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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본영화] 클럽 진주군(2)

by 컴속의 나 2008.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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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진주군(2)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진부한 표현이다. 일본영화 <클럽진주군>도 그 예외가 될 수 없다. 상상력도 현실과는 무관할 수 없으므로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틀린 말이 결코 아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세상 밖에서 현실과는 무관하게 상상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현실을 반영한다는 당연한 말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막연해 지기 쉽다. 도대체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가지고 있는 대답이 ‘문화’ 라는 단어이다. 문화가 현실 그 자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화를 이해한다거나 배운다고 한다. 사실 속임수다. 아니 거짓말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랴, 능력 부족인 것을.

문화는 사전적인 의미로 생활방식, 즉 삶속에서 드러나는 유무형의 방식을 의미한다. 영화를 통해 음식이 어떤가?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옷은 어떻게 입는가? 인간관계의 특성은 어떠한가?…… 등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것,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사실 일본영화를 접하기 시작한 이유도 일본 문화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주 가까이에 일본이 있고 그 일본을 대체로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정작 일본사람을 한 번도 만나 본적도 없고 일본이 어떻게 돌아가는 가에는 전무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러한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자기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도대체 일본을 보아 온 통로라고는 대개가 과거 식민주의 역사와 신문과 방송의 대체로 부정적인 단신들, 이를테면 역사왜곡, 교과서 왜곡들이었다.

이러한 오랫동안 관습화된 생각에서 살다가 일본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나의 시야에 구체적인 일본의 모습이 드러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이러한 감정은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거쳤던 생각일 테고 경험했을 체험 일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클럽 진주군>를 통해 어떠한 문화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었는가? 우선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반전사상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비극에 대한 성찰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전쟁을 다룬 모든 영화의 주제이기도하다. 언제나 반성은 하되 전쟁의 비극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추가하지만 말이다.

예술, 특히 음악의 힘을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들은 음악을 통해 교류하고 공감하면서 상처받은 서로의 영혼을 치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여러 추상적인 가치들이 있다. 삶이나 죽음이 그렇다. 미래 희망이나 꿈도 그렇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는 말이지만, 이 또한 인류 보편의 가치이며 달리 해석의 여지가 없다.

보편적인 것을 넘어서 일본을 이해하고자 하는데 중요한 것은 일본인만의 구체적인 무엇이다. 일본인들에게서 느끼는 이질적인 무엇이다. 전쟁을 보는 그들의 관점이나 태도를 이해하는 것이거나 영화 곳곳에서 나타나는 일본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러한 것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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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면에서, 가장 먼저 호기심을 일으킨 것은 원자 폭탄을 투하한 승전국 미국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였다. 필리핀의 정글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미군과 전투를 하던 켄타로가 귀향해서 (비록 생활의 방편이나 음악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미군의 클럽에서 연주하는 모습은 일본적인 무엇으로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카미카제(몽고군을 물리친 신의 바람이란 뜻으로 자살 특공대에 붙여진 이름), 옥쇄 등 극단적으로 미군과 싸웠던 일본군이 어떻게 이토록 하루아침에 순하게 될 수 있는지는 일본인들의 의식을 이해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그 원인이 신적 존재로서의 천황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에 덧붙여 스시와 할복의 명쾌한 칼, 즉 사무라이의 일도양단의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형과의 언쟁 후 히라야마 이치로가 벽장 같은 ‘밀폐’ 된 곳으로 파고드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 영화를 통해 몇 번 보면서 호기심을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란도리>에서 권투에서 진 등장인물이 자책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으로 세탁기에 들어가는 것이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여주인공 조제가 벽장 같은 밀폐된 곳에서 은신하는 것, 그리고 성격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사무라이 픽션>에서 방의 천정에 숨어있는 닌자들, 큰 덩치의 선수들에 비해 너무 좁아터진 원형경기장 등도 이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어령씨가 도시락, 쥘부채, 분재, 이레코인형, 하이쿠, 다다미 등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일본의 문화가 ‘축소지향적’ 이라고 분석하였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축소’ 와 더불어 ‘밀폐’ 또는 ‘은폐’ 의 성격을 발견하였다.(개인적인 인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이것은 쉽게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는 일본인의 특성이나 역사왜곡을 예로 삼아 봄직하다. 아마도  칼을 품고 있는 국화를 연상해 보거나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셋째는 이념이나 종교보다도 현실지향적인 삶의 태도였다. 이것은 영화의 영어제목을 <Out of this world>, 즉  세상 밖으로라고 붙였으나 내용은 다소 세상 안으로(into this world)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등장인물들이 내면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현실지향적인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따지고 보면 음악이란 것도 어려운 삶을 일시적으로 망각하거나 위로하는 수단으로 등장할 뿐이지 음악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식의 도피적이고 퇴폐적이거나 발악적인 느낌은 없었다. 음악은 세상 밖으로의 도피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자기 위안이나 위로로 여겨졌다. 켄타로의 음악적인 고뇌가 전부이며 음악은 현실로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돈을 벌기위한 현실적인 수단으로 음악을 한다. 소죠는 동생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서, 히로유키는 마약을 위해서, 아키라는 이복 동생을 찾기 위해서 드럼을 배우고 트럼본을 불고 피아노를 친다. 히라야마의 경우도 “군악대 사람들은 재즈로 먹고 산다” 고 말한다. 여기에서 예외적인 인물이 켄타로 정도이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음악에 대한 고뇌가 ‘음악을 배운다’ 는 것과 대체로 일치할 뿐 신의 구원 같은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종전 삐라는 믿지 못했어도 비행기에서 흐르는 재즈는 믿었어요.” 라고 말하는 켄타로의 태도에서 천황(신)의 자리에 음악을 세우려는 듯 했으나 사실상 음악에 대한 태도는 너무나 현실 지향적이었다. 또한 이념지향적인 형에 대한 히라야마의 조소적인 태도에서 그리고 처참한 삶의 가운데서도 신에 대한 의지나 저주 한 번 내뱉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 현실지향적인 모습은 떼놓을 수가 없었다. 재즈라는 현실적인 감각, 콜라나 아이스크림 같은 구체적인 사물, 형(이념)으로부터 “너처럼 타락한 놈”이라고 비난을 듣지만 오히려 이념이 몰락하는 현실은 일본인의 현실 지향적 태도를 반영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이상은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느낀 몇 까지 호기심이며 나름대로 이해하고 배우려고 노력한 것들이었다. 그 외 에도 이 영화에는 일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유무형의 구체적인 사물이나 인간, 그리고 사고와 의식들이 담겨있을 것이다. 재미와 감동과 더불어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고 배운다는 것이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