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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흔적들

음식의 역사(2)

by 컴속의 나 2009. 1. 15.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1.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2.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3.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5.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6.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7.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8.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9.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0.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1.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2.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3.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4.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인간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기까지는 일련의 당연한 진화의 과정을 밟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이 깃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과정은 오랜 시간을 거쳐 느리게 진행되었을 것이고 경험이 전수 될 수 있는 지식으로 형성되는 데는 수 천년, 아니 수 만년의 시간이 필요로 했을 것이다.

기원전 500,000년경에서 네안네르탈이 등장하여 활동하던 어느 시기에 불이 발견되고 원시적인 요리법이 개발되기 이전 수십만년을 날 것으로 음식을 섭취하였으며 그리고 기원전 10000, 신석기 혁명 이전까지 수렵과 채집을 통해 식량을 얻던 “성공적인 약탈자” 에 불과했다. 기원전 10000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은 농사, 목축과 더불어 정착하게 되면서 마을이 생겨나게 되었다. 미국의 인류학자 칼턴 쿤이 “요리법의 도입은 원초적 동물 상태의 사람을 보다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p.48) 하였듯이 음식과 관련하여 불의 발견과 요리법의 등장이 인간의 진보 그 자체에 미친 영향을 짐작케 한다. 단순한 불의 발견과 원시적인 요리법의 개발이 이러할 진데 농사와 목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원시적인 인간 그 이상의 존재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원전 10000년 경에 오랜 사냥과 채취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동물과 식물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꽤 축척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축척된 지식으로 신석기혁명의 여명이 시작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여성은 종자, 채소, 과일을 채집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들이 바라는 일정한 장소에서 키울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한 것 같다고 한다. 특히 동굴 생활중에 발견한 씨앗의 발아 현상은 식물 재배에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겨울에 저지대의 동굴에서 생활하다 여름에 고지대의 동굴로 이동한 후 다시 초여름 언덕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버려놓고 간 쓰레기 더미 위에서 식물이 무성하고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채취와 종자 발아의 발견을 통해 여성들은 식물 재배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이것이 농사와 정착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남성들에 의한 목축도 신석기 혁명의 중요한 요소이다. 목축과 관련하여서는 책의 내용을 좀 길게 인용하고자 한다.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빙하기가 물러가기 전에 인간과 순록의 관계과 형성되기 시작했는데......순록은 눈이 녹아서 습해진 땅에서 자라는 이끼와 풍부한 양치류를 먹었다. 그러나 눈 녹은 물에 의존하는 동물들은 염분 부족 때문에 정기적으로 해변이나 내륙의 지표에 노출된 암염지로 원정을 가야했다. 그러다가 순록이 사람의 오줌을 염분의 급원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를 미끼로 사람은 그의 야영장 부근까지 순록을 유인할 수 있었고, 동물들을 길들이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상호의존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p.54)

결국 순록이나 가젤같은 동물들이 가축이 되는 데는 실패했으나 이러한 경험을 통해 목축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실제로 신석기혁명 이전 1천년 동안 아시아 늑대가 개로 길들여졌다는 사실이 미국의 아이다호에서 발견된 기원전 8420년경의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정착농과 목축이 시작된 신석기혁명은 지구상의 다양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을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두 군데의 명확한 중심지역‘ 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은 카스피해 서쪽과 남서쪽,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심각한 도전을 받게되는 데 완두, 콩, 오이, 마름의 종자들이 발견된 태국의 미얀마 국경 지대 부근의 ’스피릿(Spirit Cave)의 등장으로 인해서 이다. “이것은 농업이 중동이나 중앙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음을 입증하는 경우보다 거의 2천년이나 앞선 것이다.“(p.56)

마을의 형성과 관련하여서도 상충되는 이견들이 존재한다. 고고학적으로 가장 오래된 기록이 남아있는 중동에서는 농사와 목축이 시작되기 전에 마을이 발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농사와 목축은 상당한 인력을 필요로 하며 그 인력의 확보를 위해 소규모 공동체 생활을 포기하면서 씨족 공동체가 더 큰 집단인 마을을 형성했다는 이론도 존재한다. 이 책에서 이러한 견해의 차이가 어떠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야 농사와 목축과 마을의 형성이 갖는 관계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 형성은 야생 곡식이 풍부하게 자라는 들판이었다. 곡식을 거둬들이기 위해 수확기를 전후해 그곳에 정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정착지들이 이러한 목적으로 하나 둘씩 생겨났으며 수확물을 가지고 다시 동굴로 돌아가는 것은 짐수레나 바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원전 9000년경 북부 이스라엘의 말라하(Mallaha) 의 예는 정착과 농사, 그리고 농부의 탄생에 대한 좋은 예를 제공해 준다. 책의 내용을 인용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사냥과 채집에 의존했는데, 거의 알려지지 않은 단계들을 거쳐서 채집은 경작으로 발전했다. 우선 그들은 야생 곡식의 수확을 너무 효율적으로 하는 경우에 이듬해의 수확이 현저히 감소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다음 줄기에 이삭의 일부를 남겨두자 그보다는 낫지만 불규칙한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 다음의 합리적인 단계로서 씨앗들을 손으로 골고루 뿌려주게 되었을때, 그들은 단순한 채집자에서 벗어나 농부가 되었다.”(p.58)

기원전 10,000 경 중동의 야생곡식 들판은 그 주위에 마을 형성하였고 그 야생곡식 들판을 동물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했다. 왜냐하면 야생곡식 들판은 동시에 야생염소와 양들의 번식처를 제공해주었고 먹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3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몰살, 들판을 지키기, 그리고 지배가 바로 그러한 선택의 여지들이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선택은 지배로 낙점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염소의 경우는 고기는 물론이고 농토를 확장하던 초기의 경작에 있어서 관목숲을 제거하고 잎사귀를 먹어치우는 능력을 가진 일꾼으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었다. 양의 경우는 다소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한 마리의 양이 먹어치우는 목초의 양이 너무 많아 그 유지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돼지는 염소, 양, 다음으로 기원전 7,000년 경 등장하는 가축으로 되새김 동물과는 달리 목초들을 소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6100~5800년경 가장 늦게 소가 사육된다.

음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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