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들을 생각하며......
인간의 사전에 비극이란 단어는 사라질 수 있을까?
일회적인 역사를 특정한 방향으로 가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인간이 만든 그 문명에 대해서는 그 폐해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 혜택에 대해서도 늘 감사를 해야 할 것 같다.
만약 나 자신이 로마시대의 검투사로 태어나거나 노예로 태어났다면 그 잔인한 운명에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만약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지 못한 네안네르탈인 이나 크로마뇽이었다면 또 어떻겠는가?
21세기, 법과 도덕이 인간의 잔인함을 다소나마 아니면 엄청나게 순화시키고 있는 지금에 태어났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인간의 문명에 대해 감사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는가? 나의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만 할까? 문명에 대한 고마움은 곧, 문명을 이룩한 인간들에 대한 고마움과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이 공간에 태어나게 한 어떤 힘에 대한 고마움이기도 하다. 그 힘이 그저 우연이란 이름으로 불리던지 노력이고 필연이란 이름으로 불리던지 아니면 운명이고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던 간에 나는 무조건 나라는 존재의 세포 하나하나에 심어진 축복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전적으로 비판하려면 자신의 존재의 전적인 부정이 그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 까닭으로 오직 문명에 대한 제한된 일부의 비판만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일부분의 비판이라는 것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다면 오랫동안 문명이 내재되어온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를 살상하는 일이다. 자기 존재의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 그래도 가능한 것은 미래 때문이다. 미래는 더 나은 문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희망과 믿음 때문이다. 나의 존재에 주어진 축복 중에 다소 불순한 것, 불편부당한 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미래의 존재를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미래의 그들이 진정으로 더 더욱 축복받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불순하고 불편부당한 것이란 왜곡으로 변질된 문명이다. 광기와 전쟁과 기아와 증오이다. 그것에 근거한 문명이다.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든 문명의 왜곡들이다. 왜곡된 문명, 우리는 이것을 우리에게 축복을 주는 참된 문명 속에 깃든 불순물로 걸러내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나 자신이 나를 인간답도록 해준 이 문명에 참으로 감사하는 길은 문명의 왜곡된 부산물을 걸러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세상을 개화시켜온 인간들처럼 지금, 현재 우리가 또한 개화시켜할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을 개화시키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문명에 감사하는 길이다.
그러나 현실은 참으로 어렵다. 역사라는 체계 속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고 또 그렇게 단단한 체계로 움직이면서 끊임없는 쇠뇌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을 잉태하는 인간은 너무도 완고하고 잔인하다. 현실에 얼룩져있는 비극을 잉태하는 불순함과 불편부당함이 스며들어 있는 문명의 일부와 인간의 일부로 부터 다수의 선량한 인간이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에 불순물과 같은 불행이 언제나 있다는 것은 끝없는 슬픔을 자아낸다. 인간들의 수많은 노력에 의해 무수한 불행들이 예방되고 막아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인간에게 무자비한 불행을 주는 인간들 또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당연한 현실이라고 자위해야만 할까? 인간들 사이에 왜 이러한 비극이 생겨야 할까? 그것은 수많은 인간들의 인식이고 또 노력의 근거가 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인간들로 해서 축복만이 아니라 불행과 비극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다.
인간은 죽어야 하는 비극적 운명의 존재이다. 죽음이라는 비극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인간들이 서로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는 존재가 될 수는 없을까? 인간의 사전에 인간이 자초하는 비극이란 단어가 사라질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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