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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꽁트] 바람의 신화

by 컴속의 나 2008. 2. 4.

 

영화 바람의 파이터 중에서



바람의 신화


K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건 여름방학을 일주일쯤 앞두고였다. 사회의 통념을 깨려고 부단히  온 몸으로 발버둥 쳐왔던(?) K이고 보면 방학을 앞두고 무단결석, 아니 행방을 알 수 없는 가출을 한 것이 처음에는 그다지 심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패싸움으로 머리가 깨지고, 오토바이를 몰다 중상을 입고, 여자 친구 낙태를 시키고, 가출을 다반사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학교로 돌아왔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처음의 무던한 생각과는 달리 이번 가출은 그저 기우로만 여겨지지가 않았다.


정말이지 K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K의 사라짐은 말 그대로 완벽한 사라짐이었다. 집에도, 학교에도, 여자애들과 어울리는 클럽에도, 비디오방과 만화방에도, 그 어느 곳에서도 K의 자취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K가 바람처럼 사라진 사건은 한동안 편모에게, 담임에게, 친구들에게, 심지어 경찰에게도 지우지 몰할 슬픔과 충격처럼 다가왔지만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드디어는 잊어야 할 불필요하고 기분 나쁜 기억이나 물건처럼 여지없이 망각의 강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다 K가 바람처럼 홀연히 다시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고 바람처럼 나타난 것이다.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K가 다시 나타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사회와 학교에 반항적이고 도전적인 K였기에 K 스스로 떠나던 쫓겨나던 학교를 그만두리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K가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운동화를 신고 바람처럼 다시 나타난 것이다. 교복도 가방도 헤어스타일도 학교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 한 듯 했지만 여전히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K의 외모는 급하게 정리한 흔적들이 많았다. 그러나 바람 같은 변덕과는 다른 단호한 모습이 서려있었다. 신산했던 K의 뒷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그런 모습은 신비하고 경이롭게 여겨질 정도였다. 무어라 할까, 이전의 K가 모나고 달구어진 돌이었다면 이젠 바닷가 흰 포말로 깨어지는 갯바위 같았다. 이전의 K가 삭이지 못한 분노로 몸부림치던 폭죽 같은 인간이었다면 이젠 숯불 같은 그윽함이 서려있었다.


K가 학교로 돌아 온 날 담임은 K에게 딱 한마디만을 했다. 좀 잘해보자! K는 아무런 말없이 이전의 호전적인 눈빛으로가 아니라 온화해진 눈빛으로 담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라운 변화였다. 사실 담임은 K를 퇴학 처리하려던 참이었다. K에 대한 원망보다는 다른 학생들을 위해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경찰에서 신원을 찾지 못하는 상태에서 학적을 유지시키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달라진 K의 눈빛을 보는 순간 담임은 K에게 중간고사를 치도록 허락하고 말았다.


중간고사를 치고 K가 또 홀연히 떠나버렸다. 아니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버렸다. 중간고사를 치고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람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속에 칼을 꽂고 떠나갔다. 영웅의 칼이었다. 전교 1등이라는 칼이었다. K의 칼은 우리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예리한 고통으로 박혀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이자 이변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충격과 이변의 감정은 전설이 되어갔고 신화가 되어갔다.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의 부모들에게, 그렇게 세상의 신화가 되어갔다. 그리고 영원히 교육이란 것이 존재하는 한 신화로 남을 것 같았다. 이 신화을 사리사욕에 의해 왜곡시키는 인간들-사교육을 부채질하는 인간들과 학원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영웅의 고고하고 신선한 회오리 바람에 형체 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영웅의 신화는 인간의 가슴에서 꿈틀거리며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에 오아시스가 되어 주었다.


사족: K를 이용하는 사악한 인간들은 K의 신화와 더불어 늘어만 갔고 동시에 K의 신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악한, 괴물)들이 되어갔다. K가 그들 학원 출신이라고, 그들 출판사의 교재로 공부했다고, 그들 학용품을 사용했다고, 그들 학습지로 학습했다고……. 그렇게 허위 광고는 눈덩이처럼 커져 이 또한 바람 아닌 거품 같은 전설이 되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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