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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7 23:49

독재자들

                                                    사진출처: http://kr.news.yahoo.com/servi


독재자들을 생각하며......

인간의 사전에 비극이란 단어는 사라질 수 있을까?

일회적인 역사를 특정한 방향으로 가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인간이 만든 그 문명에 대해서는 그 폐해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 혜택에 대해서도 늘 감사를 해야 할 것 같다.

만약 나 자신이 로마시대의 검투사로 태어나거나 노예로 태어났다면 그 잔인한 운명에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만약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지 못한 네안네르탈인 이나 크로마뇽이었다면 또 어떻겠는가?

21세기, 법과 도덕이 인간의 잔인함을 다소나마 아니면 엄청나게 순화시키고 있는 지금에 태어났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인간의 문명에 대해 감사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는가? 나의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만 할까? 문명에 대한 고마움은 곧, 문명을 이룩한 인간들에 대한 고마움과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이 공간에 태어나게 한 어떤 힘에 대한 고마움이기도 하다. 그 힘이 그저 우연이란 이름으로 불리던지 노력이고 필연이란 이름으로 불리던지 아니면 운명이고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던 간에 나는 무조건 나라는 존재의 세포 하나하나에 심어진 축복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전적으로 비판하려면 자신의 존재의 전적인 부정이 그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 까닭으로 오직 문명에 대한 제한된 일부의 비판만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일부분의 비판이라는 것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다면 오랫동안 문명이 내재되어온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를 살상하는 일이다. 자기 존재의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 그래도 가능한 것은 미래 때문이다. 미래는 더 나은 문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희망과 믿음 때문이다. 나의 존재에 주어진 축복 중에 다소 불순한 것, 불편부당한 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미래의 존재를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미래의 그들이 진정으로 더 더욱 축복받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불순하고 불편부당한 것이란 왜곡으로 변질된 문명이다. 광기와 전쟁과 기아와 증오이다. 그것에 근거한 문명이다.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든 문명의 왜곡들이다. 왜곡된 문명, 우리는 이것을 우리에게 축복을 주는 참된 문명 속에 깃든 불순물로 걸러내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나 자신이 나를 인간답도록 해준 이 문명에 참으로 감사하는 길은 문명의 왜곡된 부산물을 걸러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세상을 개화시켜온 인간들처럼 지금, 현재 우리가 또한 개화시켜할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을 개화시키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문명에 감사하는 길이다.

그러나 현실은 참으로 어렵다. 역사라는 체계 속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고 또 그렇게 단단한 체계로 움직이면서 끊임없는 쇠뇌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을 잉태하는 인간은 너무도 완고하고 잔인하다. 현실에 얼룩져있는 비극을 잉태하는 불순함과 불편부당함이 스며들어 있는 문명의 일부와 인간의 일부로 부터 다수의 선량한 인간이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에 불순물과 같은 불행이 언제나 있다는 것은 끝없는 슬픔을 자아낸다.  인간들의 수많은 노력에 의해 무수한 불행들이 예방되고 막아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인간에게 무자비한 불행을 주는 인간들 또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당연한 현실이라고 자위해야만 할까? 인간들 사이에 왜 이러한 비극이 생겨야 할까? 그것은 수많은 인간들의 인식이고 또 노력의 근거가 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인간들로 해서 축복만이 아니라 불행과 비극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다. 

인간은 죽어야 하는 비극적 운명의 존재이다. 죽음이라는 비극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인간들이 서로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는 존재가 될 수는 없을까? 인간의 사전에 인간이 자초하는 비극이란 단어가 사라질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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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5 21:50

자연은 슬픈 목격자

나무를 보면 부끄럽다. 꽃을 보면 부끄럽다. 산을 보면 부끄럽다. 그들이 보는 가운데 인간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왔던가? 문명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얼마나 거만하게 살아왔던가? 자연은 역사의 슬픈 목격자다. 나무에 가만히 기대어 그 슬픈 목격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미지 출처는 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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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3 19:34

술은 아름답다.

모든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인식하는 바다. 모든 인간이 추잡스런 것은 아니다. 이 또한 상식적으로 인식하는 바다. 세상은 아름답다거나 추잡스럽다. 이 또한, 또한 상식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서, 취하고서 인간을 비난하는 인간들, 세상을 추잡하다고 하는 인간들은 상식적인 인식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술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인간을 아름답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욕이 필요하다. 세상은 delagatory words  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fuck you 가 필요하다. 그런데 또한 증오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세상이다. 세상을 욕하면서도, 세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소통을 거부하는 인간들을 나는 조소한다.  술을 마시고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을 나는 증오한다. 술은 소통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통을 거부한다면 술을 마실 하등의 이유가 없다. 술을 마시고 소통을 거부하다면 그는 인간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100%이다. 소통을 거부한다면, 순수한 마음을 되찾으려 하지 않은다면, 술은 마시면 안된다. 술은 그런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세상을 사랑한다.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미워도 증오스러워도, 원망스러워도 세상은 내가 몸담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공간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세상을 증오할 수가 없다.

술을 마시고 세상에 욕을 퍼부어라! 미친듯이 외쳐라! 세상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안다. 그나마 그렇게 외치는 인간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술은 그렇다. 밖을 시끌벅적하게 한다. 그러나 속을 , 속을 아프게 하는 것을 진실로, 진실로 소통을 바라게 하는 것을! 이 진실이 없다면, 껍데기로 노딘다면 껍데기는 가라!


나는 술이 좋다. 술 그 자체가 좋다. 취하는 것이 좋다. 내 더러운 껍질을 벗겨내고 내 가식을 벗겨내고, 내 찡그린 표정을 벗겨내기 때문이다. 술은 취할 수록 좋다. 취하니 좋다. 내가 아니기에 좋고, 껍질을 벗겨놓기에 좋고, 흥겨웁기에 좋다. 나를 이 팍팍한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하기에 좋다.

그래서 술은 아릅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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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8 04:05

생태주의와 관련하여

                                        생태주의와 관련하여


1.정치적 생태주의와 생태주의 정치

생태주의의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이 창조한 문명은 생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의 평등과 해방을 부르짖는 사회주의도 그것이 간과하고 있는 여성, 식량, 환경 따위의 사각지대로 말미암아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두 말 할 것도 없다.

현재 인간 문명의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만약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제지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인류는 공멸의 위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생태주의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솔직히 늦은 감이 있다. 2040년이 되면 북극의 얼음이 다 사라진다고도 하고 인간의 자원도 고갈의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이 위기 앞에서 이념 따위는 어쩌면 사치인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생태주의를 어떻게 인류에게 확산시키고 실천을 도모하는가가 당면한 문제다. 이와 관련하여 생태주의 정치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상적인 정치행태라고 할 수 있다. 후쿠야마가 틀린 것은 생태주의 정치에 대한 통찰이 부족한 것이다. 완전한 민주주의로써 생태주의를 그는 몰랐다고 생각한다. 인간 중심의 민주주의는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상의 민주주의로 확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태주의 정치 는 가능할까?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 중심적인 역사는 그 해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인간도 그 해체의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민주주의 정치를 넘어 생태주의 정치로 나아가는 실험을 하고 현실적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면 그는 역사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최초의 인간이 될 것이다.

단지 이러한 노력이 가능하려면 정치적 생태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그 나마 가능한 일이다. 생태주의자들이 정치로 진출하여 부분적으로 정책의 방향을 생태주의로 변화시키고, 개선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녹생당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제도 정치로의 진출이 아니더라도 그린피스등의 환경 단체들이 여론을 환기시키고 정치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생태주의 정치는 소집단에서 실험될 수는 있겠으나 국가 단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며, 다만 정치적 생태주의가 어느 정도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본다.

이 세상에 인간의 행위가 정치적이 아닌 것은 없다. 아니 좀 더 좁혀서 국가 정책과 관련한 경우 그것은 당연히 정치적이란 이름을 띠게 된다. 농민의 쌀 수입 시위, 이를테면, 미국의 대량 생산된 유전자 변형 농산물에 대한 유기농 쌀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정치적인 생태주의라 부를 수 있다. 또한 생산주의와 인간중심주의 비순환적인 개발 등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가장 효율적인 정치적 생태주의라 부를 만 하다.

그러나 ‘정치적‘ 이란 단어의 함의가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정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 대립적인 존재로 위치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생산주의, 자연파괴등을 근거로 존립하고 있는 기존의 정치를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러하면 굳이 정치적이란 단어로 생태주의를 수식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정치적‘ 이란 단어는 생태주의의 본질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주의, 종교, 문화, 생명과학, 공동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생태주의를 발전시키고 강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 다양성의 원리에도 맞다.


2.정치적인 생태주의에서 ‘정치적‘ 이라는 용어의 함의가 다양성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일까?


위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정치적‘이란 말의 함의는 기존 정치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양성의 정치를 의미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기존 정치의 안티테제로 의해서며, 생태주의 그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다양성을 협소화시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종교적인 생태주의, 식량 생태주의, 문화생태주의, 생태여성주의 등 다양한 생태주의를 협소화할 위험이 있다고 본다.


3.생태주의적인 행동양식의 변화는 ‘정치적‘ 인 행위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

정치적 생태주의가 권력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정치적 생태주의는 그 용어상에서 정치권력을 지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으로의 화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다. 그것은 단순히 권력에 대한 대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대안제시를 목적으로 하기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A라는 권력을 쥐고 있는 인간이 B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정치적 생태주의는 생태주의 정치를 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생태주의 정치라는 용어 자체가 언어로만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마도 리피에츠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생태주의 정치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바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4.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5.동양정신의 언급은 이분법이 아니라 생태주의로의 진정한 환원을 의미한다.

위대한 정신들은 (이건 참 잘못된 표현이었다.) 대체로 동양에서 존재했다.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노자도, 간디도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생태주의자들이다. 희랍의 철학은 생태 사슬의 순환에서 인간을 독자적인 존재로 만들었고 이성과 합리성으로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삼는 비순환적인 생산주의를 초래했다. 그리고 산업주의의 결과로 지속 불가능한 발전을 통해 인간은 풍요 속에서 동시에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금 서구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녹색 혁명을 부르짖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인간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들의 생태주의 이론을 호들갑스럽게 받드는 지식인이 있다면 그것 또한 부끄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스스로에게 눈을 돌려보아도 생태주의는 생활 속에 존재하고 있고 있다. 왜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에서 그토록 야단법석을 뜨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민주주의는 서구가 전해준 위대한 유산이다. 산업주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제 민주주의와 산업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생태주의는 동양의 정신에서 찾았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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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1 17:56

[꽁트] 신문팔이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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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팔이 소년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떠올린 것은 녀석의 몰골과 그러한 몰골을 가능케 해주는 추운 날씨와 간간이 날리는 눈발과 약간의 취기(醉氣)때문이었다.

‘아마 성냥팔이 소녀도 저러했겠지.’

녀석은 신문 꾸러미를 옆구리에 끼고 벤치 위에 앉아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고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도 무관심하게 녀석의 옆을 총총 걸음으로 지나쳐가기만 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녀석에게 액수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지폐 두 장과 함께 가지고 있던 라이터를 녀석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라이터는 어쩌다 한 번 갔던 단란주점에서 받은 것으로 겉에 상호와 전화번호가 큼직하게 새겨져있었다. 그땐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성냥팔이 소녀처럼 불이라도 피워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손에 쥐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이터를 녀석에게 준 것은 실수였다. 혹 불장난이 큰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해,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그 라이터의 뒷면에는 여자의 적나라한 나체가 그려져 있었기에 라이터를 열 서너 살 안팎의 그 철없는 소년에게 쥐어주고 나서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다음날 나는 라이터 때문에 무척이나 걱정을 했다. 어떤 면에서는 나의 생활의 무절제(?)함의 때가 묻어있는 라이터를 그 순수한 아이의 손에 쥐어준 것이 내내 마음이 걸렸고 더해, 성냥팔이 소녀의 죽음이 자꾸만 불길한 생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성냥불이 다되어 동사한 소녀처럼 녀석도 라이터 불을 피워놓고 잠이 들어 얼어 죽거나 불이 신문이나 옷에 붙어......”

나의 불길한 상상은 그렇게 이어지면서 차마 끝말을 잇지 못한 기억이 났다. 일요일이었기에 나는 윗도리를 걸쳐 입고 전날의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고 거리로 달려 나갔다. 그곳 벤치에는 녀석의 흔적조차 없었다. 나는 벤치 위에 검은 재의 흔적이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기도 했다. 라이터만이라도 어딘가에 떨어져있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실망스럽게 돌아서려다 벤치아래 돌멩이 틈 사이에서 바람에 나풀거리는 검게 탄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순간 녀석이 무언가를 태웠다고 생각하고 벤치 아래로 고개를 쑥 내밀고 보니 의외로 타다 남은 복권 조각이었다. 복권 위에 가능성을 품고 있던 숫자란 숫자들은 모조리 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다 타버린 복권을 들고 인도 위를 서성거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힐긋힐긋 보기도 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좀체 복권을 태운 녀석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난삼아 복권을 태웠단 말인가? 거액의 당첨금을 가져다주지 못한 얄미운 복권을 증오로 가득 찬 손길로 태웠단 말인가?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고자 일확천금을 꿈꾸는 소년. 소년은 평소 손으로 찢어버렸을 복권을 라이터로 체념과 분노가 동시에 밀려오는 혼란스런 심정으로 태웠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소년과 복권과 라이터가 좀 더 명확해 지는 듯도 했다. 나는 성냥팔이 소녀의 이미지를 몰고 왔던 그 신문팔이 소년의 허황된 믿음과 발버둥이 못내 안타까웠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침 준비를 했다. 직장 근처의 연립아파트였다. 30대 초반인 나를 결혼의 유혹에 빠트리는 것은 언제나 밀려드는 가사노동이었다.

“독신으로 남겠다고......빨리 장가나 갈까.”

나는 세탁기나 냉장고, 진공청소기 보다는 여자 한사람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여자들이 들으면 맞아죽을 소리겠지만). 총각 행세야 단란주점이 좋았지만 가사노동이 버티고 있는 현실에서는 총각의 꼬리를 떼고 싶었다.

나는 TV를 켜고 창문을 활짝 열고 실내를 환기 시켰다.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비명을 지르며 외쳐대던 퀴퀴하고 느끼한 그 노총각 냄새를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창문으로 실내와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겨울의 찬 기운이 들어와 무언가 새로운 각오를 용솟음치게 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특히 복권 추첨이 있는 일요일 오전에는 더욱 그러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소파에 앉아 복권 추첨을 조용히 시청했다. 복이 들어오려면 창문은 활짝 열려있어야만 했다.

나는 전날 밤에 구입한 복권을 소파 옆 옷걸이에 걸려있던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었다. 그런데 내가 분명 3장을 구입한 복권이 두 장밖에 없었다. 전 날 밤 확인하지 않고 소년에게 주었던 지폐 두 장에 한 장의 복권이 끼어있었던 것이다.

복권 추첨이 끝나고 나는 나의 가장 큰 실수는 그 복권을 녀석에게 준 것이란 걸 알았던 것이다. 나는 녀석에게 엄청난 돈을 보시했던 것이다. 무려 오억이나. 내가 가지고 있던 복권 두 장 모두 1등 번호를 가운데 두고 있는 번호들이었기 때문이었다(그 복권들은 1등 하나만 당첨되는 복권이었기 때문에 나의 충격은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아니 나는 완전히 미쳐버렸다.

“억, 억, 억, 재로 변해버렸어, 재로!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녀석은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제기럴.”

나는 온갖 욕과 저주를 녀석에게 퍼부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일어날 수도 없는 대사건이었다. 도대체 5억원을 태워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제 과거가 되어버린 그 일을 이렇게 완곡과 완곡을 거듭하며 무덤덤히 표현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열려진 창문 밖으로 획하고 자신을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 자신이 저주스럽고 증오스러웠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던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도 나는 여전히 오랜 동안을 악몽 속에 시달려야만했다. 나는 거의 1년 동안을 5억을 되새기며 살았고 엄청난 스트레스와 신경증으로 신경과를 찾기도 했다. 재로 변한 5억은 두고두고 나의 가슴에 한으로 맺힐 것 같았다.

이제 20년이 지난 지금, 녀석을 찾은 지금, 불로소득인 5억은 내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녀석의 삶은 교훈으로 전해주었다. 그 5억짜리의 복권은 재(灾)가 되었지만 노골적인 여자의 나신이 새겨져있던 라이터는 녀석의 삶에 엄청난 재(財)를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 밤에 녀석은 손을 녹이기 위해 돈이 아닌 그 복권을 근처에서 주워 모은 나무가지들과 함께 태웠고, 잠깐 신문에서 본 한 벤처기업가의 성공 기사를 보면서 성공의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그렇게 타다 바람에 날려 버려진 복권 조각이었던 것이다.

그때 불태운 복권은 재(灾)로 사라졌지만 불태운 성공의 의지는 비록 신산(辛酸)하기는 했지만 20년 동안 녀석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 라이터에 새겨져있던 여자의 나신(裸身)은 녀석의 성적인 타락이나 유혹보다는 도덕적 무장을 촉발한 특이한 정신적 효과를 가져왔던 것은 차라리 이상할 정도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녀석이 나를 찾은 것은 내게 외관상 라이터를 돌려주기 위함이었지만 라이터가 자신에게 가져다준 의미를 고마움으로 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그러나 사실 나는 부끄러웠다).

나를 찾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엄청난 재력가가 되어버린 녀석은 반복해서 언론매체를 이용했고 나 또한 그 엄청난 복권 소각(?)에 얽힌 그 녀석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라도 꼭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라이터는 아주 특색 있는 것이었고 라이터를 주고받던 상황이 우리 둘에겐 어떤 극적인 장면으로 남아있었기에 서로의 만남은 어렵지가 않았던 것이다.

"......전 그 라이터를 보면서 여자와 단란주점을 멀리하였습니다. 단란주점에 여러번 전화를 해서 누나들 좀 놓아주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저의 성공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 성공의 의미가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 도덕적이고 사회지향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저는 그 작은 라이터에서 부의 사회적 환원이란 거대한 교훈을 얻었던 것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시오."

그때 나는 복권 소각 사건을 이야기하려다 그만 두었다. 우리들의 이런 따뜻한 인간관계는 그 라이터의 교훈과 복권의 재(灾)가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나약한 신문팔이 소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지출처: blog.empas.com/jeongsg21/1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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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




 

인간의 굴레, 중심과 이탈


인간에겐 야성(野性)이 있다. 아프리카의 초원을 뛰노는 사자나 기린 같은 동물적인 야성이 있다. 그 야성 중에는 물론 온화한 초식성과 사나운 육식성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과 인간이 생존을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걸 보여준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과 살인이 끊임없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동물적인 야성간의 문제로 생각해 봄직도 하다.  


문제는 인간의 육식성이 초식성보다 비대할 때였다. 힘과 무력이 지배하는 경우이다. 존재하는 인간의 제도와 법과 종교를 보면, 인간의 야수적인 육체를 지배한 정신의 성과물처럼 여겨진다. 인간의 그 사나운 육식성이 어떻게 순화되고 있는지를 제도와 법과 종교는 잘 보여준다. 만약 제도와 법과 종교의 등장에 근거해서 '인간의 역사는 야수성과 순화(純化)로 얼룩진 역사이며 또 그렇게 전개 될 것이다' 라고 한다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된 것은 스스로에게 중심(中心)을 제공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었다. 도덕과 윤리와 신과 이념을 마치 오뚜기의 중심 추처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인간을 다잡는 그 자기 희생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인간은 인간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심(中心)은 권위와 권력과 결합하여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야수적(?) 억압으로 변질되면서 인간은 자기 내부의 야수성의 통제와 조절과 억압과 더불어 자기 외부의 거대한 권력과 권위라는 감당할 수 없는 억압에 직면한 것이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한다면 내면의 욕구를 억압하고 외부의 권력과 폭력에 의해 억압당하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면에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권력과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을 온전히 맡겨버리거나 중심(中心)으로부터 이탈하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이탈은 악덕과 미덕을 다 포함한다. 먼저, 인간의 야수성에만 국한해 본다면 나쁜 의미가 선명히 드러난다. 중심에서 이탈한 새로운 야수성이 개인적인 살인과 집단적인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구속적인 중심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미덕으로 간주 될 수 있으나 동시에 가장 극단적으로 인간의 야수성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악덕으로 간주 될 수 있는 것이다. 이탈이 이러한 범죄적인 양상으로 변질되고 새로운 억압과 권위주의를 낳는 것은 인간의 정신 속에 내재된 동물적인 야수성이 잉태한 가장 최악의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경우로, 은둔과 세상과 인연을 끊는 이탈이거나 중심의 해악에 순수 비판적 이탈이라면 그는 온전히 자유로운 이탈을 이루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은 바로 이러한 이탈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탈은 인간의 야수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된다. 즉, 순화(純化)는 완전한 질적(質的) 변화가 아니라 억압에 대한 일종의 반응 양식인 까닭에 더 근본적인 질적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한 질적 변화의 중심에 종교와 부단한 자기 수양이 있다. 


사족이지만, 그렇다면 현실이 완전한 파라다이스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인가? 가당한 결론인지는 모르지만 ‘불가능’ 하다. 억압은 끊임없는 이탈을 낳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 ‘완전’ 하고 절대적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그것은 수많은 철학자들의 좌절이기도 했다. 완전과 절대란 <관념>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지 현실은 결코 완전과 절대적인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해 현실에 대한 실망과 도피가 그러한 관념을 만들어 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에서 실존적으로 주어진 이 구심력(중심)과 원심력(이탈)의 충돌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인간들을 피곤하게 할 것이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굴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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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8 15:08

Homo Microorg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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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http://kr.image.yahoo.com/GALL 


Homo Microorganism


<‘인간은 미생물(Homo microorganism)이다. 스스로를 미생물이라 정의할 수 있는 미생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우주에 존재하는 아주 유익한 미생물이다.>


크고, 작음이란 상대적인 비교의 부산물이다. 절대적인 큼과 작음이 없다는 말이다. 크기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수준 또한 마찬가지이다. 더 잘났다, 더 우수하다 등도 상대적인 비교의 부산물이며 절대적인 기준이나 근거가 없다. 항상 비교의 대상이나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개미는 인간 보다 작다거나, 인간은 사고를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라고 하는 상대적인 비교대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는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생물체들을 비교대상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지 않거나 비교를 하는 경우에 자신을 중심에 놓는 좋지 않는 버릇이 있다. 아니, 좋지 않은 버릇이라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버릇이다. 그 비교는 항상 ‘우등비교’ 이거나 ‘절대적인 우위’, 또는 유일성 등으로 표현된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라거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라는 정의가 바로 그런 경우들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는데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정의에 동의할 수 있는가? 이렇게 ‘인간은 …… 이다’ 라는 식의 정의는 아주 인간중심적인이며 절대적인 사고이다. 이러한 잘못된 정의 자체가 인간이 이성적이지 않으며 만물의 영장도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정의들을 남발하는 인간이 어떻게 이성적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잘못된 인간에 대한 정의가 인간을 오만하게 만들어 온 역사임을 인간은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한다. 만물의 영장이기에 독단적인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해 온 것이다. 이것은 아리안 족이 우월성을 보존하기 위해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생각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인간의 우월한 문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자연을 학살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이 살아남아 학살 원흉들을 단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은 인간에게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단죄의 형벌을 내릴지도 모른다. 이러한 징조가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고 과학자들이 경고하고 있다. 지구 멸망의 영화가 유난히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야 말로 인간다운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를 점유하고 있으며 공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2008년으로 정의하는 현재의 시간과 인간이 건설한 도시들이 우주의 중심적인 공간이라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습관이 너무나도 단단하게 굳어져 버렸다. 인간이 정의한 인간 중심적인 잘못된 인간에 대한 정의 때문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2008년이란 시간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지구라는 공간은 거의 사라지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도 초라하고 작은 인간이 그 스스로를 너무나도 과대하게 과장되어 버린 것이다. 작은 좁쌀이 확대된 뻥튀기에 불과한 것이다.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면서 인간 자신이 이 우주라는 유기체속의 작은 미생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비상식적인 왜곡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이것은 당장 실행해야 할 인간의 과제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너무나도 오만에 갇혀버려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식의 정의를 반복하고 있고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러한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는 위기의식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 스스로가 정의하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라는 식의 정의를 폐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주의 입장에서 보는 ‘인간에 대한 정의’ 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인간 은 미생물이다.‘ 라는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지구는 광활한 우주 속의 작은 행성에 불과하며 인간은 작은 미생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인간이라는 미생물은 지구상의 다른 미생물들과는 달리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정의 할 수 있는 미생물’ 인 것이다. 이 정의는 우주적인 관점으로써 인간의 왜소함과 동시에 겸손을 드러내는 참으로 인간적인 정의가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인간중심적인사고나 지구중심적인 사고를 버리고 우주 중심적인 사고로 자신을 정의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우주 중심적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겸허한 생물이길 바란다.


이렇게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다시 선언하고 싶다; ‘인간은 미생물(Homo microorganism)이다. 스스로를 미생물이라 정의할 수 있는 미생물이다.‘


인간이 유기체의 균형을 파괴하는 미생물을 박멸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우주는 자신의 균형을 파괴하는 인간이란 미생물을 박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겸허한 생각을 해야 한다. 만약 인간이 우주라는 유기체의 균형을 깬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솔직히 인간들은 우주라는 전체 유기체의 관점에서 보면 쓸데없고 잘못된 짓을 너무나도 많이 하고 있다. 지나친 상업주의가 낳는 자원 고갈과 쓰레기 배출을 통한 환경파괴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업그레이드되는 문명의 이기들이 인간의 편리만을 추구하면서 디스토피아적인 문명으로 변이되고 있다. 오존층의 파괴, 각종오염 등…… 인간이 지구에 미치고 있는 영향이 어쩌면 태양계, 더 나아가 우주 전체의 질서와 조화를 깨고 있다면 미생물인 인간은 박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주가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 둘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지겹게 반복하는 소리이지만 인간은 과학의 성과물에 얼마나 기고만장해 있는가. 마치 이 우주의 주인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위해 우주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거만하고 기고만장한 태도는 가장 비인간적인 태도이다.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혁명적인 정의로 과거의 모든 잘못된 정의를 대체해야만 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의를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인간은 미생물이다(Homo microorganism).’ 그러나 인간이란 미생물이 우주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로 불리어 지기를 바라자.


이것이 인간을 정의하는 새로운 혁명적인 정의의 완결판이다: ‘인간은 미생물(Homo microorganism)이다. 스스로를 미생물이라 정의할 수 있는 미생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우주에 존재하는 아주 유익한 미생물이다.’

*이전에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 라는 글을 새로 제목 수정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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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8 23:50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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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트를 보낸곳              이미지 출처:http://kr.image.yahoo.com/GALL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인간은 미생물(Homo microorganism)이다. 스스로를 미생물이라 정의할 수 있는 미생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우주에 존재하는 아주 유익한 미생물이다.>


크고, 작음이란 상대적인 비교의 부산물이다. 절대적인 큼과 작음이 없다는 말이다. 크기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수준 또한 마찬가지이다. 더 잘났다, 더 우수하다 등도 상대적인 비교의 부산물이며 절대적인 기준이나 근거가 없다. 항상 비교의 대상이나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개미는 인간 보다 작다거나, 인간은 사고를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라고 하는 상대적인 비교대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는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생물체들을 비교대상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지 않거나 비교를 하는 경우에 자신을 중심에 놓는 좋지 않는 버릇이 있다. 아니, 좋지 않은 버릇이라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버릇이다. 그 비교는 항상 ‘우등비교’ 이거나 ‘절대적인 우위’, 또는 유일성 등으로 표현된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라거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라는 정의가 바로 그런 경우들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는데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정의에 동의할 수 있는가? 이렇게 ‘인간은 …… 이다’ 라는 식의 정의는 아주 인간중심적인이며 절대적인 사고이다. 이러한 잘못된 정의 자체가 인간이 이성적이지 않으며 만물의 영장도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정의들을 남발하는 인간이 어떻게 이성적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잘못된 인간에 대한 정의가 인간을 오만하게 만들어 온 역사임을 인간은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한다. 만물의 영장이기에 독단적인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해 온 것이다. 이것은 아리안 족이 우월성을 보존하기 위해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생각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인간의 우월한 문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자연을 학살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이 살아남아 학살 원흉들을 단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은 인간에게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단죄의 형벌을 내릴지도 모른다. 이러한 징조가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고 과학자들이 경고하고 있다. 지구 멸망의 영화가 유난히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야 말로 인간다운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를 점유하고 있으며 공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2008년으로 정의하는 현재의 시간과 인간이 건설한 도시들이 우주의 중심적인 공간이라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습관이 너무나도 단단하게 굳어져 버렸다. 인간이 정의한 인간 중심적인 잘못된 인간에 대한 정의 때문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2008년이란 시간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지구라는 공간은 거의 사라지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도 초라하고 작은 인간이 그 스스로를 너무나도 과대하게 과장되어 버린 것이다. 작은 좁쌀이 확대된 뻥튀기에 불과한 것이다.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면서 인간 자신이 이 우주라는 유기체속의 작은 미생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비상식적인 왜곡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이것은 당장 실행해야 할 인간의 과제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너무나도 오만에 갇혀버려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식의 정의를 반복하고 있고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러한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는 위기의식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 스스로가 정의하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라는 식의 정의를 폐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주의 입장에서 보는 ‘인간에 대한 정의’ 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인간 은 미생물이다.‘ 라는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지구는 광활한 우주 속의 작은 행성에 불과하며 인간은 작은 미생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인간이라는 미생물은 지구상의 다른 미생물들과는 달리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정의 할 수 있는 미생물’ 인 것이다. 이 정의는 우주적인 관점으로써 인간의 왜소함과 동시에 겸손을 드러내는 참으로 인간적인 정의가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인간중심적인사고나 지구중심적인 사고를 버리고 우주 중심적인 사고로 자신을 정의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우주 중심적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겸허한 생물이길 바란다.


이렇게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다시 선언하고 싶다; ‘인간은 미생물(Homo microorganism)이다. 스스로를 미생물이라 정의할 수 있는 미생물이다.‘


인간이 유기체의 균형을 파괴하는 미생물을 박멸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우주는 자신의 균형을 파괴하는 인간이란 미생물을 박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겸허한 생각을 해야 한다. 만약 인간이 우주라는 유기체의 균형을 깬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솔직히 인간들은 우주라는 전체 유기체의 관점에서 보면 쓸데없고 잘못된 짓을 너무나도 많이 하고 있다. 지나친 상업주의가 낳는 자원 고갈과 쓰레기 배출을 통한 환경파괴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업그레이드되는 문명의 이기들이 인간의 편리만을 추구하면서 디스토피아적인 문명으로 변이되고 있다. 오존층의 파괴, 각종오염 등…… 인간이 지구에 미치고 있는 영향이 어쩌면 태양계, 더 나아가 우주 전체의 질서와 조화를 깨고 있다면 미생물인 인간은 박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주가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 둘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지겹게 반복하는 소리이지만 인간은 과학의 성과물에 얼마나 기고만장해 있는가. 마치 이 우주의 주인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위해 우주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거만하고 기고만장한 태도는 가장 비인간적인 태도이다.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혁명적인 정의로 과거의 모든 잘못된 정의를 대체해야만 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의를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인간은 미생물이다(Homo microorganism).’ 그러나 인간이란 미생물이 우주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로 불리어 지기를 바라자.


이것이 인간을 정의하는 새로운 혁명적인 정의의 완결판이다: ‘인간은 미생물(Homo microorganism)이다. 스스로를 미생물이라 정의할 수 있는 미생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우주에 존재하는 아주 유익한 미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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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4 00:06

[꽁트] 우주를 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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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http://blog.daum.net/kkjw2010/13138414 



우주를 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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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kkjw2010/13138414

신종 암은 100% 정복이 가능한가? 초기 신종 암의 경우 100% 치유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이미 초기의 증세를 넘어서 버렸다. 현재로선 확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신종 암을 치유할 수 있는 물질이 어디엔가 존재는 하지만 아직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다. 분명 신은 신종 암세포를 죽일 수 있는 항체의 존재를 마련해 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종 암의 저항도 만만찮은 상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면역력을 높이고 있다. 신종 암은 고도로 지능화 되어서 파괴적인 속성을 숨기기 위해 아름다운 위장물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독버섯이 독성을 숨기기 위해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는 것과 같다. 온갖 고상함과 화려함으로 위장을 하고 있지만 신종 암의 결정적인 속성은 파괴임은 분명하다. 원래 아름다운 것과 독성을 감춘 아름다움은 분명 구별이 되어야 한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신종 암이 발생 반경을 넓히고 있다는 것이다. 신종 암의 발생 영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는 것은 생물체의 생존이 그 만큼 위협받을 가능성이 커다는 것이다. 신종 암은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면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과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그곳의 원주민이 학살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은 것처럼 신종 암은 새로운 영역을 황폐시키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지금 효과적인 치유의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우주의 균형은 깨어질 것이다. 미세한 피부층이기는 하나 그 곳의 여러 세포들에 신종 암이 지속적으로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현재 세 가지 방법이 연구되고 있는데 1) 신종 암을 외부에서 붕괴시키거나, 2) 신종 암의 내부를 혼란시켜서 자멸케 하거나, 3) 신종 암의 발병 영역을 제한하고 격리시키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초-레이저 치유법(Ultra-Laser Therapy)이며 두 번째 방법은 신종 암세포 균형체계 교란술(Cancer Cell System Destruction: CCD)이다. 마지막으로 신종 암의 영역을 격리시키는 격리법(Isolation Method)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신종 암을 격리시키는 방법은 어려운 실정이다. 이미 전이와 발병의 케이스가 새로운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 레이저 치유법과 암세포 체계 교란술을 상황에 맞게 유효적절하게 사용해 근본적인 신종 암의 퇴치를 기대하는 것뿐이다.


특히 현재 가장 기대할 수 있는 치유방법은 신종 암 내부의 균형을 교란하여 신종 암을 자멸시키는 방법인데 이 방법은 실제로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되고 있다. 신종 암도 일종의 유기체로 생명을 유지하는 기관들(organs)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기관들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교란하여 파괴하는 것이다. 이것은 큐피드의 화살(Cupid's Arrow)로 명명되는 신종 암세포 균형체계 교란술(CCD)이다. 이 방법은 신종 암세포의 중추에 해당하는 백유기세포(White Organic Cell:WOC) 와 흑유기세포(Black Organic Cell:BOC) 간에 적대적 파괴 관계를 형성하고 미세하게 조정되어있는 줄기형(Branch-typed) 축 내부의 알파 황소립자(Alpha Yellow Subtle Particle:AYSP) 을 파괴하므로써 유기적 세포(Oraganic Cell)간에 균형을 깨어 궁극적으로 신종 암을 제거하는 최신의 치유법이다. 양 유기세포 간에 균형을 깨는 방식은 백유기세포(WOC)에 증오유발 호르몬(hatred-led hormone)을 주입하고 흑유기세포(BOC) 에 적대 유발호르몬(hostility-led hormone)을 투입해 증오와 적대를 유발하여 상호 파괴(mutual destruction)을 유도하는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러한 상호 파괴의 정도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균형 축으로 작용하고 있는 알파 황소립자(AYSP)를 파괴하는 것이다


현재 호르몬 투입 이후 이 우주의 신종 암, 즉 인간에게는 증오와 적대감으로 상당한 교란이 일어나 자멸직전에 있다. 우려되는 것은 그 부작용에 의해 연쇄적으로 자연이 황페하게 되고 생태계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이다. 반드시 암적 존재인 인간을 지구로부터 도려내고 아름다운 지구는 살려야 한다. 지구가 죽으면 우주의 균형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생로병사에 의한 자연적인 소멸이 아닌 인간에 의한 지구의 멸망은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우주의 유기체 속에서 암적 존재인 인간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이 글은 본인의 글이 아님을 밝힌다. 인간의 우주를 향한 침략계획(일명 우주 탐사 계획)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는 우주 종합병원(Universe General Hospital)의 원장인 하머니 박사(Dr. Harmony)로부터 기고 받은 글을 전재한 것이다. 따라서 전문 의학용어, 기술용어에 대한 무단 도용이나 모방을 절대 금하며 그러한 행위에 따른 피해에 대해서는 일체 책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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