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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와 뼈

by 컴속의 나 2008. 8. 28.


피와 뼈


낯선 삶이었다. 영화의 역사적 배경이나 공간등 간과 할 수 없는 여러 주제들, 이를테면 광기의 역사적 상징성, 불행한 가족사의 부조리함, 개인의 병적 심리 등 역사라는 거창한 주제에서부터 가족사의 비극과 한 개인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감상의 자료를 제공해주었지만, 나의 생각은 인상적인 한 인간의 괴물 같은 삶(연기)에 주로 매달렸다. 아마도 낯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 내내 김준평(기카노 다케시)의 ‘괴물성‘ ’야수성‘의 근원이 어디에서 있는지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괴물성‘ 과 영화의 어디에도 그 인과성을 찾지를 못했다. 김준평의 괴물성을 일본 제국주의에 항의하는 메시지로 읽고자 했으나, 그것은  넌센스 같았다. 아니 관객인 내가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를 이해하기에는 김준평은 너무 속물적이었다.


그냥 다소 낯선 한 한인 가족사가 1920년대 초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이란 배경만을 달리하며 기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해 보였다. 그냥 즐기면 되는데 괜한 헛수고를 한 듯했다. 가족들과의 관계조차도 파괴하는 가장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 가장을 사실적으로 묘사를 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만 넘어가자니 어딘지 허전하고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미지 출처:http://www.slrclup.net/Common/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상처’ 라는 단어였다.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트였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관계들이 엮어놓고 있는 인간들의 실존이었다. 역사도 이데올로기도 어쩔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모습이었다. 절망을 만들고, 절망에 순응하고, 절망에 저항하는 삶들은 깨어진 관계 속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절망들은 전 근대적인 인간관계 속에 처해진 실존들의 상처이고 절망들이기에, 과거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해준다. 특히 김준평으로 상징되는 억압적인 한국의 유교적인 가부장제와 그것에 얽힌 문제들에 대한 성찰이 그랬다.


그리고 죽음이 있었다. 죽음이 끝인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한 장의 유서일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제법 긴 유서를 쓰고 있다는 오싹한 느낌이 몰려왔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죽음들이 인상적인 까닭이기도 했다. 딸의 주검 앞에 김준평이 나타났을 때, 상가에는 큰 소동이 벌어지고 그 소동을 피해 딸의 시신을 이리저리 옮기는 장면은 현실의 고통을 피해 죽음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고통스런 현실은 죽음과 현실의 끊임없는 악순환을 느끼게 했다. 현실은 좀더 아름다운 곳은 될 수 없는가? 인간은 좀더 선한 존재가 될 수는 없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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