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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6 09:45

녹차의 맛(3)








이미지 출처:http://kr.image.yahoo.com/GALLERY/read.html?img_filename=44e56fc0f103


녹차의 맛(3)
-사춘기의 내상(內傷) : 손자 또는 하루노 하지메

영화의 첫 장면은 하루노 하지메의 뜀박질로 시작된다. 전학 가는 짝사랑, 스즈이시가 타고 가는 기차를 보기 위해서 뛰고 또 뛴다. 그녀에게 마지막 작별의 손짓이라도 보여주기 위한 필사의 뜀박질이다. 기차는 하지메의 이마를 뚫고 지나간다. 떠나가는 기차를 보는 하지메의 이마에는 떠나간 기차의 뻥 뚫린 흔적이 남는다. 엽기적인 표현이지만, 그 이상의 큰 아픔일 것이다. 만개한 벚꽃 나무, 들판 풍경, 나지막한 산, 개울이 정물처럼 나타난다. 하루노 하지메의 내면의 풍경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동시에 그 내면을 위로하는 자연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메의 여동생 사치코, 낙원을 상실한 그 사치코가 밀려가야 하는 곳은 사회라는 신대륙이다. 황량한 신대륙, 실낙원의 초입에서 주저하고, 당황해하고, 어쩔 줄 몰라 할 때, 하지메는 신대륙의 좀 더 깊은 곳을, 으슥한 곳을 탐색하고 조심스럽게 더듬는다. 사치코는 그렇게 하지메가 된다.

이로써 우리는 지나간 시절의 또 다른 액자 하나를 갖게 된다.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있다. 눈처럼 서럽도록 내리는 벚꽃 나무가 있다. 눈물처럼 애잔히 흐르는 개울도 있다. 서러움 풀어 놓아야 할 두 눈 시리도록 푸르른 들판도 있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그 둘 사이, 아니 하지메 혼자만의 소름 끼치도록 전 육체의 감각 세포들을 돋아나게 하고 고양시키는 이성에 대한 순수한 감정이 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혼돈과 격정을 고스란히 보듬고 있는 풍경화 같은 한 폭의 그림이다.


이미지 출처:http://kr.image.yahoo.com/GALLERY/read.html?img_filename=44e56fc0f103


이걸 좀 더 넓혀보면, 젊은 날을 거친 모든 인간들의 추억들 속에서 강렬한 인상으로 남을 만한 한 폭의 그림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전제가 있다. 이러한 강렬한 인상은 쌓여있는 현실의 먼지를 털어내어 야만 도드라져 나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할 것이다. 우리의 감정이 그만큼 무뎌져 버린 탓이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얼마나, 얼마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가! 우리가 순수하게 아름다워 질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그림이지 않는가? 우리의 감정을 이토록 순수하고 소름끼치도록 고양시켜주는 것들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영화의 첫 시작은 인상적이다.

사랑이라 부르기에는 아직 영글지 않은 감정이고 우정이라 하기에는 이성적 호기심이 강렬한 감정이겠지만, 아무튼 스즈이시의 작은 날갯짓이 하지메에게는 지축을 흔드는 크나 큰 충격으로 다가 온다. 스즈이시가 전학 온 날 교실을 맹렬히 휘젓던 돌풍보다도 칠판 앞에 서있던 스즈이시에게 넋이 나간 채 빠져들던 하지메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한다. 스즈이시는하지메에게 돌풍보다도 더 강렬하게 그의 넋을 빼앗아 놓는 존재가 되고 만다.

하지메는 중성같은 외모를 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영화의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직은 사랑이라고 불리기에는 애매모호한 순수한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에 가장 무지하고 순수하면서도 그 설레임의 감정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느 시기보다 야릇하고 강렬하게 고양된 감정으로 지배되는 시기. 이러한 감정은 사춘기라는 신대륙상에서의 새로운 발견이다. 새로운 발견이란 성장의 과정이고 단계이다. 이러한 새로운 발견들 중에 ‘이성에 대한 눈뜸, ‘ 바로 이것은 파열되고 단절된 실낙원에서 결합과 완전으로 향하려는 성적 호기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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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http://kr.image.yahoo.com/GALLERY/read.html?img_filename=44e56fc0f103

문제는 헤어짐이다. 성적인 호기심의 당사자, 스즈이시가 주위에서 볼 수 있다는 것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이다. 스즈이시가 떠남으로써 그녀를 중심으로 궤도를 돌던 하지메는 졸지에 궤도를 이탈한 별이 되고 만다. 그것이 바로 하지메에게는 사춘기의 내상으로 자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 내상이 상처만으로 끝난다면 성장은 멈추고 말 것이다. 애틋한 감정을 삭여야 하는 법 또한 배워야 한다. 내상은 오래 가겠지만 치유해야만 한다. 현대 문명에서 이 내상에 의해 발생하는 숱한 후유증을 목격한다. 내상을 차분하게 치유하는 여유보다는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를 수 없이 많이 목격한다. 마치 그것이 권리인양 말이다. 치정에 얽힌 수많은 범죄, 자살, 중독 등이 그것을 입증한다. 때로 실수와 치기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차분하고 한 박자 느린 호흡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이다. 바로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의 하지메의 바로 그 모습처럼 말이다. 녹차처럼 차분한 마음으로 음미해 볼 일이다. 자연이 상징하는 것의 의미를 음미해 볼 일이다. 그래서 첫 장면은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메의 이성에 대한 감정의 촉수는 점 점 더 섬세해 질 것이다. 또 섬세해 질수록 그 감정은 무뎌지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성장의 과정이다. 스즈이시가 떠났지만 사회는 하지메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시달리게 할 것이다. 추근거리고 스캔들을 만들어 내기도 할 것이다. 국수집 사건과 편의점 사건이 바로 그런 예이다. 그렇게 하지메는 이성 문제를 비롯한 사춘기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조금씩 성숙한 안목을 갖게 될 것이다. 녹차의 맛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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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21:44

독일이 선전용으로 만든 <타이타닉>(1943년)





이 영화는 실제 타이타닉호의 인명 손실 보다 훨씬 더 컸던 2차 대전의 마지막 주에 침몰한 여객선인 JJ Cap Arcona호의 선상에서 촬영되었다. 구명보트들의 장면들은 발틱해(the Baltic Sea )에서 촬영되었고 실내 장면들은 토비스 촬영소(Tobis Studios)에서 촬영되었다.

타이타닉(1943)은 그 당시까지 가장 많은 액수가 투자된 독일 작품이었으며 관계자들의 의견 충돌, 메우기 힘든 제작상의 이견들과 전반적인 전시상황의 어려움 등을 포함하는 많은 제작상의 어려움들을 겪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로 인해 조셉 괴벨스(Joseph Goebbels)는 반역 혐의로 감독인 헤르베르트 셀핀(Herbert Selpin)을 체포하여 바로 그 다음날 그에게 자신의 선실에서 목을 매 죽으라고 명령한다. 통제를 벗어나 거칠게 소용돌이 치던 이 미완성의 영화는 마침내 베르너 클링글러(Werner Klingler)에 의해 완성이 된다.



1943년 초에 영화가 개봉 예정이었으나, 초벌 프린트(the answer print: 완성 작품으로서 감상에 사용되는 최초의 영화 프린트)를 보관하고 있던 극장이 상연 전날 밤 폭격을 당한다. 필름은 같은 해의 크리스마스 쯤 파리에서 활기 없는 개봉을 하기 위해 옮겨지지만, 결국은 괴벨스가 상연을 금지한다. 그러한 판단은 연합군의 야간 폭격을 겪고 있는 시점에서 독인 국민들이 대규모의 죽음과 공포를 묘사하는 영화를 보는 걸 그다지 바라지 않으리라는 이유에서 였다. 타이타닉은 1949년에 다시 발견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즉시 상영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 영화의 혹독한 반 자본주의적인 진술과 매우 관련이 깊은 소련(Soviet) 관객들로 인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50년대 이후, 때때로 독일의 텔레비전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타이타닉은 잊혀져 갔다. 그러나 1992년에 검열 받은 저화질의 VHS 복사본이 독일에서 발매가 되었다. 이 버전은 가장 혹독한 선전 장면들을 삭제 하였는데, 이것은 논쟁적인 내용들을 아주 완화시켰다. 마침내 2005년에는, 타이타닉이 완전히 복구가 되어, 최초로, 무검열 버전이 키노 비디오사(Kino Video)에 의해 DVD 특별판으로 발매되었다.

2. 구성

영화는 화이트 스타 주식 소유자들(the White Star stock holders)에게 주식이 폭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이트 스타의 회장은 타이타닉호의 처녀 출항 동안 주식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비밀을 밝히기로 약속한다. 그는 타이타닉호가 속도에서 세계 기록을 세울 수 있을 거라고 혼 자 알고 있고 그것이 주식의 가치를 올려놓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와 화이트 스타의 이사회는 더 낮은 가격으로 주식을 재구매 하기 위해 심지어 그들 자신의 주식을 매각함으로 주가를 낮추려고 계획한다. 그들은 타이타닉호의 신기록 속도에 대한 뉴스가 언론에 발표되기 바로 직전에 주식을 재매수하기로 계획한다.



자본주의 문제와 주식 시장이 영화 내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1912년 영국의 타이타닉호의 불행한 운명의 항해에 승선한 가상의 독일인 일등 항해사인 페테르손(Peterson)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연기한다. 그는 배의 부유한 속물적인 소유주들에게 배이 속도를 늦추도록 호소하지만, 그들은 거부하고 타이타닉호는 빙하와 충돌하고 침몰하게 된다. 항해사 페테르손과 삼등 선실의 몇 몇 독일인 승객들은 용감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반면에, 부유한 자들은 아주 천박한 겁쟁이들로 묘사된다. 페테르손은 많은 승객들을 가까스로 구출하고, 그의 연인에게 구명보트로 오르도록 설득하고(1997년 영화에서 훌륭하게 모방된 바로 그 장면에서) 돌보지 않고, 냉정한 영국인 자본주의자인 엄마에 의해 선실에 남아 거의 죽어가는 어린 소녀를 구한다. 이 영화는 대부분의 타이타닉 침몰과 관련된 개작들이 그런 것 처럼, 보편적인 인간의 오만과 뻔뻔스러움에 대해서 보다도 오히려 특정하게 영국의 탐욕에 대해 타이타닉의 침몰을 알레고리로 삼고 있다.


이미지 출처:http://en.wikipedia.org/wiki/Titanic_(1943_film)


이 영화는 타이타닉 필름들의 모든 “고전적인” 장식물을 포함한다. 수많은 부차적 줄거리들이 탐욕, 오만, 불운한 연인들, 풋사랑, 비운의 배 위에서 다시 만나는 옛 애인들, 그리고 한 아내가 불행한 정기선에 그녀의 남편을 남겨두려는 것을 거절하는 강력하고 극적인 장면을 가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면이 근거하고 있는 실제의 커플은 유대인었는데, 이 1943년 독일 영화에서는 설명되지 않은 사실이었다.

제일 아래의 사진을 제외한, 위 모든 이미지들의 출처는 http://www.jimusnr.com/Titanic1943.html 입니다.
윗글은 http://en.wikipedia.org/wiki/Titanic_(1943_film) 을 우리말로 서툴게 직역한 것이므로 어법상, 의미상 잘못된 부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역이나 잘못은 댓글로 남기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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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30 19:58

아이를 통해 만난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



작년 1월 입니다. 아이들 신학기 참고서 구입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서점을 들렀습니다. 그때 큰 아이가 이 책 <브이 포 벤데타>를 꼭 사달라고 하더군요. 들고 졸졸 따라다니다 싶이 해서 가격이 비쌌지만 끝까지 읽는다는 약속을 하고 구입을 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저는 소설인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두꺼운 소설을 읽겠다니 한편으론 대견스럽기도 해서 구입했던 겁니다. 

그런데 아뿔싸, 책값을 지불하고 아이가 포장 비닐을 뜯자 마자 만화책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참 후회가 되더군요. 겉으론 별 내색을 안했지만 참 한심한 짓을 했구나 하고 탄식이 절로 새어나오더군요. 만화책에 거금을 들인 꼴이 여간 우습지가 않았죠(저의 기준으로는 말이죠. 다른 책을 쌌더라면 몇 권인가, 이런식의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이 후로 이 책을 아이가 읽고 재미있다고 해도 저는 그러려니 하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대수롭지 않는 만화책 정도로 치부해 버렸던 겁니다. 차라리 교육용 만화책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감만 밀려오더군요, 아이가 틈틈히 읽는 모습도 영 마뜩치가 않았습니다. 뭐가 될려고 한가하게 저런 책이나 읽고 있는지(이상하게 큰 아이는 백남준이니 팀버튼이니 하면서 제가 보기엔 아이들에겐 걸맞지 않는 책을 사달라고 했고 마지못해 사주었거든요.).
 
그런데 2월쯤인가요, 블로그에서 이 책이 자주 등장하고 영화까지 소개되면서 도대체 이 만화가 무어길래 이렇게 블로그에까지 뜨고 난리지, 하고 의아해 하다가 3월 초쯤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작하기는 했지만 1장(Chapter) 만 읽고 덮어 둔 상태가 지속이 되었습니다만...... 이 만화 책을 읽고 제가 얼마나 멍해졌는지 모릅니다. 만화에 대한 선입관이 얼마나 강했는지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DVD도 보게 되었습니다.
또 멍해지더군요. 그 DVD의 내용이 제가 읽은 1장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으악~~고작 1장(Chapter)만으로 이런 영화가 만들어 졌다면 앞으로 얼마나 무궁무진할까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놀랍더군요! 고작 1장 만으로 이런 영화가 만들어 지다니! 맙소사! 그런 만화책이었던 겁니다. 

아이에게 고맙더군요. 아이는 어쩌면 아빠를 안타깝게 여겼을까요?  모르긴 하지만, 이번에 아이에게 크게 한 수 배웠습니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앨런 무어를 알게 되었고, 브이 포 벤테타를 알게해 주어서 말입니다.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 를 강력하

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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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6 19:41

포스터로 보는 타이타닉




In Nacht und Eis ore Tianetec (Titanic or In Night In Ice) 1912년 작, 상연시간 35분, 독일. 무성영화. 모형 타이타닉이다(바로 위 사진)






Saved From the Titanic (영국에서는 A Survivor From the Titanic으로 알려져 있다)1912년 5월 14일, 상연시간 10분, 미국, 무성영화.  실제 타이타닉 생존자인  Dorothy Gibson 이 출연한다. 영화는 부분적으로 몇 몇  칼러 장면을 포함하는 흑백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촬영 기간은 2주가 넘지 않았다. 이 영화는 1914년에 Éclair Studios 의 화재로 파손된  잃어버린 영화로 여겨지고 있다.
 


이미지 출처: http://www.imdb.com/title/tt0019658/






Titanic  은 1943년 2차대전중 독일 베를리에서 제작된  나치의 선전용 영화다. 타이타닉의 침몰을 부자들의 탐욕이 빗어 놓은 비극으로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Titanic 은 1953년작 드라마 영화로, 동명의 다른 영화들과는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 구성이 타이타닉호의 처녀 출항에 승선한 소원해진 커플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A Night to Remember  은 1958년 최우수 외국 영화상 부분 골든 글로브를 수상한 다큐드라마 영화이다.





The Unsinkable Molly Brown 은 1964년작 뮤지컬 영화이다







S.O.S. Titanic 은 1979년 TV 영화이다.







Raise the Titanic!  은1976년 Viking Press 에 의해 미국에서 출판된 클라이브 쿠슬러(Clive Cussler)의 모험 소설이다. 1980년에 감탄 부호를 뺀 같은 동명의 영화로 각색되었다.







Titanic 은 1996년 미국 CBS 에서 방송된 TV용 영화이다.







Titanic
은 제임스 카메룬이 원작, 감독, 공동제작, 공동 편집한  1997년작 미국의 로맨틱 영화이다.




 

Ghosts of the Abyss 은 2003년에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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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5 12:37

녹차의 맛






이미지 출처:http://www.koreafilm.co.kr/movie/review/nokcha.htm



녹차의 맛

녹차의 맛을 한 편의 영화로 표현한다면 어떤 영화가 될 수 있을까?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녹차의 맛을 어떻게 우려 낼 수 있을까? 녹차의 맛은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떫고 쓴맛이 나다가 달콤하고 짠맛이 나기도 하는 오묘한 맛이랄 수 있다. 한마디로 인공이 느껴지지 않는 자연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녹차의 맛이 단순히 차 잎에서 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녹차의 맛을 단순히 미각적인 테두리로 설명하는 것은 부족한 구석이 있다.


자연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차는 필수적이지만, 또한 녹차를 마실 수 있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하고, 녹차를 우려내기 적합한 적당히 뜨거운 물이 빠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구운 다기(茶器)도 있어야 하며, 녹차의 맛을 함께 음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다. 아니 혼자여도 좋다.


그러니 녹차의 맛은 이성보다는 감성적이며 분주함보다는 여유로움이며 외면적인 표현이기 보다 내면적인 성찰이요, 채움보다는 비움이고 번잡함보다는 단순함이다. 그래서 녹차는 도시의 빌딩과 자동차와 도로보다는 자연의 나지막한 집들과 들판과 오솔길이 더 어울린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 보다 크고 느리게 돌아가는 페리스 휠과 어울린다.


이제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녹차의 맛을 한 편의 영화로 표현한다면 어떤 영화가 될 수 있을까?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녹차의 맛을 어떻게 우려 낼 수 있을까? 그것은 결국 은은한 사람들의 맛이고 오묘한 삶의 맛이 될 것이다. 녹차의 맛처럼 미각적으로 오묘하며 정서적으로 감성적이며 내면적이며 단순하고 자기 성찰적인 사람들의 따뜻하고 은은하며 고요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며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페리스 휠을 타며 조용히 자연을 관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나하나의 차 잎들이 모여 오묘한 맛을 내듯이 여러 개인들이 모여 삶의 쓰고, 떫고, 달고, 슬픈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보여주는 삶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짙은 커피향에 익숙한 이들에게 녹차의 맛은 너무나 무미건조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액션과 폭력이 난무하는 이야기에 익숙한 이들에게 녹차의 맛은 자극과 재미가 없는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녹차의 맛은 아득한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본질적인 맛이라는 것이다. 인공의 미각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마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그 내면을 성찰하도록 하게 하는 맛이라는 것이다. 성찰이란 말 자체도 번거로울 정도로 비움의 맛이라는 것이다.


녹차의 맛을 위해 대가족의 구성원들을 주된 등장인물들로 설정한 것은 참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관계 중에서 가족처럼 본질적인 관계가 어디에 있을까?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알고 있는 그대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관계가 또 있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지막까지 지켜져야 할 가족조차 그 본질적인 관계가 해체되고 있는 현실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다. 의도가 개입되고, 자본이 개입되고, 사회적인 체면이 개입되면서 가족의 관계도 갈등을 겪으며 허물어지고 있다. 자식의 영어 공부를 위해 ‘기러기 아빠’ 가 되고, 때로 외로움에 자살을 하는 비극적인 아버지의 모습. 자식들로부터 버려진 노부부의 모습. 자연적이고 건강한 성장통을 겪으며 자라나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공부와 과외에만 시달리며 맹목적으로 내달려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 맛으로 따지자면 가족의 본질적인 맛을 상실하면서 인공적이고 비본질적인 맛이 색소처럼 자극을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녹차의 맛>의 가족 구성원들은 녹차 잎에서 우러나오는 불립문자의 오묘한 맛처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성장통을 겪으며, 성인들은 성인들대로 나름의 상처와 고통과 기쁨 등 틀에 박힌 일상에서도 삶에 체념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녹차의 맛 같은 은근한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녹차의 맛>은 본질적인 가족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도록 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대가족으로 형성된 <녹차의 맛>의 가족들은 그래서 우리에게 깊은 의미, 녹차의 맛으로 다가온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바로 이 대가족과 그 구성원들의 삶을 통해서 인간의 삶과 관계와 그리고 더불어 자연과 인간의 관계(녹차의 맛을 음미하는)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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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23:57

허니와 클로버

 
이미지 출처는 여기입니다.


 
허니와 클로버


초원을 만들려면 꿀과 클로버가 필요하다

- 에밀리 디킨슨

젊은 시절이 아름다웠던가? 이 질문의 시점은 젊은 시절을 거친 자들의 질문이다. 그들에게 젊음이 사라지고 난 뒤, 젊음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향유할 수 없는 젊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결코 반복해서 누릴 수 없는 시간으로 추억이란 박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지만 그저 회상으로만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은 아름다운가? 정녕, 아름다운가? 지금 청춘들에게 이 질문은 불필요한 질문이다. 청춘이 아름답다는 말은 되돌아보는 자들의 회상 속에서나 가능하다. 삶이 완성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라면 청춘은 격렬한 붓놀림이다. 덧칠에 덧칠을 거듭하는 한계를 뚫으려는 욕망이다. 수많은 좌절과 상처를 끊임없이 덧칠하면서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나아가거나, 때론 부수거나, 무의미한 붓놀림으로 제자리에 맴돌기도 한다. 그림과 조각으로 정신을 승화하려 하지만 유형의 캔버스와 나무속에 젊은 영혼의 자유로움을 넣는 것은 참으로 고뇌가 아닐 수 없다. 자유를 부자유의 틀 속에 넣으려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역설이 있기에, 고뇌가 있기에 또한 젊음이 아름다워 지는 것이다.(이 영화조차 한 편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젊음의 순수와 서툼, 상처와 이해가 헝클어지고 복잡한 혼돈의 추상화를 이루어진 영화). 젊음의 시기를 지나 매너리즘에 빠진 기성세대들을 생각해 본다. 아주 부자유한 자연스운 삶과 자유로운 영혼이 고착의 상황에 처할 때 그림이나 조각은 한낱 물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지출처는 여기입니다.



그래서 초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한 파괴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질곡에 대한 혐오와 부자유에 대한 경멸에도 불구하고 젊음은 ‘젊음이란 시기’ 속에 박제된 된 시간으로 남는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시간은 젊음의 시기를 그들이 뒤돌아 추억해야할 시간으로 마련하기 위해 조용히 거두어 간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에서 젊음이 분리되고 나면 추억이란 이름으로 내보인다. 그것이 그림이라면 혼돈의 추상화일까? 꿀과 클로버가 있는 초원일까? 그 추억은 하나의 액자처럼, 그림처럼, 조각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부자유함과 질곡 속에 우리의 젊음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젊음은 아름다워진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워진다.

그러니 젊음은 아름답다고 하는 바로 그 ‘젊음’ 을 마음껏 향유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들에게 그토록 소중해 진다. 슬픔마저도, 상처마저도, 절망마저도, 상실마저도 순수하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젊음의 영화다. 순수함과 솔직함으로 장식되는 젊은 날의 그림들이다. 감정의 과장도 엿보이고 서툼도 보이지만 이것이야 말로 이 영화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정형화된 현실로 이 젊음들을 바라본다면 그야말로 한편의 넌센스가 되고 말 것이다. 눈물 겹지 않는가? 감정의 과장과 서툼들이. 영화 속의 저런 젊음들도 회상 속에 묻혀져 버릴 것이란 그 피할 수 없는 사실이. 그러니 속으로 눈물을 삼길 만한 영화라고 한 들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09.2.25.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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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8 01:39

결혼 기념일에 먹은 아구찜, 아니 스파게티

오늘은 결혼 기념일이라 모처럼, 정말 모처럼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고 외식을 했습니다. 글로 쓰면 고상해지려는 성향을 억제하면서 좀 투박하게 오늘의 행사(?)를 돌이켜 보면 사실 부끄럽습니다. 딱 영화 <발키리> 한편에 점심으로 스파게티를 먹은 것이 끝입니다.  디저트로 자판 커피 한 잔씩 하구요. 항상 그래왔지만 고생한다고 꽃 한송이 못 건넸습니다. 마음으로 위로하고 또 그렇게 한 해의 결혼 기념일이 지나갔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인증샷인데, 어찌 사진들의 색이 이상하게 나왔습니다. 위의 두 사진은 제가 먹은 것인데  중국식 굴소스와 치킨 스파케티로 색깔이 좀 거무칙칙해야 한데 조명 때문인지, 영락없는 아구찜처럼 보이네요^^ 아래 것은 이름을 잘 모르겠네요^^;;



* 별로 먹음직스럽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맛은 느끼하지 않고 괜찮았습니다. 굴소스와 치킨 스파게티는 오히려  매운맛이 나면서 중국 음식 향이 났습니다.

*바로 옆 테이블에 독일인 부부가 앉았는데 참 다정하게 보이더군요. 한국식으로 스파게티를 먹는 게 신기한 지(?) 가끔씩 쳐다보더군요. 또 서로 나누어 먹고, 들어 먹고, 먹든 걸 먹고 하는 것도 이상한 건지, 신기한 건지 곁눈질을 하더군요.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식을 존중해주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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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9 00:35

생일 선물(Birthday Present)



사진출처:http://www.maxmovie.com/



생일선물(Birthday Present)



인간은 관계와 더불어 살아간다. 그래서 사회적인 동물이란 말도 있다. 관계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관계의 대상보다 우위적인 위치를 점하고자 한다. 인간은 그 관계 속에서 보다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바로 그것이 사회적인 신분이랄 수 있다. 그러한 노력에 더해 현실적으로 도달하고 획득한 사회적인 신분을 넘어 과시나 과장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이미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인 신분에 더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또 상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모습으로 과시하고 과장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이성과의 사랑이라는 다소 동물의 본능에 가까운 관계에 처하는 경우 이러한 과시나 과장은 더욱 강해진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액세서리를 하는 등 보다 화려한 치장에서부터 직업등을 과시하고자 한다. 더해 사회적 신분이나 자신의 생물적인 조건을 과장하기까지 한다. 이런 과시와 과장이 이성간의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선사시대 남녀들의 문신이나 장식도 과시와 과장에 속할 것이다. 현실은 인간과 인간의 꾸밈없는 관계가 아니라 과시와 과장이 게재된 불필요한 요소들로 거품이 이는 곳인지도 모른다.

인간을 판단하고 관계를 맺을 때 인간 그 자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아니 판단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아주 비중있는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대신 직업과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인간 그 자체를 판단하는 것이 관습처럼 일반화되어있다. 이것은 순환적인 상승을 일으키면서 사회를 경쟁의 관계로 몰아넣고 있다. 보다 나은 신분을 위해, 직업을 위해 남들보다 앞서고 우위에 서야 하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사진출처:http://www.maxmovie.com/



<생일선물(Birthday Present)>은 이러한 과시와 과장의 경쟁적인 사회 속에서의 관계(특히 이성간의 관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있게 본 영화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전도연을 닮은 영배우가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경해 마지않는 파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도 그렇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바로 이성간의 관계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 보다 크지는 않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 마사요시(키시타니 고로)나 아키코(와쿠이 에미) 모두 관계에 대해 인간 그 자체보다는 현실에서 이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인 신분과 직업이 만들어 내는 과시와 과장된 모습에 익숙해져 있다. 그들이 속물적인 것이 아니라 속물적인 현실에서 지속적으로 강요되고 쇠뇌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곡에서 예외적일 수 있는 인간이 우리중에서 과연 몇이나 될까?

마사요시는 여행사의 관광안내원으로 영화내내 자신이 관관관안내원이란 사실을 숨긴다. 우연히 화가로 자처하게 되었지만 의도적으로 화가라고 신분을 속인다. 이것은 화가로서의 사회적인 지위가 관광안내원보다 낮았다면 계속해서 화가라고 속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솔직하게 들러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신분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 우연히 식당에서 아키코의 약혼자였던 변호사와 조우하게 되고 아키코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은 변호사를 향해 주먹을 날리긴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혼이 나는 것은 변호사라는 신분이 호락호락하지 않는 직업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키코에게 사랑의 상처를 심어준 것이나 아키코가 그렇게 당한 것은 알고 보면 변호사라는 신분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아키코는 어떤가? 아키코는 비행기 여승무원이다. 그녀의 신분은 그다지 낮은 것이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비행기 여승무원에 대한 인식이 낮지 않은 것을 보면 일본 또한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본다. 또한 관관안내원인 마사요시가 다소 부담을 느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사요시와는 달리 아키코는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거나 고과장하기 보다는 상대의 신분을 너무 높이 잡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물질적인 보상을 위한 설득력 있는 이유가 존재하지만, 결국 인간을 그 자체로 보는 관점과는 먼 인간에 대한 판단이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차라리 사랑과 물질을 동시에 추구한다면 더 나을 것이다. 사랑은 온데, 간데없고 물질적인 보상만을 바란다는 것에서 아키코도 속물적인 관습에 익숙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성간의 사랑이라는 좁은 영역에서가 아니라 인간 일반의 관계로 넓혀서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 영화의 갈등은 과시와 과장에 가려진 관계에 의해 일어난다. 또 이러한 과시와 과장을 벗어버리고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고, 그 진실을 바라보는 가운데 갈등은 해소된다. 그러나 영화속의 이러한 갈등의 해소가 우리의 마음속에 동요를 일으키기에는 다소 부족한 것 같다. 한 순간의 감동이나 위로를 제공하고 그칠 것 만 같다. 왜 그런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쩐지 현실의 높은 벽과 싸우기에는 이 영화가 다소 무기력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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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9 02:27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 誰も知らない)



이 영화를 보기 바로 전 조금 언짢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언짢은 기분 때문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 영화를 보았으니 그러한 연관이 필연적인 것인지 우연의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요.

그 언짢은 기분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11시 쯤 가족 모두가 잠자리에 다 누웠습니다. 잠들기 전에 보통 한 두 마디씩 하게 되거나 장난도 치는데 어쩌다 기독교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마도 큰 아이가 저의 종교가 무엇인지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아직 자아 형성도 덜 된 어린 아이들을 교회로 데리고 가는 기독교 신자들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아내와 생각이 달라 조금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행위에 호의적인 아내가 못마땅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아직은 어리니 교회에 따라갈 필요는 없다. 좀 더 자라서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아이들을 과자나 학용품등을 이용해 교회로 데리고 가는 선교 행위를 싫어했습니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유치하고 악의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종교란 어떤 비극적이거나 절망적인 인생의 경험 뒤에 찾게 되는 근엄하고 경건한  무엇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이끌고 선교를 시작한 나이도 30세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대상들도 주로 가난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받은 어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맹목적이기 보다는 절실한 무엇이기에 적어도 성숙한 나이에 어울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직 자아 형성도 덜 된 초등학교 학생을 교회에 데려가 예수만을 믿으라는 것은 지적인 살인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교도들의 구원이 절실할 것이고 저주 받은 인간을 살려내는 행위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선교의 대상이 나이에 의해 제한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면 구원받지 못하는 이교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인 기독교의 교리 앞에서 왜 신성함이나 두려움 보다는 어떤 속박감이 먼저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양자 택일의 강요가 너무나도 모진 이 기독교에 대해 우유부단해지는 제 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한 선택의 강요가 너무나 모질고 확신에 차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러한 잡념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 컴퓨터를 켜고 우연히 아무도 모르게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모태 신앙처럼 종교는 빠를수록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삶의 체험 속에서 신을 절실하게 찾게 되는 그러한 나이에 다다를 때가 좋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기독교를 꼭 믿으라고 전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와 기독교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물론 굳이 연결을 지으려면 불가능한 것 아닙니다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기독교 운운하며 이 영화를 본 소감을 시작했을까요?


사진 출처  http://www.livedio.com/ImgPool/ImgPool.aspx?MediaID=693396


또 한 가지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 훨씬 이전의 경험입니다. 지인과의 식사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 적이 있습니다. 먼저 식사를 끝낸 아이들이 식당을 돌아다니려고 하기에 제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납니다: “실내에서 남들에게 피해주지 말고 어른스럽게 행동해라!” 그런데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지인이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에게 가능한 요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정말 가능하지도 않는 요구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스러울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이들이 어른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들은 아이스러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아무도 모른다>는 영화에 대해 소감을 말하기 전에 이러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바로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좀 과장이긴 하지만 인간은 아이와 어른으로 나누어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모든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어른은 아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언의의 유희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여자와 남자처럼 명확한 구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른과 아이의 사이에는 시간의 연속성과 역사성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명확한 구분이 아니라 변화상의 구분정도가 가능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편의적인 구분일 뿐이며 결국 아이는 어른으로 변화할 뿐인 것입니다. 아이였던 어른이며 어른이 될 아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이의 시기를 경험한 어른들은 그 시기를 자주 망각합니다. 남, 여 간의 오해나 편견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다른 실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아이였던 어른들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현실은 이 망각 때문이 아닌가도 합니다. 이 망각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아이들과 관련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모든 어른들에게는 아이일적의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정작 자기  주의에 존재하는 아이들의 세계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솔직히 우리에게 단절된 것은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아닌가도 싶습니다.

 
쿄코와 유키    사진 출처 http://www.joycine.com/service/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참 좋은 영화입니다. 잊고 있었던 아이들의 세계를 환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단절된 아이들과 어른들의 세계를 이으려는 진지한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자기 성찰을 진지하게 유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에서 어른의 존재가 없다면 아이들은 생존이 어렵습니다. 첨단 과학의 21세기에도 무기력하게 태어나는 인간은 원시인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아이와 어른들의 세계는 원시(자연)와 문명, 본능과 문화, 순수와 오염(타락), 환상과 현실등의 구분이 가능할 것입니다. 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인류 문명의 축소판이라거나, 문화의 창조적인 전수라거나 세속에의 적응 같은 알레고리로 파악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원시의 모습으로, 본능만으로, 순수하게만 살아갈 수 없도록 조직화된 세상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또한 역설적이게도 아이들의 세계(동심의 세계)가 필요한 것이 오늘날의 세계입니다. 문명과 문화와 순수함을 잃은 어른들은 아이들을 통해 원시와 본능과 순수를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이와 어른은 공생의 관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아이들의 세계를 망각해버린다는 것은 어쩌면 끔찍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뿌리를 상실한 나무처럼 근원과 단절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망각된 아이들의 끔찍한 모습들이 바로 우리 어른들의 모습임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요? 결코 과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아무도 모른다>는 단순히 ‘아이들의 세계‘ 만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결코 영화 속의 4남매들처럼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눈물 없는 아이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영화 속의 아이들은 너무 어른스럽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을 통해 망가진 어른들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피가 다른 4남매가 그리는 비극의 세계는 어른들의 썩어가는 환부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무도 모른다>는 아이들의 비극적인 실존을 통해 어른의, 더 나아가 문명과 문화와 타락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세계와 관련해서 이점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아이들이 그토록 감정을 철저하게 절제할 수가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일본인들의 특성을 잘 알지 못해서 그럴까요? 사실 일본인들의 감정 절제는 대단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속 다르고 겉 다르다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이들의 불행한 일상이 다루어진 <아무도 모른다>가 병들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지만 아이들의 세계 그 자체를 다루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감독의 의도가 의미심장하다고 하더라도 또 영화의 리얼리티가 그럴 듯 하다 하더라도 아이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이들이 너무 어른스럽기 때문입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세계가 있다’ 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른들이 감정을 강요한 감정적 살인을 저지른 듯한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2004년 칸느 영화제에서 영화제 사상 최초의 아역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훌륭한 영화입니다. 아마 <아무도 모른다>가 아니었더라면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연기력을 높이 평가받은 우수한 영화입니다. 하드 보일드한 문체나 스타일이 예술적인 경향의 대세를 이룬다고 하지만 아무리 비극적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들의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세계를 눈물 한 방울 없는 냉혹한 세계로 묘사한들 그리 탓할 일은 아닙니다. 앞서도 애기했지만 망각된 아이들의 끔찍한 모습들이 바로 우리 어른들의 모습임을 감독은 의도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돌아와 아이들이 환한 웃음을 짓게 되었다면 이 영화는 분명 실패했을 것입니다. 청중들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스토리를 전개한다면 영화는 신선함이 없이 진부해지고 마는 것이니까요. 영화감독들이 고민하는 세계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일 것이니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사진출처: http://www.myphototv.com/PhotoMagazine/


아이들에게 그들의 세계를 돌려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입니다. 그들의 얼굴에 웃음을 돌려주는 것은 어른들의 책임입니다. 타락한 어른이 투영된 아이들의 눈물 없는 냉혹한 세계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어른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서로를 치유하는 방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 의해 그들의 세계를 보호받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통해 좀더 평화롭고 순수한 세계를 꿈꾸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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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4 04:51

일본영화 음악 3곡(같은 달을 보고 있다,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 무지개 여신 )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같은 달을 보고 있다> 은 참 매력적인 영화였습니다. 인간의 마음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의사의 매스가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져지지도 않는 사랑이라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랑이란 감정이 표현된 예술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듭니다. 진관희를 보면서 연예인들의 사생활과 영화와의 관계를 조금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는 약간 진부했습니다. 엇비슷한 주제에 조금 다른 의상을 입힌 듯한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록 진부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수긍해야만 할 우리 자신들의 내면의 풍경이 아닐가 합니다. 그래서 또 가치있는 것일 테구요. 아사노 타다노부의 개성적인 연기가 인상에 남습니다. <무지개 여신> 은 슬픈 영화이긴 하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영화였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 자체의 흠이라기 보다는 제 감수성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君のそばに, 久保田 利伸, 같은 달을 보고 있다 






Gravity,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






Rainbow Song, 무지개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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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9 23:18

일본영화 음악 3곡(눈에게 바라는 것,란도리,눈물이 주룩주룩)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눈에게 바라는 것> 은 인간의 삶에 비극은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의 삶에 필요한 이유를 잔잔하게 느끼게 하는 수작입니다. 비극을 통해 인간은 성숙해진다는 근엄하고 무거운 주제를 잔잔한 감동으로 보여줍니다. <란도리>는 정신연령이 떨어지는 한 청년의 순수하고 해맑은 모습을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 우리가 위안 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영화입니다. 마지막으로 <눈물이 주룩주룩>  가족이란 애정으로 묶어진 이루어 질 수 없는 남녀간의 사랑을 애잔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자 이제, 영화음악과 함께 영화 속으로 푹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눈에게 바라는 것
trailer





란도리
Under the sun, Bonnie Pink





눈물이 주룩주룩
나츠카와 리미, 눈물이 주룩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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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8 19:07

젊은 날의 초상, 하나와 앨리스

 

이미지 출처:  http://kr.n2o.yahoo.com/NBBS/1


 


하나와 앨리스




☞하나와 앨리스 영화 음악 감상하러 가기☞


‘우정’ 과 ‘사랑’ 은 젊은 날의 추억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말들입니다. 아마 젊은 날을 지탱하는 두개의 큰 기둥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과의 우정과 이래저래 알게 되는 여학생(남학생)들과의 풋풋한 사랑은 감수성 예민한 그 시기에 가슴 설레게 하는 감정들입니다. 이성(理性)이나 이해(利害)보다는 감성과 맹목이 처녀림처럼 오염되지 않은 시기에 마음과 마음으로 투명하게 교감하는 우정과 소름 돋도록 황홀해 하던 순수의 사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보석들이라 할만 합니다. 하늘에 떠있는 별들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추억들은 지금은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지만 그 이면에는 서툴고 어눌했기에 생긴 부끄러운 일들이 시행착오들처럼 동시에 얼룩으로, 그림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별들이 반짝이는 것은 어두운 밤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성(異性)에 관한한, 젊은 시절의 고통은 처절(?)할 정도였습니다. 별을 출산하기 위한 의례적인 통과였겠지만, 육체적인 감정과 죄의식 사이에서의 갈등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처절하다는 표현이 정말이지 적당합니다. 내부 깊숙한 곳에서는 성적 본능이 솟구치는데 이 본능을 순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아무도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가정과 사회나 학교가 만들어 놓은 도덕적 규율과 죄의식이 거의 다였습니다. 만약 이 시기에 누군가 이 성적 욕구를 예술이나 다른 창조적인 것으로 승화시켜주거나, 본능에 솔직하도록 죄의식을 부수어주었다면 아마도 저는 양극단의 삶 중 어느 하나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상황이다 보니 분열되고 깨어진 자아는 사회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깨어진 유리의 날이 날카롭듯이  신경질적이고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기성의 제도나 가치에 대한 젊은 세대의 비판과 저항도 이런 맥락일까요? 비판과 저항이 낭만적이거나 환상적인 건 이런 때문이 아닐까요?

이미지 출처:  http://kr.image.yahoo.com/GALL

 

이러한 분열된 자아를 그나마 위로해 준 것이 친구였습니다. 우정이었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몇몇 친구가 왜 그토록 힘이 되고 위안이 되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공유하는 생각이 비슷했기 때문이었겠죠. 우정은 제가 순화되는 유일한 출구 중에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하나를 더 들자면 도스토예프스키(Fedor Dostoevsky)와 비틀즈(The Beatles)입니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중학교 2학년 때 저에게 아주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집 근처의 서점에서 ‘이중인격’ 이란 제목의 문고판(‘삼중당’ 문고인 듯한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책을 샀는데 그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였습니다. ‘이중인격’ 이란 책 제목이 저를 완전히 압도했는데 바로 제가 이중인격자라는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중인격’ 이란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둡고 분열된 심리를 반영하는 책 제목을 주로 골랐습니다. 어둡고 부적응적인 정신 상태를 잘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그 이후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의 책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밤을 새워 가며 읽었던 ‘죄와 벌’ 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은 읽긴 했지만 음산한 분위기와 인물들에 막연히 공감했을 뿐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스토예프스키 외에는 접한 작가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왜 이토록 하나만 우상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틀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집 근처의 골목 어귀 레코드 방에서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촘촘히 꽂혀있는 카세트테이프 중에서 흰 와이샤츠에 까만 넥타이를 매고 까만 양복을  입은 4명의 젊은이들이 훈장을 들고 있는 사진이 저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멋져 보였습니다. 또 훈장들이 호기심을 자아내었습니다. 그 테이프를 꼭 사야만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음악이 있는가?  그 테이프는 복사판으로 20곡 정도의 곡이 들어있었고 듣자마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도스토예프스키와 비틀즈는 내게 작은 아니 큰 위안으로 찾아온 것입니다.(아집의 탄생이라고 할까요? 우상의 탄생이라고 할까요? 도스토예프스키와 비틀즈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제게 작은 축복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저주였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마음은 황량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kr.image.yahoo.com/GALL


이제 ‘하나와 앨리스‘ 의 얘기를 해볼까요? ’하나와 앨리스’ 는 10대들의 우정과 사랑과 상처의 치유를 다룬 영화입니다. 아라이 하나(스즈키 안)와 앨리스[아리스가와 테츠코](아오이 유우), 그리고 미야모토(카쿠 토모히로)가 펼치는 순수한 우정과 사랑과 고민과 관용과 이해를 담은 젊은 날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명랑하고 쾌활하고 낙천적인 분위기가 마냥 부러웠던 것은 아마도 칙칙하기만 했던 제 개인사에 기인할 것입니다. ‘하나’와 ‘앨리스’는 왜 이토록 성숙하고 어른스러운지! 아마 젊은 세대가 이토록 낙천적이고 밝기만 하다면 이 세상에는 문제가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와 앨리스는 그들이 가진 문제들을 스스로 잘 극복해갔으니까요.


또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하나와 앨리스’ 는 10대들의 ‘역할 모델’ 영화로 적합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직 여물지 않은 머리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문제와 더불어 살아야하는 사춘기의 10대들에게 여유와 낭만과 관용이란 삶의 방식을 선사해주는 것은 교육적으로 소중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 시기의 사랑과 우정이 너무나도 가슴시리도록 뭉클한 것은 자기 한계에 대한 질곡이 너무나도 깊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육체적, 환경적 변화와 불안정에 따른 자기 혼돈의 시기인 것입니다. 이럴 때 자신과 동질적인 누군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커나큰 기쁨입니다. 또한 혼란스런 가운데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천국처럼 특별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와 앨리스’는 이러한 사랑과 우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과 우정에 대한 따스한 시선, 만담(발레, 사진) 등의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활동들을 통해 극단적인 방식들이 순화된 성숙한 10대의 모습들, 그 모습들에 아와이 순지 감독의 10대들에 대한 애정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영화의 끝부분에 발레의 장면 이 지루하게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영화가 교육적으로도 힘든 작업을 대신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10대들과 관련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화들(두사부일체,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 동갑내기 과외하기, 우리형 등)은 과연 이러한 방식들이 순간의 감정 분출을 의도한 것 외에 무엇일까 하고 회의하게 합니다. 인간성 상실과 삭막한 사회 현실을 고발하기 보다는 혹 일조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시인인 유하 감독이 만든 ‘말죽거리 잔혹사’ 의 경우 ‘과거 향수의 향유’ 라는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지만 이 영화가 15세 이상 등급이란 면에서는 그 잔인한 폭력으로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빨간딱지가 붙는 18세 이상 관람 등급이 주로 에로 영화에 국한되는 것도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10대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문제의 접근이나 해결의 측면에서 더 깊이 있고 진지하다고 주장한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와 앨리스’ 류를 전적으로 두둔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 영화들에도 10대들과 관련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화들은 존재합니다. 아니 더하다면 더할지도 모릅니다. (최근에 본 일본 영화 ‘바운스’ 가 그랬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는 ‘폭력적’ 이거나 ‘부정적‘ 이라기보다는 ’고발적‘ 인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나 폭력이 상업성과 결합되면서 마치 영화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소재라는 데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폭력을 비판한다는 미명하에 폭력을 이용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차라리 폭력을 연구하려 했다거나 상업성을 고려했다고 좀더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과연 10대의 학창 시절이, 보편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시기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나와 앨리스 영화 음악 감상하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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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5 23:08

일본영화 음악 3곡(자토이치,사토라레,전차남)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자토이치>는 키타노 다케시 감독의 맹인무사 자토이치 기행적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토라레>는 타인들의 속마음이 들리게 된 사토라레(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청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차남> 은 일본 사회의 고독한 섬이 되어가고 있는 오타구와 그 세계를 이해 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자토이치
스즈키 케이지, Festivo





사토라레
Crystal Kay, Lost Child




전차남


전차남 trailer




전차남
Orange Range, Love Parade





*관련랑크: 자토이치 1        자토이치 2       자토이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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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2 20:14

일본영화 음악 3곡(토니 타키타니, 냉정과 열정사이, 연애사진)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토니 타키타니>는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영화한 것입니다. 70여분이란 상대적으로 짧은 영화이지만 무게감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사랑의 감정을 복구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예술품의 마모와 복원을 테마의 은유로 녹여놓은 것이 돋보입니다. <연애사진> 사진의 흔적을 더듬으며 사랑하는 이의 시선을 통해 다시 하나가 되려는 사랑의 간절함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니 타키타니(2004년)
류이치 사카모토, Solitude


Tony Takitani UK Trailer




냉정과 열정사이(2003)
조수미, History








연애사진(2003년)
Fan MV


영화 <연애사진>의 스코어는 아닙니다. 팬이 만든 뮤직비디오라고 합니다.    이 음악을 알고 계시면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연애사진> OST 곡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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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8 02:35

피와 뼈



피와 뼈


낯선 삶이었다. 영화의 역사적 배경이나 공간등 간과 할 수 없는 여러 주제들, 이를테면 광기의 역사적 상징성, 불행한 가족사의 부조리함, 개인의 병적 심리 등 역사라는 거창한 주제에서부터 가족사의 비극과 한 개인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감상의 자료를 제공해주었지만, 나의 생각은 인상적인 한 인간의 괴물 같은 삶(연기)에 주로 매달렸다. 아마도 낯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 내내 김준평(기카노 다케시)의 ‘괴물성‘ ’야수성‘의 근원이 어디에서 있는지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괴물성‘ 과 영화의 어디에도 그 인과성을 찾지를 못했다. 김준평의 괴물성을 일본 제국주의에 항의하는 메시지로 읽고자 했으나, 그것은  넌센스 같았다. 아니 관객인 내가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를 이해하기에는 김준평은 너무 속물적이었다.


그냥 다소 낯선 한 한인 가족사가 1920년대 초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이란 배경만을 달리하며 기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해 보였다. 그냥 즐기면 되는데 괜한 헛수고를 한 듯했다. 가족들과의 관계조차도 파괴하는 가장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 가장을 사실적으로 묘사를 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만 넘어가자니 어딘지 허전하고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미지 출처:http://www.slrclup.net/Common/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상처’ 라는 단어였다.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트였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관계들이 엮어놓고 있는 인간들의 실존이었다. 역사도 이데올로기도 어쩔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모습이었다. 절망을 만들고, 절망에 순응하고, 절망에 저항하는 삶들은 깨어진 관계 속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절망들은 전 근대적인 인간관계 속에 처해진 실존들의 상처이고 절망들이기에, 과거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해준다. 특히 김준평으로 상징되는 억압적인 한국의 유교적인 가부장제와 그것에 얽힌 문제들에 대한 성찰이 그랬다.


그리고 죽음이 있었다. 죽음이 끝인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한 장의 유서일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제법 긴 유서를 쓰고 있다는 오싹한 느낌이 몰려왔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죽음들이 인상적인 까닭이기도 했다. 딸의 주검 앞에 김준평이 나타났을 때, 상가에는 큰 소동이 벌어지고 그 소동을 피해 딸의 시신을 이리저리 옮기는 장면은 현실의 고통을 피해 죽음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고통스런 현실은 죽음과 현실의 끊임없는 악순환을 느끼게 했다. 현실은 좀더 아름다운 곳은 될 수 없는가? 인간은 좀더 선한 존재가 될 수는 없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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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6 21:42

토니 타키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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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타키타니


단편소설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의 이 영화는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토니 타키타니>를 영상화한 것입니다. 다른 영화들에 비에 다소 짧은 편(76분)이지만 진지하고 무게감 있게 다가옵니다. 간결하고 경쾌한 문체에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주제를 담고 있는 하루키의 소설(읽는 것은 《상실의 시대(Norwegian Wood)》가 유일하지만)과 마찬가지로 경쾌하고 간결한 문체를 마치 눈으로 보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문장이 간결하면 경쾌해지고 또 스타카토의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단문과 단문사이의 여백은 ‘인상’을 만드는 유용한 공간으로 존재합니다. 선에 비유하자면, 점선이 완전한 선은 아니지만 더욱 인상적인 선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점과 점 사이의 공간 덕분입니다. 실선은 완전하나 점선보다 인상적이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이런 이유로 점선이 끊는 선을 상징하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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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http://www.dvdactive.com/news/releases/tony-takitani.html

인생에 비유하자면, 인간의 인생은 마치 점선과도 같습니다. 여러 사건들의 인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지요. 지나온 시간들은 하나의 긴 흐름처럼 느껴집니까, 아니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여러 사건(장면)들이 인상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그림이나 사진처럼 파편으로 남아 인상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기억은 인상을 만들 뿐 그대로 재연하지는 못하죠.) 모래를 생각해 보면 될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알갱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모래를 이루고 있습니다. 알갱이들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소설의 문장들이 아니라 인간들의 관계로 생각해 보면 사실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들이 간결하고 경쾌한 관계들로만 구성된다면 ‘인상’ 은 만들어 내겠지만 끈끈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지는 못하겠지요.

단문들로 쓰인 소설들은 대체로 차갑고 냉정합니다. 단편인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단편소설이란 이름처럼 인간들의 ‘단편적인 관계’가 되겠지요. 이 영화에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주 단편적인 접점만을 갖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 주인공 토니 타키타니(잇세 오가타)와 여자 주인공인 에이코(미야자와 리에)가 만나 이렇게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에이코: 옷이란 자신의 내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제 멋

           대로에요. 게다가 굉장히 사치스러워요. 그래서 급료의 대부분이 옷을 사

           는 비용으로 사라져버려요.

토 니 : 나는 그림도구 외에는 어디에도 돈을 쓸 일이 없어.


이렇듯 그들의 만남에는 인간적인 공감이라기보다는 단편적인 접점으로서의 옷과 돈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토니와 그의 아버지의 대화에서도 인간적인 공감이 아니라 단편적인 접점만을 확인해 줍니다.


토  니:머랄까, 사랑에 빠져 버린 것 같아.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

          어.

아버지:그래서 어디가 마음에 든 거야?

토  니:뭐라 말해야 할까? 옷을 입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

아버지:그것 참 굉장하군.



이러한 인간의 단편적인 관계에는 서로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공감할 수 없다는 그 사실에 의해 어떤 막연하고 근원적인 고독이나 외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토니 타키타니와 에이코는 운명에 순종하는 무기력한 인간처럼 여겨집니다. 마치 허수아비처럼 말입니다. 비록 함께 있지만 대책 없는 고독과 외로움이 그들 주위를 맴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인 것입니다. 단지 망각하는 것 밖에는 그것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일시적인 위로일 수는 있되 영원한 구원은 되지 못합니다. <토니 타키타니>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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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http://kr.image.yahoo.com/GALL

이렇게 보면 피상적인 관찰이기는 하지만 《상실의 시대》(1987)에서 우울하기는 하나 인간관계에 대한 희망이 단편 <토니 타키타니>(1997)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무기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소 안타깝습니다. 꼭 10년만입니다. 성숙인지 퇴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상실의 시대》에서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존재로서 공감하고 일체감을 갖는) 인간관계의 희망을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 <토니 타키타니> 를 보고나면 연민과 인간 실존, 그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체험입니다. 일본 영화라는 편견을 버리고 이러한 영화를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이제 이 영화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들을 몇 가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장면들 사이의 검고 두터운 벽들입니다. 이 벽은 인간을 가두고 차단시키는 외로움을 상징하고 있는 듯 합니다. ‘외로움은 감옥’ 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장면들 사이에 놓여있는 검은 벽들이 창살처럼 여겨집니다. 고독은 우리 인간이 깨기에는 너무나도 큰 벽처럼 여겨집니다.


둘째는 인간들이 남긴 흔적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다지 유쾌한 생각은 아닙니다만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오릅니다. ‘우리의 삶 뒤에 남게 되는 것은 흔적뿐’이라는 말 말입니다. 도대체 죽음 뒤에 우리가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종교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고, 환생이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죽음 뒤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직면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빠져 나간 자리에는 마치 뱀의 허물처럼 헐렁한 옷 몇 벌만이 덩그러니 남으리라는 상상은 쉬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남아있을 옷들에 발악적으로 집착하는 에이코에게 우리는 연민을 느낍니다. 에이코는 옷을 반품하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신호등에 걸려있는 중에 다시 그 옷이 생각나 차를 돌리다 사고로 죽습니다. 에이코를 죽인 것은 그녀의 옷인 셈입니다. 토니 타키타니의 아버지가 죽은 뒤의 흔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고작 낡은 레코드들이 전부입니다. 에이코의 옷들이 머물러 있던 텅 빈 방에 남겨진 그 레코드들은 에이코의 옷들과 함께 연민을 자아냅니다.


셋째는 인간에 대한 연민입니다. 토니 타키타니는 죽은 아내를 기억하고자 아내와 체형이 같은 여자를 비서로 채용해 아내의 옷을 입고 출근하도록 하는데, 바로 히사코가 그녀입니다. 히사코는 리에가 에이코와 함께 1인 2역을 맡습니다. 히사코는 에이코의 옷을 고르기 위해 에이코의 옷방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그녀는 에이코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느끼고 눈물을 흘립니다.


몇 백 벌이나 되는 아름다운 옷이 그 곳에 쭉 늘어서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옷을 잔뜩 남겨 놓은 채 죽어버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 들까?”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옷도 구두도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과 같이 정확히 사이즈가 맞았다.


그리고 그녀는 흐느껴 웁니다. 그녀의 눈물은 바로 연민의 눈물인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공감인 것입니다. 토니 타키타니는 아내의 옷 방에서 흐느껴 울던 히사코를 잊지 못합니다.


그는 때때로 아직껏 그 방안에서 아내가 남기고간 옷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잘 알지도 못한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의 흐느껴 울던 소리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이렇게나 많은 예쁜 옷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후에도 이상하게도 그 여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토니 타키타니 UK tra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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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5 00:33

일본영화 음악 3곡(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박치기, 아무도 모른다)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세상의 중심에서사랑을 외치다>은 카세트 테입에 담긴 젊은 날의 상처를 테입을 재생시키듯 다시 찾아가는 성찰의 영화이며 동시에 성장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박치기>는 일본영화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화입니다. 우리 민족을 다룬 영화이며 분단을 다룬 영화입니다. 우리의 슬픈 역사가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 교포들에게 한 처럼 맺혀있는 영화입니다. <임진강>으 너무도 감동적인 노래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입니다. 이 영화는 일본영화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보시면 어떨가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만난 것이 참 행운이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2004년)
瞳をとじて(눈을 감고)



                  히라이 켄(平井 堅,ひらい けん)의 원곡이 아닌 마사미 버전





박치기(2006년)
임진강



영화 <박치기> 중 한 장면


임진강




아무도 모른다(2005년)
보석

                                                 타테 다카코 <보석>




다른 일본영화음악 3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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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0 02:11

일본영화 OST 3곡(키쿠지로의 여름, 하울의 성, 러브레터)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키쿠지로의 여름>은 참 재미있게 본 영화였습니다. 잊고 있던 동심의 세계를 마구 일깨워 주더군요. 다음이 <하울의 성> 메인 테마곡이고, 마지막으로 이와이 순지 감독의 <러브 레터> MV입니다. 


 
키쿠지로의 여름(1999년)
히사이시 조, 메인 테마곡







하울의 성(2004년)
히사이시 조, 메인 테마곡







러브 레터(1995년)
Winter Story 메인 테마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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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9 00:39

일본영화 OST 3곡(조제,호랑이,그리고 물고기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말은 삼각, 마음은 사각> 이 노래는 작년 여름에 접하고 참 좋았던 음악입니다. 쿠루리의 <Highway> 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엔딩 스코어로 흘러 나올 때는 잔잔한 여운이 계속 남았던 기억이 나는 군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쿠루리,  Highway






 
마을에 부는 산들 바람
쿠루리, 말은 삼각 마음은 사각







지금 만나러 갑니다
Orange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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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5 15:27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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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www.art.com



영화 <이 보다 좋을 수는 없다(As good as it gets)>
―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의미

영화의 매력은 해석이나 설명 따위로는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비합리적이고 비경험적인 개체들의 감정과 심리와 행위를 영상으로 전달하는데 있다. 이것은 소설의 묘사나 시의 상상력보다 즉발적인 감동을 제공함을 의미한다. <이 보다 좋을 수는 없다>(이하 <이보다~> 로 줄임) 는 이러한 등장 인물간의 감정과 심리를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그냥 내보여주지만 인간과 인간의 관계, 특히 상처받은 인간들의 관계의 진정성은 거친 삶의 파도 이면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다. 즉, 감정과 심리와 표정의 다소 정적이며 사소한 것들의 흐름 속에 아주 다이내믹한 동적인 요소(사랑, 치유, 이해 등)들이 종횡무진으로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신경증에 시달리는 유달(잭 니콜슨)은 세상을 거부하며 비정상적인 자기중심적 일탈의 세계에 안주하는 소설가이며 동성애자인 사이먼(그렉 키니얼)은 어린 시절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체 그림으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한 아이의 어머니이면서 이혼녀인 캐롤(헬렌 런트) 또한 궁핍한 소시민적인 삶에 체념하며 살아가는 웨이트레스이다. 유달의 경우 사랑을 상실한 비정상적인 인간관계와 자기중심적 세계 해석이 자신의 소외를 초래하고 있으며 사이먼은 동성애자로서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그것을 만회하고자 예술을 선택했을 수 있다). 이혼녀로서 궁핍한 삶을 살고있는 캐롤은 자본과 사랑으로부터 소외 받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영화 <이 보다~> 는 이러한 소외로부터 상처받은 이들의 만남과 소통과 사랑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소통과 사랑의 특성이 상호성임을 이해할 때 그들의 교감은 예상과는 달리 결코 일방적이지 않으며 상호간의 영향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아주 크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며 그저 소박하고 일상적인 교류를 통해서이다. 진정한 인간관계의 거창한 주제를 아주 소박한 이야기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소통과 사랑이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피가 우리의 몸을 돌 듯 인간과 인간의 감정이 교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차를 타고 단 한번 일상을 함께 벗어났을 뿐이며 사건이나 반전도 흔히 일어나지 않는다. 고작 유달의 사이먼에 대한 질투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여행은 대단히 중요한 메타포를 갖는다. 일상을 벗어나는 차 속에서 그들은 사실상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가장 정상적이랄 수 있는 캐롤이 여사제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녀의 임무는 조용히 들어주는 것일 뿐이었다. 유달이 캐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 사이먼이 캐롤의 벗은 몸을 통해 예술적 성취의 영감을 얻는 것, 캐롤이 피곤한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 이 한 번의 여행에서 사실상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소통이란 그렇게 거대한 곳에서 거창하게 인간에게 다가서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이것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버렐이란 아주 보잘 것 없는 강아지 한 마리가 암시해 주고 있기도 하다. 또한 영화의 끝 장면에서 이른 새벽 유달이 빵집 앞에서 자신이 걷길 거부하던 길바닥으로 뛰어드는 것은 결국 버렐이란 강아지 한 마리의 아주 사소한 발걸음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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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8 17:32

무사의 체통(3)




무사의 체통(3)

― 누구의 사랑이고 명예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武士の 一分>의 영어 제목 <Love and honour>은 영화의 내용을 왜곡하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우리나라 제목 <무사의 체통>이 영화의 내용에 적확하다고 여겨진다. 영화의 내용으로 볼 때 사랑은 무사의 명예(체통)에 종속되기 때문에 그렇다. 일본의 전통적인 미덕을 love 와 honour라는 단어로 소개하려고 한 듯 하지만 기실 영어 단어 love와 honour의 의미를 변질시키고 왜곡시킨 일면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의 영제를 <Love and honour>라는 기만적인 미화보다는 일본어 제목과 마찬가지로 사무라이라는 한정사를 붙이는 것이 보다 솔직하다고 본다. 그것은 ‘사무라이의 사랑이고 명예’ 이지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이나 명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냐 무사의 사랑이냐를 떼어놓고 볼 때, ‘무사의 관점‘ 에서 보는 사랑은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좁게는 한 개인으로서 사무라이의 사랑과 명예에 대한 태도일 수 있으나, 좀 더 공간을 넓혀 보면 의미 또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완고한 계층질서에서 <남, 녀 간의 사랑>이란 감정이 주변으로 밀려난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또는 사랑과 명예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때 사랑이 무사의 명예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더욱 더 넓게는 국가주의에 부속화 되는 개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무력에 압살당하는 사랑(일본군국주의에 희생당한 위안부 할머니처럼)의 일그러진 모습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무사의’ 라는 한정사는 내용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영화 <색계>의 예를 잠시 빌려오면, 이 영화는 사랑과 애국이라는 선택에 흔들리는 한 개인의 감정, 특히 한 여자의 감정이 밀도 있게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이안 감독이 집단이나 국가 이전에 사랑이라는 한 인간의 감정을 유연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고 애국과 민족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매국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다). 애국(민족, 국가)라는 중력과 개인의 일탈적인 힘이 부딪히면서 동정과 이해, 공포와 용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들의 약한 모습이고 단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무사의 체통>은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명예가 존중되는 국가주의나 군국주의의 초개인적인 냄새만을 맡을 수 있다. 마치 심오한 무언가가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맹목적인 개인과 개인들이 집단(사무라이, 더 나아가 국가)의 중력에 흐물흐물 떠다니고 있는 것이다. 신파조의 사랑타령이 조금 등장하기도 하지만 양념일 뿐 오직 하나의 중심에 수렴되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무사의 명예에 사랑을 주변적인 것으로 종속시켜버린 다는 것은 사무라이 영화의 당연한 특성의 일부로 전통적인 미덕이나 영화 자체로도 사무라이의 남성성을 멋지게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어딘지 무서운 일면을 뿌리 칠 수가 없다. 무사와 칼에 여성과 사랑이 종속된다는 것은 아무리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인류 보편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일본의 과거도 미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역사의 경우도 가족을 몰살하고 전쟁터로 나아가는 장군의 이야기나 다소 성격을 달리하긴 하나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이 그러한 예로 들 수 있다. 칼과 무사, 사랑과 여성을 좀 더 단순화해서 인류 보편적인 상징으로 표현한다면 여러 가지 추상적인 단어들과 구체적인 존재들과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중심주의, 가부장제도, 부자유와 복종 등의 단어들이 아닐까 한다.

장님이 되어버린 한 가난한 무사의 체통과 권위주의 아래에 사랑, 헌신, 봉사가 종속되면서 순수하고 희생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관계는 얼마나 삭막해질 것인가? 아니 삭막한 정도가 아니라 관계 자체가 두절되고 파괴되면서 비민주적이고 폭압적이며 비상식적인 어두운 통로들만이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닐까? 바로 남성중심주의요, 가부장제도이며 부자유와 복종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리 무사도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영화에 나타나는 남성중심주가 미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사도는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였으니 말이다. 이러한 무사도가 <love and honour>라는 이름으로 그럴듯 하게 포장되고 상품화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21세기의 일본 영화에 아직도 이러한 사무라이의의 전통적인 미덕이 칭송되고 있다는 것은 현대 일본인의 마음에 내재에 있는 의식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사랑보다도 사무라이의 명예를 추켜세우는 것은 결국은 국가에 종속되는 개인과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로 확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해석이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최근의 독도 문제를 보면서 영화와 현실이 별개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미지출처: http://kr.blog.yahoo.com/iamji
                 http://kr.news.yahoo.com/ser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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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7 23:43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기이한 만남과는 달리 헤어짐의 담담함은 이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며 그 메시지가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예상치 않게 만난 예상치 않은 존재는 우리의 일상에서 벗어나 있지만(숭고함에 가까운 감정이던 호기심이던), 헤어짐은 이러한 만남과는 달리 우리 일상의 한 단면을 통속적으로 보여줄 뿐이다(일순간의 동정이었을뿐). 꿈에서 깨어나는 아쉬움이라고 할까? 끝까지 조제를 책임져 주길 기대하는 우리의 상상적인 기대를 여지없이 배신해버리기 때문이다. 숭고함(또는 호기심)이 일상의 것으로 추락할 때 우리의 실망은 얼마나 클 것인가? 그러나 또 우리가 인정해야할 우리의 일상이기에 우리는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정의 변화에 솔직해 진다는 것은 일상으로의 귀환이며, 의지는 또 다른 숭고함인 것을...... 조제의 삶을 책임지리라는 확고한 의지가 없다면 코네츠의 조제에 대한 사랑은 휘발성이 강한 일시적인 사랑의 감정일 뿐이다. 아니면 동정이거나. 코네츠는 의지가 아니라 감정을 선택했다. 비통할 정도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코네츠의 가슴처럼이나 이 둘을 지켜보는 우리들의 가슴도 마찬가지긴 하다. 이 영화의 결말과 ‘영화가 끝난다는 사실’은 함께 이제 우리는 과장된 감정을 훌훌 틀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것은 인간적인 감정의 솔직함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엇으로 불리울까.



1.사랑의 감정들


<오아시스> 와 <나쁜 남자>의 경우. 이 영화 내내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떠올랐다. 아마 장애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물론 오아시스의 주인공들은  둘 다 사회로부터 정신적 육체적으로 소외된 인간들이다. 그들의 관계에 ‘사랑‘이란 진정성의 무게를 두고자 할 때,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으로 작용한다. 영화 내내 보는 이들이 부끄러웠던 것도 그런 진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잘 들어맞는 한 쌍이었고. 그것은 어느 일방의 동정심에 근거한 관계가 아니라 가식 없는 ’진정한 사랑‘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작 우리에겐 그런 진정성에 우리를 투신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위선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그 대상을 파멸시킬 수 있을까? 대상을 파멸시키는 <나쁜 남자>의 그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그 모든 것조차 초월하는 것을 김기덕 감독은 보여주는 것일까? 한 여자를 덫에 걸어 자신의 옆에 애완동물처럼 두고자 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 수 있을까? 아니면 나쁜 남자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영화임에도 내가 사랑이란 말을 잘못 갖다 붙이고 있는 것일까? 오아시스와는 달리 <나쁜 남자> 에서의 남녀의 관계는 부담스럽고 껄끄럽고 낯설기만 하다.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런 관계의 설정에서부터 <나쁜 남자>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하 <조제~>표기) 은 흡사하며 그 감정의 처리 방법에서도 흡사한 측면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은 극단적으로 다른데, 나쁜 남자가 감정을 폭력의 단계까지 극단적으로 과장하면서 끌어올리는 반면, <조제~’> 는 감정의 변화에 솔직히 반응하면서 감정의 가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조제를 포기하는 것도 실상은 감정에 솔직해 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제~>에서는 감정이 가변적이고 일시적이며 자연스럽다는 전제에서 감정을 쉽게 놓아버리지만, <나쁜 남자>에서는 강렬한 일시적 감정의  절대성을 포착하여 그 감정을 극단으로 수렴하는 병적이고 집착적인 모습을 보인다.


우리가 감정에 솔직해 진다고 했을 때 <나쁜 남자>‘나 <조제~> 는 진실일 수 있다. 그리고 진정성일 수 있다. 그러나 <조제~>에서의 코네츠의 사랑의 감정은 동정심에 가깝고 의지적이다. 이러한 감정은 의지가 약해질 때 더불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 있다. <나쁜 남자>에서의 사랑의 감정 또한 강렬하며 의지적이긴 마찬가지다. 다른점이라면, <조제~>에서의 동정심에 가까운 의지적인 감정이 쉽게 포기되는 반면, <나쁜남자> 에서는 감정대로 이루려는 의지가 너무나 강력해 조금도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폭력과 억압에 가까운 감정이 되어 상대를 파멸시킨다(이것에 진정성이란 이름을 달기에는 왠지 끔찍한 느낌이 들기는 한다.) 아마도 김기덕의 의도가 일반화된 사랑의 감정을 낯설게하기겠지만 이것은 일상적인 사랑의 진정성과는 솔직히 거리가 멀다. 낯설고 도발적인 사랑을 통해 인간에게 있어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별스러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겠지만......사랑은 이럴 수도 있다는...... 감정에 솔직해 진다는 면에서 <조제~’>와 ,나쁜 남자> 는 서로 극단의 방향이지만 동질성을 나타낸다. 



2. 사랑과 동정의 사이

이제,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사랑은 무엇인가? 일시적인 감정인가? 지속적인 감정인가? 아니면 감정을 초월한 어떤 것인가? 감정이 촉발시키는 행동인가? 그 어느 것에 사랑의 이름을 붙이던 개개인들의 정의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인간만큼의 사랑에 대한 정의들이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의 정의는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사랑이란 전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인 관계인 경우는 어떤가? 코네츠처럼 정상적이고 여자들에게 인기있는 대학생과 출생도 불분명한 뇌성마비인지 병명조차 모르는 장애인인 조제의 관계말이다. 코네츠의 조제에 대한 감정은 일시적인 감정일까? 지속적인 감정인가? 아니면 감정을 초월한 어떤 것인가?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영화의 파국으로는 판단해 보면 분명 일시적인 감정이다.  그렇다면, 코네츠의 감정에 사랑의 라벨을 달아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랑에 ‘일시적인’ 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주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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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0 00:42

[일본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기쿠지로의 여름 (菊次郞の夏)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기쿠지로의 여름>은 기타노 다케시(영화명은 비트 다케시)의 명성에 걸맞는 영화입니다. 역시 다케시라는 감탄사가 튀어나오게 합니다. 감독, 각본, 편집은 물론 마사오 역의 유스케 세키구치와 함께 주연을 맡아 열연합니다.

꼭 외형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 내용의 측면에서도 사무라이와 야쿠자 일색의 기존 다케시 영화와는 달리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놀라운 일이지만(이 말은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폭력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다케시가 만드는 영화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뜻에서입니다. 물론 이 영화는 폭력이 전혀 필요 없는 영화이긴 합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어린아이들이 보는 만화 영화만큼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것도 없습니다. 폭력이 나쁘다고 하지만 만화영화의 폭력을 보면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는 느낌이 듭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에서는 폭력이 거의 사라집니다.

물론 다케시의 ‘폭력’ 이 한, 두 군데 등장하고 있지만 그리 심각하지도 않고 인간적이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면, 트럭의 앞 유리창을 깨고 도망가지만, 뒤쫓아 온 기사와 싸우는 장면은 트럭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한 마을의 축제에서 야쿠자 일당과 맞서지만 폭력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얻어터진 키쿠지로의 모습만을 보여주어 싸움이 치열했음(?)을 대충 짐작케 할 뿐입니다. 야쿠자인 ‘기쿠지로‘ 에게서 완전히 폭력을 금지하기엔 불가능하겠지요.

아무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야쿠자에게서 폭력적인 요소를 배제했을 때 어떤 인물이 될까요? 예를 들면 야쿠자를 유치원의 보모 자리에 앉혀봅시다. 또 야쿠자를 전업주부로 만들어 봅시다. 사실 이러한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은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조폭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의 여지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의 대상을 부조화/불균형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웃음이나 감동을 유발하는 것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두사부일체><조폭 마누라><달마야 놀자>등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 야쿠자를 관광버스의 관광 안내원으로 내세운다면 이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따라서 기쿠지로를 엄마를 찾는 마사오의 길 안내자로 만드는 것도 기발하고 의외의 상상이랄 수 있겠습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만약 동화 속에 야쿠자가 등장한다면 그 야쿠자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것도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입니다. 좀 사내다운 관객이라면 “야쿠자가 그럴싸한 폭력물에나 어울리지, 무슨 이런 장난을 치나!“ 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전 제 경험상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 다소 유치한(?) 노래를 부를라 치면 분위기 깬다라는 냉소적인 표현(?)을 짓는 군자들이 꼭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들이란 설운도, 태진아, 조용필, 남진, 나훈아, 이미자 류의 그 애끊는 고상한 트로트들이었습니다. 분위기 띄우기의 정수를 보여주겠다는 자세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트로트 일색의 노래방 분위기에서 갑자기 유치한 ‘마법의 성’ 이 등장한다면 분위가기 썰렁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야말로 마법에 걸린 듯 얼어붙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어떠한 종류의 분위기도 인정하는 노래방의 성숙한 문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달마야 서울 가자>의 노래방 장면이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만약 이렇게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객이라면, ”야쿠자가 백마를 탄 기사가 되었군. 아주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인데......“ 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동화 속에 등장한 야쿠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두 입장 중에서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 서고 싶습니까? 저는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습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제가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부조화/불균형)을 비일상적으로 보는 관습적이고 경직된 태도, 즉 우리가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익숙해져온 편견이나 획일화된 사고를 지양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관습을 벗어난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이 영화를 더 재미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야쿠자가 리얼하게 폭력을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동화의 나라에서 백마 탄 기사가 되는 것은 더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여러 관계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이란 말 자체에 그런 뜻이 있습니다. 관계는 지속적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다 그 관계들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저를 나아준 부모의 존재가 사라지면 그 관계도 소멸합니다. 제가 자식을 낳으면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 집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사라질 때 인간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죽는다는 것은 모든 관계의 소멸을 뜻합니다. 마치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들이 확정적이고 경직되는 것은 그다지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새삼 언급하면 잔소리로 들릴 정도로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현실은 관습화되고 경직된 관계들로 구획되어 있는 듯 합니다. 영화는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을 통해 이러한 관습화되고 경직된 관계들을 변화시키는 측면이 아주 강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친구의 관계로 유연화 되기도 합니다. 유교의 경직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으로서 말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비일상적인 남녀의 관계가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전도되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인간의 여러 관계들이 일상적인 역할을 벗어나 작동합니다.그것은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영화와는 달리 허구를 통해 현실을 허물려는 영화의 본질과도 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쿠지로와 마사오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영화 내내 느끼는 것이지만 도대체 누가 더 정신적으로 성숙한지? 도대체 누가 더 진정한 안내자인지? 도대체 누가 더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지? 이 두 사람의 여행을 통해서 더 깊이 감동을 받고 정신적으로 변화한 존재를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마사오의 여름>이 아니라 <기쿠지로의 여름>이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마사오의 여름을 위해 기쿠지로가 떠밀려 동행을 했고 안내자와 보호자의 역할을 하지만 정작 여행을 통해 변화한 쪽은 기쿠지로인 것입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조금 강요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자의 입장, 즉 “장난치나!“ 같은 냉소적인 입장은 이 글을 읽으면서는 누그러트려 주었으면 합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의 구성은 여행의 시간 흐름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전개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서 보기가 편합니다. 이러한 단순함은 영화의 재미와도 연관되면서 지루하지가 않은데, 아이의 시선을 배려한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이 영화는 소설처럼 각각의 장들이 존재하는데 마치 추억의 앨범이나 여행 기록 또는 일기장을 넘기는 듯한 효과를 줍니다. 각 장마다 영화의 압권이랄 수 있는 장면들이 숱하게 나옵니다. 여러 장으로 구성된 <기쿠지로의 여름>은 [할머니의 친구들]로부터 시작합니다.


마사오(유스케 세키구치)는 부모가 없이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9세 된 아이입니다. 여름 방학이 되었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친구들은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고 축구 교실도 여름방학 동안은 활동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학교에 찾아갔다가 축구 코치로부터 “방학인데 바다에나 다녀오렴. 재밌을거야.”란 속 모르는 소리만 듣는데, 이 학교 신(scene)에서 헛발질을 하고 넘어지고 혼자 운동장에 서있는 마사오의 모습이나 혼자 남은 집에서 밥을 먹는 마사오의 뒷모습은 아이의 작은 어깨에 드리워진 무거운 외로움 느끼게 합니다.

외로운 마사오에게 어는 날 엄마의 소포가 찾아듭니다. 그리고 소포의 겉봉투에 적힌 주소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치 현, 토요하시 구’ 주소를 가방에 넣고 엄마를 찾아 떠나지만 불량배들에게 잡히는데 이때 나타나는 기쿠지로와 그의 아내가 할머니의 친구들입니다(할머니의 친구들 치고는 너무 젊은데......) 이런 인연으로 아내로부터 여행 비용으로 5만엔을 받은 기쿠지로와 마사오는 토요하시로 떠나게 됩니다. 이 장면의 압권은 유흥가와 경륜장에서의 해프닝으로 누가 어른이고 어린이인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웃음을 자아냅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그리고 이어지는 [무서운 아저씨] 장에서는 유흥과 경륜으로 돈을 다 탕진해 버리고 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기쿠지로는 마사오가 없어진 것을 알고 근처 공원으로 찾아 나섭니다. 어린이 마사오를 전혀 고려치 않는 무지막지한 어른인 기쿠지로가 공원에서 목격하는 것은 마사오에게 이상한 짓거리를 강요하는 변태 대머리입니다. 변태 대머리는 무서운 세상의 암시로 이로서 마사오를 지켜야하는 기쿠지로의 필연적인 운명(?)이 시작된다고 할까요? 그 다음 날 아침 택시를 타고 ‘토요하시‘ 로 떠나게 됩니다. 이 후로 [이상한 아저씨][실패였다][천사의 종][아저씨가 놀아 주었다] 등의 장들이 이어집니다.



다 이야기를 해버리면 재미가 없겠지요. 자, 이제부터는 기쿠지로가 마사오와 함께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 일기장을 직접 넘겨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재미있어 눈을 떼지 못할 것입니다. “장난치나!“ 같은 냉소적인 입장만 갖고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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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21:54

[일본영화] 자토이치(3)



                                         이미지출처: www.sung-ho.pe.kr

 

 

자토이치(3)

-마이너리티 리포트


맹인 자토이치는 로닌(浪人)이다. 로닌은 사무라이의 위계질서에 편입되어 정착하지 못한 사무라이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로닌은 소속된 조직이 없는 소속 외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바람처럼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무라이라고 하면 된다.


자토이치는 외관상 어떠한 조직에 소속되기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아주 현대적인 외관을 하고 있다. 머리는 노란 염색에 가깝고, 의복 또한 마찬가지이다. 머리모양과 의복만을 놓고 보면 자토이치는 21세기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자토이치의 외관은 격식을 파괴하고 있다.   


약간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자토이치를 만나 자토이치를 통해 대리 복수를 하는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하나같이 사회의 비주류들이다. 우선 가족을 죽인 살인자들을 복수하려는 남매는 부모를 잃고 정처 없이 살인자를 찾아 헤맨다. 그런데 그 남매에게는 자토이치 이상의 이질적인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내인 남동생이 여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전도된 현상은 어린 시절의 충격(어른에 의한 아동 동성애, 경제적인 궁핍을 모면하기 위한 동성매매)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것은 소수 동성애자들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할 수 있다. 가족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여장하고 춤을 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이해를 호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는 하층민이다. 집단화된 도적 패에게 언제나 폭력을 당하는 경제적, 계층적인 약자이다. 자토이치가 신세지고 있는 집의 여주인과 거리의 상인들이 그러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집단화된 도덕 패들에 의해 자릿세를 뜯기고 폭행을 당하면서 하루하루를 영위해 가는 존재들로 삶이 핍박하고 고달프다. 이들은 소수라는 측면보다는 약자라는 측면에 더 강조점이 두어져야 하지만 절대적인 빈곤층이란 의미에서 마이너리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칼을 쓰지 못한다는 면에서 자토이치와 다를 뿐 실제적으로 사회적인 이방인으로 도박과 술과 여자에 빠져 죽은 둥 사는 둥 살아가는 중독자들이다. 이들은 자의적으로 사회를 일탈한 존재로서 마이너리티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 등도 이러한 사회적인 약자(사회로부터 냉대를 받는다는 의미에서)로서 동일한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하지만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냉대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격리는 범죄자에 대한 동일한 인식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범죄자가 감옥에 격리되듯이 병원 따위에 수용이 되는 것이다.


넷째는, 셋째의 부류와 다소 동일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같은 부류로 분류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바로 미친자들이다. 미친자는 자의적이지도, 어떤 지향성(술, 마약, 여자)도 갖지 않는 존재라는 면에서 중독자들과는 다르다. 자토이치가 머물고 있는 집 주위를 함성을 지르며 도는 이웃집 아들이 바로 미친자이다. 영화 <자토이치>에서 왜 이 미친자가 등장할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만들어 낸 캐릭터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하층민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들의 존재는 웃음만을 자아내기에는 서글픈 존재가 아닐 수 없으며 운명적으로 사회적인 냉대와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슬픈 존재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약자와 대척점에 있는 존재가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이다. 이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를 현재적인 시간에서 그 대응 집단들을 살펴본다거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본다거나 도적이란 본질을 위장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알레고리로 자리잡는 것이다. 자토이치의 시대 상황이 과거이지만 해석은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영화는 언제나 현재에서 만들어지듯이 현재의 시점에서 하는 해석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대척적인 존재들(사회적인 약자 vs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 사이에 놓여있는 자가 자토이치라고 하면 어떨까? 이 자토이치가 도박을 즐기고, 여자를 즐기고, 관습을 무시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다면 자토이치는 마이너리티에 관용적인 자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 자신이 육체적으로 맹인인 약자라면 어떠한가? 판단은 영화를 보는 개인 각자의 몫이지만, 분명한 것은 자토이치의 몰골은 그 당시의 시점에서는 결코 보편적이거나 관용적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는 사실이다. 자토이치가 칼을 휘두른 것은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회적인 약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질성을 말살하려는 관습의 편견인지도 모른다. 분명 자토이치는 이질적인 것, 사회적인 역자들의 편에 서있다.


영화가 끝나면 사회적인 약자들집단화 된 도적 패거리가 함께 모여 춤판을 벌린다. 이 춤판은 두 가지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영화내내 자행되는 칼질에 대한 살풀이의 마당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더욱 중요한 것으로써 사회적인 약자들의 신명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염원이다.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어 불탄 집을 다시 세우는 그 축제의 한마당은 바로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인 것이다.(*)    

(2008.4.20.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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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3 21:23

[일본영화] 자토이치



                                         이미지 출처:http://kr.blog.yahoo.com/jesse




자토이치

-복수의 카타르시스


어느 곳이고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또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아주 큰 잘못이 아니라면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서로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러나 때로 그 관계가 크나 큰 상처를 만들어 관계된 상대자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처가 아물어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져 원한이 쌓여가기도 한다. 복수가 피할 수 없는 행위가 되고 만다. 법의 구속이 약하고 무력이 지배하는 계급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명예를 위해서든, 가족을 위해서든 복수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복수는 약한 자들에게는 참 어려운 결단이다. 오히려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약한자들의 증오는 대체로 체념이 되기가 싶다. 집단, 특히 사악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저항은 너무나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집단과 집단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원시부족사회, 고대 국가 들간의 정복과 약탈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나 징기스칸의 정복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약한자들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특히 여성, 노약자, 사회빈곤층 등의 약자들인 경우는 증오의 감정이 집단적인 힘으로 승화되지 않는 한 복수를 꿈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약자들이 집단화 되었기에  동학혁명이나, 스파르타쿠스의 난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경우라면, 복수는 동류나 강한자들에나 가능한 행위에 국한되고 만다. 


바로 여기에서 체념에 빠져버린 복수에 대한 무수한 상상들이 발동하게 된다. 정의로운 대리자가 나타나 주기를 바라고, 자신이 영웅이 되기를 상상한다. 억울하고 비통한 감정을 대리자를 통해 상상적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들은 약자들의 한으로 응어리져 수많은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복수의 모티브는 영화의 영원한 소재이다. 아니 주제이기도 하다.


다소 벗어나는 이야기이지만, 문학의 경우, 20세기 모더니즘이 추구했던 주인공의 전형은 소외되고 고독한 개인이었다. 그것은 작가들의 예민한 시선이 근대화의 이면에서 고통 받는 소외된 인간들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도시를 떠도는 부랑자나 걸인이기도 했고 무기력한 남편이기도 했다. 고뇌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이 바로 그러한 전형이었다. 그들은 복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무기력한 인간 군상들이었다. 집단화되지 않으면 무기력한 개인으로 남아있어야 할 뿐이었다. 우리의 경우 20세기의 수많은 집단적인 투쟁이나 혁명이 바로 이러한 경우를 설명한다. 참으로 극단적인 시대였다. 집단과 개인이란 아주 이질적인 관계로 존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개인은 아주 강해졌다. 개인과 집단이 극단적이고 이질적인 성격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가 모호할 정도로 상호작용이 쉬워진 것이다. 인터넷이란 막강한 매체 때문이었다. 최근에 등장한 블로그 또한 마찬가지이다. 권력의 형성이 개인들이 모인 인터넷에 의해 탄생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www.sung-ho.pe.kr/?p=17679



다소 벗어난 글의 흐름에서 다시 돌아와, 그렇다면 영화는 어떠한가. 개인적인 판단으로, 20세기의 고전적인 권선징악의 스토리는 21세기에도 여전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보편화 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개인의 비극과 파멸을 다룬 영화도 많기 때문이다. <시민 케인>, 심지어 <람보>도 그런 부류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영화가 두드러진다. 아마도 실존주의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사회를 반영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폭력과 살인이 난무한다. 이데올로기로 다소나마 제어되던 인간의 잔인한 본성이 출구를 찾았기 때문일까? <양들의 침묵><한니발>이 그렇다. 무슨, 무슨 살인사건이니, 사이코 영화, 새디즘이니, 메조히즘이니 하면서 폭력이 난무한다. 전쟁영화와는 그 폭력의 격이 다르다. 참 잔인하다.


한국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잔인한 폭력과 살인이 빠져버리면 성립하지 못하는 영화가 부지기수이다. 복수라는 용어는 무수하게 나타난다. <복수는 나의 것><올드보이>가 그렇다. 칸느 영화제에서 그렇게도 격찬한 <올드보이>의 폭력신은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복수는 나의 것>의 경우 영화가 복수의 대중화를 선언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엄연히 법이 존재하는 민주주의의 세상에서 개인적인 복수를 용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을 선명한 영상으로 목격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화는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것일까? 아니면 법을 조롱하는 것일까? 아마도 법이 존재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조차도 인간은 상상적인 복수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소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억울한 약자들을 위해 복수를 해주는 정의로운 개인, 정의의 대리자가 나타나 사악한 집단을 보기 좋게 쓸어버리는 것을 소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 특히 약자들의 본성 속에 내재해 있는 특성이 아닐까 하며, 영화는 이러한 약자들의 소원인 복수를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충족시켜준다. 이것은 문학적인 결말이나 여운과는 다소 다른 방향이다. 바로 이러한 방향이 현실에 대한 영화의 발 빠른 반응이며 대중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토이치는 바로 이 복수의 이야기이며 복수를 위한 대리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복수를 소원하는 자들은 대체로 약자들이다. 여자들이고, 무기력한 남편이고, 사회의 빈곤층이다. 그런데 약자들 중에 약자라고 할 수 있는 맹인 낭인, 자토이치가 정의의 대리자라는 것은 약자들의 복수의 소원을 가장 극화시킬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가장 약한 자가 가장 강한자로서 복수의 칼을 날려준다는 사실은 얼마나 통쾌한 쾌감,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주는가. 즉, 복수의 대리자가 장님이라는 사실, 그의 검도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운 신비에 가깝다는 데 복수의 대리 만족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복수는 자토이치의 것! 그는 우리보다 더 불운한 장님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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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3 19:50

인간, 그 슬픈 삐에로

 

인간, 그 슬픈 삐에로




찰리 체플린, 가장 삐에로 같은 외모로 가장 삐에로 같은 인간

히틀러, 삐에로 같은 외모로 가장 삐에로 같지 않은 인간

노틀담의 꼽추, 가장 삐에로 같지 않은 외모로 가장 삐에로 같은 인간


배용준, 가장 삐에로 같지 않은 외모로 가장 삐에로 같지 않은 인간

블로거, 가장 삐에로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인간

by 컴속의 나



                                         사진출처:컴속의 나


인간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지구의 공전 궤도가 조금만 삐거덕해도 공멸(共滅)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지구라는 둥근 공위에서 궤도의 줄을 타고 있는 슬픈 삐에로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삐에로 같은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인위적으로 지구의 공전을 줄타기에 비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상 인간은 삐에로와 같은 희․비극적 모습을 삶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삶 속에 죽음, 젊음 속에 늙음이 깃들어 있는 모순적인 사실, 삶의 조건인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여러 아이러니한 사실, 개인과 집단과의 끊임없는 삐걱거림, 현세와 내세에 대한 분열적인 고뇌, 전쟁과 평화, 사랑과 증오의 극단적인 감정의 변주, 풍요와 빈곤이라는 현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줄타기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줄타기는 너무나도 오래 지속되고 있어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다는 인식을 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나약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모습에 대해 언제나 겸손해야 균형과 조화를 유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리혀 오히려 위치를 망각하고 증오와 분노로 조화와 균형을 깨드리고 과신의 오만함에 빠져있다. 삐에로가 삐에로의 위치를 상실하고 전지전능한 초월자로 줄 아래를 향해 경멸적인 조소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자아를 상실한 가엾은 삐에로. 신이 되어 버린 삐에로. 신을 죽여버린 삐에로.


삐에로가 스스로 우주의 중심이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삐에로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가는 현실을 인간은 자랑스럽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곳곳에서 삐에로임을 주지시키는 경종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울려대기도 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 예술, 문화의 영역에서 마초적인 삐에로의 심성을 부드러운 여성적 삐에로의 심성으로 돌려놓으려는 노력을 피눈물 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길 La Strada>의 길 위의 그 슬픈 삐에로의 모습을 삶의 구석구석에서 상기해야 하는 것이다. 숭례문의 전소를 삐에로의 슬픈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삐에로가 삐에로의 처지를 애써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대견스러운 일이지만 삐에로의 매력은 사실 슬픔과 연민을 자아내는 그 애틋한 모습에 있다.



 아돌프 히틀러:스스로 신이 된 인간


그러나 인간들은 어렵게 줄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삐에로의 그 슬픔과 연민을 자아내는 표정과 몸짓 그리고 속마음 사이의 깊이 있는 역설을 잊고 있다. 서로의 비극을 헤아려주는 연민이나 동정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빠져 나와 이제는 그 마음속에 삐에로를 잊은 우주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엄과 허세가 들어차 있다.


니체는 삐에로를 너무 오만하게 만든 상징적인 인간은 아닐까?

찰리 채플린은 삐에로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 상징적인 인간은 아닐까?


인간이 비극적 존재이니 희극적 존재이니 하는 따위는 물론 인간 스스로의 주관적인 해석이겠지만 이 막막한 우주에서 그야말로 작디 작게 존재하는 지구라는 땅위에서 근원적인 고독을 되씹으며 버겁게 살아간다는 것이 그저 희극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더 크다. 그런데 작디 작은 존재이며 근원적으로 고독한 인간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잔인한지를 보라, 인간들이 숱하게 저질러온 전쟁들을 보라. 이 세계화의 시대, 이 실용주의의 시대에 아프리카 대륙의 구석에서 굶주림에 죽어 가는 아이들의 모습들을. 하찮은 인간들이 얼마나 다른 인간들을 멸시하고 하찮게 여겨왔는지를, 얼마나 비극에 비극을 더해 왔는지를. 삐에로의 위치를 망각한 인간들이 저지른 잔인한 행위들이다.


인간 스스로 삐에로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이 광활한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전쟁과 기아에서 그 숱한 비극을 싹트게 하고 무관심해 왔겠는가. 인간이 스스로 초인으로 행세하고 스스로를 구원하는 메시아로 자처하곤 했고 종교의 힘을 빌려 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의 고독과 비극성 때문이다. 줄 타는 슬픈 삐에로의 모습처럼 말이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면서 동시에 신에게 용서를 구하며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성을 외친다는 것, 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인간의 부끄러움인가? 


인간의 본질적이고 실존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 벌거벗은 삐에로의 모습을 보고 싶다. 오만하고 과시적인 삶의 방식을 초월해 있는 진정 삐에로, 그 슬픈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싶다. 이 광활한 우주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만이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초라함을 깨닫을 수 있기에 기댈 수 있는 곳은 오직 인간들 스스로라는 분명한 사실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 줄을 타고 있는 그 슬픈 삐에로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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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7 15:53

[일본영화] 무사의 체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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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의 체통(2)


일본이 진정으로 무사의 체통을 찾는 길은 군국주의에 대한 참회라고 강조한 글을 썼다. 이것은 영화외적인 상황을 영화 해석의 수단으로 이용한 경우이다. 그러나 영화를 지나간 과거의 틀로만 해석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니 바람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우리처럼 사무라이에 대한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나라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화 자체를 통해 일차적으로 영화를 해석할 것이다. 그러다 해석의 방법을 다양화해가다보면 일본의 군국주의와 대면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영화외적인 상황을 영화 해석의 근거로 삼든, 영화 자체를 해석의 근거로 삼든 보는 이의 다양한 시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영화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혼돈에서 질서가 생겼듯이 한 편의 영화도 수많은 해석에 의해 의미들이 생산되는 것이다. 해석에 의해 의미가 명료해 질수도 있고 더욱 불명료해 질 수도 있다. 전문가들의 이론에 기반을 둔 난해하고 현학적인 영화 해석이 후자의 경우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다양한 여러 해석들, 심지어 난해하고 현학적인 해석조차 하나의 텍스트로 귀를 기울이는 개방된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어느 민족이고 타민족에게 너그럽지 않다는 것은 역사의 수많은 전쟁들과 분쟁들이 증명해 준다. 심지어 민족 간에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다. 인간은 왜 같은 동족에게 칼을 들이대고 총부리를 겨냥하는가? 이 질문은 인류가 풀어야할 영원한 과제가 아닐까 한다.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도 결국은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정착한 것이다. 같은 동족에게 피를 요구하는 문화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가 오랜 전통이 된 것은 그 시대적인 상황을 배우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사무라이를 있게 한 시대적인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기에는 지식이 너무 짧다. 따라서 영화에 나타난 사무라이와 사무라이의 생활, 그리고 일반적인 일본 문화에 대한 몇 가지 인상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하나의 문화로 사무라이 문화를 이해하게 될 때 <무사의 체통>은 좋은 자료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 동시에 일본 문화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우선 <무사의 체통>을 통해 사무라이의 생활이 대단히 절제 있고 금욕적임을 알 수 있다. 미무라가 먹는 음식이나 입는 옷, 행동과 말씨를 통해 사무라이의 생활이 금욕적임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미무라의 식사가 스님의 탁발을 연상시킬 정도다. 이러한 사무라이의 금욕주의는 가마쿠라 시대(1192~1333)의 금욕적인 군사규율과 무로마치(1336~1573) 시대에 불교의 영향을 받아 사무라이 문화로써 무사도의 경지로 정착되는데 <무사의 체통>은 그러한 사무라이의 무사도(武士道)를 잔잔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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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http://www.news365.com.cn/wxzt

대개의 사무라이 영화가 그렇지만 사무라이의 위계질서와 규율은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다. <바람의 검>에서 사무라이의 그러한 엄격한 규율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사무라이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서의 작은 실수도 할복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만회한다. 주군의 식재료로 싱싱하지 못한 붉은 골뱅이를  선택한 식재료 담당자가 할복하는 것이 그렇다. 결과적으로 붉은 골뱅이를 먹은 독미역사인 미무라 신노조가 맹인이 되고 사무라이로서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러한 실의는 전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데서 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마다에게 복수를 불태우면서 비로소 사무라이로서 살아나는 듯하다. 맹인이지만 무사의 체통을 회복하려는 미무라의 모습에서 무사도를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맹인 무사의 주제는 <자토이치>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또한 검도 도장에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부탁하면서 스승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리고 미무라가 되풀이 하는 과거 스승으로부터 들었던 말에서 무사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알겠냐. 미무라. 목숨을 주고받는 진검승부는 도장에서의 검술과는 다르다. 상대는 무엇을 할지 몰라. 칼끝을 피하지 마라. …… 너는 죽을 각오가 되었고 상대는 사는 것에 집착하고 있어. 그것 밖에 없다. 네게 기예를 전수할 때 전해줬던 말이 있었다. 기억하느냐?”

“같이 죽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라. 승리는 그 가운데 있으니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산다.” 


그리고 시마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독미역사의 권태로움에서 깨어난 무사도의 외침이며 무사의 체통과 명예를 지키려는 사무라이의 전의인 것이다.


미무라에게는 토쿠헤(사사노 타카시)이라는 몸종이 있다. 토쿠헤이(천민)의 존재는 사무라이의 신분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초부터 사무라이는 지방귀족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농부, 장인, 상인들을 지배하는 계급으로 급부상한다. 실제로 부유한 상인이나 장인들이 사무라이와 혈연으로 맺어져 권력적인 기반을 닦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무라이 계급도 일반사병과 가신(家臣), 제후(諸侯)그리고 쇼군(將軍)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으로 분화되어 있긴 하나, 아무튼 사무라이가 존경의 대상이 된 것은 분명하다. <바람의 검>에서 몰락해가는 사무라이를 보게 되는데 사무라이의 몰락은 18세기 메이지유신으로 근대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 이르러서이다.


미무라는 주군으로부터 봉록을 받는 무사로 주군의 식사에 든 독을 감별하는 독미역사이다. 그런 하위 사무라이가 몸종을 이끌고 있는 것은 사무라이의 계급적인 위치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무사의 체통>에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절대적인 복종이 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는 분명하다. 아내 카요(단 레이)는 미무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이 보일 정도이다. 위계질서하의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카요의 바짝 엎드린 인사법을 통해 볼 수 있는 복종적인 여자의 이미지를 현대 일본 여성의 이미지와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사마다가 아내 카요를 성적으로 농락한 것은 맹인이 된 자신을 농락한 것과 같은 차원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자의 부정이 남편의 체통과 명예와도 관련이 되어 칼로 체통을 회복하는 것이 사무라이의 보편적인 방법인 것에도 무사도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또 하나의 것은 신사에서 발견한 스님의 존재이다. 카요가 남편의 건강을 위해 신사에서 기도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스님이다. 신사와 절이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지 아니면 신사와 절이 공존하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지만 토속적인 일본의 신앙과 외래 종교 불교가 만나 어떠한 형태의 종교를 만들어 내는지 호기심을 자아낸다.


지나쳐 버린 것들이 더 많을 것이다. 또한 이면의 의미를 통찰하기보다 표면의 인상만을 읽은 것이 안타깝고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이러한 호기심을 가지고 일본인과 일본 문화를 차근차근 알아보는 과정이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일본 영화를 보는 감동과 함께 재미중에 하나가 아닐까 한다. (*)


(2008.2.27.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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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7 00:10

[일본영화] 무사의 체통



 

무사의 체통

-일본이 진정으로 무사의 체통을 찾는 길


사용자 삽입 이미지http://kr.blog.yahoo.com/iamjina2000/

인간에게는 자신의 성격을 규정하는 명칭이 주어진다. 출생에서부터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성별(여자, 남자)과 가문․신분(양반, 평민, 천민 등)에서부터 다소 변화와 상승이 가능한 학벌(명문대 여부)과 경제력․직업(부자, 빈자, 과장, 사장 등)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고정된 사회 계급(계층)이 사라졌다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차별적인 관습이 여전히 개인의 삶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적인 계급(계층)이 당연시되던 시대에는 그 엄격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계급(계층)에 따라 사회적인 역할이 규정되어 있어 그 계급(계층)적인 틀을 깨기라도 하면 사회 질서의 파괴로 간주되었다. 계급(계층)이 사회의 질서고 사회적인 질서가 곧 계급(계층)이기 때문이었다. 서자인 길동이 적자가 될 수는 없었고 천민이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도 가문의 의지를 거스른 결과였다.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과 함께 생매장 당하기도 한다.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잔존한다. 심지어 원시 사회에서도 제사장, 추장, 남자, 여자, 아이에 따라 사냥물의 부위가 다르게 지급되었다. 이러한 계급(계층) 사회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개인의 삶을 규정하고 의식을 지배했다. 따라서 계급(계층) 사회는 차이를 무시하는 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차이에 따라 차별하는 비인간적인 계급 사회를 벗어나 개인이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무라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무사의 체통> 또한 그 내용을 떠나서 일본 사회의 전통적인 계급(계층)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일본의 사회의 계급(계층)에서 사무라이가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임진왜란과 일제 시대로, 세계사적으로는 태평양 전쟁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그 성격이 얼마나 호전적인가는 사무라이를 반영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전쟁 범죄를 통해 이미 주지하고 있는 바이다. 사무라이 영화를 보면서 그 잔인한 무력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당사국으로서 일본의 사무라이에 대한 특성이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우선, 대개의 사무라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무라이는 정의롭다. 정의가 언제나 승리한다. 그러한 정의가 일본을 벗어나서는 왜 잔인한 악의로 돌변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크게 두 가지 이유일 텐데, 하나는 영화가 실제의 사무라이의 성격을 왜곡하고 미화했거나, 다른 하나는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이다.


첫째로, 만약 일본이 사무라이 영화를 통해 사무라이의 성격을 왜곡하고 나아가 미화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 군국주의의 과오에 대한 정당성과의 관계를 충분히 의심해 보아야 한다. 사무라이 영화의 폭력성은 결코 군국주의의 폭력성과 혼돈되거나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은 존재할 수 있을까? 사무라이 영화에서는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복수)이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서부영화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은 인간성을 좀 먹는 잘못 된 생산물(가치)이다. 영화 속의 허구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고작 정당방위 정도일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공습은 정당방위조차도 아니었다.

  

둘째로, 일본의 경우 타 민족에 대한 배타성은 심각한 수준이다. 아마도 군국주의화된 사무라이의 가치보다도 어쩌면 타민족, 특히 한국인과 중국인에 대한 배타성이 일본 민족의 특이성을 잉태했는지도 모른다. 일본 근대화 시절의 탈아입구의 가치나 아시아 민족에 대한 야만적인 인식이 바로 그렇다. 아무리 민족주의라는 인류 보편적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군국주의의 유래 없는 잔인성이 인류 보편적인 특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만주에서 731부대의 생체실험이나 카미카제 특공대 그리고 북경 대학살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인성은 인류의 특이성이지 보편성으로 옹호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이러한 잔인성에서는 일본 민족만의 특이성이 존재하며 사무라이의 폭력성과도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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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kochinews.co.jp/cinema/06cinema35.htm

 


따라서 사무라이에 대해 일도양단이나 쾌도난마식의 명쾌하고 정의로운 측면만으로 무협의 재미와 복수와 정의의 감동만을 찾는다면 사무라이에 대한 미화에 전적으로 빠져드는 위험이 있다.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은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을 비롯해 재일 한민족에 대한 차별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일본은 독일을 배워야 한다.


무사의 체통은 일본적인 인식이다. 무사뿐만이 아니라  일본인은 체통이나 명예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사무라이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할복은 체통이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극단적인 표현이다. 물론 체통이나 명예라는 가치는 모든 인간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이다. 할복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체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에게는 더욱 숭고한 가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무사로서의 체통, 아니 일본인으로서의 체통은 사실상 군국주의와 태평양전쟁으로 수치스럽게 상실했다. 체통뿐만이 아니라 인간성마저 상실해 버렸다. 아주 불의하고 잔인한 전쟁을 일으키고 인류에게 해악을 끼쳤다. 이제 일본인이 인류에게 체통을 지키는 것은 일본 민족에 한정된 배타적인 체통이 아니라 전 인류로 향하는 개방된 체통이다. 아직도 일본인의 체통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무사의 체통> 운운하는 영화를 버젓이 만든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슬픈 현실이랄 수도 있다. 일본은 역사적인 과오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고 참회하면서 잃어버린 무사의 체통을 회복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해야 한다. 


무사의 체통을 지키려는 미무라 신조(기무라 타쿠야)는 사실상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의 심정을 반영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즉 사실상 강간당한 아내로 인한 무사의 체통을 지키려는 미무라의 의지는 36년 동안 침탈당한 한국인의 의지와 동일하다면 동일할 수 있다.  


“시마다는 카요를 가로에게 조언해 준다고 거짓말 하고 불쌍하게도…… 카요에게 강간이나 다름없는 일을 당하게 했다. 내 속은 아직도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다.”


만약 야마도 요지 감독이 수치스럽게도 무사의 체통을 잃어버린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이 영화 <무사의 체통>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8.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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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3 18:25

[일본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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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3)

―마츠코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편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스런 내 딸, 마츠코!

마츠코, 세상의 어느 아비도 자식의 불행을 바라지 않는단다. 행복하기만을 바란단다. 세상 모든 부모의 심정이 그렇다. 자식의 불행을 지켜보아야 하는 그 사실 만큼 가슴 아프고 고통스런 일이 어디 또 있겠니.


그런데 마츠코, 난 널 지켜주지 못했구나. 불행하게 만들고 말았구나. 이 못난 아비로 인해 네가 불행해 지고 말았다니 나 자신이 용서되지가 않는구나. 이 아비의 부덕한 탓이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고통스런 일이다. 아비의 굳어버린 입장에서 새싹 같은 마츠코 너의 가슴에 피멍 맺히게 하고 말았구나. 그러나 믿어주렴. 처음부터 네 불행을 바란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이 아비의 가슴 깊숙이에 마츠코 너에 대한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네 동생은 병든 아이였다. 사랑과 관심이 특별히 필요한 아이였단다. 그러나 이 아비가 네 동생에게 보여준 사랑은 네게서 빼앗은 것은 결코 아니란다. 마츠코, 네 동생이 더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불쌍하고 가여웠기 때문이란다. 그 당시에 마츠코 네가 그렇게 생각했듯이, 결코 네 동생에 대한 편애는 아니었단다. 그러나 어린 네 마음에는 아비의 사랑이 그리웠고 외로움이 참기 어려웠겠지. 이 애비가 네 아픈 동생만 편애 한다는 오해는 어린 마츠코 너의 마음엔 지울 수 없는 상처였겠지. 이 애비가 네게 조금만이라도 더 따스하게 대했더라면 네 삶이 그토록 힘들게 되지는 않았겠지. 마츠코 네가 이 애비의 웃음을 얼마나 필요로 했는가를 진심으로 알았더라면 비극적인 오해는 생기지 않았겠지. 이 애비는 너의 그 깊은 슬픔을 안단다. 이 애비가 아픈 네 동생만큼이나 마츠코 너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졌다면 너의 삶은 얼마나 순탄했을까, 하고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온단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별 대수롭지도 않는 일들이 당시에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란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이 아비도 어린 날의 삶의 과정을 거쳐 왔으면서도 미처 네게만은 이해의 따스한 손길을 내보이지 못했으니 인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어버리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구나. 어린 내게는 아비의 무관심이 절대적인 고통이란 걸 미처 깨닫지 조차 못했다. 이 아비가 살아 온 방식으로 마츠코 너의 삶을 속박하려 했구나. 나에게는 살아온 시간이 더 많았고 너에겐 살아 갈 시간이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지나간 과거의 방식으로 너에게 부단하게 영향을 끼치려고 했구나. 결국 아비의 굳어버린 머리 탓이었단다. 용서해 주렴 마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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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직에서 해고된 것이 이 아비의 무관심과 관련이 되어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단다. 이 아비의 웃음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이 아비를 웃기기 위해 익살스런 표정이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을까. 결국 그것은 이 아비의 굳어진 표정이 초래한 희극적인 동시에 비극적인 습관이라고 생각하니 아비의 무관심이 뼈에 사무치는 구나. 그 굳어진 익살스러운 표정이 네 학교에서의 사건을 더욱 악화시키고 마침내는 사표로 이어지는 불행과 그 이후의 비극을 초래하는 단초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쉬움이 있다면, 마츠코야, 병들어 누워 있는 네 동생에 대해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마츠코, 네가 학교에 사표를 내고 동생을 저주하면서 목을 조르고 가출하는 행동도 충분히 이해를 한단다. 그러나 마츠코, 어린 시절의 너와는 달리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교사였던 너의 행동에 조금은 지나친 데가 있었다.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에 전적으로 지배받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너는 성인이 아니었니. 그런데 여전히 동생을 원망하며 동생의 목을 조르고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마츠코야, 네 삶이 너무 가엾고 가슴이 아파 이 아비가 뒤늦게 하는 넋두리라고 생각해라. 너를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인데 지나쳐 온 시간들을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마츠코, 이 세상 어느 누구가 너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해도 넌 내 자식이다. 마츠코, 네가 이 아비를 탓해도 언제까지나 넌 내 자식이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어린 자식일 뿐이다. 마츠코, 너에 대한 이 아비의 사랑이 너무 가슴 깊숙이에 있어 서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어쩌면 아주 사소한 오해였던 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감정을 쉬 내보이지 않으려는 이 아비와 너무 깊어 보이지 않던 이 아비의 사랑을 갈구하던 어린 마츠코 네가 서로 빗어놓은 어처구니없는 오해 말이다. 너무나도 긴 시간 후에 서로의 진실이 해후한다는 그 사실과, 그 오해와 해후 사이에 마츠코 네 비극적인 삶이 놓여 버렸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가슴을 찢는 고통으로 다가오는 구나. 늦었지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네가 이제는 이 아비의 사랑을 이해하듯이 이 아비 또한 네 진실을 알고 있단다. 이 아비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이 세상에 보여주려 했던 네 진실을 말이다.


마츠코, 이 세상엔 별 만큼이나 많은 오해들이 존재한단다. 그러나 이 애비와 너의 오해만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오해들은 다 사라졌으면 좋겠구나. 마츠코 너로 인해 이 세상에 그런 오해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그런 작은 오해로 큰 불행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기 때문이란다.  아주 작은 오해 하나가 마츠코 너의 삶을 휘감는 큰 불행과 비극을 낳았다는 데 이 애비는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괴롭단다. 이제 긴 시간을 우회해서 우리의 오해도 풀렸지만 아직도 마츠코 네가 혐오스러운 존재라고 오해하고 그렇게 부르는 인간이 여전히 많은 듯하다. 작은 오해로 비롯된 네 삶을 빗대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혐오스러운 마츠코라 불러도, 이제 더 이상 넌 결코 혐오스러운 마츠코가 아니란다. 이 아비에게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내 자식이란다.


마츠코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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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0 14:32

[일본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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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

영화가 끝날 무렵 조카인 쇼는 마츠코를 신이라 부른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종교적일 정도로 희생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성스러운’ 마츠코가 아니라 ‘혐오스런’ 마츠코이다.

그녀가 혐오스럽다는 단서는 강가의 낡은 아파트에서 한 마리 더러운 벌레처럼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곳에서 마츠코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먹고 마시고” 하면서 “화장도 치장하는 것도 청소도 하지 않고 숨 쉬는 것도 귀찮아져 이대로 죽는구나” 할 정도로 삶을 포기한 상태이다. 마츠코는 그녀의 인생 속으로 더 이상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다.

마츠코에 대한 혐오의 시선은 마츠코의 방 옆에 살고 있는 전위적인 메탈 밴드의 멤버인 듯한 오쿠라 슈지의 것이 대표적이다. 오쿠라 슈지는 마츠코에 대해 “사회의 법칙도 이웃에 대한 예의도 다 무시했지.” 라고 말하면서 그녀에게 혐오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 혐오라는 단어, 즉 오쿠라 슈지의 시선이 현재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시선은 기성 질서의 가치관이 그것이다. 여기서 잠깐 언급하자면 이러한 기성 가치관을 대표하는 존재가 항상 흑백사진처럼 존재하는 마츠코의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마츠코의 동화적인 세계와 접촉하는 유일한 방식은 고작 미소를 띠는 정도에 불과하다. 마츠코의 남동생, 즉 쇼의 아버지 또한 아버지의 흑백사진 속에 머무는 존재이다. 마츠코의 남동생은 마츠코의 유골함을 들고 2년 만에 쇼와 재회한 날 무덤덤하게 마츠코에 대해 이야기 한다. “어떻게 봐도 시시한 인생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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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코를 보는 이러한 두 시선은 동일하다. 방향은 다르지만 오쿠라 슈지나 마츠코의 남동생은 마츠코의 인생에 찍힌 혐오스런 타인들의 지문을 읽지 못하는 피상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마츠코의 일생에 담겨진 ‘혐오’ 의 정체를 마츠코에게만 조준해 버린 것이다. 마츠코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왜 고통스럽게 살아왔는가? 하는 이해는 전무한 것이다. 


“사회의 법칙도 이웃에 대한 예의도 다 무시했지.” 이 오쿠라 슈지의 말은 오히려 ‘사회의 법칙조차 이해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예의를 상실한 무지한 표현’ 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오쿠라 슈지가 보는 마츠코의 ‘현재’ 의 모습은 ‘혐오스럽겠지만’ 쇼처럼 마츠코의 일생에 대해 진지한 의문이나 물음 같은 것을 던지지는 않은 것이다. 만약 오쿠라 슈지가 예술(음악)을 한다면 그가 음악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지 의심스러워 지는 것이다. 단지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는 야메카와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마츠코를 ‘혐오’의 낙인을 찍은 오쿠라 슈지는 타인의 전생애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인간으로 낙인찍혀 마땅한 것이다.

글의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지만, 오쿠라 슈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색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오쿠라 슈지의 외모와 행동은 참 재미있고 웃음도 자아내고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오쿠라 슈지가 말한 ‘혐오’ 라는 단어가 마츠코를 수식하는 단어가 된다는 것은 현대의 대중문화의 속성을 말해준다고 하면 과장일까? 그 자신 혐오스런 몰골을 하고 있으면서 사회의 법칙이나 예의라는 말을 언급하며 마츠코가 혐오스럽다고 하는 태도는 대중문화의 건전성에 대한 긍정적인 변호로 읽혀짐과 동시에 대중문화의 깊이 없는 피상적인 모습으로도 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봐도 시시한 인생이었어.” 마츠코의 동생, 즉 쇼의 아버지는 가출한 마츠코와 간간히 접촉하면서도 마츠코의 일생을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시시한 인생” 이라고 못 박아 버린다. 이렇게 죽은 후에도 마츠코는 이해받지 못하고 남동생에게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처형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남동생의 오해는 현재의 마츠코의 모습만을 피상적으로 본 오쿠라 슈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세계와 가치관(기성의 가치관)으로만 마츠코를 본 결과이긴 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본 결과라는 면에서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의 삶이 마츠코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는 사실이다. 동화와는 거리가 먼 가부장적 남성의 질서에서 마츠코를 보았을 때 마츠코의 일생은 시시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남동생의 시선 또한 진지하기는 하나 전통과 기성의 가치관에 집착하는 불완전한 시선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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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다소 감상적이긴 하지만 쇼의 시선이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선으로 등장한다. 쇼는 마츠코 고모의 일생을 결코 혐오스럽다거나 시시한 일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신과 같은 존재’ 로 보는 것이다. 혐오와 시시함으로 못 박힌 고모 마츠코의 일생에서 그 오해의 못들을 빼버리는 것이다. 마츠코의 일생에서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오쿠라 슈지와 아버지의 시선은 쇼의 진지하고 성찰하는 시선으로 대체된다. 쇼는 ‘혐오스러움’ 의 이면을 관찰하고 그곳에서 마츠코의 신성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한 때  삶의 공허함에 빠져 음악, 술, 섹스로, 마침내는 자살로 현실을 탈출하고자한 쇼가 마츠코의 일생을 통해 인간과 대중문화(음악, 술, 섹스)의 공허한 속성을 성찰하고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추락하던 젊음의 자기 비상을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또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전통과 기성의 가치(속마음은 표현하지 않았지만 속 깊은 사랑)를 통해, 이러한 자기 비상이 현실을 저버린 이상만으로는 성취 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도 이해하게 된다. 쇼의 갑작스런 진지함과 성숙함은 바로 이러한 생각의 균형에서 싹튼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약간이나마 억지스럽게 <마츠코의 혐오스런 일생>에 대한 오해를 푼 듯하다. 어쩌면 죄책감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혐오스러운 세상을 위해 혐오스러움을 뒤집어쓴 한 여자의 일생을 위해서……(*)    

이미지 출처:http://www.koreafilm.co.kr/movie/today_movi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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