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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벌거벗은 여인들의 정체

by 컴속의 나 2009. 1. 19.




벌거벗은 여인들의 정체


사진출처: http://kr.blog.yahoo.com/pete_.



세상에는 수많은 만남들이 존재하지만 만남에 대한 희망에 비해서는 그 수가 적을지도 모른다. 원하지 않는 만남들이 수많은 만남들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세상은 또 그런 만남을 거품처럼, 아니 윤활유처럼 해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꼭 원하는 만남을 가슴 속 깊이 묻어 둔 채로 원하지 않는 만남으로 지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떤 이유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택배가 올 것이라는 것을 전화로 알고 있었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문을 열었다. 택배회사 로고가 붙은 모자나 옷을 입은 택배회사 사원이 아니라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있는 여자였다. 상상하지도 못한 광경이었다. 나는 급하게 문을 닿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녀가 몸을 반쯤 안쪽으로 헤집고 들어 온 상태였다. 그녀는 숨을 조금 허덕이고 있었지만 그다지 다급한 움직임은 없이 침착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안에서 문을 닫고는 돌아서서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나는 그녀에게 남자 옷이긴 했지만 청바지와 셔츠를 건네주었고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옷을 입었다. 그녀는 음료수를 한 잔 마시고는 쇼파에 누워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서 너 시간 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머리를 쓰러 넘기며 내게 말했다.

“고마웠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을 뿐이다. 그녀는 들어왔던 문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졌다.

*

세상에는 수많은 죽음이 존재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는 없다. 살아있는 자가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일 것 같은 어떤 것’ 에 불과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강하기에 죽음일 것 같은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조차도 우리에겐 강한 호기심 일으킨다.

교통사고였다. 나는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이었고 길에는 벌거벗은 여자의 시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누워있었다. 그녀는 소파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있던 그녀의 얼굴과 중첩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여자는 아니었다. 이번의 누드의 여자는 이전의 여자보다 머리칼이 짧았다. 그녀는 왜 벌거벗은 몸으로 도로로 뛰어든 것일까? 그녀가 쓰러져 있는 곳은 횡단보도가 아니었다. 불가사의였다.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나 차에서 내려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나 인도에 서있는 사람들이나 모두들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는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아무도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가던 장례식장으로 다시 향했지만 이 일은 오래 동안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

그 교통사고가 있고 몇일 뒤 나는 맛선을 보았다. 부모의 재촉 때문이었다. 나의 부모는 삼십대 중반이란 나이를 넘긴 내가 아직도 결혼하지 않고 원룸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언제나 걱정했다. 맞선을 본 상대 여성 O는 부모가 함께 나온 맞선 장소인 호텔 카페에서는 다소곳했다. 그러나 부모들이 물러나자 O는 내게 이색적인 제안을 했다. 결혼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다. O는 과감하게도 나이트클럽에서 함께 춤을 추자고 제안을 했던 것이다. 나도 결혼이란 것에 부담감을 가지고 있지 않던 터라 O가 그다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그날 밤의 시간을 O와 함께 즐기기로 했다. 정말 신나게 춤을 추었다. 술도 꽤 마셨다. 그런데 이상한 헤프닝이 발생했다. 무대 스테이지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을 부르던 악단도, 무희들도, 아래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던 한 무리의 남녀들도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3분 정도 나신으로 몸을 흔들어대다 조용히 무대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아무도 그녀를 다시 보지 못했다. 그런 이상한 일에도 불구하고 그날 참 흥겨웠다. 세상 근심 떨쳐내려는 듯이 춤을 추었고 현실을 잊기라도 하듯이 술을 마셨다. O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O와 나는 나이트 클럽에서 흥겨운 시간을 보낸 뒤 헤어졌다. O는 나이트 클럽에서 만난 친구들과 더 흥겨운 시간을 가졌고 나는 나이트 클럽을 나와 정적이 기다리고 있는 나의 원룸으로 향했다.

*

세 명의 벌거벗은 여자들! 쇼파 위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첫 번째의 여자, 도로에 쓰러져 있던 두 번째의 여자, 나이트 클럽에서 춤을 추던 세 번째의 여자. 나는 그녀들의 존재가 환영이라고 한동안 생각했지만 결코 그녀들은 환영이 아니었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얼마 전 달이 바뀌면서 넘겨놓은 달력의 그림 때문이었다. 그림 속에는 벌거벗고 있는 세 여인이 그려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루벤스란 화가가 그린 <파리스의 심판>이란 그림이었다. 그 여자들도 인간이 아니라 여신들이었다. 바로 아테나, 아프로디테, 헤라였다. 내가 현실에서 본 여신들의 이름이 일치되지는 않지만 내가 본 여자들이 <파리스의 심판>에서 튀어나온 여신들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여신들이 그 그림 속으로 다시 들어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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