 철학적인 생각을 해, 제기럴! 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괜한 감상이려니 생각했다. 나는 애써 그러한 병적인 감상을 막으려 먹이사슬이나 생존 욕구 따위의 단어들을 들먹거렸다. 그러자 내 마음도 조금 위안이 되었지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전어들 앞에서 뱃속에 한 가득 전어회를 채우고 포만감에 만족하며 커피를 홀짝이는 나 자신이 구토를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기력하고 무각감하다는 생각은 완전히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를 둘러싼 주위의 자그마한 부조리한 현실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어에게 나의 존재처럼 나에게 세상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란 무기력과 무능력과 더 나아가 무감각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수족관을 보고 있는 친구 옆에 나란히 서서 초조(?)하게 유영하는 전어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나는 괜한 감정 따위를 떨쳐낼 요량으로 친구에게 말했다.


“야, 2차 노래방 가야지! 뭐 그리 쓸데없는 소리를 주절거리고 있냐, 너는!”


친구는 계속 전어에 시선을 드리운 채 입을 열었다.


“야, 정말이지 모르는 게 약이야, 약!”


나는 친구에게 다시 한 번 모르는 게 약이다, 약 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대고는 친구의 팔짱을 끼고 근처의 노래방으로 향했다. 노래방에서의 이야기는 노래를 계속 불렀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언급할 것이 없다. 허전한 김에 한 가지 언급한다면, 나는 서툴긴 했지만 팝송을 연속으로 불렀고 친구는 평소와는 달리 센티멘탈한 노래를 불렀다는 점이 될 것이다. 마흔에 이른 우리는, 제목을 [마흔 즈음에]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마지막으로 함께 목이 터져라 부르고 난 뒤 노래방을 나왔다. 그 날 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다음 날 아침, 부고가 날아들었다. 그 친구의 부고였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정말이지 모르는 게 약이었을까? 아무 준비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버린 친구에게 모르는 것이 정말 약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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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6 23:35

[꽁트] 우아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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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slrclup.net/Common/

 


우아한 인생


지하철을 타러 간다. 지하철을 타지 않으려면 택시나 버스를 타야하고 버스를 타지 않으려면 걸어야 한다. 자주 걷지만 신고 있는 구두 때문에 걸을 수가 없다. 굽이 떨어진 건 오늘 오후다. 오늘 오후에는 커피를 마실 시간도 없이 바쁘다. 커피가 무척이나 마시고 싶다. 좋다는 원두커피는 마다하고 커피믹서를 즐겨 마신다. 고객들이 몰려온다. 고객들이 뒤섞인다. 그런 혼란에도 일정한 질서는 있다. 번호표를 한 장씩 들고 있다. 번호표는 무언의 약속이다. 소파에 앉아도 있다. 고객들은 돈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돈을 인출한다. 돈을 예금한다. 돈을 이체한다. 통장을 보며 투덜거린다. 통장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현금지급기에도 고객들이 줄서있다. 카드를 현금지급기의 투입구에 넣고 입출금의 액수 버튼을 누른다. 비밀번호를 누른다. 단단히 닫혀있던 지급기의 뚜껑이 열리고 현금이 보인다. 돈을 센다. 돈의 형상이 망막에 와 맺힌다.


“바쁘다는 것은 그다지 나쁠 것은 없지. 아직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지.”


번호판의 붉은색 숫자가 245다. 신발 사이즈다. 고개를 숙인다. 작은 발을 내려다 본다. 고개를 든다. 그녀가 서있다. 그녀는 인상적인 붉은 스카프를 하고 있다. 진한 붉은색 입술이다.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적금 통장을 내민다. 통장 사이에는 십 만원 수표 5장이 끼워져 있다.


“이서 좀 해 달라고 했을 때 그녀는 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지.”


그녀가 수표 뒷면에 이서를 한다.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그녀의 이름은 수진이다. 전화번호는 1234-432*. 아름다운 숫자다. 숫자에도 지저분한 숫자가 있다. 그녀의 전화 번호는 아름답다. 손이 바쁜 시간에 눈으로 쉽게 외어지는 숫자이기에 그렇다. 그녀는 못생긴 것도 잘 생긴 것도 아니다. 그녀의 전화번호처럼 쿨하지도 않아 보인다.


“그녀의 입술과 스카프만큼이나 전화번호가 인상적이었지. 전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하루 종일 돈만 만지고 있으면 잔인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건성으로 돈을 세거나 서류를 처리하면서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을 한다. 전날 밤의 분위기와는 다른 직장의 오전 시간 동안 그런 생각에 쉬 빠져든다. 돈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자리. 돈을 세고 앉아있는 허깨비 같은 존재. 지나친 감정이긴 하다. 나의 존재감을 더욱 강렬하게 확인해 주는 존재는 K이다. K는 선배이자 상사이다. K가 점심을 먹고 나를 부르고 역정을 낸다. 무엇이 잘못 된 듯하다. 아침의 지각 탓이기도 하다. 서류 뭉치를 집어 던진다. 바로 이런 일이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가슴의 꿈틀거림이다.  


“점심을 얻어먹은 것으로 만족해. 그렇게 식사비를 아껴 바에서 술이라도 마시는 게 아냐? 분노나 벌레 같다는 것, 그건 감정이라는 허상일 뿐이지.”


속이 쓰려온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이다. 시간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변기에 목을 길게 빼고 구토를 한다. 침대 위에서 바로 잠에 빠져 든다. 아침 6시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두통이 심하다. 아침을 먹지 않는다. 습관처럼 인과로 연결되는 단어들이다. 술, 구토, 잠, 아침, 두통, 속 쓰림.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한다. 하얀 와이셔츠와 양복바지를 입는다. 넥타이를 매고 윗도리를 입는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는다. 거울 속에 사내가 서있다. 뒷모습을 내보이기 싫어하는 사내가 서있다. 구두를 바꿔 신으려고 한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른 구두는 수선을 위해 구두 수선점에 맡겼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거울을 뒤로 하고 빠르게 등을 돌린다. 룸을 나와 문을 잠근다. 벌레의 각질 같은 철제문을 잠근다.


지하철을 타러 간다. 지하철을 타지 않으려면 택시나 버스를 타야하고 버스를 타지 않으려면 걸어야 한다. 늦으면 뛰기도 한다. 오늘은 아무래도 뛰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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