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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무도 모른다

by 컴속의 나 2008. 11. 9.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 誰も知らない)



이 영화를 보기 바로 전 조금 언짢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언짢은 기분 때문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 영화를 보았으니 그러한 연관이 필연적인 것인지 우연의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요.

그 언짢은 기분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11시 쯤 가족 모두가 잠자리에 다 누웠습니다. 잠들기 전에 보통 한 두 마디씩 하게 되거나 장난도 치는데 어쩌다 기독교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마도 큰 아이가 저의 종교가 무엇인지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아직 자아 형성도 덜 된 어린 아이들을 교회로 데리고 가는 기독교 신자들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아내와 생각이 달라 조금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행위에 호의적인 아내가 못마땅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아직은 어리니 교회에 따라갈 필요는 없다. 좀 더 자라서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아이들을 과자나 학용품등을 이용해 교회로 데리고 가는 선교 행위를 싫어했습니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유치하고 악의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종교란 어떤 비극적이거나 절망적인 인생의 경험 뒤에 찾게 되는 근엄하고 경건한  무엇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이끌고 선교를 시작한 나이도 30세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대상들도 주로 가난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받은 어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맹목적이기 보다는 절실한 무엇이기에 적어도 성숙한 나이에 어울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직 자아 형성도 덜 된 초등학교 학생을 교회에 데려가 예수만을 믿으라는 것은 지적인 살인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교도들의 구원이 절실할 것이고 저주 받은 인간을 살려내는 행위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선교의 대상이 나이에 의해 제한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면 구원받지 못하는 이교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인 기독교의 교리 앞에서 왜 신성함이나 두려움 보다는 어떤 속박감이 먼저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양자 택일의 강요가 너무나도 모진 이 기독교에 대해 우유부단해지는 제 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한 선택의 강요가 너무나 모질고 확신에 차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러한 잡념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 컴퓨터를 켜고 우연히 아무도 모르게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모태 신앙처럼 종교는 빠를수록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삶의 체험 속에서 신을 절실하게 찾게 되는 그러한 나이에 다다를 때가 좋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기독교를 꼭 믿으라고 전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와 기독교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물론 굳이 연결을 지으려면 불가능한 것 아닙니다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기독교 운운하며 이 영화를 본 소감을 시작했을까요?


사진 출처  http://www.livedio.com/ImgPool/ImgPool.aspx?MediaID=693396


또 한 가지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 훨씬 이전의 경험입니다. 지인과의 식사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 적이 있습니다. 먼저 식사를 끝낸 아이들이 식당을 돌아다니려고 하기에 제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납니다: “실내에서 남들에게 피해주지 말고 어른스럽게 행동해라!” 그런데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지인이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에게 가능한 요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정말 가능하지도 않는 요구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스러울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이들이 어른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들은 아이스러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아무도 모른다>는 영화에 대해 소감을 말하기 전에 이러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바로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좀 과장이긴 하지만 인간은 아이와 어른으로 나누어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모든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어른은 아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언의의 유희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여자와 남자처럼 명확한 구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른과 아이의 사이에는 시간의 연속성과 역사성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명확한 구분이 아니라 변화상의 구분정도가 가능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편의적인 구분일 뿐이며 결국 아이는 어른으로 변화할 뿐인 것입니다. 아이였던 어른이며 어른이 될 아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이의 시기를 경험한 어른들은 그 시기를 자주 망각합니다. 남, 여 간의 오해나 편견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다른 실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아이였던 어른들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현실은 이 망각 때문이 아닌가도 합니다. 이 망각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아이들과 관련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모든 어른들에게는 아이일적의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정작 자기  주의에 존재하는 아이들의 세계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솔직히 우리에게 단절된 것은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아닌가도 싶습니다.

 
쿄코와 유키    사진 출처 http://www.joycine.com/service/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참 좋은 영화입니다. 잊고 있었던 아이들의 세계를 환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단절된 아이들과 어른들의 세계를 이으려는 진지한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자기 성찰을 진지하게 유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에서 어른의 존재가 없다면 아이들은 생존이 어렵습니다. 첨단 과학의 21세기에도 무기력하게 태어나는 인간은 원시인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아이와 어른들의 세계는 원시(자연)와 문명, 본능과 문화, 순수와 오염(타락), 환상과 현실등의 구분이 가능할 것입니다. 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인류 문명의 축소판이라거나, 문화의 창조적인 전수라거나 세속에의 적응 같은 알레고리로 파악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원시의 모습으로, 본능만으로, 순수하게만 살아갈 수 없도록 조직화된 세상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또한 역설적이게도 아이들의 세계(동심의 세계)가 필요한 것이 오늘날의 세계입니다. 문명과 문화와 순수함을 잃은 어른들은 아이들을 통해 원시와 본능과 순수를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이와 어른은 공생의 관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아이들의 세계를 망각해버린다는 것은 어쩌면 끔찍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뿌리를 상실한 나무처럼 근원과 단절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망각된 아이들의 끔찍한 모습들이 바로 우리 어른들의 모습임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요? 결코 과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아무도 모른다>는 단순히 ‘아이들의 세계‘ 만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결코 영화 속의 4남매들처럼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눈물 없는 아이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영화 속의 아이들은 너무 어른스럽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을 통해 망가진 어른들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피가 다른 4남매가 그리는 비극의 세계는 어른들의 썩어가는 환부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무도 모른다>는 아이들의 비극적인 실존을 통해 어른의, 더 나아가 문명과 문화와 타락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세계와 관련해서 이점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아이들이 그토록 감정을 철저하게 절제할 수가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일본인들의 특성을 잘 알지 못해서 그럴까요? 사실 일본인들의 감정 절제는 대단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속 다르고 겉 다르다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이들의 불행한 일상이 다루어진 <아무도 모른다>가 병들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지만 아이들의 세계 그 자체를 다루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감독의 의도가 의미심장하다고 하더라도 또 영화의 리얼리티가 그럴 듯 하다 하더라도 아이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이들이 너무 어른스럽기 때문입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세계가 있다’ 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른들이 감정을 강요한 감정적 살인을 저지른 듯한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2004년 칸느 영화제에서 영화제 사상 최초의 아역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훌륭한 영화입니다. 아마 <아무도 모른다>가 아니었더라면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연기력을 높이 평가받은 우수한 영화입니다. 하드 보일드한 문체나 스타일이 예술적인 경향의 대세를 이룬다고 하지만 아무리 비극적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들의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세계를 눈물 한 방울 없는 냉혹한 세계로 묘사한들 그리 탓할 일은 아닙니다. 앞서도 애기했지만 망각된 아이들의 끔찍한 모습들이 바로 우리 어른들의 모습임을 감독은 의도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돌아와 아이들이 환한 웃음을 짓게 되었다면 이 영화는 분명 실패했을 것입니다. 청중들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스토리를 전개한다면 영화는 신선함이 없이 진부해지고 마는 것이니까요. 영화감독들이 고민하는 세계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일 것이니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사진출처: http://www.myphototv.com/PhotoMagazine/


아이들에게 그들의 세계를 돌려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입니다. 그들의 얼굴에 웃음을 돌려주는 것은 어른들의 책임입니다. 타락한 어른이 투영된 아이들의 눈물 없는 냉혹한 세계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어른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서로를 치유하는 방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 의해 그들의 세계를 보호받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통해 좀더 평화롭고 순수한 세계를 꿈꾸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