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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본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by 컴속의 나 2008.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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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인간의 삶이란 한 편의 서사(긴 이야기)와도 같다. 그러나 의도한데로 구성하고 전개할 수 없는 서사이다. 동화적인 상상과 환상으로 서사를 이끌어 갈 수도 없다. 언제나 폭죽을 터트리고 꽃이 만발하고 음악으로 가득 찬 동화의 세상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없다. 이 세상 어느 인간도 작가가 소설을 쓰듯이 자신의 삶을 의도대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겨우 불확실한 미래를 추측가능하게 하려고 노력하거나 지뢰밭을 걷듯이 조심스럽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 원고지에 쓰다가 찢어버리고 다시 쓸 수는 없는 것이 인생이다. 마츠코의 남자중 하나인 소설가 야마카와 처럼 삶의 원고를 찢어버린 다는 것은 바로 죽음인 것이다. 아무리 불행한 삶이라도 다시 번복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넝마처럼 끌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꽃동산이나 폭죽은 아니더라도 의도대로 조차 삶을 살아갈 수 없을까? 왜 원치도 않는 고통을 감당해야만 할까? 인간의 삶을 비틀어 버리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마츠코의 일생은 바로 그러한 질문에 대한 진지한 대답처럼 여겨진다. 마츠코의 비극적인 죽음에 부단하게 영향을 미친 크고 작은 이유들은 비록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가벼운 사회면 신문 한 장이 이를 잘 입증해 준다. 그러나 신문은 알량하게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사회면 단 몇 줄의 기사에 무감각하게 싣는다. 비일비재하게 기사화되는 일상이지만 동시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게 된 일상이기도 하다. 약간의 동정으로 얼마의 적선만을 던져주면서 좀 더 감각적이고 색다른 뉴스에 시선을 집중한다. 아니면 애당초 시선을 빼앗겨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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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속 요정이 된 마츠코


모든 생물체가 커져가는 성장의 과정을 거치듯이 마츠코의 일생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여기에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과거에 아주 귀여운 마츠코의 가족에서 시작된다. 아주 사소한 오해 그러나 어린 마츠코에게는 강박에 가까운 의식이었다. 아버지가 어린 동생만 사랑한다는 오해였다. 그러한 오해는 외로움이 되었고 동생에 대한 증오로 변해갔다. 아버지가 표현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오해는 이렇게 커져만 갔다. 아버지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일기장에 마츠코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루 일기를 아버지는 꼭 ‘오늘도 마츠코 연락 없음’ 이란 말로 끝맺음을 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은 마츠코의 삶이 뒤 틀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너무나도 사소한 듯이 보이는 이 오해가 삶을 빙빙 돌아 해소가 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놀이동산 무대에서 배우들이 짓는 묘한 얼굴 표정을 보고 아버지가 웃자 그런 표정을 흉내 내면서 아버지를 웃게 만들려는 마츠코의 마음은 그저 동심이었다. 그러나 동생에 빼앗긴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끊임없이 아버지 앞에서 표정을 지은 결과 그것이 씻지 못할 버릇이 되어 더 큰 불행을 가져 오게 된다.

마츠코의 일생은 가정에서 비롯된 부녀간, 자매간의 오해에서 부조리한 학교 현장, 비현실적 예술 공간, 맛사지 클럽, 미용실, 감옥, 야쿠자, 변두리 아파트로 이어지면서 고단한 부침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마츠코의 일생을 비틀어 놓는 것은 모두 남자들이란 사실이다. 이것은 감독이 철저하게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여자들은 대체로 수동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제의 가족, 남교사 중심의 학교, 남성중심의 성문화, 문학의 변태성과 폭력성, 야쿠자, 교도소, 남성 아이돌 등 전부 남자들이 마츠코의 삶에 끼어들어 영향을 미친다. 아직도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요소가 똬리를 틀고 있는 듯 보인다. 좀 더 정형화해서 남성 중심의 사회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마츠코와 교도소에서 만나 유일하게 우정을 나누는 포르노 배우인 메구미의 말이 남성적인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여성의 위치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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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강을 바라보는 마츠코



“여자라면 누구나 백설공주, 신데렐라 그런 동화같은 이야길 동경하지.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백조가 되고 싶었는데 눈을 뜨면 새까만 까마귀가 되있다나 어쩐다나. 오직 한 번 뿐인 두 번 살 수 없는 인생인데 이게 동화라만 너무 잔혹해.”

백마탄 왕자가 나타나는 동화이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백마가 아닌 권위적인 남성의 폭력이 지배하는 곳일 뿐이다. 영화에서는 마츠코의 심상이 후광처럼 동화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지만 현실과는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 의도라 하더라도 마츠코의 비극적인 일생에 동화적인 요소, 즉 화려한 색채와 발랄한 음, 그리고 과장된 행동과 인물 등을 끼워 넣은 것은 다소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가 종교적인 엄숙성(저녁노을)이나 성화의 인상을 엿보이게도 하지만 너무 과장되어 있다. 결국 마츠코의 아름다운 동화는 동화를 잃어버린 아이들에 의해 비참하게 깨어지는 파국을 맞이한다. 아이들이 작은 현실의 동화마저도 부수어버리는 이 각박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종교적인 영역에 내 맡겨야만 할까? 영화는 조카인 쇼가 마츠코를 신이라 부르게 하지만 신을 이토록 타살한 현실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마츠코와 그녀를 둘러싼 삶의 조건들을 돌아보면서 삶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건들이 삶을 살게 만드는 굴레의 측면을 본다. 인간의 삶이라는 서사 장르 중에서 동화는 저 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이 영화를 한 편의 성인 동화라고 볼 수 있다면 그 나마 다행이다 싶다. (*)

이미지출처(링크):www.monadist.com/5?TSSESSION=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