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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숙, 우리들의 천사
21세기도 7년이나 지났다. 올 것 같지도 않던 21세기였다. 그러나 7년은 21세기에 누적된 시간이 아니라 2000년이란 긴 세월을 한 순간에 폭발, 분열, 그리고 융합시키면서 스며든 변화의 시간이었다. 이러한 폭발로 사회, 정치 문화적으로 소외되어온 주변부와 타자가 파편처럼 떠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한 개인에게는 어떠한가? 개인의 이성과 합리성이 오히려 억압되고, 테크놀로지와 멀티미디어가 양산하는 고상한 이름으로 포장된 유행, 트렌드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온갖 욕망들의 부유가 개인의 정체성 해체, 곧 자아 해체라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인의 중심은 뻥 뚫려버리고 그 구멍 속에는 온갖 타자의 욕망들만이 채워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초상에 덧붙여 자아를 빼앗긴 현대인의 초상화라 말해도 될까?
진정한 자아의 의미란 타인과의 의미 있는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억압되는 이성과 합리성을 회복하고 상업주의에 의해 인위적으로 강요되는 욕망을 벗어난 자리에 진정한 자아, 즉 타인을 존중하고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 개인이 탄생하지 않을까? 그러한 개인들이 모일 때 바람직한 공동체가 만들어 지지 않을까?
그러나 모두들 제 잘난 맛에, 제 기분 꼴리는 대로 아주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착각 속에 오만한 콧대를 세우고 있다. 어떤 거대한 것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는 줄인형이란 사실을 모른 체 말이다. 이제 텅 빈 구멍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자아에 대해서 말하자면, 내가 우연히 알게 된 만숙의 이야기는 빠질 수 없지 싶다.
만숙이가 나를, 아니 내가 근무하고 있는 <청소년 문제 상담소>를 찾은 건 작년 가을이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불행하게도 몇 가지 경우에 한해서는 너무 늦어있었다. 그녀의 목에 찍힌 ‘이빨’ 자국이나 양팔에 새겨진 온갖 문신들과 약물 중독은 없애거나 치료하기에 늦지 않았지만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는 아이는 어쩔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술과 담배에 찌들고 약물에 중독 된 상태로 보아 만숙이의 뱃속 아이는 기형의 가능성이 아주 높았지만 막상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해 본 결과 다행히 기형은 아니었다. 하지만 낙태를 하기엔 늦어 있었다.
만숙이에게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물었을 때 만숙이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만 했다. 그러면 인생이 더욱 불행해진다는 말에도 그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몰라“ 라는 버려진 짐승의 신음 같은 단음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불행하게도 만숙이가 모르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본명은 물론이고 나이, 주소도 몰랐다. 그러니 그녀 부모의 얼굴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욕탕에 한 번도 안 가 보았는지 자신의 몸무게도 몰랐다. 그녀가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만숙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부풀어 오르는 뱃속에 아이가 들어있다는 그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그녀가 아는 것이 있다면 내가 임신한 것 외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명언 같은 그 사실 하나 밖에 없는 셈이었다. 마치 나 , 만숙이를 알기 전에 너 자신을 알라는 항변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만신창이가 된 만숙이에게 그 자신의 존재는 ‘죽은 시체‘ 아니 ’살아있는 시체’ 와도 같은 모순적인 존재였을까? 어쩌면 그렇게 만숙이는 자신의 존재조차도 잊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인간과 세상에 대해 한없는 원망과 저주를 퍼붓기도 할 법 했지만 오히려 ’몰라‘ 라는 말만을 반복해 대던 만숙이는 텅 빈 구멍 바로 그것이었다. 새 생명이 자라고 있는 그녀의 자궁과 불러오는 배의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만숙은 마치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검은 구멍 같이만 여겨졌다.
무엇이 만숙이를 그토록 공허와 자학으로 몰아가게 했는지 누구나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만숙이의 육체에 가해진 폭력의 검은 손길이 누구의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욕망의 성격을 쉬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숙이의 정신에 검은 얼룩을 드리운 자들이 누구인지도 또한 쉬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검은 손길의 실체들을 짐작에만 근거해 털어 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검은 실체들은 도처에 검버섯처럼 퍼져 또 다른 만숙이를 잉태하겠지만 어찌할 수 없는 슬픈 현실이었다. 만숙이의 상처와 고통과 공포는 그녀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역설을 잉태했다. 인간의 관계가 인간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비극, 만숙이의 모습이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이해하고, 이해받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면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 만숙은 그것을 증거했다.
그러나 끝까지 만숙이가 붙잡은 것은 그녀가 잉태한 아이였다. 그녀의 공허한 검은 가슴에서 잉태된 밝은 생명이기라도 하듯 만숙은 어린 생명을 꼭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그녀의 가슴으로 꼭 보듬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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