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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8 20:37

해운대, 추리문학관







해운대 달맞이 언덕에 있는 추리문학관을 찾았습니다. 우리나라 추리소설계의 거목이신 김성종 선생님께서 사비를 털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만들어진 추리문학관입니다. 도서관과 카페로 구성된 복합적인 문화 공간으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더해져 달맞이 언덕의 자랑들 중에 하나입니다. 현재 추리문학관의 운영이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소중한 공간이 개인의 사비로 운영된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녹색성장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이러한 문화 공간을 부산시 당국이나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고 홍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과 문화야 말로 녹색 성장의 요체인 것입니다. 녹색 성장이 마치 대체 에너지나 공해없는 IT산업 등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녹색 성장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의 마음의 문제이며 인간의 마음이 진정으로 녹색의 싱그러움으로 가득할 때 녹색 성장은 그 가치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자전거를 타고, 나무 심고, 강 정화 한다고 해서 녹색 성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녹색으로 물결쳐야만 진정으로 녹색성장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마음을 일깨우는 성숙한 문화의 발전 없이는 녹색 성장은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달맞이 언덕에 올라갈 때 마다 항상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 무절제한 난개발 입니다. 아마도 김성종 선생님이 추리문학관을 이 달맞이 언덕에 세운 것은 달맞이 언덕이 문화의 공간으로 성장하고 개발되기를 바래서였을 것입니다. 화랑이 들어서고, 박물관이 들어서고, 미술관이 들어서고, 갖가지 예술 행사가 이루어지는 예술의 공간이 들어서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맞이 언덕에는 빌라가 들어서고, 식당이나 카페가 들어서면서 달맞이 언덕을 프랑스의 몽마르트 언덕처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꼭 서구의 문화 공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전통적인 예술의 공간으로 은은하게 가꾸어졌어도 좋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비단 달맞이 언덕 뿐만이 아니라 도시 전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학교 근처에 유흥 업소가 난립하고, 식당과 주택가와 공장이 뒤섞여 있는 난개발이 도처에 이루어져왔습니다. 건축에 대해 무지한  주제에 이런 언급을 하기도 어색합니다만 하도 안타까워서 하는 넋두리입니다. 


현재 문화 공간이 지속적으로 늘어가는 추세이긴 합니다. 그러나 달맞이 언덕의 현실이 웅변하고 있는 것 처럼 도시 속에서 녹색 문화와 예술의 공간을 한가롭게 음미하면서 걷기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푸릇하게 만드는 진정으로 녹색의 문화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이렇게 변화한 인간의 녹색의 마음이야 말로 진정으로 녹색 성장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추리 문학관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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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23:57

허니와 클로버

 
이미지 출처는 여기입니다.


 
허니와 클로버


초원을 만들려면 꿀과 클로버가 필요하다

- 에밀리 디킨슨

젊은 시절이 아름다웠던가? 이 질문의 시점은 젊은 시절을 거친 자들의 질문이다. 그들에게 젊음이 사라지고 난 뒤, 젊음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향유할 수 없는 젊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결코 반복해서 누릴 수 없는 시간으로 추억이란 박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지만 그저 회상으로만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은 아름다운가? 정녕, 아름다운가? 지금 청춘들에게 이 질문은 불필요한 질문이다. 청춘이 아름답다는 말은 되돌아보는 자들의 회상 속에서나 가능하다. 삶이 완성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라면 청춘은 격렬한 붓놀림이다. 덧칠에 덧칠을 거듭하는 한계를 뚫으려는 욕망이다. 수많은 좌절과 상처를 끊임없이 덧칠하면서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나아가거나, 때론 부수거나, 무의미한 붓놀림으로 제자리에 맴돌기도 한다. 그림과 조각으로 정신을 승화하려 하지만 유형의 캔버스와 나무속에 젊은 영혼의 자유로움을 넣는 것은 참으로 고뇌가 아닐 수 없다. 자유를 부자유의 틀 속에 넣으려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역설이 있기에, 고뇌가 있기에 또한 젊음이 아름다워 지는 것이다.(이 영화조차 한 편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젊음의 순수와 서툼, 상처와 이해가 헝클어지고 복잡한 혼돈의 추상화를 이루어진 영화). 젊음의 시기를 지나 매너리즘에 빠진 기성세대들을 생각해 본다. 아주 부자유한 자연스운 삶과 자유로운 영혼이 고착의 상황에 처할 때 그림이나 조각은 한낱 물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지출처는 여기입니다.



그래서 초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또한 파괴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질곡에 대한 혐오와 부자유에 대한 경멸에도 불구하고 젊음은 ‘젊음이란 시기’ 속에 박제된 된 시간으로 남는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시간은 젊음의 시기를 그들이 뒤돌아 추억해야할 시간으로 마련하기 위해 조용히 거두어 간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에서 젊음이 분리되고 나면 추억이란 이름으로 내보인다. 그것이 그림이라면 혼돈의 추상화일까? 꿀과 클로버가 있는 초원일까? 그 추억은 하나의 액자처럼, 그림처럼, 조각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부자유함과 질곡 속에 우리의 젊음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젊음은 아름다워진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워진다.

그러니 젊음은 아름답다고 하는 바로 그 ‘젊음’ 을 마음껏 향유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들에게 그토록 소중해 진다. 슬픔마저도, 상처마저도, 절망마저도, 상실마저도 순수하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젊음의 영화다. 순수함과 솔직함으로 장식되는 젊은 날의 그림들이다. 감정의 과장도 엿보이고 서툼도 보이지만 이것이야 말로 이 영화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정형화된 현실로 이 젊음들을 바라본다면 그야말로 한편의 넌센스가 되고 말 것이다. 눈물 겹지 않는가? 감정의 과장과 서툼들이. 영화 속의 저런 젊음들도 회상 속에 묻혀져 버릴 것이란 그 피할 수 없는 사실이. 그러니 속으로 눈물을 삼길 만한 영화라고 한 들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09.2.25.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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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22:52

세계의 조상들(statues in the world)




조상(a statue)은 반신상(a bust)과는 대조적으로 그리고 적어도 실물 크기 이거나 또는 그 이상의 크기인 보통 전신으로, 인간이나 인간들, 동물들, 또는 사건을 표현하는 어느 각도에서나 볼 수 있는 조각이다. 

조상의 정의는 항상 명확하지는 않다; Equestrian statues( 마상의 조상들)로 불리는 말을 타고 있는 인간의 조각들도 분명히 포함되며, Madonna and Child  또는 Pietà 와 같이, 많은 사례에서,  두 사람의 조각이 또한 포함 될 것이다. 보통 집을 수 있는 작은 조상은 statuette 나 Figurine 이라 불린다.

많은 조상들이 역사적인 사건이나 위인(an influential person)의 삶을 기념하기 위한 대리물로 만들어 진다. 많은 조상들은 일반적인 단어들이 갖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고결함 보다 더 큰 고결함을 가지고서, 바라보는 이들을 고양시키기 위해 옥외나 공공 건물들에 전시되는,  public art(대중예술)로 간주된다.

아주 드문 경우에, 조상들 자체가 역사상 중요하고 그것들 자체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고취시킨다. Statue of Liberty (자유의 여신상)이 그것의 100주년 기념일을 축하 할 때인 1986년에, 그것을 기념하는 3일간의 100주년 기념일은 천 이백만명의 사람들을 불러들였는데, 그 날짜 현재로 세계에서 가장 큰 대중적인 행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 행사의 게스트 목록은 퍽이나 독특했다. 그 행사의 연출자인 Jeanne Fleming 은 "우리는 자유의 여신상 기념일에 전세계의 모든 위대한 조상들을 초대했고 그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거대한 인형들을 만들었다. 각각의 퍼핏 조상들이 그 국가의 음악과 함께 입장했다." 고 말했다. 

말을 탄 조상들에 대한 관습(a code)에 관한 도시의 전설이 있는데, 그것으로써 말의 발굽들이 어떻게 기수가 최후를 맞이했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하나의 말발굽은 기수가 전투에서 당한 부상으로 죽었거나, 부상당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바닥에 떨어진 두개의 말발굽은 전투에서 죽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대부분의 주요한 유럽 국가들에서 마상 조상들의 예들은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준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관습은 19세기에 사라진 것처럼 여겨진다. 

조상들은 Seven Wonders of the Ancient World (고대 세계의 7가지 불가사의들) 가운데 Colossus of Rhodes (Helios의 거상) 과 Statue of Zeus at Olympia(올림피아 제우스의 입상) 그리고 현대 세계의 불가사의들 중에는 Easter Island (이스터 섬)의 모아이와 더불어, 세계의 불가사의들 가운데도 존재한다.
 

번역본의 원문은 이곳 입니다

아래 이미지들의 출처는 위키피디아 입니다. 아래 이미지들은 조상들의 예들로 사용되었습니다.



원문

더보기




Seokguram Buddha. The grotto was completed by the Silla court in 774





The statue of Admiral Yi overlooking central Seoul.




Auguste Rodin, The Thinker, Bronze, c.1902, Ny Carlsberg Glyptotek in Copenhagen, Denmark




Lion man, from Hohlenstein-Stadel, Germany, now in Ulmer Museum, Ulm, Germany, the oldest known zoomorphic statuette, Aurignacian era, 30,000 BC-26,000 BC




Venus of Willendorf, one of the oldest known Statuettes, Upper Paleolithic, 24,000 BC-22,000 BC




The Great Sphinx at Giza, 3rd millennium BC, Egypt




Venus de Milo, c. 130 - 100 BC, Greek, the Louvre




Laocoön and his Sons, Greek, (Late Hellenistic), circa 160 BC and 20 BC, White marble, Vatican Museum




Moai of Easter Island facing inland, Ahu Tongariki, c. 1250 - 1500 AD, restored by Chilean archaeologist Claudio Cristino in the 1990s




The Great Buddha of Kamakura, c. 1252, Japan




Michelangelo's David, 1504, Florence, Italy




Auguste Rodin, The Burghers of Calais (1884–c. 1889) in Victoria Tower Gardens, London, England.




The Statue of Liberty, New York Harbor, USA, c.1886




Christ the Redeemer, Rio de Janeiro, Brazil, 1931




A closeup of the replica statue of Roman Emperor, Marcus Aurelius, 1981, The original c. 200 AD is in the nearby Capitoline Museum, Rome




The Ushiku Daibutsu, Amitabha Buddha, 1995, Japan. The second tallest statue in the world.




Stone statue outside Moscow's New Tretyakov Gallery




Perseus with the Head of Medusa (Benvenuto Cellini, 1545-54) in the Piazza della Signoria in Florence, Italy after the statue's cleaning.




Jeté (Enzo Plazzotta, 1975), at Millbank, Westminster, London, illustrates the material's capab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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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1 20:24

[생각 돌아보기] 성욕의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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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성욕과 관련해서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일정한 나이, 대체로 사춘기에 접어들면 예외 없이 자연스럽게 성적 욕구가 생겨나게 되고, 따라서 내면의 본능적인 성적 욕구와 외부의 강제적인 도덕과 사회적인 요구와 기대 사이에서 찢어지고 흩어지는 분열된 자아로 고뇌하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성욕의 해소와 억압의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복잡하고 해결 난해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역사가 인간 중심의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고도의 문명을 형성하면서 본능이 억압받고 중심에서 배제되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도화되고 체제화 된 인간적인 이성의 ‘차갑고’ ‘냉정한’ 문명이 그 존속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물적 본능을 억압하거나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순화된 본능이 태양의 그림자같이 그 영역을 넓혀온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은 인간의 이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억압된 본능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순화된 본능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간의 문화를 억압된 본능(성욕)의 승화된 양상으로 파악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을 순화 시키는 것에는 예술과 더불어 교육제도가 많은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의 교육제도는 이성과 합리성의 계발과 더불어 인간성의 고취라는 명목 하에 동물적인 본능을 순화시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즉 인간성의 고취라는 것은 이 성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창조적으로 승화시킬 것이냐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을 것이다.  성욕이 창조적인 행위로 출구를 발산할 때 그것에 문화적, 교육적, 종교적인 라벨을 붙여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근의 영어에 대한 강조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국가의 존속을 위한 실용적인 인간상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파악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영어를 통해 국가 경쟁력과 실용적인 인간상을 강조하는 것은 본능을 강제하고 억압하는 국가주의의 극단적인 변형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순화된 본능은 고급이나 세련미의 고상한 이름으로,  동물적, 본능적이고 탐욕스런 성욕에 관해서는 ‘양심의 가책’ 이나 ‘수치심’ 이나 ‘위선’ 또는 ‘정신이상’ 이란 감정이나 인식을 갖게 만들어왔다. 승화되지 않은 본능(성욕)은 저질이고 더럽고 타락한 것이란 인식의 팽배가 사회를, 특히 아직도 유교의 영향이 큰 우리 사회를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성격으로 만들어 놓은 측면을 간과 할 수 없다. 의식의 이면으로 감추어지고 억압되어져야 할 성욕이 건전하게 형성된 듯한 의식층을 뚫고나와 타인에게 성욕을 탐욕적으로 발산하게 될 때는 영락없는 위선자의 딱지가 붙여지는 것이다.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경우가 그렇다. 피해자들은 평소 가해자들을 존경하고 믿었던 것이다. 존경받고 믿을 만한 사람이었기에 위선의 감정은 더 깊어지는 것이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10대들에게 있어 성욕은 그 자체로서 위선이란 죄책감을 갖게 하기도 한다. 솔직히 필자도 어린 시절 그런 죄책감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특히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숨어서 자위행위나 만원 통학 버스에서 여학생에게 몸을 밀착하는 행위 등을 했을 때는 어김없이 위선자란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일을 반복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괴롭고도 괴로운 성욕의 질곡이었다.          


바로 이 위선이란 감정의 사회 문화적인 경로를 추적해보면 아마도 사회적인 억압장치의 부산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동물을 인간이게 하는 거의 모든 장치들이 아마도 성욕을 죄악시했을 것이다. 특히 가족과 공동체등 가부장적인 질서는 혼란한 성욕을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성욕을 죄악시 한 것은 신에게 순종하는 종교적인 질서의 필요에 의해서일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의 선악과도 성욕의 통제라는 의미 해석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욕이 인간이게 하는 이 모든 제도와 체제의 원리와 반할 때 동물이라는 위선의 딱지가 붙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위선을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자연스러워야 할 성욕을 폭력적으로 병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성행위에는 질서와 정정당당한 경쟁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인간에게 성행위는 그 나름대로의 원칙과 정당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서로간의 동의와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위선은 순화된 본능이 억압해온 성욕에 대한 지나친 죄책감이다. 성욕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과 같다. 한 순간 막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홍수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의 10대들에게 충고하건대 성욕을 때로 자위행위나 이성과의 교제와 같은 방법으로 해소하는 경우 지나친 죄책감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위선이 아니다. 어차피 성욕에 대해 억압해야만 하는 환경이라면, 중요한 것은 성에 대한 건전한 의식이다. 그리고 임신과 낙태에 대한 정확한 정보, 건강, 교육, 경제적 여건 등 현실적 고려이다. 또한 성욕을 억제하는 것 그 자체도 괴로운 자기 수행이며 속과 겉이 다른 위선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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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본능이 억압되고 통제되어 왔지만 앞서 말했듯이 본능이 그 영역을 넓혀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 본능의 영역을 넓히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해 왔으며 예술은 인간 본능의 고귀한 산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성욕의 괴로움과 관련해서, 이제 인간은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해 있다.(아니 이것은 인간 일반의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개인들 각자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이며 양자의 공존도 가능하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언급해 보면, 그 하나는 성욕을 창조적으로 승화하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성욕의 직접적이고 동물적인 해소가 그것이다.

제도화된 결혼을 통한 성욕의 해소는 제외하고, 성욕의 직접적인 해소는 성범죄나 성상업주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매춘은 성상업주의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것이 성욕의 변질되고 왜곡된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러한 상업주의가 인간의 순수한 성욕해소는 무관하게 인간의 비극을 잉태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술, 마약, 범죄 등 성욕해소를 변질시킬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0대들의 원조교제는 이러한 변질의 전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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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에서 다소 무리한 주장이긴 하지만, 승화된 성욕이 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성상업주의보다 성욕 해소의 더 효과적인 방법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욕의 해소를 주로 직접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것 같이 보인다. 따라서 성욕으로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문화 보다는 직접적으로 성욕을 배출하는 성범죄나 성상업주의가 더 횡행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인류 문화는 성욕의 승화에서 창조되었다는 말처럼 창조적인 승화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과장된 표현인지는 몰라도 그야말로 성욕이 문화의 질을 높이느냐 저질로 만드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예민한 감수성이 있기에 많은 분야에서 창조적인 승화를 이룰 수가 있다. 예술, 스포츠, 컴퓨터 등이 그런 분야이다. 성욕의 괴로움에 빠져 범죄까지 저지르는 10대(사실 기성세대가 더 심각하며 10대들은 성범죄는 기성세대의 모방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들은 참으로 안타깝다. 분명히 창조적인 다른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미래 자산인 10대들이 성욕의 괴로움을 창조적으로 해소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와 기성세대의 노력이 절실하다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성세대가 성욕을 창조적으로 승화하여 바람직한 성문화를 이루려는 의지와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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