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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6 23:14

역사에 흔적을 남긴 배들




정복의 역사를 이야기 하자면, 기동성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칭기즈 칸의 제국은 기병의 기동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몽골제국의 쇠락은 유목민의 삶에서 정착을 택한 삶의 방식 변화에서 이미 그 싹을 잉태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원나라, 킵착한국, 일한국 등은 유목민의 기동성을 상실하고 정착을 선택함으로써 숫적으로 열세인 몽골의 몰락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의 전격전(Blitz)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히틀러의 전격전(Blitz)은 몽골군의 군사전술에서 차용한 것으로 용어의 뜻 그대로 기동성괴 집중성을 의미합니다. 몽골군의 전술과 관련하여 또 재미있는 것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침공에 쏘련이 보여준 전술, 즉 점령지를 태우고 후퇴하는 전술도 일종의 몽골군의 '작전상 후퇴' 전술의 변형이랄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진격에 대한 쏘련의 전술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몽골군의 경우 적을 침공할 때 중앙을 가장 약한 자들과 외국인들을 배치하고 양쪽으로 정예군을 배치하여 중앙이 뚫려 후퇴하는 척 하면서 양쪽의 정예군이 추격하는 적을 포위하는 식이었습니다. 또한 달리는 말에서 뒤로 돌아 화살을 쏘는(배사) 기술이 능란한 것도 이러한 전술을 아주 효율적으로 기능하도록 했습니다.

이후 기병에 의한 기동성은 또 다른 기동성을 상징하는 화포에 의해 대체가 됩니다. 화포는 말이나 화살보다 훨씬 더 빠른 기동성과 함께 파괴력을 갖습니다. 이러한 화포가 배로 운반되어 대륙을 정복하는 무서운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유럽인들의 배와 화포를 통한 대륙의 정복과 약탈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이 바로 배로 운반된 화포의 위력 앞에 식민지 정복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과거 칭기즈 칸이 이루어 놓았던 제국이 유럽의 수많은 화포와 배들에 의해 하나의 시대적인 현상으로 '제국주의'를 잉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화포와 배는 인류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배가 정복의 역사와 관련된 것만은 아닙니다. 위에서 배를 언급한 것은 대륙과 대륙을 이어주는 수단과 함께, 동시에 화포를 운반하는 수단, 즉 기동성 그 자체이며 기동성(화포)을 운반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정복의 역사와 함께 배를 언급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정복의 역사라는 한계를 넘어 배의 다른 기능과 용도의 관점에서도 배에 대해 알아 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타이타닉, 인듀어런스 등의 배들이 그렇습니다. 이 포스트는 이러한 흥미있는 배들을 임의적으로 소개해 보자는 의도에서 만들어 본 것입니다.


거북선 모형



16세기 거북선 묘사도
 
 



콜럼버스의 산타 마리아호(the Santa Maria) 모형


Santa Clara(The Niña)

La Pinta


 
콜럼버스의 산타 마리아호와 함께 했던 두 대의 배들
 
 
 



정화(Zheng He)의 보물선 모형



정화의 보물선과 산타 마리아호의 크기 비교. 큰 배가 정화의 보물선이다.
 
 



마젤란의 빅토리아호(The Victoria)
 
 
 



노예선 아미스타드호(The Amistad)



아미스타드 호에서의 흑인의 의거. 이 의거는 흑인 노예 해방의 기폭제가 된다.
 
 
 



노예선 브룩호의 흑인 노예 배치도



비글호(HMS Beagle). 찰스 다윈이 승선했던 역사적인 배

 




타이타닉호(The RMS Titanic)

 




인듀어런스호(The Endurance). 남극의 빙하에 갇혀 2년에 가까운 고통스런 기간 동안 그 선원들은 모두 살아남은 기적을 이룬 쇄빙선









 
로르망디 상륙 당시의 LCVP(Landing Craft, Vehicle, Personnel)
 





미국대륙 최초의 이민자들인 청교도들의 메이 플라워. 플리머스 항의 메이플라워호(Mayflower in Plymouth Harbor by William Halsall, 1882)






The SS Savannah호의 그림.  대서양을 횡단한 최초의 증기선(비록 증기선이기는 했지만 돛으로 운행한 부분이 압도적으로 컸다)





U-Boat. 제 1,2차 대전 당시에 사용된 독일 잠수함
 





Great Western . 최초로 대서양 횡단선이라는 특정 목적을 가지고 건조된 대형 증기선


2008/04/10 - [생각 돌아보기] - 인듀어런스호와 새클턴
2009/03/16 - [영화] - 포스터로 보는 타이타닉
2009/03/15 - [여행] - 후쿠오카 자유여행(1.선상에서)
2009/03/04 - [알아봅시다] - 다시 듣는 타이타닉 밴드 & 음악


 
*위 이미지들의 출처는 영문판 위키피디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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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4 20:21

유대인과 집시

 

일본의 전후( 2차 유럽 대전후) 처리에 대해 그 피해 당사자인 우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독일의 피해 보상, 역사적 인식 등을 비교하면서 일본 정부의 비인간적이고 몰역사적인 태도에 강한 분노를 표출한다. 전후 일본의 터무니 없는 피해 보상과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역사 왜곡, 성노예 할머니들에 대한 인격적인 모독 등 반성은 커녕 자국의 역사를 오히려 미화하는 짓을 서슴치 않고 있다.

독일의 경우 전대미문의 유대인 대학살을 저지른 장본인이라는 측면에서 그들 스스로도 유대인들에 대한 보상과 전범 처리, 역사인식등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인류에게 유대인 대학살은 살아있는 역사이며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독일이 근본적으로 일본의 전후 태도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니요이다. 독일 또한 일본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무엇이 독일과 일본의 태도를 다르게 했을까?

우선 하나의 실례로 유대인과 한국인(피해 당사국을 한국으로 국한)이란 차이를 들 수 있다. 유대인은 어떤 민족인가? 올해 5월 14일로 건국 60주년을 맞이한 이스라엘을 세운 민족이 아닌가? 유대인의 선조 헤브라이 인이 B.C. 15세기 경에 팔레스티나에 나라를 세운 후 분열과 박해와 추방을 당하며 전세계를 떠돌다 19세기말 시오니즘 운동이 전개되면서 다시 팔레스티나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국과 미국의 정계를 움직일 수 있었던 그들의 경제력과 시오니즘이라는 종교적인 결집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미국 인구의 2.5%를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의 영향력은 미국의 대 이스라엘 정책을 보면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 

전세계적인 유대인 리스트



Ruth Bader Ginsburg







Henry Kissinger

Jon Stewart



Steven SpielbergBarbra StreisandJon Stewart
Norman MailerMichael BloombergAlbert Einstein
Scarlett JohanssonRuth Bader GinsburgMel Brooks
Louis BrandeisHank GreenbergMilton Friedman




이에 비하면 한국은 가난한 아시아의 변방국에 불과했다. 유대인들과 비교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약소국의 현실을 안고 있었던가? 비유하자면 팔레스티나 아랍인들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미국과 영국이 팔레스티나 아랍인들에게 했던 처사와 일본이 우리에게 한 천후의 태도의 본질은 곧 강자의 약자에 대한 잔인한 태도 인 것이다.

독일인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피해 보상과 깊은 뉘우침은 실상은 유대인이 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판단되며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일본이 우리에게 아직도 역사왜곡을 일삼는 비상식적인 태도는 바로 우리가 약소국이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역사적인 인식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박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유대인이 강했던 어떻던 독일은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충분한 보상과 역사적인 인식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근본적으로 일본이 전후 보상과 역사인식은 독일과는 근복적으로 다르고 양심적이라고.

 그러나 전후 보상에 대한 독일인의 양면성을 알게 된다면 독일 또한 일본의 태도와 다르지 않으며 유대인들에 대한 피해 보상은 유대인의 능력이 유발한 것이지 독일인의 근본적인 반성에서 나왔다는데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바로 집시들에 대한 독일인들의 전후 보상으로 볼 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주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유대인과 집시에 대한 독일의 야누스적인 전후 보상과 태도는 독일의 뻔뻔스러움을 여지 없이 보여준다.

Gypsy costumes



우선 집시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유럽에서 집시에 대한 명칭의 유래는 세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이집트 인(Egyptian)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영어의 gypsy, 프랑스어의 gitan, 에스파냐어의 gitano(히타노) 등을 들 수 있다. 두번째는 중세 그리스어의 아팅가노이(이교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독일어의 치고이네르, 프랑스어의 치가느(tsiganes) 등이 그 예이다. 세번째는 15세기 보헤미아 왕이 집시에게 영내 통행권을 부여한 것에서 보헤미안(bohemian)으로도 불렸다. 그러나 정작 집시 자신들은 스스로를 롬(Rom) 이나 로마(Roma)로 부른다.

이 로마들이 나치스에 의해 학살된 숫자가 50만에서 70만에 이른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아마도 600만명 이라는 상상하기 끔찍한 유대인 학살이 이러한 숫자를 가리고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50~70만명이라면 실제로 상상하기 끔찍한 숫자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집시에 대한  보상은 유대인들에 대한 피해 보상에 비해서 터무니 없다. 독일의 전후 보상법은 유대인들을 중점에 두었으며 그 보상액도 유대인들에게 집중되었다. 1981년에 집시와 동성애자등을 대상으로 하는 '비유대계 피박해자 특별기금' 으로 약 1억 마르크, 우리나라 돈으로 500억원이 조성되었는데 이 액수는 1991년까지 1월까지 유대인 희생자들에게 지급된 864억 마르크에 비하면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였다. 이러한 집시에 대한 독일의 태도가 곧  전후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태도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독일의 전후 보상이나 역사인식이라는 것은 일본과 비교해도 오십보 백보에 불과한 것이다.

독일의 유대인 보상의 전례를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전후 보상에 대한 모범적인 사례로 들먹인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독일 또한 일본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일의 태도는 집시 학살에 대한 독일의 태도가 분명하게 입증하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어느 나라던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으로, 군사력으로 강하고 보아야 한다. 



*이 글은 이전 히틀러와 집시라는 글로 소개한 글이지만 이번 이스라엘의 팔레스티나 침공을 목격하면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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