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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돌아보기

양심적인 보수주의자들에게 고함

by 컴속의 나 2008.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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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www.flickr.com/photos/djokomul

 


양심적인 보수주의자들에게 고함

― 포세이돈, 테세우스, 그리고 미노토


미노토는 포세이돈(Poseidon)이 크레타(Crete) 섬의 왕 미노스(Minos)왕에게 내린 보복의 산물이었다. 포세이돈은 소 한 마리(a Bull)를 자신을 위한 제물로 바치도록 미노스 왕에게 하사했으나 미노스왕은 그 소를 보호했다. 이에 분노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아내인 파시파에(Phasipae)가 그 소와 사랑에 빠지게 하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반인반우(半人半牛)인 미노토였다. 미노스왕은 이 해괴한 존재를 다에달로스(Daedalus)가 설계한 미로(labyrinth)에 가두어 두었다. <미로(Labyrinth)속의 미노토(Minotaur)와 야만적 정치인들, 컴속의 나. >


신화는 인간의 의식의 원형이랄 수 있다. 신화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 느끼던 경외감과 호기심, 인간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에서 발생하여, 단순히 재미를 위해 덧붙여지거나 또는 교묘하게 신화를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인간들에 의해 변형되면서 그 의미가 복잡하고 다양해 졌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연에 대해 느꼈던 경외감은 아주 유치한 수준에 불과하다. 과학이 발달하고 과학과 함께 인간의 이성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면서 신화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솔직히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자연은, 그 자연을 제공하는 지구, 더 나아가 우주는 인간의 완전한 해석을 용인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우주에 대해 신화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화를 낡은 것,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고작 상상력을 인정해 줄 뿐이다.


이러한 신화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지극히 편협할뿐더러 인간 중심적이다. 우리는 여전히 자연을 이해하지 못하며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눈부신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의 본질적인 의문과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의문은 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신화는 인간 의식의 원형이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화는 여전히 현대에도 유효하며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스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위치해 있는 크레타섬은 문명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이집트 문명이 크레타섬을 거쳐 그리스 문명을 꽃피웠기 때문이다. 크레타를 중심으로 한 에게문명의 특성이 이집트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위의 인용글은 바로 그러한 문명사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크레타섬의 미노토는 덜 개화된 문명을 의미하며 테세우스는 새로운 그리스문명의 태동을 알리는 존재이다. 물론 신화의 의미가 전적으로 여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큰 틀의 문명사적인 전환기에 일어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신화로 만든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문화적인 전환기에 직면해 있다.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넘어 내용상으로 민주주의, 정직하고 양심적인 정치 문화로의 전환을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적인 전환기에 테세우스와 미노토의 신화를 적용해 보는 것은 그 문화적인 전환의 방향성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미노토를 미로속에 숨겨두고 그리스로부터 인간 제물을 바치라고 한 비정상적인 미노스왕은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으로 본다면 MB이다. 아무리 심리의 문제라고 치부한다고 하더라도 먼 미래, 아니 가까운 미래에 광우병 희생자가 나타나지 않으리란 절대적인 보장은 없는 것이다. 테세우스는 촛불을 든 시민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테세우스가 파시파에의 도움으로 어두운 미로를 비추는 촛불과 길을 잃지 않으려고 준비한 실은 지금의 촛불정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테세우스는 미노토를 죽이고 그리스인 인질들을 다 구출해낸다. 미노토를 죽인다는 말은 촛불정국의 상황에서는 광우병의 위험을 철저하게 차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노토를 죽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듯이 고시를 철회하고 재협상을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랄 수 있다.


파시파에는 미노스왕의 아내이다. 반인반우 미노토를 잉태한 당사자인다. 그녀가 남편을 버리고 테세우스를 선택하는 것은 꼭 사랑이라는 문제보다는 미노토에게 그리스인들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적인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양심적인 정치인들이라면, 양심적인 관료라면, 테세우스를 도왔던 파시파에의 입장에 반드시 서야만 하는 것이다. 테세우스를 사랑했듯이 촛불을 든 시민들을 사랑해야 하며 때로는 폭력을 중재하고 촛불이 평화롭게 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일부 진보적인 정치인들이 이러한 파시파에의 역할을 하고 있으나 너무나도 부족하다. 문제는 미노스의 친위 세력 중에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아내인 파시파에가 그랬듯이 진정한 보수주의자, 양심적인 보수주의자들이라면 촛불을 들고 그리스인 인질들을 구출해야 하는 것이다.


소고기 사태는 결코 이념의 문제가 아니며 분열을 잉태하는 문제가 아니라, 건강의 문제이며 신뢰의 문제이며 양심의 문제이며, 또한 의식과 문화적인 전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한민국이 양심과 정의에 근거해서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조화와 통합으로 나아가는 문제인 것이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싸울 필요가 없다. 긴 역사의 호흡으로 보면 그 싸움들이 얼마나 부질없었던가? 그 부질없었던 결과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보수주의적인 가치와 진보주의적인 가치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충돌이 한 쪽을 압살하는 극단주의는 피해야 한다. 절충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거쳐 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 절충이 사욕과 탐욕이 아니라 진정성과 양심과 진실에 입각해 있다면, 그 절충은 결코 변질도 아니고 비겁도 아니며 타락도 아닌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변증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아가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 소고기 사태는 가치의 충돌이 결코 아니다. 건강과 양심과 정의와 겸손의 문제이다. 양심적이고 진실한 보수주의자라면 촛불을 단순히 좌파니 빨갱이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폭력을 지양하라고 비판하기는 하되 촛불의 의미에 대해서는 양심적인 발언을 해야 한다고 본다. 폭력은 단호하게 비판하되 촛불의 의미를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를 떠나 양심적이고 진실한 정치인들의 의무요 사명이라고 본다. 촛불에 대한 왜곡된 정보에 대해 계몽적인 자세로 국민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보수주의 정치인들, 보수주의자들이 보여주어야 할 성숙한 보수주의적인 자세인 것이다.(*) (2008.7.2.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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