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교차
떠오를 듯 말 듯한 기억으로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있다. 아무리 기억하려 하여도 기억에 가려진 사물이나 사실의 실체가 떠오르지 않을 때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비등점에 도달하곤 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본 듯한 사람 인 듯한데 도무지 기억할 수 없을 때 그 호기심은 의외로 질기게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하지만 그럴 경우 기억하고 싶지 않는 무의식적 억압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호기심의 끈을 끊어버린다. 기억하고 싶지 않을 때 그것은 참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런데 참 우스운 것은 애써 기억하려는 노력을 그만 둔 순간에 느닷없이 떠오르는 기억이다. 기억은 긴장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긴장이 풀려 있을 때 잘 떠오르는 것일까? 기억에 관한 한은 이렇듯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도 일어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금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여자가 그의 머릿속에 잡스러운 생각들을 떠오르게 하고 있다. 그는 지금 강릉으로 가는 기차의 좌석에 앉아 그 여자의 뒤통수를 보며 기억을 더듬고 있다. 그는 기차가 강릉에 도착할 때까지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고 무척 애썼다. 무려 2시간 가까이나. 때로 자유연상기법이란 황당한 짓까지도 해보기도 했고 하느님께 기도도 해보았다. 하지만 도통 기억을 할 수가 없다.
그는 좌석에 앉아 조용히 자는 척을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과 단어들과 장소들과 인간들과 사건들과 사물들이 어지럽게 맴돌았다. 그러다 여자에 관한 한 그는 좋은 기억들이 없어 술이나 마시고 잠에나 곯아떨어지자고 작정하고 통로를 지나다니는 카트 상인에게 캔 맥주 두 개와 마른 오징어를 사가지고는 마시기도 했지만 잠은커녕, 정신이 더욱 말똥말똥 해지면서 기억해 보자는 각오가 더욱 샘솟는 것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막상 기억을 해낸다고 해도 기억을 해낼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가 아닐 것은 분명하다. 그런 여자가 그의 삶 속에 존재하는가 생각해 보면 그런 여자는 없었다. 그에게 여자들은 기억의 대상이 아니라 망각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서 본 듯한 저 여자 얼굴은 떠오를 듯 말 듯 기억의 언저리를 맴돈다.
그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강릉에 도착하기 까지 달아난 기억을 다잡고 싶다. 그는 여자에게 다가가 직접 물어보려고 한다. 취기가 한 몫을 하고 있다. 별 대수롭지 않는 일이 때로 뻥튀기처럼 커질 때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이러다 보니 기억을 돌이키려 고민하느니 차라리 당사자에게 직접 다가가 기억을 환기시키고 싶다. 아주 쉬운 길이 있음에도 우회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그녀 앞으로 가 선다. 그리고 더듬더듬 입을 땐다.
“저, 죄송하지만......구면이 아닌가요?”
그의 갑작스런 말에 그녀는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누구신지......”
그는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심 망설이면서도 이왕 내친김이라 말을 잇는다.
“어디서 뵌 듯 하거든요. 제 기억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전 기억에 없는데요. 죄송하군요.”
그녀는 등받이에 고개를 기대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죄송하다고 말하고는 자리로 돌아와 앉지만 갑작스런 충격이 밀려든다. 그는 충격 속에서 중얼거린다.
‘죽은 여자, 죽은 여자.’
그의 머릿속에 여자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의 차에 치여 죽은 바로 그 여자가 분명하다. 그녀가 다시 살아나 그의 앞에 앉아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서 그의 옆자리에 앉는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제겐 죽은 언니가 하나 있었지요.”
“쌍둥이였나요?”
“그래요. 그런데 저도 당신을 보는 순간 너무나도 놀랐어요.”
“놀랐다구요?”
“당신도 쌍둥이시죠?”
“그걸 어떻게......?”
“전 타살된 당신 쌍둥이 형을 죽인 당사자이니까요. 전 언니를 죽이고 뺑소니를 친 인간을 꼭 죽이고 싶었거든요. ......당신으로 착각하고 당신의 형을 죽였지만 말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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