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09.03.03 00:48

11.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음식의 역사 개괄

2.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3.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4.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5.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6.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7.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8.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9.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10.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1.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2.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3.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4.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5.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11.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이미지출처는 여기입니다


“칠면조가 어떻게 ‘turkey' 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는 무성한 추측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가사의한 일로 남아있다. 가장 그럴듯한 대답은 동부 지중해 연안으로 무역여행을 하면서 항해 중에 스페인의 세비야 항에 늘 기항했던 ’터키 상인들‘ 에 의해 칠면조가 유럽에 처음 도착했고(1523-1524년경), 이후에 곧바로 영국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영국인들은 그것의 멕시코 이름인 ’uexolotl' 을 알지 못했거나, 단지 발음하기가 여의치 않아서 그냥 ‘터키새(turkey-bird)' 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것 같다.” (p.292)



더보기


2009/02/13 - [분류 전체보기] - 10.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2009/02/05 - [알아봅시다] - 9.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2009/01/29 - [음식과 건강] - 음식의 역사(7):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2009/01/27 - [알아봅시다] - 음식의 역사(6):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2009/01/23 - [알아봅시다] - 음식의 역사(5):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2009/01/14 - [구슬들] - 음식의 역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Trackback 0 Comment 3
2009.02.13 01:04

10.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음식의 역사



1.음식의 역사 개괄

2.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3.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4.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5.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6.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7.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8.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9.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10.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1.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2.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3.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4.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5.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10.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선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질문과 관련된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이 질문 속의 주체가 되는 ‘선원들’ 이라는 한정된 범주에 국한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여행자들’ 의 휴대식품이 또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선원’이야 말로 핵심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주요한 여행은 주로 항해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항해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쟁적으로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항해의 시대였다. 따라서 장기간의 항해를 해야 하는 선원들의 식량에 대한 관심은 클 수밖에 없고, 그 식량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고 흥미있는 일이아닐 수 없다.


콜롬버스의 산타 모니카호 복원(carrack, 15-16세기에 사용된 대형 무장 상선)


이 책의 5부는 세계의 확장(1500 ~ 1800)이란 하위 제목을 달고 있다. 고상한 표현이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흔히 말하는 식민지 경쟁의 시대라던가, 노예와 학살로 얼룩진 착취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그 원주민들의 학살과 노동력 착취를 위한 북동부 아프리카 흑인 노예무역은 인간의 비인간적 전형이 될 수 있을 정도다. 아마 더 언급하면 잔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 만큼 이 시기는 산업 기술과 무기의 성능이 앞섰던 유럽인들이 다른 대륙을 무력에 의해 식민지화하면서 그 대륙들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착취한 피로 얼룩진 시기였다.

음식이나 식량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비극적이지 않을 수 없다. 유럽인들의 식량 보존과 상업적인 이익을 얻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향로의 획득을 위해 시작된 여행이 결과적으로 학살과 착취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집약적 농산업의 성장과 그에 따른 노동의 필요에 의해 흑인 노예무역이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인의 배불림을 위해 비유럽인들을 굶주림과 죽음으로 내 몬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극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배제된 채 단순히 ‘선원들이 무엇을 먹었나?’ 하는 따위의 질문에 답하려니 약간은 당혹스럽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축소하고 은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럽인의 시각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다.
 


<노예무역>("The Slave Trade" by Auguste Francois Biard, 1840)




흑인 노예들은 싣는 노예선의 단면도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16세기의 배들은 대략 600톤급으로 음식만을 싣거나 저장 시설이 발전했다면 선원들의 어려움은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거운 돛과 그것을 다루어야 하는 선원들과 ‘화물이나 대포‘ 를 함께 실어야 했기에 식량의 부족을 자주 겪어야 했을 것이다. 식량이 부족할 경우 어획물이나 바다새를 먹을 수는 있었지만 식수의 부족으로 인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선원의 식량은 목조 선박이라는 제약에 의해 고려되어야 했다. 첫째는 목재는 물을 흡수하는 자재였기 때문에 식품을 건조한 상태로 유지 할 수 없었다. 장기간의 여행에 있어 건조식품은 아주 유용한 식량이었다. 그러나 목조선박이란 제약 때문에 소금에 절인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선택되었다. 이외에 건조한 완두와 건빵이 소금기를 흡수하는 데 이용되었다. 둘째는, 목조선박의 화재 위험성이었다. 따라서 배안에서 요리용으로 불을 피우는 데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이로 인해 선원들은 바구미가 우글거리는 건빵이나 익지 않은 돼지고기를 먹어야 했을 것이다.


19세기 선원들의 건빵(19th century hardtack, two different styles)


Labskaus(영어명:lobscouse, 북부 독일에서 기원한 음식)

Hamburg-style Labskaus with fried egg, gherkin and rollmops



건빵은 밀가루 반죽을 구워 건조시킨 것으로 먹기 힘들 정도로 딱딱했다. 야채 섭취의 부족으로 가득이나 이가 약한 선원들이 이로 깨어 먹기에는 무리일 정도였다. 손으로 부수기에도 어려울 정도였다. 이 선원용 건빵은 맛과는 상관없이 50년간 선원들의 식량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선원들이 건빵을 먹었던 방식은 이러했다.

“선원들은 건빵을 할당한 소량의 물에 담가서 죽과 같은 맛없어 보이는 음식으로 만든 다음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덩어리나 소량의 식초를 가하여 맛을 내고는, 스킬리골리(skillygolee), 랍스카우스(lobscouse), 또는 스카치 커피(scotch coffee)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불렀다.“(pp.309-310)

건빵이나 소금에 절인 소고기와 돼지고기 외에도 맥주, 버터, 치즈 등이 식품 목록에 기록되어 있는 정도였다. 이러한 식품들은 오랜 항해 동안에 시거나 산폐되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식량 공급은 선원들의 건강에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임스 린드(영국의 로얄 네이비의 의사로, 1747년 과일의 어떤 성분이 괴혈병을 예방한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레이 태너힐이 “식량 조달을 맡고 있는 선주들과 나중의 해군 관리들은 인색한 만큼 상상력도 없엇다” 고 표현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주로 ‘고형의 값싸고 부피가 큰 식품‘ 을 공급했기 때문이었다. 고작 ’선의(船醫)의 필수품’ 을 가장해서 양념들이 실리기도 했으나 일반 선원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소금이나 전분 위주의 식사에 도움이 되는 설탕이나 건포도는 식품 목록에서 빠졌는데 사치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신선한 야채나 과일은 커녕 제대로 조리된 음식을 장기간 먹지 못하는 선원들은 비타민C의 결핌으로 인한 괴혈병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바스코 다가마의 ‘최초의 탐험 항해‘에서 선원의 반 이상이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위의 이미지들은 모두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Trackback 0 Comment 0
2009.02.05 01:08

9.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9.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
    했을까?

1.음식의 역사 개괄

2.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3.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4.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5.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6.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7.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8.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9.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10.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1.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2.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3.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4.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5.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미션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스페인의 선교사들이 남미 원주민들을 교화하는 희생적인 모습을 아주 스텍터클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남미의 문명은 식인이 보편화 되어 있었고 야만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인 정복자들이 그들의 학살과 문명 파괴를 ‘신의 벌‘ 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도 이러한 원주민들의 식인풍습과 야만성에 근거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The Sacred Cow and the Abominable Pig : The Riddles of Food and Culture,1985)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목격한 부족 원주민들의 식인 풍습의 많은 사례들이 인용되어 있다. 이 식인풍습의 목격담은 심장이 서늘해 질 정도다. 이러한 인용들 가운데 하나를 좀 길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예수회 신부였던 주앙 데 이스필쿠에타 나바로(Juan de Aspilcueta Navarro)가 1549년에 오늘날의 살바도르 시 근처의 한 마을에서 본 목격담이다.

“……내가 도착하자 그들은 그들이 이제 막 한 소녀를 죽이는 일을 마쳤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그 집을 보여주었다. 그 안으로 들어 간 나는 그들이 그 소녀를 먹기 위해 요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그 머리가 나무에 걸려 있었다. 나는 이러한 혐오스러운 일과 이렇게 자연에 위배되는 일에 대해 그들을 꾸짖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런 뒤 나는 다른 집으로 갔는데 거기서 나는 사람의 발과 손과 머리들이 연기 속에서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19세기 후반 식인풍습의 분포도

이미지 출처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이러한 목격담들은 그 사실을 반박하기 힘들도록 만들고 있다. 따라서 ‘미션’ 이 보여주는 선교의 의미는 상당히 의미있는 백인들의 자기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사냥에 나섰던 유럽의 ‘정복자’들은 식인 풍습 이상의 잔혹한 짓을 또한 했음을 숨겨서도 부정하거나 부인해서도 안된다. 신대륙의 발견에 대해 백인들이 부여하는 의미는 실상 수많은 학살과 문명의 파괴를 가리는 경우가 많다.

『음식의 역사』(Food in History) 이 책에는 질문에 대한 답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지는 않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삶과 문명 파괴의 구체적인 원인들과 그 역사적인 기록들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단지 이 책의 내용의 행간을 통해 답을 구성하기는 좀 어려웠다. 단지 한 군데 적절한 답을 발견할 수 있어 그 나마 다행이었다. 그 내용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코르테스 시대 이전에는 중부 멕시코의 주민이 2,500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으나, 30년 후에는 600만명 남짓으로 줄어 들었다. 그리고 1605년경에는 단지 107만 5천명 밖에 남지 않았다. 전쟁, 경제적 대변동, 착취, 새로운 질병들에 대하여 중앙아메리카의 주민들은 아무런 저항력이 없었고, 이 모든 요인들이 결합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재난의 하나를 초래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를 두고 냉혹하게도 ‘신의 벌’ 이라고 말했다.(p.295)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Trackback 1 Comment 4
2009.01.23 21:17

음식의 역사(5):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1.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2.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3.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5.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6.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7.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8.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9.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0.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1.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2.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3.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4.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유럽 전체와 아드리아 해와 지브롤터 해협 사이에 살고 있던 모든 야만 민족들은 일체가 되어 이동했다…… 온 가족을 이끌고 유럽의 모든 나라를 가로질러 행진하면서…… 그들은 어깨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열광적이고 열정적으로 모든 도로에 모여들었다. 이 전사들과 함게 많은 민간인들이 왔으며, 그 숫자는 바닷가의 모래알과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다.”
 


1차 십자군 원정 중 안티오크 포위 공격, 중세 세밀화.(The Siege of Antioch, from a medieval miniature painting, during the First Crusade.)
 
 
 

비잔틴 황제의 딸인 안나 콤네나는 최초의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p.224)

안나 콤네나의 묘사는 십자군을 야만 민족이라 비웃고 있지만 ‘열광적이고 열정적으로‘ 란 표현에서는 어떤 두려움이나 심지어 경외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어떻게 유럽의 ’야만족들‘ 은 십자군과 같은 ’모험적인 계획’ 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십자군 원정은 대단히 힘들고 심지어 무모하달 수 있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계획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생겼을까?



휘어진 보습이 달린 중국 철제 쟁기, 1637
(Chinese iron plough with curved mouldboard, 1637.)

 




소들이 끄는 보습 쟁기. 브리티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6세기 초 중세 영시 원고의 삽화 ( Ploughing with oxen. A miniature from an early-sixteenth-century manuscript of the Middle English poem God Spede ye Plough, held at the British Museum)





바로 이 힘이 쟁기에서 생겨났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중세의 농업 혁명을 구체화한 도구는 평범하게도 새로운 형태의 쟁기였다.“(p.230). 수메르 시대 이래로 쟁기는 그 기능과 모양이 꾸준히 개선되어 왔지만 실제적으로 땅을 갈기에 힘든 막대기에 지나지 않았다. 16세기경에 북동부 지역의 슬라브족은 이전의 쟁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쟁기를 개발했는데, 바로 이것이 '보습 쟁기(moldboard plow)' 였다. 이 보습 쟁기로 인해 땅의 깊은 부분을 파내면서 경작지의 면적을 획기적으로 넓히면서 식량의 증가를 가져왔고 이어 인구의 증가를 불러왔다. 예를 들어, 17세기 말엽에 독일의 한 지역의 인구는 로마 시대에 비해 4배나 증가하였다. 보습 쟁기의 출현은
북부 지방에서 단순히 식량과 인구의 증가뿐만이 아니라 생산성이 높은 3부작을 가능하게 하였고 더 많고 더 질좋은 곡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단백질 섭취의 증가는 건강 증진, 열량 섭취 증가, 정력의 강화를 의미했다. 3부 윤작을 하는 토지 - 예컨대 샤를마뉴 대제의 프랑크 왕국 - 에서는 사회 자체도 더 부강해졌다. 한 과학기술 역사가가 표현한 대로, 북부의 민족들은 곧 모든 면에서 ‘원기왕성(full of beans)' 해졌다 ”(pp. 232-233) 이렇게 무역과 농업혁명에 따른 식량의 증가와 영양의 섭취는 유럽인들의 수적인 증가와 함께 더 정력적이고 활동적으로 되었다. 이렇게 쟁기에 의해 촉발된 인구의 증가와 육체적인 힘의 활동력의 증가가 십자군 원정을 가능하게 한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위 그림들의 출처는  모두 위키피디아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Trackback 0 Comment 2
2009.01.22 00:07

음식의 역사(4) :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2.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3.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5.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6.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7.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8.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9.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0.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1.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2.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3.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4.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음식의 역사(4) :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기원전 10,000를 전후한 신석기혁명과 함께 인간의 농경과 목축이 발전하고 농경지를 중심으로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식량의 생산량은 급속하게 증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지를 중심으로 한 정착은 토지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목축 또한 목초지를 고갈시키게 되어 농경지를 중심으로 한 정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화전민이나 반 유목적인 생활을 영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의 증가와 음식 요리법의 발달은 인구의 증가와 인간의 문명을 형성하는 계기 되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 초기의 수천 년은 발견과 확장 그리고 파괴의 기간이었다. 곡식의 새싹이 돋아나는 넓은 들판은 해충의 번식을 부추겼고,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들은 설치류를 급증시켰다. 농경은 단지 토양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져가는 데만 급급했고, 그 대가로 되돌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토지를 소모시키는 데는 2~3년 밖에 안 걸리지만 그 땅이 재상되는 데는 50년이나 걸린다. 신석기시대의 중심지역에서는 우선 대지의 나무와 잡목들을 다 베어버리고, 그 다음 지나치게 땅을 혹사시키고, 또 가축들이 풀을 뜯어먹게 했다. 그러자 대지는 점차 사막으로 변해갔으며 경작할 수 있는 땅은 자꾸 줄어들었다. 신석기 혁명은 현대문명의 기초를 쌓았지만, 20세기의 인간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의 절박한 생태학적 문제들의 원인을 낳기도 했다.”(p.67)

농경이 최초로 발달한 중동의 경우 기원전 5000년 경, 현재의 페르시아 만 위쪽에 있는 쿠지스탄(Khuzistan)이라고 알려진 지역에서 제방을 터서 물을 공급하는 작은 수로 기술을 개발했다. 이 수로의 개발로 강의 양쪽 3마일에 걸친 토지에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개기술의 발달은 몇 가지의 결과를 낳았는데, 첫째로, 수확량의 증가, 둘째로 도시가 형성되고 수메르와 같은 문명을 탄생하는 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중동의 사막화를 초래한 사막화를 불어왔다. 관개에 의존하여 형성된 국가들은 국경을 넘어서 새로운 토지를 찾아야 했으며 이것은 제국의 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경우는, 신석기 혁명들의 결과들이 기원전 5000년경에 중동으로부터 수에즈의 지협을 건너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밀과 보리가 잘 자란 덕택에 단지 몇 세기 동안 인구가 100배 이상 증가했다.” (p.72)기원전 3000년경에 이집트의 농부는 가족들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식량보다 3배나 많은 식량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잉여 생산물의 대부분은 홍수를 통제하는 사업, 대규모 공공건축사업, 피라미드 등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메리카의 경우는, 혁명의 흔적들이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기원전 7,000~9,000년에 멕시코 타마울리파스 산맥의 둥굴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채집과 더불어 작물들을 배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6,000년경에는 테우아카 계곡에서 옥수수를 재배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아시아는 아메리카 대륙보다도 신석기 혁명에 관한 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 "선사시대 아시아의 음식에 관한 정보의 결여는 인도와 중국의 경우에 특히 불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인더스강과 황하유역의 위대한 문명들이 역사의 무대에 돌연히 그리고 장엄하게 등장했는데, 이들은 선례가 없을 만큼 충분히 발전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식습관에 대해서는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p.75)

특히 기원전 3,000 ~ 기원후 1,000년에 걸쳐 중동, 이집트, 중국, 유럽의 문명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수메르와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에 장거리 무역을 시작했다. 2000년 후 그리스도 식량 공급을 위해 페니키아인들을 앞세워 지중해의 대부분의 국가와 무역을 해야만 했다. “로마 역시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수세기 동안 밀의 공급이 행정, 경제에, 국제적 정책을 수립하는 데 지배적 역할을 했다. 로마 제국의 대부분 국경지방은 고대 세계의 밀 재배지역들의 경계와 거의 일렬로 접해 있다.“(p.83)

신석기 혁명이 시작되고 인간의 문명이 형성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국가와 국가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식량의 무역과 함께 팽창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후 수세기의 발전을 서술함에 있어 세계의 지역적인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중세 이전의 아시아와 아랍을 거친 후 이 책이 도달하는 시대는 1,000 ~ 1,500경의 중세 유럽이다. 이후 세계의 확장편(1,500 ~ 1,800)에서 다시 아메리카, 인도, 중국이 등장하지만 유럽이 중심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팽창을 이 책의 행간을 통해 지속적으로 암시받고 추측하고 해석할 수 있으나 좀 더 꼼꼼하고 확신적인 정리를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음식과 관련된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의 기술은 중세 유럽에서 발전한 농업 혁명 이후 급속하게 증가한 인구와 도시의 팽창을 중심으로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6세기 북동부 지역에서 시작한 중세의 농업 혁명은 식량의 공급를 획기적으로 증가시켰고, 이 결과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또한 “새로운 농업 체계는 간접적으로도 마을과 도시의 부활에 기여했다. 이전에 토지를 경작하던 농부들은 자신의 다리나 느릿느릿 움직이는 가축 이외에 다른 운송 수단이 없었다. 그러나 귀리가 새로운 윤작 시스템에서 중요한 작물이 된 것은 말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된 부분적인 이유가 되었다. 말은 농사일이나 짐을 나르는 일 외에도 유용한 교통수단 역할을 했다. ...... 이제는 말을 들에서 떼어 놓을 수 있을 때면 언제든지 더 빨리, 그리고 더 자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p.225)

이렇게 기동력이 원활해지면서 시장을 자주 이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시장의 규모도 대규모화 되었다. “한 도시의 번영은 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강도 및 폭력조직의 협박에 대항하여 노점상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엄중한 경계를 취해야 했다. 그 결과 고대 그리스와 유사한 ‘시장 평화’ 가 확립되었는데, 이 새로운 기독교 세계에서는 시장에 세워진 십자가에 의해 상징화되었다.”(p.235) 시장의 확대는 도시 자체에 활기를 불어 넣으면서 콘스탄티노플이나 베네치아 같은 대도시들이 형성하기 시작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Trackback 0 Comment 0
2009.01.18 12:47

음식의 역사(3):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1.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2.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3.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5.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6.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7.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8.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9.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0.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1.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2.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3.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4.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 일까?

요리법의 발달은 인간의 건강을 비롯한 생존방식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가져왔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특히 인간이 날 것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던 질긴 고기는 인간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수명을 단축시켰을 것이다. 이와 위의 손상, 또는 신경과 조직의 손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생존을 위해 먹은 음식이 사실상 생존을 단축시키는 아이러니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날것을 먹어야 했던 우리의 선조들이 불을 발견하고 우연하게 익힌 고기를 접하게 되면서 요리를 할 수 있게 된 역사적 사실은 실제 어떠한 역사적인 발견보다도 우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리법의 개발은 기원전 500,000년경과 네안네르탈인이 선사시대의 무대에 모습을 나타낸 어느 시기에”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사시대에 요리법에 관한 정보는 거의 찾을 수 없다 불을 사용해 음식을 익혀 먹기 시작해 토기를 발명하기 까기 수 만년 동안 요리의 변화상은 단순히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부언하는 말 같지만 『음식의 역사』의 내용을 따라 추측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불의 발견은 곧 굽는다는 행위와 직결된다. 즉 구이가 인간들에겐 최초의 요리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이는 고온으로 인해 그 양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타다 남은 불에서 구운 고기가 손실이 적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타다 남은 불에서 단단한 뿌리식물을 요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다음의 변화에 대해서는 고고학자들은 진전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요리법은 고고학적인 흔적을 남기지 않기에 확인해 볼 수도 없는 일이다.

기원전 6000년경에 토기가 발명되었는데, 그 발명의 영감은 흙투성이 돼지새끼를 진흙덩이 위에 놓고 구웠을 때 깨끗한 상태로 구웠을 때 보다 수분이 더 많이 남고 맛있다는 것을 알고부터였을 것이다. 토기와 관련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돌니 베스토니체(Dolni Vestonice)에서 기원전 2500년으로 추정되는 화덕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는 2천여개의 불에 구운 점토덩어리들이 들어 있었다. “이 점토들은 동물의 머리, 몸통, 발 등의 형상을 한 작은 모형들이었다.“(p.50) 우크라이나에서도 화덕이 작은 구덩이 같은 형태로 존재했으리라 추측된다. 이 작은 구덩이들에는 ‘예열된 뜨거운 숯이나 조약돌‘ 로 채워져 음식을 익히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런 구덩이 요리법은 선사시대의 부족이 광활한 지역을 거쳐 이동할 때 소란스러운 모닥불로 요리하는 방법을 피하고 불꽃을 숨기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불을 피우는 방법을 개발 했을 것 같다.

굽는 것과는 달리 끊이는 방법에 대한 정보는 더욱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불이나 굽는 방법은 우연의 결과라고 할 수 있으나 뜨거운 물은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접하기 어려우며 특히 불과 물에 견딜 수 있는 용기의 발명은 우연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요리법은 증거가 발견된 기원전 5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이전에 삶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도처에 있다. 거북의 창자를 잘게 다져 만든 아마존의 요리인 사라파텔은 거북의 오목한 등껍질을 그릇처럼 이용하여 끓여졌다. 아시아에서는 대나무를 사용하였는데 인도네시아는 아직도 이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 또한 기원전 7000년경 중앙아메리카의 테우아칸 계곡에서 돌그릇과 돌냄비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토기와 청동기 이전에 널리 사용된 것은 동물의 위였다. 유목민인 스키타이족은 기원전 5세기에 위 속에서 음식을 요리했다고 한다. “기원전 13000년경에는 가죽 가공기술이 대단히 진보하여 가죽이 예전의 여러 가지 용기를 대처하게 되었다고 한다.”(p.53)

곡물요리의 경우는 단순히 불에 굽는 사냥한 동물의 원시적인 요리와는 달리 까다로운 곡물 처리로 인해 동물에 비해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이 필요했다. 그 이유는 야생곡식 자체가 실제로 인간이 먹는 배를 배유라는 전불질 속에 들어있고, 이것을 다시 얇고 거친 까끄라기가 감싸고 있고 다시 전체적으로 왕겨로 싸여있었기 때문이다. 야생 곡식은 그 왕겨를 제거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인간은 이삭을 구워주면 왕겨를 제거하기가 쉬워진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고대 시리아의 무레이바트(Mureybat)에서 구덩이에 가열한 돌을 깔아놓고 이삭들을 탈곡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탈곡도 까끄라기나 왕겨가 잘 없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는 탈곡법이 발명되었는데 이집트의 콤 옴보(Kom Ombo), 나일강 상류의 사하바(Sahaba) 퇴적평원, 요르단 계곡의 말라하, 이라크의 자위 케미 샤니다르(Zawi Chemi Shanidar)에서 발견된 절구와 비벼대는 돌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곡식을 두 개의 돌 사이에 두고 비벼대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밀과 보리를 탈곡한다고 하더라도 날곡식과 인간의 소화기관은 잘 맞지 않아 곡식을 요리하는 방법이 개발되어야 했을 것이다. 동물요리와는 달리 작은 낱알들로 이루어진 곡물의 요리는 용기 문제가 걸림돌이었다. 곡물을 불 위에 직접 굽기가 어려웠고, “뜨거운 바닥돌은 종자의 양이 한두 줌 보다 많으면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 문제를 무시해도 좋을 곡식 요리법이 한 가지 있었다.“(p.60). 이것은 실수(?)에 의한 발견으로 탈곡을 위해 가열한 돌바닥에서 왕겨가 떨어져 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과열로 인해 밀이 구워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발견되어 돌바닥에서 탈곡이 되면서 구워진 밀은 소화하기에도 좋고 그 자체가 요리가 되었고 맛이 좋았지만 너무 건조해서 먹기에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이것의 해결방법으로 발명된 요리법이 탈곡하고 구워진 밀에 물을 붓고 그 혼합물을 주물러 반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렇게 반죽한 곡물반죽 덩어리는 그야말로 곡물 요리의 혁명적인 발명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것은 그 맛에 있어서는 고대 식사의 기본적 품목이었던 곡물 반죽인 그리스의 마자(maza)나 로마의 풀스(puls)와 거의 비슷한 것이었으며, 질감에 있어서는 오늘날에도 티베트에서 즐겨먹는 트삼파(tsampa)와 비슷했을 것이다.”(p.61)

곡물 반죽의 발명 또는 발견은 음식의 역사에서 곡물을 인간이 가공한 효율적인 요리법으로 오늘날까지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발명된 선사시대의 밀가루 반죽은 기원전6,000 진정한 토기의 발명으로 그 보존과 응용이 가능해졌을 것이다.

“마침내 토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자 요리사의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방열, 방수용기들이 원활하게 공급되어 용기들이 쉽게 깨어지더라도 손쉽게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곡식에 다량의 물을 넣고 끓이기, 소량의 물을 가하여 부글부글 삶기, 고기와 곡식으로 스튜 만들기, 납작한 빵을 더욱 맛있게 굽기 등등 여러 가지 새로운 요리법을 개발하고 이전의 음식들을 개선하는 일들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토기가 깨지지 않는 금속용기로 대체되면서 현대적인 요리가 발달하기 시작했다.”(p.63)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구슬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식의 역사(3):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2) 2009.01.18
독재자들  (0) 2009.01.17
말 할 수 있는 죽을 동물  (1) 2009.01.14
음식의 역사  (1) 2009.01.14
내게 남는 것 3가지  (0) 2008.11.08
유대인  (2) 2008.11.07
Trackback 0 Comment 2
2009.01.14 19:26

음식의 역사

음식의 역사
Food in History

래이 테너힐의 Food in History(음식의 역사, 손경희 옮김)를 읽으면서 음식이 단순한 인간 문명의 부산물이거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의 역사에 상호 영향을 끼쳐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가 과거와 미래의 대화’ 라는 카의 명언에 음식의 역사를 적용해보면 인간의 역사가 생물적인 한계와 관습을 가지는 보다 유기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역사의 모습을 제공해 주는 듯하다. 단순히 ‘대화’ 라는 유기적인 역사인식 보다 더 나아가 마치 역사가 우리의 식탁위에 놓여있다는 일상성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이러한 느낌은 음식이 갖는 친밀감 때문일 것이며 삶의 현장이 곧 음식을 제공해주는 자연, 곧 현재의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그 공간과 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의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과거의 거대한 정치적인 사건이 학습과 이성으로 그 심각성과 교훈이 전달되는 것과는 다른 이치이지 싶다. 단순이 요리의 레시피와 조리과정을 소개하는 요리책과는 다른 재미였다. 과장된 예가 되겠지만, 인간이 영양실조에 빠져 침대에 누워있다면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물로서의 인간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그 에너지의 충족 여부에 따라 행동이 유발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음식의 역사가 여러 인간 역사의 한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은 진실일 수밖에 없다.

특히 식량(음식)이 인간의 생존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시기에 식량의 획득이야말로 인간 생존의 본질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인간의 역사가 음식의 역사와 동질적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좀 더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하고 삶이 풍요로워지면서 다양한 생존 요소들이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음식이 차지하던 절대적인 중요성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음식이 인간 생존의 수단인 이상 그 관계는 여전히 변함이 없으리라고 본다.

이렇듯 인간의 역사에 있어 음식이 미친 영향은 곧, 인간의 생물적인 조건이나 환경이 인간의 역사를 해석하는 여러 단서들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목격한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저자의 말」의 서두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음식의 역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간단한 주제를 다룬 선구적인 저작이다. 이 책을 쓴 목적은 인류의 3만 년 역사를 통하여 식생활의 특성을 형성해 온 영향 요인들을 조사하고, 보다 많은 양질의 음식에 대한 추구가 역사의 진행 방향에 때로는 결정적으로 또 대개는 미묘하게 작용하게 되는 경로를 쉽게 설명하려는 데 있다. 요컨대, 어떤 면에서는 음식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임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글을 읽는 내내 참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이를테면, 쟁기와 십자군 원정의 관계, 흑사병과 동물 쓰레기의 불법 투기, 인도인들이 암소를 신성시하는 원인등등 음식이 “역사의 진행 방향에 때로는 결정적으로 또 대개는 미묘하게 작용하게 되는 경로” 를 접하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인간의 역사에 음식이 “때로는 결정적으로 또 대개는 미묘하게 작용해왔다면”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역사가 진행형이듯이 음식의 역사 또한 진행형이다. 저자의 말대로 “미래의 식량의 역할이 과거보다 덜 결정적이지는 않을 것”이기에 음식이 인간의 역사의 진행방향에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작용을 하기를 바라지만, 음식과 관련하여 인간이 처한 현실은 다소 비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식량의 문제는 과거의 부족사회와 같은 국지적인 성격이 아닌 국가, 대륙, 지구적인 차원에서 발생하고 있다. 인종과 국가간의 교류가 증대함에 따라 그 규모는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후진국의 영양부족과 선진국의 비만이라는 극단적인 대비와 환경의 파괴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음식의 부패와 오염, 그리고 저장의 문제 같은 것이 아니라 음식 자체를 생산할 수 없는 어두운 현실에 직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미래의 인간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그 변화의 저변에는 음식이 어떻게 자리할 것인지,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 아닐까 한다.

책의 뒷표지에는 독자들의 시력을 측정하기라도 할 듯이 까만 바탕에 흰색으로 깨알같이 써놓은 아래의 질문들이 있다. 이에 대한 답은 앞으로 해 나가고자 한다.


1.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2.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3.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5.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6.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7.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8.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9.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0.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1.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2.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3.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4.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구슬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재자들  (0) 2009.01.17
말 할 수 있는 죽을 동물  (1) 2009.01.14
음식의 역사  (1) 2009.01.14
내게 남는 것 3가지  (0) 2008.11.08
유대인  (2) 2008.11.07
주술 풀기와 걸기  (2) 2008.11.06
Trackback 0 Comment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