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목욕탕은 놀이터와도 같은 곳이라 생각할 것이다. 오늘날의 수영장을 대체하는 의미가 있었다거나, 엄마와 함께 여탕으로 가던 추억이나, 목욕후 아빠가 사주던 짜장면에 대한 추억들 따위로 어린 시절과 목욕탕을 낭만적으로 연결 지으려고도 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런 추측은 9할 정도는 맞을지도 모른다. 목욕탕이 낭만적인 곳이었다는 생각은 보편적인 생각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목욕탕에 대한 기억이 그리 낭만적이지 못하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엄마와 함께 여탕을 이용했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간혹 여탕에서 목욕하기도 했다. 이건 내겐 낭만이 아니라 차라리 악몽이었다. 엄마의 편리를 위해 희생된 비극적인 결과였다. 빈도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심지어 나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도 엄마와 함께 여탕을 들락거렸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애가 여탕에 가기에는 좀 커지 않나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면서도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여탕으로 향했다. 엄마는 억척같고 생활력이 강한 여자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상하게 내가 엄마 손을 잡고 여탕의 탈의실에서 옷을 벗는 순간부터 같은 반 여학생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나의 초등학교 1, 2학년 여학생들은 나의 나신에 꽤 익숙해 있을 것이다. 남자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드물게 보았기에 나는 여탕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더욱 부끄러웠다. 그 아이들은 어디에서 목욕을 할까? 아빠를 따라 남탕으로 가겠지? 여자 아이들을 볼 때면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고추가 뻣뻣해져 얄궂은 수치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탈의실에서부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여자 아이가 있는가부터 살폈던 것이다. 만약 여자 아이가 있으면 아예 등을 돌리고 후다닥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욕실에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참 단순한 행동이었다. 작은 욕실은 더욱 더 피할 곳이 없었으니 말이다. 공간의 제약이 더욱 심해서 함께 나란히 앉아야 할 경우도 있었다. 작은 목욕탕은 가끔 악몽이 되었다.
설이나 추석등 명절 전날의 공중목욕탕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아마도 도스도예프스키의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 나오는 죄수들의 공중 목욕탕에서의 목욕 장면보다는 덜 하겠지만, 그래도 발 디딜 틈새도 없는 욕실은 많이 불편했다. 서로 탕 옆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나 노골적인 욕설이 오가기도 했다. 서로의 몸과 몸이 부딪히기도 했고 심지어 어린 아이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줌을 누기도 했다. 빨래 구러미를 가지고 와 빨래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도 그런 부류에 속했다. 무엇보다도 탕의 물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 탕의 물은 마치 썩은 어항의 폐수처럼 누르스름하고 푸른색이 감도는 빛깔이었고 제법 큼직한 부유물들이 떠다녔다. 이 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빨래를 했다. 목욕물의 오염은 오래 동안 물을 갈지 않은 목욕탕 주인의 책임인지, 아니면 목욕하는 사람들의 책임인지, 그것은 애매한 부분이었다. 아마도 그 둘 다의 책임일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가 욕탕에 앉아 볼 일을 보는 적이 많았으므로, 또 욕탕에 앉아 있다 보면 나와 같은 행동을 한 듯한 사람들을 자주 목격하였으므로, 누르스름한 목욕물의 오염은 주로 몸을 떠는 그 희열의 행위에 기인한 바가 컸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물은 귀해서 아껴서야만 했다. 심지어 생각 없는 아이들은 그 물속에서 잠수를 하거나 다이빙을 하기도 했다. 푸악 거리는 아이들의 입으로 쉴 새 없이 그 노르스름한고 푸른빛이 도는 물들이 들락거렸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가끔 엄마는 나만 혼자 욕탕에 남겨두고 사라지거나 아예 처음부터 목욕탕에 나를 넣어두고 어디론가 가기도 했다. 30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엄마의 그 뒷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엄마에게 이유를 물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 다지 슬픈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엄마의 왜 그러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 즈음 엄마는 목욕탕 근처의 작은 가내 공장에서 일을 했고 엄마의 친구였던 여탕의 때밀이 아줌마에게 나를 맡겼던 것이다. 나는 그 때밀이 아줌마를 ‘때밀이 이모’ 라고 불렀다. 때밀이 이모는 참 마음씨가 좋았다.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때밀이 이모는 항상 분주하게 움직였다. 탈의실과 욕실을 번갈아 들락거리며 무슨 일인가를 했다. 내가 때밀이 이모를 좋아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엄마와는 달리 가끔식 씻어주는 때밀이 이모의 손길이 은근히 좋았던 것이고, 그 다른 하나는 목욕이 끝난 뒤에는 언제나 내게 사탕을 사먹으라고 동전을 쥐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때밀이 이모는 때를 잘 밀어 주는 것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웃 마을의 공중목욕탕에서 월급을 더 올려주는 조건으로 때밀이 이모를 스카우트 하려고도 할 정도였다. 그러나 때밀이 이모는 그러한 제안을 거절했다. 그 자세한 이유를 내가 알 도리는 없지만, 엄마의 말에 의하면 때밀이 이모가 우리 마을에 꼭 있어야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엄마가 없는 것이 함께 있는 것보다 더욱 자유로웠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목욕탕에 있는 내내 자유가 억압되었다. 내 여린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엄마는 거친 때밀이 타월로 온몸을 박박, 마치 미루어 놓았던 때를 한꺼번에 벗겨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정성을 다해 진지하게 그러나 저돌적이고 공격적으로 몸의 구석구석을 씻어 주었다. 무엇보다도 뜨거운 탕 속에 함께 들어가 있어야할 때는 죽을 맛이었다. 그런 순간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심각한 순간이었다. 목욕탕에는 냉탕과 온탕이 있었지만 엄마는 언제나 나를 뜨거운 온탕으로 밀어 넣었다. 엄마는 무지막지하게 나를 온탕으로 밀어놓은 후 저항하는 나의 어깨를 잡고 눌렀다. 엄마는 온탕에서 나의 몸의 때를 푹 부풀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온탕에 있던 나의 몸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부풀어져 있었다. 손바닥과 발바닥은 한껏 부풀어 흐물거릴 정도였다. 지금이야 각종의 탕이 있어 마음껏 사용할 수 있지만, 30년 전인 그 때는 냉탕과 온탕이 다였다. 온탕도 아이들을 배려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온수와 냉수의 비율을 거의 7:3 정도로 어른의 피부에 맞추어 물은 언제나 아이들이 사용하기 에는 뜨거웠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으으, 시원하다, 하는 비명을 질러대면서 욕탕에 앉아 있곤 했다. 나는 그런 어른들이 얄미웠다.
아빠의 손을 잡고 목욕탕에 가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3, 4학년쯤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아빠에 대한 기억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아빠는 배를 탔다. 1년에 한 두 번씩 집으로 왔고 아빠와 함께 목욕탕으로 갔다. 아빠는 미루어 놓았던 그 사랑의 감정을 목욕탕에서 풀기라도 하려는 듯이 언제나 나를 정성을 들여 씻어주었다. 그것은 엄마와는 다른 손길이었다. 또 때밀이 이모의 손길과도 다른 손길이었다. 마치 천상의 손길 같았다. 몸에 비누칠을 하고 뜨겁지 않은가를 확인 한 후 부드러운 손길로 비누의 흔적을 씻어내었고 머리를 감겨줄 때에는 혹 눈에 비눗물이 들어가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아빠의 손길은 너무나도 부드러워 아빠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워있으면 스르르 잠이 오곤 했다. 아마 아빠는 새근새근 잠든 나를 내려다보면서 그 손길로 나의 온 몸을 어루만졌을 것이다. 아빠의 손길과는 달리 아빠가 뺨을 비벼댈 때는 껄끄럽고 따가웠다. 그 껄그럽고 따가운 감촉은 여름날 바닷가에 누워 바라보는 태양의 강렬한 인상만큼이나 강렬하게 남아있다. 내가 아빠의 등을 밀면 아빠는 대견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 없이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빠와의 흔하지 않는 목욕은 언제나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었다. 아빠와의 마지막 목욕 또한 그랬다. 되돌아보면 아빠와의 마지막 목욕은 영원한 작별을 위한 의식이었던 셈이다. 그 아빠의 손길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아빠는 마지막 목욕을 한 그 이듬해 여름 사늘한 시신이 되어 귀국한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고, 목욕탕도 추억이 되어버린 지금 나는 아이들이 둘 있는 ‘아빠’ 가 되었다. 내가 녀석들을 작은 촌마을의 작은 공중목욕탕으로 데리고 간다면 어떨까? 그들은 내 어린 시절의 목욕탕을 상상 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