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성욕과 관련해서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일정한 나이, 대체로 사춘기에 접어들면 예외 없이 자연스럽게 성적 욕구가 생겨나게 되고, 따라서 내면의 본능적인 성적 욕구와 외부의 강제적인 도덕과 사회적인 요구와 기대 사이에서 찢어지고 흩어지는 분열된 자아로 고뇌하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성욕의 해소와 억압의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복잡하고 해결 난해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역사가 인간 중심의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고도의 문명을 형성하면서 본능이 억압받고 중심에서 배제되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도화되고 체제화 된 인간적인 이성의 ‘차갑고’ ‘냉정한’ 문명이 그 존속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물적 본능을 억압하거나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순화된 본능이 태양의 그림자같이 그 영역을 넓혀온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은 인간의 이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억압된 본능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순화된 본능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간의 문화를 억압된 본능(성욕)의 승화된 양상으로 파악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을 순화 시키는 것에는 예술과 더불어 교육제도가 많은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의 교육제도는 이성과 합리성의 계발과 더불어 인간성의 고취라는 명목 하에 동물적인 본능을 순화시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즉 인간성의 고취라는 것은 이 성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창조적으로 승화시킬 것이냐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을 것이다. 성욕이 창조적인 행위로 출구를 발산할 때 그것에 문화적, 교육적, 종교적인 라벨을 붙여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근의 영어에 대한 강조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국가의 존속을 위한 실용적인 인간상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파악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영어를 통해 국가 경쟁력과 실용적인 인간상을 강조하는 것은 본능을 강제하고 억압하는 국가주의의 극단적인 변형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순화된 본능은 고급이나 세련미의 고상한 이름으로, 동물적, 본능적이고 탐욕스런 성욕에 관해서는 ‘양심의 가책’ 이나 ‘수치심’ 이나 ‘위선’ 또는 ‘정신이상’ 이란 감정이나 인식을 갖게 만들어왔다. 승화되지 않은 본능(성욕)은 저질이고 더럽고 타락한 것이란 인식의 팽배가 사회를, 특히 아직도 유교의 영향이 큰 우리 사회를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성격으로 만들어 놓은 측면을 간과 할 수 없다. 의식의 이면으로 감추어지고 억압되어져야 할 성욕이 건전하게 형성된 듯한 의식층을 뚫고나와 타인에게 성욕을 탐욕적으로 발산하게 될 때는 영락없는 위선자의 딱지가 붙여지는 것이다.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경우가 그렇다. 피해자들은 평소 가해자들을 존경하고 믿었던 것이다. 존경받고 믿을 만한 사람이었기에 위선의 감정은 더 깊어지는 것이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10대들에게 있어 성욕은 그 자체로서 위선이란 죄책감을 갖게 하기도 한다. 솔직히 필자도 어린 시절 그런 죄책감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특히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숨어서 자위행위나 만원 통학 버스에서 여학생에게 몸을 밀착하는 행위 등을 했을 때는 어김없이 위선자란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일을 반복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괴롭고도 괴로운 성욕의 질곡이었다.
바로 이 위선이란 감정의 사회 문화적인 경로를 추적해보면 아마도 사회적인 억압장치의 부산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동물을 인간이게 하는 거의 모든 장치들이 아마도 성욕을 죄악시했을 것이다. 특히 가족과 공동체등 가부장적인 질서는 혼란한 성욕을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성욕을 죄악시 한 것은 신에게 순종하는 종교적인 질서의 필요에 의해서일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의 선악과도 성욕의 통제라는 의미 해석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욕이 인간이게 하는 이 모든 제도와 체제의 원리와 반할 때 동물이라는 위선의 딱지가 붙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위선을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자연스러워야 할 성욕을 폭력적으로 병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성행위에는 질서와 정정당당한 경쟁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인간에게 성행위는 그 나름대로의 원칙과 정당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서로간의 동의와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위선은 순화된 본능이 억압해온 성욕에 대한 지나친 죄책감이다. 성욕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과 같다. 한 순간 막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홍수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의 10대들에게 충고하건대 성욕을 때로 자위행위나 이성과의 교제와 같은 방법으로 해소하는 경우 지나친 죄책감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위선이 아니다. 어차피 성욕에 대해 억압해야만 하는 환경이라면, 중요한 것은 성에 대한 건전한 의식이다. 그리고 임신과 낙태에 대한 정확한 정보, 건강, 교육, 경제적 여건 등 현실적 고려이다. 또한 성욕을 억제하는 것 그 자체도 괴로운 자기 수행이며 속과 겉이 다른 위선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비록 본능이 억압되고 통제되어 왔지만 앞서 말했듯이 본능이 그 영역을 넓혀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 본능의 영역을 넓히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해 왔으며 예술은 인간 본능의 고귀한 산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성욕의 괴로움과 관련해서, 이제 인간은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해 있다.(아니 이것은 인간 일반의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개인들 각자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이며 양자의 공존도 가능하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언급해 보면, 그 하나는 성욕을 창조적으로 승화하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성욕의 직접적이고 동물적인 해소가 그것이다.
제도화된 결혼을 통한 성욕의 해소는 제외하고, 성욕의 직접적인 해소는 성범죄나 성상업주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매춘은 성상업주의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것이 성욕의 변질되고 왜곡된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러한 상업주의가 인간의 순수한 성욕해소는 무관하게 인간의 비극을 잉태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술, 마약, 범죄 등 성욕해소를 변질시킬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0대들의 원조교제는 이러한 변질의 전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소 무리한 주장이긴 하지만, 승화된 성욕이 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성상업주의보다 성욕 해소의 더 효과적인 방법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욕의 해소를 주로 직접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것 같이 보인다. 따라서 성욕으로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문화 보다는 직접적으로 성욕을 배출하는 성범죄나 성상업주의가 더 횡행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인류 문화는 성욕의 승화에서 창조되었다는 말처럼 창조적인 승화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과장된 표현인지는 몰라도 그야말로 성욕이 문화의 질을 높이느냐 저질로 만드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예민한 감수성이 있기에 많은 분야에서 창조적인 승화를 이룰 수가 있다. 예술, 스포츠, 컴퓨터 등이 그런 분야이다. 성욕의 괴로움에 빠져 범죄까지 저지르는 10대(사실 기성세대가 더 심각하며 10대들은 성범죄는 기성세대의 모방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들은 참으로 안타깝다. 분명히 창조적인 다른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미래 자산인 10대들이 성욕의 괴로움을 창조적으로 해소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와 기성세대의 노력이 절실하다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성세대가 성욕을 창조적으로 승화하여 바람직한 성문화를 이루려는 의지와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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