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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14:10

백댄서즈(バックダンサ-ズ, 2006)




이미지 출처는 여기입니다.



백댄서즈(バックダンサ-ズ, 2006)


젊음은 방황의 시기다. 수긍할 수 없는 기성세대에 대한 실망이나 분노에서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지만 조여 오는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사회의 구속에 반항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질풍노도의 시기이고, 주변인의 시기이며, 이유없는 반항기라 낙인 아닌 낙인이 찍히는 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백지에 가까운 시기이기도 하며 순수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상에 목말라하며 현실의 속됨에 야유를 보낸다. 아무리 불완전하고 비현실적이며 하찮은 사색의 결과에서 싹텄다고 하더라도 이상이야 말로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이러한 현실과 기성세대, 다른 무엇들에 대한 분노와 실망이 배출구 없는 막막함으로 다가올 때 그 막막함은 폭력이나 환각이나 환상, 그리고 예술이 되곤 한다. 마약이나 섹스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수단이 되고, 혁명안 파괴가 분노를 잠재우는 도구가 된다. 또한 예술을 통해 기성의 가치관에서 이탈하려는 노력을 한다. 예술은 환각과 결합하는 경우가 흔하다.


백댄서즈는 바로 이런 젊음이들의 영화이다(사실은 이런 젊음을 가장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상업주의의 스타 탄생의 경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대한 상업주의와 자본주의에 비록 달걀을 던지는 격이지만 그런대로 의미있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상업주의라는 바위가 워낙 견고하다 보니 이 정도도 가상하지 않을까?). 이런 젊음만이 아니다. 또한 나이를 초월해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늙은 젊은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느 사회에서나 기성세대의 대오에서 낙오한 늙은 젊은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젊은 백댄서들에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미지 출처는 여기입니다.



이 애 젊은이들과 늙은 젊은이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영화의 제목이 <백댄서즈(Backdancers)>이므로 이 영화는 백댄서들을 구성하는 젊은 멤버들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록밴드를 구성하는 늙은 멤버들 또한 한물 간(?) 밴드라는 의미에서 영화의 제목과 상응할 수 있다고 보여 진다. 그들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교류하고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고 서로 이해하는 것은 바로 예술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더 나아가 백(back) 이라는 ‘중심에서 벗어나거나’ ‘한물 간’ 존재라는 사실이다. 누구로부터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특히 백대서들의 멤버들이 춤이라는 예술을 선택한 것은 자유로움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의지에 의한 삶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따라서 이런저런 이유로 백댄서인 자신들의 존재 가치가 위축되고 상실되는 것은 그들의 자유로운 삶과도 밀접하게 관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들의 자유라는 것이 도덕이나 선, 악 등의 사회 관습적인 가치판단에서 볼 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라 할 수 있을 지라도 그것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한 개인이 자유롭고 싶다는 그 사실 자체는 개인이 처한 상황의 맥락이 좀 더 더해진다면 그 자유의 추구가 더욱 구체화 될 것이다. 그들이 가출을 하면서, 호스티스 생활을 청산하면서, 사회로부터 받는 개인적인 수치심에서 모델을 그만두면서 선택한 춤을 더 이상 추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의 선택과는 관계없는 부자유한 삶을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현실적으로 판단해 볼 때, 그들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기를 누리고, 지명도가 높아지면서 그들의 사적인 자유에도 제약이 올 것은 분명하니까 말이다. 이것은 늙은 젊은이들이 젊은 시절 인기의 절정에서 음악을 그만 둔 사연을 추측해 볼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자유로서의 예술(춤)이 너무 상업주의와 결합되는 것도 자유의 성격을 회의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좋아서, 바래서 하는 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감동이나 의미의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이 영화의 인상을 두루뭉술하게 적어 보았다. 이 글이 너무 자의적인 생각에 근거해 적었다거나 찬사 일변도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이 영화를 단순한 오락이나 상업주의 영화라고 해도 맞는 말이다. 또한 작품성 자체에도 야박한 점수를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의 변두리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살아가야하는 삶보다, 비록 백댄서이기는 하나 자신이 선택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적어도 이 영화가 우리의 일상과 우리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미덕 정도는 있지 않을까? 특히 우리의 교육과 우리의 부모들에게도 의미있는 교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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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9 00:35

생일 선물(Birthday Present)



사진출처:http://www.maxmovie.com/



생일선물(Birthday Present)



인간은 관계와 더불어 살아간다. 그래서 사회적인 동물이란 말도 있다. 관계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관계의 대상보다 우위적인 위치를 점하고자 한다. 인간은 그 관계 속에서 보다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바로 그것이 사회적인 신분이랄 수 있다. 그러한 노력에 더해 현실적으로 도달하고 획득한 사회적인 신분을 넘어 과시나 과장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이미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인 신분에 더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또 상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모습으로 과시하고 과장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이성과의 사랑이라는 다소 동물의 본능에 가까운 관계에 처하는 경우 이러한 과시나 과장은 더욱 강해진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액세서리를 하는 등 보다 화려한 치장에서부터 직업등을 과시하고자 한다. 더해 사회적 신분이나 자신의 생물적인 조건을 과장하기까지 한다. 이런 과시와 과장이 이성간의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선사시대 남녀들의 문신이나 장식도 과시와 과장에 속할 것이다. 현실은 인간과 인간의 꾸밈없는 관계가 아니라 과시와 과장이 게재된 불필요한 요소들로 거품이 이는 곳인지도 모른다.

인간을 판단하고 관계를 맺을 때 인간 그 자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아니 판단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아주 비중있는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대신 직업과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인간 그 자체를 판단하는 것이 관습처럼 일반화되어있다. 이것은 순환적인 상승을 일으키면서 사회를 경쟁의 관계로 몰아넣고 있다. 보다 나은 신분을 위해, 직업을 위해 남들보다 앞서고 우위에 서야 하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사진출처:http://www.maxmovie.com/



<생일선물(Birthday Present)>은 이러한 과시와 과장의 경쟁적인 사회 속에서의 관계(특히 이성간의 관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있게 본 영화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전도연을 닮은 영배우가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경해 마지않는 파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도 그렇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바로 이성간의 관계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 보다 크지는 않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 마사요시(키시타니 고로)나 아키코(와쿠이 에미) 모두 관계에 대해 인간 그 자체보다는 현실에서 이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인 신분과 직업이 만들어 내는 과시와 과장된 모습에 익숙해져 있다. 그들이 속물적인 것이 아니라 속물적인 현실에서 지속적으로 강요되고 쇠뇌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곡에서 예외적일 수 있는 인간이 우리중에서 과연 몇이나 될까?

마사요시는 여행사의 관광안내원으로 영화내내 자신이 관관관안내원이란 사실을 숨긴다. 우연히 화가로 자처하게 되었지만 의도적으로 화가라고 신분을 속인다. 이것은 화가로서의 사회적인 지위가 관광안내원보다 낮았다면 계속해서 화가라고 속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솔직하게 들러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신분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 우연히 식당에서 아키코의 약혼자였던 변호사와 조우하게 되고 아키코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은 변호사를 향해 주먹을 날리긴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혼이 나는 것은 변호사라는 신분이 호락호락하지 않는 직업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키코에게 사랑의 상처를 심어준 것이나 아키코가 그렇게 당한 것은 알고 보면 변호사라는 신분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아키코는 어떤가? 아키코는 비행기 여승무원이다. 그녀의 신분은 그다지 낮은 것이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비행기 여승무원에 대한 인식이 낮지 않은 것을 보면 일본 또한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본다. 또한 관관안내원인 마사요시가 다소 부담을 느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사요시와는 달리 아키코는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거나 고과장하기 보다는 상대의 신분을 너무 높이 잡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물질적인 보상을 위한 설득력 있는 이유가 존재하지만, 결국 인간을 그 자체로 보는 관점과는 먼 인간에 대한 판단이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차라리 사랑과 물질을 동시에 추구한다면 더 나을 것이다. 사랑은 온데, 간데없고 물질적인 보상만을 바란다는 것에서 아키코도 속물적인 관습에 익숙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성간의 사랑이라는 좁은 영역에서가 아니라 인간 일반의 관계로 넓혀서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 영화의 갈등은 과시와 과장에 가려진 관계에 의해 일어난다. 또 이러한 과시와 과장을 벗어버리고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고, 그 진실을 바라보는 가운데 갈등은 해소된다. 그러나 영화속의 이러한 갈등의 해소가 우리의 마음속에 동요를 일으키기에는 다소 부족한 것 같다. 한 순간의 감동이나 위로를 제공하고 그칠 것 만 같다. 왜 그런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쩐지 현실의 높은 벽과 싸우기에는 이 영화가 다소 무기력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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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5 13:30

일본 여자 영화배우들은 왜 생머리를 고집할까?

일반화 시키기는 어렵지만, 일본여자 영화배우들은 생머리를 고집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생머리를 한 여자 영화배우들만 보았기 때문이다. 거의 예외가 없었던 것 같다.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면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달린다>에서 우에노 주리의 파머 머리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도 영화 속에서의 경우이며 실제로 우에노 주리가 파머를 한 모습을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우선 일본 여자 영화배우들의 사진을 통해 이러한 모습을 확인해 보기로 하자.




슬라이더 순서대로
나카야마 미호,  미야자키 아오이,  사와지리 에리카,  스즈키 쿄카, 
시바사키 코우,  아오이 유우,  우에노 주리, 유민,  카시이 유우,  타케우치 유코,  히로스에 료코



한국의 여배우들
 
 


한국의 여자배우들과 비교를 해보면 별 차이가 나지 않는 듯 하지만, 그러나 한국 여배우들이 일본여배우들에 비해 퍼머 머리가 더 많다는 사실은 직접 확인해 볼 수가 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개인적인 가치관의 문제일까? 사회적인 집단 의식의 결과인가? 아니면 종교적인 차원의 무엇일까? 이 질문 자체가 좀 생뚱맛아 더 진척시키기가 어렵고 개인적인 호기심을 일반화하는 것 같아 미안한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여우들, 아니 사실은 대개의 일본 여성들의 생머리가 일본을 이해하는 어떤 단서가 되지는 않는지 생각해 해볼 법도 같아 이렇게 올려 본다. 그 이유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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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7 13:16

일본영화 음악 3곡(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좋아해)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은 개인적으로 아주 감동적으로 본 영화입니다. 영화 리뷰는 잘 쓰지 않는 편인데도, 3번에 걸쳐 영화 리뷰를 쓰게 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있다면 보시기를 권합니다.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좋아해> 는 너무  순수해서 서툰 사랑이지만 다시 돌아가게 하는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자 이제, 영화음악과 함께 영화 속으로 푹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비디오 클립을 3~4개씩 넣으니 화면이 부숴지는데 저만 그런건지 아니면 이웃님들도 그런 건지 궁금합니다. 댓글로 좀 알려주시구요, 실제 그렇다면 비디오 클립을 1~2개로 줄여야 겠습니다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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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5 22:45

마츠코에게 보내는 편지(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마츠코에게 보내는 편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스런 내 딸, 마츠코!

마츠코, 세상의 어느 아비도 자식의 불행을 바라지 않는단다. 행복하기만을 바란단다. 세상 모든 부모의 심정이 그렇다. 자식의 불행을 지켜보아야 하는 그 사실 만큼 가슴 아프고 고통스런 일이 어디 또 있겠니.


그런데 마츠코, 난 널 지켜주지 못했구나. 불행하게 만들고 말았구나. 이 못난 아비로 인해 네가 불행해 지고 말았다니, 나 자신이 용서되지가 않는구나. 이 아비의 부덕한 탓이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고통스런 일이다. 아비의 굳어버린 입장에서 새싹 같은 마츠코 너의 가슴에 피멍 맺히게 하고 말았구나. 그러나 믿어주렴. 처음부터 네 불행을 바란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이 아비의 가슴 깊숙이에 마츠코 너에 대한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네 동생은 병든 아이였다. 사랑과 관심이 특별히 필요한 아이였단다. 그러나 이 아비가 네 동생에게 보여준 사랑은 네게서 빼앗은 것은 결코 아니란다. 마츠코, 네 동생이 더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불쌍하고 가여웠기 때문이란다. 그 당시에 마츠코 네가 그렇게 생각했듯이, 결코 네 동생에 대한 편애는 아니었단다. 그러나 어린 네 마음에는 아비의 사랑이 그리웠고 외로움이 참기 어려웠겠지. 이 애비가 네 아픈 동생만 편애 한다는 오해는 어린 마츠코 너의 마음엔 지울 수 없는 상처였겠지. 이 애비가 네게 조금만이라도 더 따스하게 대했더라면 네 삶이 그토록 힘들게 되지는 않았겠지. 마츠코 네가 이 애비의 웃음을 얼마나 필요로 했는가를 진심으로 알았더라면 비극적인 오해는 생기지 않았겠지. 이 애비는 너의 그 깊은 슬픔을 안단다. 이 애비가 아픈 네 동생만큼이나 마츠코 너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졌다면 너의 삶은 얼마나 순탄했을까, 하고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온단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별 대수롭지도 않는 일들이 당시에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란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이 아비도 어린 날의 삶의 과정을 거쳐 왔으면서도 미처 네게만은 이해의 따스한 손길을 내보이지 못했으니 인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어버리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구나. 어린 내게는 아비의 무관심이 절대적인 고통이란 걸 미처 깨닫지 조차 못했다. 이 아비가 살아 온 방식으로 마츠코 너의 삶을 속박하려 했구나. 나에게는 살아온 시간이 더 많았고 너에겐 살아 갈 시간이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지나간 과거의 방식으로 너에게 부단하게 영향을 끼치려고 했구나. 결국 아비의 굳어버린 머리 탓이었단다. 용서해 주렴 마츠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교사직에서 해고된 것이 이 아비의 무관심과 관련이 되어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단다. 이 아비의 웃음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이 아비를 웃기기 위해 익살스런 표정이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을까. 결국 그것은 이 아비의 굳어진 표정이 초래한 희극적인 동시에 비극적인 습관이라고 생각하니 아비의 무관심이 뼈에 사무치는 구나. 그 굳어진 익살스러운 표정이 네 학교에서의 사건을 더욱 악화시키고 마침내는 사표로 이어지는 불행과 그 이후의 비극을 초래하는 단초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쉬움이 있다면, 마츠코야, 병들어 누워 있는 네 동생에 대해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마츠코, 네가 학교에 사표를 내고 동생을 저주하면서 목을 조르고 가출하는 행동도 충분히 이해를 한단다. 그러나 마츠코, 어린 시절의 너와는 달리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교사였던 너의 행동에 조금은 지나친 데가 있었다.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에 전적으로 지배받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너는 성인이 아니었니. 그런데 여전히 동생을 원망하며 동생의 목을 조르고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마츠코야, 네 삶이 너무 가엾고 가슴이 아파 이 아비가 뒤늦게 하는 넋두리라고 생각해라. 너를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인데 지나쳐 온 시간들을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마츠코, 이 세상 어느 누구가 너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해도 넌 내 자식이다. 마츠코, 네가 이 아비를 탓해도 언제까지나 넌 내 자식이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어린 자식일 뿐이다. 마츠코, 너에 대한 이 아비의 사랑이 너무 가슴 깊숙이에 있어 서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어쩌면 아주 사소한 오해였던 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감정을 쉬 내보이지 않으려는 이 아비와 너무 깊어 보이지 않던 이 아비의 사랑을 갈구하던 어린 마츠코 네가 서로 빗어놓은 어처구니없는 오해 말이다. 너무나도 긴 시간 후에 서로의 진실이 해후한다는 그 사실과, 그 오해와 해후 사이에 마츠코 네 비극적인 삶이 놓여 버렸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가슴을 찢는 고통으로 다가오는 구나. 늦었지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네가 이제는 이 아비의 사랑을 이해하듯이 이 아비 또한 네 진실을 알고 있단다. 이 아비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이 세상에 보여주려 했던 네 진실을 말이다.


마츠코, 이 세상엔 별 만큼이나 많은 오해들이 존재한단다. 그러나 이 애비와 너의 오해만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오해들은 다 사라졌으면 좋겠구나. 마츠코 너로 인해 이 세상에 그런 오해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그런 작은 오해로 큰 불행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기 때문이란다.  아주 작은 오해 하나가 마츠코 너의 삶을 휘감는 큰 불행과 비극을 낳았다는 데 이 애비는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괴롭단다. 이제 긴 시간을 우회해서 우리의 오해도 풀렸지만 아직도 마츠코 네가 혐오스러운 존재라고 오해하고 그렇게 부르는 인간이 여전히 많은 듯하다. 작은 오해로 비롯된 네 삶을 빗대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혐오스러운 마츠코라 불러도, 이제 더 이상 넌 결코 혐오스러운 마츠코가 아니란다. 이 아비에게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내 자식이란다.


마츠코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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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6 13:12

사토라레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미지 출처:www.koreafilm.co.kr/movie/revi





사토라레



한 인간의 머릿속 생각이 타인들에게 들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 타인들의 머릿속 생각이 한 인간에게 들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이러한 상상을 누구나 한 번쯤은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이런 상상은 상상으로서 끝나버립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가 왜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일까, 하고 그러한 상상의 의미와 관련된 질문은 던져 볼만 합니다. ‘사토라레’ 라는 영화가 이러한 상상을 조금 더 진전시켜 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은 호기심이 참 많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호기심이 미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 자신들에 대한 호기심도 그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의 호기심이 인간 스스로에게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도대체 인간(우리)은 무엇인가? 인간(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가? 인간(우리)은 왜 전쟁을 할까? 인간(우리)은 선한가, 악한가? 이러한 질문들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서 좀 더 진지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3박4일의 일본 후쿠오카로 팩키지 여행과 이후 자유여행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이 두번에 걸친 관광을 떠나기 전까지 일본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일본에 대한 제 머릿속 생각과 태도는 관광 전과 후를 비교하면 전혀 다릅니다.

일본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이 능동적인 노력으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다소 민족주의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늦게나마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제 식민지 과거사와 독도문제에 빠져 극일, 혐일이라는 일본에 대한 경직된 생각이 다소 바뀐 것입니다. 최근 일본 영화를 자주 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바로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 좀 더 일치된 생각을 갖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미지 출처:http://blog.naver.com/caek22?Redirect=Log&logNo=20028909648



 

일본과 일본인에 관련한 또 하나의 경험은 일본인들은 속과 겉이 다르다는 선입관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친절한 척을 해도 속으로는 이를 갈고 있다는 식의 생각이 왜 일본인들에게만 그토록 집요하게 강요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좀 더 다르게 표현하면 그것은 좀더 성숙한 인간의 자세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일본인들을 대하면서 그들의 속마음이야 어떻던, 형식적으로라도 친절과 예의가 몸에 박힌 태도에 차라리 호감이 갔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인간의 생각과 말의 불일치는 일치할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생각을 철저하게 숨기는 것이 오히려 불일치를 극복하는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일치 할 수 없는 것을 굳이 일치시키려 하기 보다 불일치를 철저히 숨기는 것 말입니다.


이렇듯 생각과 말이 불일치하는 인간 자신의 한계를 인간들은 부단히 일치시키려고 하거나 철저하게 숨김으로서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 일치와 숨김의 노력들은 우리 삶의 도처에서 보이는 형태로 또는 보이지 않는 형태로 강렬하게 또는 어렴풋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이러한 숨박꼭질 같은 인간 삶의 모습은 때론 우습기도, 절망스럽기도, 슬프기도, 역겹기도, 기쁘기도 한 여러 감정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감정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삶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어떠한 방식으로 바라보느냐는 우리의 태도이겠지요.   


인간의 안과 밖, 즉 생각과 말이 모순적이고 불일치하는 인간의 한계를 다루는 경우, 제가 접한 최근의 영화들은 그 모순이나 불일치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은 대체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 안과 밖의 불일치는 끝까지 극복하지 못한 채 비극적으로 오히려 그 한계로 인한 비극적이고 파국적인 인간을 드러내 관객들에게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듯 합니다.(물론 간절한 의도는 일치를 지향하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미지 출처: daiquiri.egloos.com/1641885



일치는 가능하지도 않으며 인간은 생각과 말의 불일치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모순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듯 합니다. 많은 영화에서 한 인간과 현실의 불일치는 메워지기보다는 끝까지 어긋나면서 비극적 파국을 맞이합니다. 예술의 도덕적, 교훈적인 역할이 약화 된 것은 오래전 일인 것입니다.

 



이제 사토라레로 돌아갑시다. ‘사토라레’ 는 생각이 타인들에게 들리는 기이한 특성을 가진 인간을 지칭합니다. 안(마음, 생각)과 밖(말, 언어)의 불일치와 모순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영화 ‘사토나레‘에서 이러한 안과 밖의 불일치를 접하는 시선들에는 비극적이라거나 진지함은 그다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왁자지껄하고 코믹하기까지 합니다. 사실 사토라레의 특이성은 놀랄만한 것이지만 생각과 말의 불일치는 당연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물론, 비극적 인식은 다소 드러나는 편이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성격을 좌우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교훈적인 장면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안과 밖 중에서 보이지 않는 것(마음)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말보다 안에 갇혀 드러나지 않는 마음에 대한 애정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말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마음이 더 소중하다는 교훈적인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의 생각(마음)이 외부로 들려 난처한 경우가 많지만 마음과 마음이 소통되는 것을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인상적이었던 마지막 대사입니다.         


“요즘 시대에는 말로서만 모든 일을 해결하려 하는 경향이 많아져서 도리어 다른 사람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일도 많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이런 시대가 사토라레들을 태어나게 하는지도...... 우리 모두가 사토라레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우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도 우리의 머리 속이 투명해 진다면 - 우리의 생각이 타인들에게 들린다면- 어떻게 될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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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5 23:08

일본영화 음악 3곡(자토이치,사토라레,전차남)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자토이치>는 키타노 다케시 감독의 맹인무사 자토이치 기행적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토라레>는 타인들의 속마음이 들리게 된 사토라레(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청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차남> 은 일본 사회의 고독한 섬이 되어가고 있는 오타구와 그 세계를 이해 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자토이치
스즈키 케이지, Festivo





사토라레
Crystal Kay, Lost Child




전차남


전차남 trailer




전차남
Orange Range, Love Parade





*관련랑크: 자토이치 1        자토이치 2       자토이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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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2 20:14

일본영화 음악 3곡(토니 타키타니, 냉정과 열정사이, 연애사진)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토니 타키타니>는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영화한 것입니다. 70여분이란 상대적으로 짧은 영화이지만 무게감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사랑의 감정을 복구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예술품의 마모와 복원을 테마의 은유로 녹여놓은 것이 돋보입니다. <연애사진> 사진의 흔적을 더듬으며 사랑하는 이의 시선을 통해 다시 하나가 되려는 사랑의 간절함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니 타키타니(2004년)
류이치 사카모토, Solitude


Tony Takitani UK Trailer




냉정과 열정사이(2003)
조수미, History








연애사진(2003년)
Fan MV


영화 <연애사진>의 스코어는 아닙니다. 팬이 만든 뮤직비디오라고 합니다.    이 음악을 알고 계시면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연애사진> OST 곡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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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8 02:35

피와 뼈



피와 뼈


낯선 삶이었다. 영화의 역사적 배경이나 공간등 간과 할 수 없는 여러 주제들, 이를테면 광기의 역사적 상징성, 불행한 가족사의 부조리함, 개인의 병적 심리 등 역사라는 거창한 주제에서부터 가족사의 비극과 한 개인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감상의 자료를 제공해주었지만, 나의 생각은 인상적인 한 인간의 괴물 같은 삶(연기)에 주로 매달렸다. 아마도 낯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 내내 김준평(기카노 다케시)의 ‘괴물성‘ ’야수성‘의 근원이 어디에서 있는지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괴물성‘ 과 영화의 어디에도 그 인과성을 찾지를 못했다. 김준평의 괴물성을 일본 제국주의에 항의하는 메시지로 읽고자 했으나, 그것은  넌센스 같았다. 아니 관객인 내가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를 이해하기에는 김준평은 너무 속물적이었다.


그냥 다소 낯선 한 한인 가족사가 1920년대 초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이란 배경만을 달리하며 기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해 보였다. 그냥 즐기면 되는데 괜한 헛수고를 한 듯했다. 가족들과의 관계조차도 파괴하는 가장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 가장을 사실적으로 묘사를 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만 넘어가자니 어딘지 허전하고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미지 출처:http://www.slrclup.net/Common/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상처’ 라는 단어였다.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트였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관계들이 엮어놓고 있는 인간들의 실존이었다. 역사도 이데올로기도 어쩔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모습이었다. 절망을 만들고, 절망에 순응하고, 절망에 저항하는 삶들은 깨어진 관계 속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절망들은 전 근대적인 인간관계 속에 처해진 실존들의 상처이고 절망들이기에, 과거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해준다. 특히 김준평으로 상징되는 억압적인 한국의 유교적인 가부장제와 그것에 얽힌 문제들에 대한 성찰이 그랬다.


그리고 죽음이 있었다. 죽음이 끝인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한 장의 유서일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제법 긴 유서를 쓰고 있다는 오싹한 느낌이 몰려왔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죽음들이 인상적인 까닭이기도 했다. 딸의 주검 앞에 김준평이 나타났을 때, 상가에는 큰 소동이 벌어지고 그 소동을 피해 딸의 시신을 이리저리 옮기는 장면은 현실의 고통을 피해 죽음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고통스런 현실은 죽음과 현실의 끊임없는 악순환을 느끼게 했다. 현실은 좀더 아름다운 곳은 될 수 없는가? 인간은 좀더 선한 존재가 될 수는 없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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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6 21:42

토니 타키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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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타키타니


단편소설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의 이 영화는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토니 타키타니>를 영상화한 것입니다. 다른 영화들에 비에 다소 짧은 편(76분)이지만 진지하고 무게감 있게 다가옵니다. 간결하고 경쾌한 문체에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주제를 담고 있는 하루키의 소설(읽는 것은 《상실의 시대(Norwegian Wood)》가 유일하지만)과 마찬가지로 경쾌하고 간결한 문체를 마치 눈으로 보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문장이 간결하면 경쾌해지고 또 스타카토의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단문과 단문사이의 여백은 ‘인상’을 만드는 유용한 공간으로 존재합니다. 선에 비유하자면, 점선이 완전한 선은 아니지만 더욱 인상적인 선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점과 점 사이의 공간 덕분입니다. 실선은 완전하나 점선보다 인상적이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이런 이유로 점선이 끊는 선을 상징하게 되었을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미지 출처:http://www.dvdactive.com/news/releases/tony-takitani.html

인생에 비유하자면, 인간의 인생은 마치 점선과도 같습니다. 여러 사건들의 인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지요. 지나온 시간들은 하나의 긴 흐름처럼 느껴집니까, 아니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여러 사건(장면)들이 인상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그림이나 사진처럼 파편으로 남아 인상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기억은 인상을 만들 뿐 그대로 재연하지는 못하죠.) 모래를 생각해 보면 될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알갱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모래를 이루고 있습니다. 알갱이들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소설의 문장들이 아니라 인간들의 관계로 생각해 보면 사실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들이 간결하고 경쾌한 관계들로만 구성된다면 ‘인상’ 은 만들어 내겠지만 끈끈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지는 못하겠지요.

단문들로 쓰인 소설들은 대체로 차갑고 냉정합니다. 단편인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단편소설이란 이름처럼 인간들의 ‘단편적인 관계’가 되겠지요. 이 영화에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주 단편적인 접점만을 갖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 주인공 토니 타키타니(잇세 오가타)와 여자 주인공인 에이코(미야자와 리에)가 만나 이렇게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에이코: 옷이란 자신의 내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제 멋

           대로에요. 게다가 굉장히 사치스러워요. 그래서 급료의 대부분이 옷을 사

           는 비용으로 사라져버려요.

토 니 : 나는 그림도구 외에는 어디에도 돈을 쓸 일이 없어.


이렇듯 그들의 만남에는 인간적인 공감이라기보다는 단편적인 접점으로서의 옷과 돈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토니와 그의 아버지의 대화에서도 인간적인 공감이 아니라 단편적인 접점만을 확인해 줍니다.


토  니:머랄까, 사랑에 빠져 버린 것 같아.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

          어.

아버지:그래서 어디가 마음에 든 거야?

토  니:뭐라 말해야 할까? 옷을 입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

아버지:그것 참 굉장하군.



이러한 인간의 단편적인 관계에는 서로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공감할 수 없다는 그 사실에 의해 어떤 막연하고 근원적인 고독이나 외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토니 타키타니와 에이코는 운명에 순종하는 무기력한 인간처럼 여겨집니다. 마치 허수아비처럼 말입니다. 비록 함께 있지만 대책 없는 고독과 외로움이 그들 주위를 맴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인 것입니다. 단지 망각하는 것 밖에는 그것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일시적인 위로일 수는 있되 영원한 구원은 되지 못합니다. <토니 타키타니>가 그렇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미지 출처: http://kr.image.yahoo.com/GALL

이렇게 보면 피상적인 관찰이기는 하지만 《상실의 시대》(1987)에서 우울하기는 하나 인간관계에 대한 희망이 단편 <토니 타키타니>(1997)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무기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소 안타깝습니다. 꼭 10년만입니다. 성숙인지 퇴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상실의 시대》에서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존재로서 공감하고 일체감을 갖는) 인간관계의 희망을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 <토니 타키타니> 를 보고나면 연민과 인간 실존, 그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체험입니다. 일본 영화라는 편견을 버리고 이러한 영화를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이제 이 영화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들을 몇 가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장면들 사이의 검고 두터운 벽들입니다. 이 벽은 인간을 가두고 차단시키는 외로움을 상징하고 있는 듯 합니다. ‘외로움은 감옥’ 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장면들 사이에 놓여있는 검은 벽들이 창살처럼 여겨집니다. 고독은 우리 인간이 깨기에는 너무나도 큰 벽처럼 여겨집니다.


둘째는 인간들이 남긴 흔적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다지 유쾌한 생각은 아닙니다만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오릅니다. ‘우리의 삶 뒤에 남게 되는 것은 흔적뿐’이라는 말 말입니다. 도대체 죽음 뒤에 우리가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종교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고, 환생이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죽음 뒤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직면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빠져 나간 자리에는 마치 뱀의 허물처럼 헐렁한 옷 몇 벌만이 덩그러니 남으리라는 상상은 쉬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남아있을 옷들에 발악적으로 집착하는 에이코에게 우리는 연민을 느낍니다. 에이코는 옷을 반품하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신호등에 걸려있는 중에 다시 그 옷이 생각나 차를 돌리다 사고로 죽습니다. 에이코를 죽인 것은 그녀의 옷인 셈입니다. 토니 타키타니의 아버지가 죽은 뒤의 흔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고작 낡은 레코드들이 전부입니다. 에이코의 옷들이 머물러 있던 텅 빈 방에 남겨진 그 레코드들은 에이코의 옷들과 함께 연민을 자아냅니다.


셋째는 인간에 대한 연민입니다. 토니 타키타니는 죽은 아내를 기억하고자 아내와 체형이 같은 여자를 비서로 채용해 아내의 옷을 입고 출근하도록 하는데, 바로 히사코가 그녀입니다. 히사코는 리에가 에이코와 함께 1인 2역을 맡습니다. 히사코는 에이코의 옷을 고르기 위해 에이코의 옷방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그녀는 에이코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느끼고 눈물을 흘립니다.


몇 백 벌이나 되는 아름다운 옷이 그 곳에 쭉 늘어서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옷을 잔뜩 남겨 놓은 채 죽어버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 들까?”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옷도 구두도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과 같이 정확히 사이즈가 맞았다.


그리고 그녀는 흐느껴 웁니다. 그녀의 눈물은 바로 연민의 눈물인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공감인 것입니다. 토니 타키타니는 아내의 옷 방에서 흐느껴 울던 히사코를 잊지 못합니다.


그는 때때로 아직껏 그 방안에서 아내가 남기고간 옷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잘 알지도 못한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의 흐느껴 울던 소리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이렇게나 많은 예쁜 옷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후에도 이상하게도 그 여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토니 타키타니 UK tra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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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5 00:33

일본영화 음악 3곡(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박치기, 아무도 모른다)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세상의 중심에서사랑을 외치다>은 카세트 테입에 담긴 젊은 날의 상처를 테입을 재생시키듯 다시 찾아가는 성찰의 영화이며 동시에 성장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박치기>는 일본영화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화입니다. 우리 민족을 다룬 영화이며 분단을 다룬 영화입니다. 우리의 슬픈 역사가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 교포들에게 한 처럼 맺혀있는 영화입니다. <임진강>으 너무도 감동적인 노래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입니다. 이 영화는 일본영화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보시면 어떨가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만난 것이 참 행운이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2004년)
瞳をとじて(눈을 감고)



                  히라이 켄(平井 堅,ひらい けん)의 원곡이 아닌 마사미 버전





박치기(2006년)
임진강



영화 <박치기> 중 한 장면


임진강




아무도 모른다(2005년)
보석

                                                 타테 다카코 <보석>




다른 일본영화음악 3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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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8 17:32

무사의 체통(3)




무사의 체통(3)

― 누구의 사랑이고 명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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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士の 一分>의 영어 제목 <Love and honour>은 영화의 내용을 왜곡하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우리나라 제목 <무사의 체통>이 영화의 내용에 적확하다고 여겨진다. 영화의 내용으로 볼 때 사랑은 무사의 명예(체통)에 종속되기 때문에 그렇다. 일본의 전통적인 미덕을 love 와 honour라는 단어로 소개하려고 한 듯 하지만 기실 영어 단어 love와 honour의 의미를 변질시키고 왜곡시킨 일면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의 영제를 <Love and honour>라는 기만적인 미화보다는 일본어 제목과 마찬가지로 사무라이라는 한정사를 붙이는 것이 보다 솔직하다고 본다. 그것은 ‘사무라이의 사랑이고 명예’ 이지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이나 명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냐 무사의 사랑이냐를 떼어놓고 볼 때, ‘무사의 관점‘ 에서 보는 사랑은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좁게는 한 개인으로서 사무라이의 사랑과 명예에 대한 태도일 수 있으나, 좀 더 공간을 넓혀 보면 의미 또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완고한 계층질서에서 <남, 녀 간의 사랑>이란 감정이 주변으로 밀려난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또는 사랑과 명예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때 사랑이 무사의 명예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더욱 더 넓게는 국가주의에 부속화 되는 개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무력에 압살당하는 사랑(일본군국주의에 희생당한 위안부 할머니처럼)의 일그러진 모습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무사의’ 라는 한정사는 내용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영화 <색계>의 예를 잠시 빌려오면, 이 영화는 사랑과 애국이라는 선택에 흔들리는 한 개인의 감정, 특히 한 여자의 감정이 밀도 있게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이안 감독이 집단이나 국가 이전에 사랑이라는 한 인간의 감정을 유연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고 애국과 민족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매국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다). 애국(민족, 국가)라는 중력과 개인의 일탈적인 힘이 부딪히면서 동정과 이해, 공포와 용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들의 약한 모습이고 단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무사의 체통>은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명예가 존중되는 국가주의나 군국주의의 초개인적인 냄새만을 맡을 수 있다. 마치 심오한 무언가가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맹목적인 개인과 개인들이 집단(사무라이, 더 나아가 국가)의 중력에 흐물흐물 떠다니고 있는 것이다. 신파조의 사랑타령이 조금 등장하기도 하지만 양념일 뿐 오직 하나의 중심에 수렴되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무사의 명예에 사랑을 주변적인 것으로 종속시켜버린 다는 것은 사무라이 영화의 당연한 특성의 일부로 전통적인 미덕이나 영화 자체로도 사무라이의 남성성을 멋지게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어딘지 무서운 일면을 뿌리 칠 수가 없다. 무사와 칼에 여성과 사랑이 종속된다는 것은 아무리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인류 보편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일본의 과거도 미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역사의 경우도 가족을 몰살하고 전쟁터로 나아가는 장군의 이야기나 다소 성격을 달리하긴 하나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이 그러한 예로 들 수 있다. 칼과 무사, 사랑과 여성을 좀 더 단순화해서 인류 보편적인 상징으로 표현한다면 여러 가지 추상적인 단어들과 구체적인 존재들과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중심주의, 가부장제도, 부자유와 복종 등의 단어들이 아닐까 한다.

장님이 되어버린 한 가난한 무사의 체통과 권위주의 아래에 사랑, 헌신, 봉사가 종속되면서 순수하고 희생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관계는 얼마나 삭막해질 것인가? 아니 삭막한 정도가 아니라 관계 자체가 두절되고 파괴되면서 비민주적이고 폭압적이며 비상식적인 어두운 통로들만이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닐까? 바로 남성중심주의요, 가부장제도이며 부자유와 복종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리 무사도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영화에 나타나는 남성중심주가 미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사도는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였으니 말이다. 이러한 무사도가 <love and honour>라는 이름으로 그럴듯 하게 포장되고 상품화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21세기의 일본 영화에 아직도 이러한 사무라이의의 전통적인 미덕이 칭송되고 있다는 것은 현대 일본인의 마음에 내재에 있는 의식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사랑보다도 사무라이의 명예를 추켜세우는 것은 결국은 국가에 종속되는 개인과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로 확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해석이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최근의 독도 문제를 보면서 영화와 현실이 별개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미지출처: http://kr.blog.yahoo.com/iamji
                 http://kr.news.yahoo.com/ser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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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0 00:42

[일본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기쿠지로의 여름 (菊次郞の夏)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기쿠지로의 여름>은 기타노 다케시(영화명은 비트 다케시)의 명성에 걸맞는 영화입니다. 역시 다케시라는 감탄사가 튀어나오게 합니다. 감독, 각본, 편집은 물론 마사오 역의 유스케 세키구치와 함께 주연을 맡아 열연합니다.

꼭 외형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 내용의 측면에서도 사무라이와 야쿠자 일색의 기존 다케시 영화와는 달리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놀라운 일이지만(이 말은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폭력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다케시가 만드는 영화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뜻에서입니다. 물론 이 영화는 폭력이 전혀 필요 없는 영화이긴 합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어린아이들이 보는 만화 영화만큼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것도 없습니다. 폭력이 나쁘다고 하지만 만화영화의 폭력을 보면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는 느낌이 듭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에서는 폭력이 거의 사라집니다.

물론 다케시의 ‘폭력’ 이 한, 두 군데 등장하고 있지만 그리 심각하지도 않고 인간적이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면, 트럭의 앞 유리창을 깨고 도망가지만, 뒤쫓아 온 기사와 싸우는 장면은 트럭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한 마을의 축제에서 야쿠자 일당과 맞서지만 폭력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얻어터진 키쿠지로의 모습만을 보여주어 싸움이 치열했음(?)을 대충 짐작케 할 뿐입니다. 야쿠자인 ‘기쿠지로‘ 에게서 완전히 폭력을 금지하기엔 불가능하겠지요.

아무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야쿠자에게서 폭력적인 요소를 배제했을 때 어떤 인물이 될까요? 예를 들면 야쿠자를 유치원의 보모 자리에 앉혀봅시다. 또 야쿠자를 전업주부로 만들어 봅시다. 사실 이러한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은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조폭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의 여지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의 대상을 부조화/불균형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웃음이나 감동을 유발하는 것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두사부일체><조폭 마누라><달마야 놀자>등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 야쿠자를 관광버스의 관광 안내원으로 내세운다면 이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따라서 기쿠지로를 엄마를 찾는 마사오의 길 안내자로 만드는 것도 기발하고 의외의 상상이랄 수 있겠습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만약 동화 속에 야쿠자가 등장한다면 그 야쿠자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것도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입니다. 좀 사내다운 관객이라면 “야쿠자가 그럴싸한 폭력물에나 어울리지, 무슨 이런 장난을 치나!“ 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전 제 경험상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 다소 유치한(?) 노래를 부를라 치면 분위기 깬다라는 냉소적인 표현(?)을 짓는 군자들이 꼭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들이란 설운도, 태진아, 조용필, 남진, 나훈아, 이미자 류의 그 애끊는 고상한 트로트들이었습니다. 분위기 띄우기의 정수를 보여주겠다는 자세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트로트 일색의 노래방 분위기에서 갑자기 유치한 ‘마법의 성’ 이 등장한다면 분위가기 썰렁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야말로 마법에 걸린 듯 얼어붙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어떠한 종류의 분위기도 인정하는 노래방의 성숙한 문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달마야 서울 가자>의 노래방 장면이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만약 이렇게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객이라면, ”야쿠자가 백마를 탄 기사가 되었군. 아주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인데......“ 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동화 속에 등장한 야쿠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두 입장 중에서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 서고 싶습니까? 저는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습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제가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부조화/불균형)을 비일상적으로 보는 관습적이고 경직된 태도, 즉 우리가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익숙해져온 편견이나 획일화된 사고를 지양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관습을 벗어난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이 영화를 더 재미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야쿠자가 리얼하게 폭력을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동화의 나라에서 백마 탄 기사가 되는 것은 더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여러 관계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이란 말 자체에 그런 뜻이 있습니다. 관계는 지속적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다 그 관계들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저를 나아준 부모의 존재가 사라지면 그 관계도 소멸합니다. 제가 자식을 낳으면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 집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사라질 때 인간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죽는다는 것은 모든 관계의 소멸을 뜻합니다. 마치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들이 확정적이고 경직되는 것은 그다지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새삼 언급하면 잔소리로 들릴 정도로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현실은 관습화되고 경직된 관계들로 구획되어 있는 듯 합니다. 영화는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을 통해 이러한 관습화되고 경직된 관계들을 변화시키는 측면이 아주 강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친구의 관계로 유연화 되기도 합니다. 유교의 경직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으로서 말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비일상적인 남녀의 관계가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전도되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인간의 여러 관계들이 일상적인 역할을 벗어나 작동합니다.그것은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영화와는 달리 허구를 통해 현실을 허물려는 영화의 본질과도 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쿠지로와 마사오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영화 내내 느끼는 것이지만 도대체 누가 더 정신적으로 성숙한지? 도대체 누가 더 진정한 안내자인지? 도대체 누가 더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지? 이 두 사람의 여행을 통해서 더 깊이 감동을 받고 정신적으로 변화한 존재를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마사오의 여름>이 아니라 <기쿠지로의 여름>이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마사오의 여름을 위해 기쿠지로가 떠밀려 동행을 했고 안내자와 보호자의 역할을 하지만 정작 여행을 통해 변화한 쪽은 기쿠지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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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강요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자의 입장, 즉 “장난치나!“ 같은 냉소적인 입장은 이 글을 읽으면서는 누그러트려 주었으면 합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의 구성은 여행의 시간 흐름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전개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서 보기가 편합니다. 이러한 단순함은 영화의 재미와도 연관되면서 지루하지가 않은데, 아이의 시선을 배려한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이 영화는 소설처럼 각각의 장들이 존재하는데 마치 추억의 앨범이나 여행 기록 또는 일기장을 넘기는 듯한 효과를 줍니다. 각 장마다 영화의 압권이랄 수 있는 장면들이 숱하게 나옵니다. 여러 장으로 구성된 <기쿠지로의 여름>은 [할머니의 친구들]로부터 시작합니다.


마사오(유스케 세키구치)는 부모가 없이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9세 된 아이입니다. 여름 방학이 되었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친구들은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고 축구 교실도 여름방학 동안은 활동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학교에 찾아갔다가 축구 코치로부터 “방학인데 바다에나 다녀오렴. 재밌을거야.”란 속 모르는 소리만 듣는데, 이 학교 신(scene)에서 헛발질을 하고 넘어지고 혼자 운동장에 서있는 마사오의 모습이나 혼자 남은 집에서 밥을 먹는 마사오의 뒷모습은 아이의 작은 어깨에 드리워진 무거운 외로움 느끼게 합니다.

외로운 마사오에게 어는 날 엄마의 소포가 찾아듭니다. 그리고 소포의 겉봉투에 적힌 주소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치 현, 토요하시 구’ 주소를 가방에 넣고 엄마를 찾아 떠나지만 불량배들에게 잡히는데 이때 나타나는 기쿠지로와 그의 아내가 할머니의 친구들입니다(할머니의 친구들 치고는 너무 젊은데......) 이런 인연으로 아내로부터 여행 비용으로 5만엔을 받은 기쿠지로와 마사오는 토요하시로 떠나게 됩니다. 이 장면의 압권은 유흥가와 경륜장에서의 해프닝으로 누가 어른이고 어린이인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웃음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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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지는 [무서운 아저씨] 장에서는 유흥과 경륜으로 돈을 다 탕진해 버리고 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기쿠지로는 마사오가 없어진 것을 알고 근처 공원으로 찾아 나섭니다. 어린이 마사오를 전혀 고려치 않는 무지막지한 어른인 기쿠지로가 공원에서 목격하는 것은 마사오에게 이상한 짓거리를 강요하는 변태 대머리입니다. 변태 대머리는 무서운 세상의 암시로 이로서 마사오를 지켜야하는 기쿠지로의 필연적인 운명(?)이 시작된다고 할까요? 그 다음 날 아침 택시를 타고 ‘토요하시‘ 로 떠나게 됩니다. 이 후로 [이상한 아저씨][실패였다][천사의 종][아저씨가 놀아 주었다] 등의 장들이 이어집니다.



다 이야기를 해버리면 재미가 없겠지요. 자, 이제부터는 기쿠지로가 마사오와 함께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 일기장을 직접 넘겨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재미있어 눈을 떼지 못할 것입니다. “장난치나!“ 같은 냉소적인 입장만 갖고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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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6 00:21

후쿠오카에서 먹은 도시락 & 음식





                        후쿠오카에서 먹은 도시락&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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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텐보스 행 열차 안에서 먹은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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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텐보스 에서 먹은 나가사키 짬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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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리 공원 가는 길에 먹은 어묵(맛이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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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찌란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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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주로 먹었던 도시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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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5 21:12

후쿠오카 자유여행(7.마지막날)







             후쿠오카 자유여행(7.마지막날)


이틀 동안 참 바빴습니다. 하우스텐보스와 다자이후 뗌만구도 다녀오고 후쿠오카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니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아쉬움도 컸습니다. 그랬던 탓인지 마지막 날 아침에야 비로소 민박집의 실내를 찍었습니다. 민박집은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는데 낡은 전통 가옥에 그다지 아늑하고 편리한 곳은 아니었지만 깨끗했으며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그 때가 비수기였던 탓인지 그 넓은 민박집에 손님이라고는 우리 가족이 전부였습니다. 정말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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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과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비수기에 일본을 여행할 경우에 굳이 한국에서 예약을 미리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후쿠오카로 출발하기 직전 한국에서 민박집을 예약했지만 막상 후쿠오카에 도착하니 하까다항에 명함만한 숙박 안내지들이 널려 있더군요. 현지에서 찾아가는 것이 좀 불편하겠지만 자유여행이라면 그렇게 찾아가는 것도 재미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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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에서 먹은 음식은 주로 도시락이었습니다. 도시락의 나라답게 다양한 도시락들이 있더군요. 사진에 담지는 못했지만 하까다역 내의 쇼핑가에 도시락 코너가 있었는데 다양한 도시락들을 전시해놓고 있었습니다. 직접 주문을 해서 도시락을 만들 수 있기도 하구요. 한국에서 가져간 육개장이 국물이 없는 도시락을 먹는데 도움이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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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도시락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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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는 좋은데 맛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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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을 나오면서 근처의 모습들을 찍었습니다. 한국과는 가까운 거리라 언제 또 오겠나하는 아쉬움은 덜했지만 그래도 짧은 일정과 근처를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은 남더군요. 하까다역으로 가는 도중에 거리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후쿠오카에 오기 전 한국에서 숙박지를 예약할 때 주로 소개되어있던(여행 동아리 카페, 여행사 정보 등등) 호텔들이 일대에 모여 있더군요. 아마 역 주변의 호텔이라는 편리성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민박보다는 호텔을 이용해서 다른 경험을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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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 바로 옆을 흐르는 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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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Boy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는데 가보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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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정문 앞에 붙어있는 교육목표 같은데 해석 좀 댓글로 남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우스텐보스와 다자이후 뗌만구를 가기위해, 또 이런 저런 이유로 자유여행의 가장 큰 이정표가 되어주었던 하까다역은 아쉬움과 함께 정겨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하까다역내의 식당가는 식사를 하고 도시락을 구입하는 편리성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다시 한 번 하까다역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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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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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가 맞은 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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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과 커피, 빵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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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까다역 역내를 가로질러 맞은 편 출구로 나가 하까다항 행 버스를 탔습니다.(또 사진이 없네요. 분명히 버스 정류장이며 버스 노선도며 하까다역 주변의 이런 저런 사진들을 찍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입니다. 아까다 항 사진도 없구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바로 선실에서 찍은 사진이 등장하네요, 이런!) 선실에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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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선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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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까다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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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여행의 기록치고는 너무 엉성합니다. 사진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우스텐보스, 다자이후에서 너무 서둘렀던 기억, 후쿠오카의 커낼시티 등을 둘러보면서 남긴 사진들을 소개하지 못했다(사진들이 다 날아가 버린 것인지 원인을 모르겠네요)는 점은 너무나 부족했던 부분입니다. 여건만 된다면 다음에는 나가사키로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하우스텐보스에서 나가사키는 거리상으로 후쿠오카와 거의 비슷합니다. 하우스텐보스에서 나가사키로 가서 일박하고 후쿠오카로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일정이 너무 빠듯해 포기했던 기억이 나는 군요.


지금까지 이 자유여행기를 보아주신 분들에게는 많은 것들을 못 보여준 것이 아쉽네요. 뭐, 다들 다녀오셨는데 괜한 말 같다구요?  아무튼 감사하구요, 좋은 여행들 하세요.(끝)

후쿠오카 자유여행 다시보기

1.선상에서 
2.후쿠오카에서 첫째날 
3.하우스텐보스 로 
4.하우스텐보스
5.다자이후 로  
6.다시 후쿠오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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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9 15:24

후쿠오카 자유여행(5.다자이후로)



                    후쿠오카 자유여행(5. 다자이후로)


다음날(6월 11일) 아침 일찍(일찍이라고 해야 아마 10시는 넘었을 것 같습니다. 전날 하우스텐보스에서의 여독이 다소 심했기 때문이죠. ). 아침에
다자이후로 가기 위해 다시 하까다역으로 가는 도중에 비로소 사진을 몇 장 찍기 시작했습니다 민박집에서 하까다역까지는 걸어서 15-20분정도의 거리에 있었습니다. 거리의 풍경이 우리나라의 거리와 흡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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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 앞에서(바로 뒤쪽이 민박집으로 들어가는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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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 앞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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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까다역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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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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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며 동상, 운동장이 우리나라의 초등학교와 너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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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로 가는 열차편은 하우스텐보스로 가는 열차편보다는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까다역에서 다이자후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어떤 종류의 노선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노선뿐만 아니라 찍어 놓은 사진을 보고서도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언제 찍은 사진인지, 뭘 하고 있는 사진인지 등등 도통 기억이 나지 않네요. 아무튼 다자이후로 가는 열차는 개인석을 가진 하우스텐보스행 열차와는 달리 천장에 손잡이가 주렁주렁 달려있고 서로 마주보고 앉는 우리나라의 지하철과 비슷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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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가는 표 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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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로 가는 열차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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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역에서 내려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다이자후로 올라가는 길 양쪽으로 다양한 가게들이 아기자기하게 들어 서 있는데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족사진조차 한 장 없네요. 다만 어느 가게에서 한국인 연예인 사진이 담긴 부채들을 몇 장 찍었네요. 다자이후 역에서 다자이후 뗌만구의 입구까지 이르는 길 양쪽으로 형성된 가게들을 보면서 일본인들의 상인정신에 대해 생각을 했습니다. (더 많은 사진 참조 : 블로그 창밖에 비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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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역 근처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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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서 찍은 한류 스타들


다자이후 뗌만구에 들어가서는 그냥 사진을 막 찍었습니다. 학문의 신(스와가라 미찌자네)을 모시고 있다는데 아이들 공부 좀 잘하게 해달라고 부적하나 써서 걸어 놓지 못했습니다. 다자이후 뗌만구에서 꼭 찍어야할 사진이 있는데 당시에는 잘 몰라 찍지 않았네요. 다자이후 뗌만구와 관련해서 전해지는 전설(아래 다자이후 뗌만구와 관련된 전설 참조) 속 소의 동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보니 정작 찍어야할 사진은 찍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네요(앞으로 여행에서는 이런 실수는 하지 않겠다는 각오!) 이곳저곳을 찍다가 결혼사진 찍는 장면을 포착했습니다. 또 자동차 무사고를 비는 고사(?)인지 시승식(?)인 듯한 장면도 찰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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뗌만구 본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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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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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신사 뒷 편으로
큰 연못이 있었고 이름 모르는 꽃들(아마 창포같기도 한)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그 연못에서 위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큐슈 국립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으로 향하는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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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국립박물관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의 입구(처음에 박물관 입구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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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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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이렇게 타고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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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국립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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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내부(전시실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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뗌만구내 식당가


또 사진 타령이지만, 어쩐 영문인지 큐슈 국립박물관과 다이자후 뗌만구를 둘러보고 나온 후와 다이자후에서 다시 하까다역으로 돌아오는 과정과 하까다 역에서 내려 후쿠오카 번화가로 가는 과정에서의 사진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마 버스나 지하철을 탔을 텐데 그런 사진들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다자이후 뗌만구와 관련된 전설

다자이후 뗌만구는 일본 전역에 산재해 있는 1만 2000여개의 뗌만구(天滿宮)의 총본산인 신사입니다. 학문의 신으로 숭상되고 있는 스기와라 미찌자네를 모시고 있는 유명한 신사입니다. 이 신사가 세워진 유래에 대한 재미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스기와라 미찌자네는 845년 교또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이미 5살 때 시조를 읊고, 11살 때 한시를 지을 정도로 보기 드문 신동이었습니다. 스기와라 미찌자네는 나이가 들면서 귀재를 더욱 발해 각종 관직을 맡으며 명성을 얻고 55살 때는 우대신(右大臣)에 임명되어 덕망있는 정치가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훌륭한 정치가로 서민들 사이에 명망이 높아 다른 정치가들의 질시가 심했습니다. 결국 스기와라 미찌자네는 정치적인 음모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901년 바로 다자이후로 좌천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2년 뒤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장례식날 그의 유체는 우마차에 실려 장지로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마차가 멈추면서 마차를 끌던 소가 꼼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쩔수 없이 그의 제자가 바로 이곳에 스기와라 미짜자네를 유체를 묻고 뗌만구의 전신인 안라꾸지(安樂寺)라는 절을 세웠습니다.


그 뒤 이상하게도 스가와라 미찌자네를 좌천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민 인물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사망하고 또한 교또 곳곳에 예기치 않는 재난들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스기와라 미찌자네가 하늘에서 내린 노여움으로 판단하고 그를 신으로 모시는 사당을 안라꾸지에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다자이후 신사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좀 더 높은 신사로 격상되어 현재의 다자이후뗌만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일본 백배 즐기기, pp.590-591, 랜덤하우스 중앙 참조)



*다자이후에서 하까다역으로 돌아와 둘러 본 일정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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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21:54

[일본영화] 자토이치(3)



                                         이미지출처: www.sung-ho.pe.kr

 

 

자토이치(3)

-마이너리티 리포트


맹인 자토이치는 로닌(浪人)이다. 로닌은 사무라이의 위계질서에 편입되어 정착하지 못한 사무라이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로닌은 소속된 조직이 없는 소속 외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바람처럼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무라이라고 하면 된다.


자토이치는 외관상 어떠한 조직에 소속되기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아주 현대적인 외관을 하고 있다. 머리는 노란 염색에 가깝고, 의복 또한 마찬가지이다. 머리모양과 의복만을 놓고 보면 자토이치는 21세기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자토이치의 외관은 격식을 파괴하고 있다.   


약간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자토이치를 만나 자토이치를 통해 대리 복수를 하는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하나같이 사회의 비주류들이다. 우선 가족을 죽인 살인자들을 복수하려는 남매는 부모를 잃고 정처 없이 살인자를 찾아 헤맨다. 그런데 그 남매에게는 자토이치 이상의 이질적인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내인 남동생이 여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전도된 현상은 어린 시절의 충격(어른에 의한 아동 동성애, 경제적인 궁핍을 모면하기 위한 동성매매)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것은 소수 동성애자들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할 수 있다. 가족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여장하고 춤을 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이해를 호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는 하층민이다. 집단화된 도적 패에게 언제나 폭력을 당하는 경제적, 계층적인 약자이다. 자토이치가 신세지고 있는 집의 여주인과 거리의 상인들이 그러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집단화된 도덕 패들에 의해 자릿세를 뜯기고 폭행을 당하면서 하루하루를 영위해 가는 존재들로 삶이 핍박하고 고달프다. 이들은 소수라는 측면보다는 약자라는 측면에 더 강조점이 두어져야 하지만 절대적인 빈곤층이란 의미에서 마이너리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칼을 쓰지 못한다는 면에서 자토이치와 다를 뿐 실제적으로 사회적인 이방인으로 도박과 술과 여자에 빠져 죽은 둥 사는 둥 살아가는 중독자들이다. 이들은 자의적으로 사회를 일탈한 존재로서 마이너리티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 등도 이러한 사회적인 약자(사회로부터 냉대를 받는다는 의미에서)로서 동일한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하지만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냉대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격리는 범죄자에 대한 동일한 인식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범죄자가 감옥에 격리되듯이 병원 따위에 수용이 되는 것이다.


넷째는, 셋째의 부류와 다소 동일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같은 부류로 분류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바로 미친자들이다. 미친자는 자의적이지도, 어떤 지향성(술, 마약, 여자)도 갖지 않는 존재라는 면에서 중독자들과는 다르다. 자토이치가 머물고 있는 집 주위를 함성을 지르며 도는 이웃집 아들이 바로 미친자이다. 영화 <자토이치>에서 왜 이 미친자가 등장할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만들어 낸 캐릭터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하층민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들의 존재는 웃음만을 자아내기에는 서글픈 존재가 아닐 수 없으며 운명적으로 사회적인 냉대와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슬픈 존재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약자와 대척점에 있는 존재가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이다. 이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를 현재적인 시간에서 그 대응 집단들을 살펴본다거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본다거나 도적이란 본질을 위장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알레고리로 자리잡는 것이다. 자토이치의 시대 상황이 과거이지만 해석은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영화는 언제나 현재에서 만들어지듯이 현재의 시점에서 하는 해석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대척적인 존재들(사회적인 약자 vs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 사이에 놓여있는 자가 자토이치라고 하면 어떨까? 이 자토이치가 도박을 즐기고, 여자를 즐기고, 관습을 무시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다면 자토이치는 마이너리티에 관용적인 자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 자신이 육체적으로 맹인인 약자라면 어떠한가? 판단은 영화를 보는 개인 각자의 몫이지만, 분명한 것은 자토이치의 몰골은 그 당시의 시점에서는 결코 보편적이거나 관용적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는 사실이다. 자토이치가 칼을 휘두른 것은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회적인 약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질성을 말살하려는 관습의 편견인지도 모른다. 분명 자토이치는 이질적인 것, 사회적인 역자들의 편에 서있다.


영화가 끝나면 사회적인 약자들집단화 된 도적 패거리가 함께 모여 춤판을 벌린다. 이 춤판은 두 가지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영화내내 자행되는 칼질에 대한 살풀이의 마당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더욱 중요한 것으로써 사회적인 약자들의 신명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염원이다.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어 불탄 집을 다시 세우는 그 축제의 한마당은 바로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인 것이다.(*)    

(2008.4.20.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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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 자토이치(2)





자토이치(2)


서부 영화에서 맹인 총잡이를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상상이라고 하면 건방진 표현처럼 들린다. 아니 무지한 표현처럼 들린다. 세상에 불가능한 상상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거나, 이성적인 합리성을 신봉하는 서양의 인식에서 맹인이 총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식의 상상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상상의 한계라기 보다는 문화의 한계에 속한다.


사무라이 영화에서 맹인 검객을 상상한다는 것은 가능하다. 상상의 무한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성격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맹인 검객을 가능하게 하는 일본적인 문화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우선 <무사의 체통>이란 일본 영화에서 맹인이 된 미무라의 정신 상태를 살펴보는 것은 맹인 검객의 탄생과 관련하여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고 하겠다. 미무라가 맹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바로 정신이었다.


“같이 죽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라. 승리는 그 가운데 있으니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한 생즉사의 정신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미무라가 스승의 도장을 찾아가 들은 이 말속에는 죽음을 무릎 쓴 결의 이상을 읽을 수는 없다. 이러한 결의가 실상 맹인 검객의 미묘한 신기를 설명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즉 미무라에서 자토이치로 이어지는 미묘한 신기를 생즉사라는 정신력 하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또는 복수심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불타오르는 복수심이 정신을 고취시킨다고 해도 맹인이 정상적인 검객을 당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분노가 정신을 혼란시키고 흐트러뜨리는 요소로 작용하기가 더 쉽다. 


그렇다면 맹인 검객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일본의 긴장의 문화와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일본 문화를 축소지향적인 문화라고 말을 하지만 이 축소의 지향은 긴장감을 동반한다. 상식적인 생각으로도 확대는 이완을 축소는 긴장을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작은 공간에서 긴장을, 넓은 공간에서 이완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우가 아니겠는가?


일본 특유의 긴장문화를 만들어 낸 모체로 이어령씨는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의 사상과 세이자(일본특유의 정좌법으로 무릎을 꿇고 않는 좌세)를 들고 있다. 이어령씨는 “시간의 축소지향인 이치고이치에의 문화와 공간의 축소지향인 세이자이 문화가 일상적인 생활어에 나타난 것인 ‘잇쇼켄메이’ 라는 말이다”(축소지향의 일본인,p.215) 라고 했다.


[잇쇼켄메이(一生懸命)는 한 곳을 생명을 걸고 지킨다는 뜻으로 일본인의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정신이다. 좋은 의미로는 자신의 맡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이지만, 일본의 침략주의와 맞닿아있는 정신이기도 하다.]


정신의 축소지향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이치고이치에의 사상을 이어령씨는 ‘다도’ 와 ‘죽음’ 의 예로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도 문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넓은 공간을 축소해 다다미 4조 반의 좁은 공간으로 만든 ‘다실’ 은 두말할  것 없이 ‘공간적 축소지향’ 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응하는 ‘시간적 축소지향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다도에서 말하는 ’이치고 이치에(一期一會)‘ 라는 정신이다. 시간을 축소하면 일순이 된다. 단 한 번 밖에 없는 시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창백한 번갯불. 다도란 그 일순의 빛 속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만남이요, 그 마음이다.“(축소지향의 일본인, p, 210).


이치고이치에의 사상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이어령씨의 글을 좀 더 인용해 보기로  하자.


“다회의 만남이 일생에 단 한 번의 만남이라는 ‘이치고이치에’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곧 다실에 끌어들인다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이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단절의 벼랑이며, 다시는 재현이 불가능한 일순간의 섬광이므로 그것을 느끼며 만나는 사, 람들은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축소지향의 일본인, p.212)


이러한 긴 인용은 다도와 마찬가지로 검도, 즉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를 설명해 보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치고이치에의 정신만으로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본다. 또한 검도 지식 외적인 것으로 검도를 논하는 우스운 꼴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어령씨의 글에서 받은 어떤 통찰이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를 일부분 해석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또한 일본인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으로 유용하다는 판단이다.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는 일본적인 긴장감 또는 비장감, 즉 이어령씨가 언급한 이치고이치에의 정신과 맞닿아 놓는다는 것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고 본다. 다도(茶道)와 마찬가지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검도(劍道)의 세계에서 이치고이치에의 정신은 더욱 더 정합성을 띈다고 할 수도 있다. <무사의 체통>에서 미무라의 생즉사의 정신이란 이치고이치에의 긴장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고이치에의 정신은 자토이치에서는 더욱 세련되게(영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검을 휘두르는 행위가 차를 마시는 행위처럼 이치고이치에의 정신 속에서 일순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축소된 시간, 즉 일순, “단 한 번 밖에 없는 시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창백한 번갯불‘을 응시하거나 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검으로 ’베어내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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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7 15:53

[일본영화] 무사의 체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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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의 체통(2)


일본이 진정으로 무사의 체통을 찾는 길은 군국주의에 대한 참회라고 강조한 글을 썼다. 이것은 영화외적인 상황을 영화 해석의 수단으로 이용한 경우이다. 그러나 영화를 지나간 과거의 틀로만 해석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니 바람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우리처럼 사무라이에 대한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나라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화 자체를 통해 일차적으로 영화를 해석할 것이다. 그러다 해석의 방법을 다양화해가다보면 일본의 군국주의와 대면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영화외적인 상황을 영화 해석의 근거로 삼든, 영화 자체를 해석의 근거로 삼든 보는 이의 다양한 시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영화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혼돈에서 질서가 생겼듯이 한 편의 영화도 수많은 해석에 의해 의미들이 생산되는 것이다. 해석에 의해 의미가 명료해 질수도 있고 더욱 불명료해 질 수도 있다. 전문가들의 이론에 기반을 둔 난해하고 현학적인 영화 해석이 후자의 경우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다양한 여러 해석들, 심지어 난해하고 현학적인 해석조차 하나의 텍스트로 귀를 기울이는 개방된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어느 민족이고 타민족에게 너그럽지 않다는 것은 역사의 수많은 전쟁들과 분쟁들이 증명해 준다. 심지어 민족 간에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다. 인간은 왜 같은 동족에게 칼을 들이대고 총부리를 겨냥하는가? 이 질문은 인류가 풀어야할 영원한 과제가 아닐까 한다.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도 결국은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정착한 것이다. 같은 동족에게 피를 요구하는 문화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가 오랜 전통이 된 것은 그 시대적인 상황을 배우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사무라이를 있게 한 시대적인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기에는 지식이 너무 짧다. 따라서 영화에 나타난 사무라이와 사무라이의 생활, 그리고 일반적인 일본 문화에 대한 몇 가지 인상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하나의 문화로 사무라이 문화를 이해하게 될 때 <무사의 체통>은 좋은 자료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 동시에 일본 문화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우선 <무사의 체통>을 통해 사무라이의 생활이 대단히 절제 있고 금욕적임을 알 수 있다. 미무라가 먹는 음식이나 입는 옷, 행동과 말씨를 통해 사무라이의 생활이 금욕적임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미무라의 식사가 스님의 탁발을 연상시킬 정도다. 이러한 사무라이의 금욕주의는 가마쿠라 시대(1192~1333)의 금욕적인 군사규율과 무로마치(1336~1573) 시대에 불교의 영향을 받아 사무라이 문화로써 무사도의 경지로 정착되는데 <무사의 체통>은 그러한 사무라이의 무사도(武士道)를 잔잔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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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http://www.news365.com.cn/wxzt

대개의 사무라이 영화가 그렇지만 사무라이의 위계질서와 규율은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다. <바람의 검>에서 사무라이의 그러한 엄격한 규율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사무라이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서의 작은 실수도 할복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만회한다. 주군의 식재료로 싱싱하지 못한 붉은 골뱅이를  선택한 식재료 담당자가 할복하는 것이 그렇다. 결과적으로 붉은 골뱅이를 먹은 독미역사인 미무라 신노조가 맹인이 되고 사무라이로서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러한 실의는 전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데서 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마다에게 복수를 불태우면서 비로소 사무라이로서 살아나는 듯하다. 맹인이지만 무사의 체통을 회복하려는 미무라의 모습에서 무사도를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맹인 무사의 주제는 <자토이치>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또한 검도 도장에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부탁하면서 스승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리고 미무라가 되풀이 하는 과거 스승으로부터 들었던 말에서 무사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알겠냐. 미무라. 목숨을 주고받는 진검승부는 도장에서의 검술과는 다르다. 상대는 무엇을 할지 몰라. 칼끝을 피하지 마라. …… 너는 죽을 각오가 되었고 상대는 사는 것에 집착하고 있어. 그것 밖에 없다. 네게 기예를 전수할 때 전해줬던 말이 있었다. 기억하느냐?”

“같이 죽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라. 승리는 그 가운데 있으니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산다.” 


그리고 시마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독미역사의 권태로움에서 깨어난 무사도의 외침이며 무사의 체통과 명예를 지키려는 사무라이의 전의인 것이다.


미무라에게는 토쿠헤(사사노 타카시)이라는 몸종이 있다. 토쿠헤이(천민)의 존재는 사무라이의 신분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초부터 사무라이는 지방귀족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농부, 장인, 상인들을 지배하는 계급으로 급부상한다. 실제로 부유한 상인이나 장인들이 사무라이와 혈연으로 맺어져 권력적인 기반을 닦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무라이 계급도 일반사병과 가신(家臣), 제후(諸侯)그리고 쇼군(將軍)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으로 분화되어 있긴 하나, 아무튼 사무라이가 존경의 대상이 된 것은 분명하다. <바람의 검>에서 몰락해가는 사무라이를 보게 되는데 사무라이의 몰락은 18세기 메이지유신으로 근대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 이르러서이다.


미무라는 주군으로부터 봉록을 받는 무사로 주군의 식사에 든 독을 감별하는 독미역사이다. 그런 하위 사무라이가 몸종을 이끌고 있는 것은 사무라이의 계급적인 위치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무사의 체통>에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절대적인 복종이 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는 분명하다. 아내 카요(단 레이)는 미무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이 보일 정도이다. 위계질서하의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카요의 바짝 엎드린 인사법을 통해 볼 수 있는 복종적인 여자의 이미지를 현대 일본 여성의 이미지와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사마다가 아내 카요를 성적으로 농락한 것은 맹인이 된 자신을 농락한 것과 같은 차원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자의 부정이 남편의 체통과 명예와도 관련이 되어 칼로 체통을 회복하는 것이 사무라이의 보편적인 방법인 것에도 무사도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또 하나의 것은 신사에서 발견한 스님의 존재이다. 카요가 남편의 건강을 위해 신사에서 기도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스님이다. 신사와 절이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지 아니면 신사와 절이 공존하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지만 토속적인 일본의 신앙과 외래 종교 불교가 만나 어떠한 형태의 종교를 만들어 내는지 호기심을 자아낸다.


지나쳐 버린 것들이 더 많을 것이다. 또한 이면의 의미를 통찰하기보다 표면의 인상만을 읽은 것이 안타깝고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이러한 호기심을 가지고 일본인과 일본 문화를 차근차근 알아보는 과정이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일본 영화를 보는 감동과 함께 재미중에 하나가 아닐까 한다. (*)


(2008.2.27.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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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3 21:24

[일본영화] 클럽 진주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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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http://www.movist.com/movies




클럽 진주군(3)

여성적인 손길로써의 음악

모든 인간들이 만든 이야기는 곧 관계를 의미한다. 관계가 없는 이야기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사물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거나 화해를 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사랑하고 증오하거나 하면서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 또한 이야기가 전달되지 못한다면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없다.

영화도 일종의 이야기이라면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아무리 자연만을 담았다 하더라도 그 자연은 감독의 시선과 관계하고 있으며 관객과의 관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담고 있는 관계들, 특히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영화의 내용(사건)을 만들고 의미를 생산해 내는 영화 그 자체라고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조명이나 촬영기법이나 언어 등 영화의 장치들은 이러한 관계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부수적인 장치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부수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영화 일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클럽 진주군>에 있어서도 영화에 드러나는 여러 관계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덧붙여야 할 것은 관계는 또한 구성(형식미)과도 긴밀하게 관련이 되어 있기에 영화의 형식 이해에도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러한 영화의 기법적인 이해는 영화 비평가나 전문가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   

<클럽진주군>에서 인간의 관계들은 전쟁의 비극이 잉태한 절망적인 현실에 부단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 추상적인 전쟁의 비극이 인간들의 관계들에 의해서 구체화 되는 것이다. 시장의 인간 군상이나 거리의 부랑자들, 버려진 아이들, 겁탈당하고 성을 거래하는 여자들을 통해 생생하게 시각화 되는 것이다. 영화의 생동감으로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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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관계의 성격에 대해서 말하자면, 전쟁의 비극이 잉태한 절망적인 현실에서 그 관계들이란 대체로 부서지고 단절되어 있다. 관계 단절의 극단적인 양상은 죽음인 것이다. 신체의 일부가 훼손된 것은 그 신체를 훼손한 자의 상처이며 관계의 파괴인 것이다. 여자를 겁탈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비극을 보면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는가? 왜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인간에 대해서 회의하거나, 절망하기도 하면서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관계를 회복(복원)하려는 노력이 존재하기를 바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노력이 존재하는데, 그 노력의 중심에 음악이 존재하는 것이다. 음악은 폭압적이고 파괴적인 남성에 대해 부드럽고 평화로운 여성적인 것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남성적인 마르스에 대한 여성적인 아폴론의 부활인 것이다. 이러한 여성적인 것(음악)의 부활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창녀가 유곽앞에서 술 취한 미군에게 겁탈 당하려는 여자에게 냉소적으로 내뱉는 대사에서 아주 인상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일본이나 네가 좋아하는 미국이나 병사들은 다 같아. 전쟁을 시작한 것은 남자니까! 그러니 어쩔 수 없어 일본은 졌으니까.”

음악으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lucky strike라는 악단으로 조직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 회복(복원)의 상징적인 의미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은 관계들의 조화를 통해 탄생하기 때문이다. 음악(여성)은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지면서 관계를 복원시키는 것이다. 음악을 통한 이 젊은이들의 작은 노력은 그래서 큰 공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소죠는 음악을 통해 원폭피해자인 여동생과의 관계를 복원하려고 하며, 아키라는 피아노를 통해 동생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다. 물론 히로유키의 죽음과 이치조와 형과의 불화는 관계 복원에 실패하고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커다란 힘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켄타로와 러셀의 음악을 통한 관계 회복(복원) 이나 소통도 인간성 회복이나 인류평화라는 보편적인 의미로 확대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회복(복원)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우리에게는 재미와 감동 같은 의미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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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31 15:58

[일본영화] 클럽 진주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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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진주군


1.영화 또는 역사적 사실 해석의 인류 보편적 가치

영화를 어떻게 보느냐는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사실에 대한 해석만큼은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개인의 소속이 국가 단위로 확대가 되면서 민족이나 국가 그리고 역사라는 문제가 게재되면 일어난 ‘사실‘ 도 ’역사적인’ 이란 수식을 받으며 ‘역사적인 사실‘ 로 화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민족, 국가 중심의 왜곡된 해석이 서로 충돌하면서 사실에 대한 해석은 공존할 수 없는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느 국가나 민족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민족위주로 해석하려는 국가이기주의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클럽 진주군>은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사실 왜곡과 감정적인 편향을 나타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감독이자 각본을 쓴 사카모토 준지의 사실에 대한 이해가 아무리 객관적이라거나, 그 마음이 따뜻하다고 해도 그 한계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침략 전쟁에 의해 희생된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참회나 반성적 사고가 철저하게 배제되고 단순히 전쟁 피해자로서 일본인의 상처와 승자로 주둔한 미국과의 화해적인 제스쳐 만을 언급하는 몰역사적인 태도가 그의 시각에 배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는 인간을 사지로 내몰아 비인간화시키는 잔혹한 전쟁에 대한 반전 논리가 인류 보편성의 추상성(이데아)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인간의 잔혹한 행위와 비극에 대한 철저한 규명은 그 거대한 추상성의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요구하는 아시아 나라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일본 정부의 사고나 의식과도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일본 젊은이들의 비극적인 삶의 갈래들을 다양하게 드러내면서도 정작 전쟁을 일으키고 타 국가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은 일본제국주의와 잔인하고 잔혹한 인간 본성이나 인간의 행위에 대한 비판이나 성찰은 정치탈색 이란 예술적인 모토 아래 의도적으로 빠트렸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따라서 영화 속의 젊은이들의 삶이 과연 인류가 공감하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지는 아주 의심스럽다. 오히려 보편성의 획득은커녕 역사적인 사실의 왜곡이란 측면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영화라는 창백한 텍스트만을 외부적인 맥락이나 연관성 없이 보는 것도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클럽 진주군>을 영화만으로 보기에는 영화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영향력과 그 파급력을 고려해 본다면 다소의 문제 제기는 필요하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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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영화의 줄거리
이제 이러한 비판적인 전제하에서 먼저 영화의 줄거리를 언급해보고자 한다. 영화는 2차 대전 당시 필리핀의 밀림(필리핀이라는 것은 작중 겐타로의 대사에서 밝혀진다) 속에서  패잔병으로 남겨진 켄타로와 전쟁 종결, 천황 성명이라 적힌 전단지를 뿌리는 비행기로 시작한다. 전단을 뿌리는 비행기에서 울려 퍼지는 재즈 음악과 전단지보다는 재즈 음악에 넋을 잃고 비행기를 바라보는 겐타로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렇게 전쟁이 끝난지 7일 만에 밀림에서 나온 겐타로는 귀향을 하고 버스에 내리면서 마을에서 벌어지는 미군들을 위한 쇼를 보게 된다. 그곳에서 음악 단원으로 콘트라 베이스를 연주하는 고야마 학교 군악대 2기 선배인 히라야마 이치로와 만나게 된다. 그들이 하는 대화는 약간은 심드렁하게 느껴지는데 다소 인상적이라 그 대화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겐타로 이제 돌아 온 거야?”
“저 살아있죠?
“당연하지.”
“이 악단은 뭐죠?”
“악단? 이거 마셔봐.”
“무슨 맛이 이래요.”
“군악대 사람은 지금 재즈로 먹고 살아.”

이렇게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겐타로와 히라야마의 대화는 너무나 일상적이라 권태로움마저 느끼게 된다. 이러한 권태감은 아마 전쟁으로 인한 체념이나 허무감을 반영하기 때문일까? 마셔보라고 준 ‘병콜라’ 나 ‘재즈’ 가 미주둔군과 미국 문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다. 

2년후 1947년(소화 22년 봄) 쇼단을 모집하는 미군 군용 트럭이 나타나고 겐타로, 이치로, 아키라, 쇼죠, 히로유키 등이 미군 기지내  클럽(Enlisted Men's Club)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이중에 트럼본을 부는 히로유키는 클럽내에서 겐타로에게 스카웃(?)되고 밴드의 이름을 담배 이름을 딴 Lucky Strike 정하게 된다. 쇼조(오다리기 조)는 드러머로 모집이 되었지만 실상은 드럼에 문외한이다. 또 이들 외에 비중 있는 등장인물은 밴드(특히 겐타로)와 갈등을 일으키는 대척적인 인물인 러셀이라는 미군이다. 일본 주둔군은 주로 유럽전에 참전한 미군들로 구성되었는데, 러셀의 경우는 예외로 일본군에 의해 동생을 잃어 일본군에 대한 분노가 지배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하나같이 전쟁의 상처들이 있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다. 이들의 음악을 매개로 만났듯이 음악이 주로 상처를 추스르고 위로하는 통로가 된다. 이렇게 음악을 매개로 만난 이들이 전개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우선 그들의 상처를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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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전쟁으로 상처 받은 개인들

겐타로는 필리핀 밀림에서 종전이 된지 7일 후에 미군 전단지를 보고 귀향하게 된다. 영화에서 켄타로의 상처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의 폭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겠다. 필리핀 정글에서의 생명이란 한 낱 피라 목숨처럼 처절했을 것이다. 군악대 단원이었던 겐타로가 부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음악 외에는 달리 없었을 법도 하다. 히라야마는 먹고 살기 위해 재즈를 한다고 했지만 그러한 이유는 어쩌면 겐타로에게는 부차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겐타로의 아버지는 중고 악기점을 경영하고 있고 그다지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음악을 한다는 것이 다소 퇴폐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의미도 부여할 수 있다면 겐타로의 경우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한다.

히라야마 이치로와 아사카와 히로유키의 경우는 (물론 전쟁이 상처의 본질적인 원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치로가 형과의 불화와 갈등(이념적인 갈등)으로 괴로워하고 히로유키가 마약 중독으로 자기 파멸으로 나아가는 것은 전쟁이후의 시대적 상황의 상징적인 의미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치로의 형의 공산주의 이념 신봉과 히로유키의 마약은 음악이나 콜라 아이스크림과는 달리 인간의 정신을 토막내고 경직되게 하는 공산주의 이념과 저질의 미국문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오노 아키라의 쇼조의 경우는 전쟁으로 비롯된 비극적인 가정사가 그들 상처를 잉태하고 있다. 아키라의 경우는 전쟁으로 풍지 박산이 된 가족과 이복 동생의 가출로 상처받고 있고 나가사키 출신의 쇼조의 가족은 직접적인 원폭의 피해자이다. 동생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고 쇼조는 동생의 병원비를 위해 도쿄로 온 것이다.

이 영화는 전쟁의 비극적인 상처를 안고 있는 다섯 명의 일본 젊은이와 한 미군의 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이들의 상처는 다양한 갈래에서 함께 모여 음악으로 그 상처들을 서로 위로하고 있지만 그들 상처를 잉태한 뿌리는 전쟁과 맞닿아 있다. 그 외에도 영화의 군데군데에 기지촌의 여성들, 유기된 아이들, 민중시장, 부랑자들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비극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상처를 품고 있는 그들의 만남과 삶은 전패 이후 상처 받은 일본인이 처한 정신적인 상처와 고뇌의 축소로 읽어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축소가 일본의 민족주의나 국가 이기주의라는 특수성으로 해석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확대지향적인 보편성으로 나아가기에는 이들의 상처가 너무 일본이란 테두리에 머물며 옹색한 자기변명,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시대적인 배경이 1945년을 걸쳐 본격적으로 1947년 봄에서 1950년 여름에 걸쳐있다. 즉 2차 대전의 종결과 6.25 한국전쟁의 발발 사이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은 그 배경 자체뿐만 아니라 그 배경에 놓여있는 인간들의 인식과 사고에 대한 많은 의미 해석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쟁의 비극을 체험한 일본군과 미군에게는 인간과 세계, 죽음과 삶 따위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잉태하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반전사상과 전쟁고발의 주제가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말 할 있으나 이미 언급하였듯이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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