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으로 가는 길
소풍날의 아침 하늘은 참 깨끗합니다. 흰 구름과 파란 하늘이 눈을 부시게 합니다. 날씨 탓인지 아이들이나 아이들을 따라나선 부모님들의 발걸음도 가벼운 듯 합니다.
소풍의 목적지는 유치원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는 공원입니다. 작고 아늑한 공원으로 지상 위의 천국이란 뜻인 '지상낙원'이란 푯말이 정문에 걸려있습니다. 아이들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공원입니다.
하지만 아쉬움이라면 아이들이 걸어야 할 그 20분 거리의 길이 약간은 번화한 곳이란 것입니다. 도시의 한 모퉁이 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지상낙원’으로 가는 길의 이미지와는 약간 걸맞지 않다고나 할까요.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입니다. 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이고 보면 질주하는 차들은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보고 상어 같다고 한 찬현이의 말이 떠오르는군요. 오늘 아침 차들을 보니 찬현이의 비유가 실감이 납니다. 아마 안전사고에 대한 책임의식 같은 것 때문이겠지요.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부모님들이 함께 따라 나선 길이니 크게 걱정은 안됩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참석했지만 항상 예외는 있기 마련이죠. 부모님과 함께 참석하지 못한 아이들이 2명 있는데 엄마가 없는 희천이와 주말에도 맞벌이를 하는 영미가 그들입니다. 저는 부모를 대신해 그들의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다들 부모들의 손을 잡거나 곁에 있으니 질투도 하지 않으니까요. ‘지상낙원’으로 가는 아침의 발걸음은 너무나도 가볍습니다.
유치원 정문을 나와 도로가로 들어설 무렵 게시판에 붙은 영화 포스터를 보고 희천이가 물었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원색적 본능>이었고 제목 밑에는 <도발적인 섹스>란 선전용 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선생님, 섹스라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현명한 대답을 준비해 놓지 못하고 있던 터라 약간 당황했지만 대답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희천아, 영어로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 알지? 그 식스의 사투리란다. 알겠니?"
여섯 살 난 아이에게 이런 터무니없는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순간 머리 속에 떠오른 말은 러브란 말이었지만 괜히 말꼬리만 잡힐 것 같아 그만두었죠. 일단은 위기의 모면이 중요했으니까요. 내일 다시 설명해 주리라 생각했던 겁니다. 유치원에서만 생활하던 우리들에게 의외의 복병이 나타난 셈이지요.
"선생님, 영어에도 사투리가 있어요? 영어는 다 영어잖아요?"
"사투리가 있지. 희천이 네가 쓰는 사투리도 다 한국말이지 않니."
희천이는 잘 알았다는 표정으로[섹스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이번엔 그림이 이상했나 봅니다. 남녀가 벌거벗고 함께 끌어안고 있는 그림이었으니까요.
"왜, 사람들이 벌거벗고 있어요?"
"응, 그건 말야. 좋아하기 때문이지."
순간 희천이가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옷을 벗으려고 했습니다.
"선생님도 옷 벗으세요. 절 좋아하잖아요?"
희천이의 행동은 장난이었지만 희천이의 모방이 아주 창의적(?)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 포스터를 보고 바로 응용을 하는 희천이가 어찌 창의적이지 않겠습니까? 나는 녀석의 윗도리를 입혀주며 생각했습니다.
‘이 녀석아! 아직 지상낙원은 멀었단 말야! 벗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곳 말이야, 요 녀석아!’
"선생님은 부끄러운 거죠?"
그렇게 말하고 히히덕거리는 녀석이 왠지 천진난만함을 잃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저의 마음을 모두 다 읽고 있다는 듯한 음흉한 목소리 같았으니까요. 사소한 것을 크게 보는 제 성격 탓이겠지만 벽에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 하나가 아이들을 많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엔 영미의 차례였습니다. 참으로 예상하지 못한 질문의 공세였던 겁니다. 영미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기 러...브...호...텔이 뭐예요?"
현실 도피적인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빨리 아이들을 ‘지상낙원’에서 뛰놀게 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섹스 보다는 쉬운 질문이었지만 그래도 만만찮은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쉬는 곳이라 간단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너무 두리뭉실한 듯해 사람들을 여행객들로 바꾸어 놓았죠.
"응, 여행객들이 쉬었다 가는 곳이란다."
"선생님 그럼 저기 알...프...스...모...텔...이 뭐예요?"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질문 같았습니다. 조금 전 대답에 여행객으로 바꾼 것이 자기 함정을 파고만 꼴이 되었습니다. 약간의 시간을 끌기 위해 영미를 보고 웃으며 대답해주었습니다.
"응 그건, 여행객들이 쉬는 곳인데 말야 피곤한 차들도 함께 쉬는 곳이란다."
영미가 고개를 꺄우뚱거리며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럼 선생님, 러...브...호...텔...에는 차들이 쉴 수는 없어요?"
영미가 예리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음 그건 말야......"
다행히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던 건 희천이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계집애, 그것 두 몰라? 알프스는 멀리 있잖아, 멀리! 그래서 차들도 쉬어야 하는 거야, 이 바보야."
또 위기가 찾아들었습니다. 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잠깐만요."
뒤돌아보니 이번에는 뒤 따라 오던 방귀 대장 방규 녀석이었습니다. 방규 녀석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있었습니다. 작은 카드 같았습니다.
‘방규 이 녀석아, 또 카드냐.’
방규 녀석은 카드 만들기에 소질이 있습니다. 자기가 만든 카드를 방귀를 뿌리듯이 온 동네에 뿌리고 다니는 녀석입니다. 참 순박한 녀석입니다. 헌데 이번에 건네 준 것은 카드가 아니라 명함 만한 크기의 광고물이었습니다.
<책임출장. 아가씨들 항시 대기. 맛사지로 싱그러운 하루를......>
낯이 뜨거운 광고물이었습니다. 여자들의 사진과 함께 전화번호가 큼직하게 적혀있었습니다. 길에 뿌려진 광고물을 주워 온 것입니다.
‘녀석, 엄마에게 가진 않고......’
선생님이란 존재를 신뢰했기에 옆에 있는 엄마를 제쳐두고 방규 녀석이 달려왔겠지만 기쁨보다는 원망이 앞섰습니다.
‘녀석아 엄마가 옆에 있잖아. 엄마가 때론 더 훌륭한 선생님이시란다.’
이렇게 한탄을 하며 퍼부을 질문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평소에 이것저것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도 했죠. 역시 방규의 입에서는 은밀한 방귀와는 달리 날카로운 질문이 흘러나왔던 겁니다.
"선생님, 맛사지가 뭐예요."
정말이지 거리에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상야릇한 것들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방규의 뺨을 두 손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습니다.
“음, 그건 말야. 뭉쳐있는 몸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거지. 요렇게 말야.”
정말이지 모두들 세계화에 걸맞은 질문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들 영어지 않습니까. 러브 호텔, 알프스 모텔, 맛사지. 또 어떤 녀석이 어떤 질문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영어임이 분명하리라 생각했죠. 비록 질문은 아니었지만 영어라는 추측은 적중했습니다. 영미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파라다이스예요, 파라다이스."
영미는 ‘지상낙원’을 파라다이스로 영역(英譯)했던 것입니다. 뭐 어떻습니까. ‘지상낙원’을 파라다이스라고 한 게 말입니다.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면 얼마나 재치있고 애교있는 행동입니까. 하지만 이번만은 비록 한자이긴 하지만 지상낙원이란 표현을 양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 그렇구나. 지상낙원이로구나. 너희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곳이니, 자, 어서 달려가 마음껏 뛰어 놀아라, 애들아!"
이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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