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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꽁트] 두더지 모텔 403호, 고호의 그림

by 컴속의 나 2008.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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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의 <밤의 카페 테라스>

 

 

두더지 모텔 403호, 고호의 그림


그녀가 다가와 “진한 커피 한잔해요.”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것 봐라, 하고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진한 커피 한잔해요.’ 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기 때문이었다. 약간은 촌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여자를 꼬실 때 언제나 ‘진한 커피 한잔해요.’를 낚시 바늘의 지렁이 미끼처럼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진한 커피 한잔해요.’ 의 의미는 미끼가 아니라 아주 순진하고 애교있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진한 커피 한잔해요.’ 가 아니라 다른 표현으로 다가왔더라면 그는 그녀의 제의를 거절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부모만큼이나 애지중지 사용하는 ‘진한 커피 한잔해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와의 예사롭지 않는 관계를 상상했다. 헤어졌던 쌍둥이가 다시 만난 것 같은 감정이었다고 할까. 갑자기 그녀가 낯설지 않아졌었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카푸치노를 주문했을 때, 그는 요것 봐라, 하고 더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는 언제나 카푸치노를 주문했고, 상대에게 카푸치노는 알 파치노가 즐겨 마시는 커피죠, 라고 늘  말했었다. 그러면 상대는, 알 파치노를 좋아하는가 보죠, 하고 물었고 그는 카푸치노를 들이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은은한 시선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대단한 연기죠. 대단한 카리스마죠.”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의 그런 대단한 연기와 카리스마는 아니지만 마스크에 넘어갔다. 그렇게 사용해온 카푸치노를 그녀가 주문했던 것이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에게 알 파치노와 대단한 연기의 여지는 남겨 놓았다. 그녀는 카푸치노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마 인생에 거품이 없다면 재미없을 거예요. 난 거품을 사랑해요.”


이어 그의 알 파치노와 대단한 연기가 이어졌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시들시들했다. 그녀가 자아내는 더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우연이겠지만 또 어떻게 우연이 이어질까, 하는 호기심이 더 컸다. 도대체 우연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


그녀가 드라이브 어때요, 하고 말했을 때, 이번에는 그에게 강한 호기심과 함께 약간의 경계심이 싹텄다. 우연의 우연한 이어짐이었겠지만 그래도 마음 구석에는 빨갛게 충혈 된 경계의 눈초리가 번뜩였던 것이다. 그는 태연한 척 했지만 가슴이 요동쳤다. 드라이브는 그야말로 그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였다. 드라이브는 미지의 땅으로의 유혹, 헤어 나올 수 없는 공간으로의 밀침이었다. 그 드라이브란 단어가 그녀의 도발적인 빨간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요-것 봐-라.’

      

하지만 여전히 그는 커피→ 카푸치노→드라이브로 이어지는 단어들의 일치가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가 애지중지하는 단어이긴 했지만 연애계(戀愛界)에서는 아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일 뿐이었다. 그러니 우연이란 신비적인 표현을 사용하기에는 개연성이 아주 높은 경우였다. 그가 그렇게 했듯이 그녀가 그럴 수 있음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란 걸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경우에 커피→ 카푸치노→드라이브의 순서가 아니라 드라이브 → 커피 → 카푸치노로 순서가 바뀌는 경우나 식사→ 된장찌개 → 산책 등으로 내용이 바뀌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지만 상대에 따라 바뀌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커피→ 카푸치노→드라이브의 순서나 내용이 그의 전유물만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괜한 반응이라고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녀가 차를 한적한 근교의 모텔에 세웠을 때 그는 아, 하고 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설마, 설마 하며 지금껏 위로하여 잠재워 놓았던 감정들이 소름처럼 다시 일어났다. 돼지코 아내를 가진 딸기코 남자 주인이 언제나 졸고 있는 그의 단골 모텔. 그가 이 모텔을 단골로 삼은 것은 바로 그 주인 부부의 멍청함과 누에 같은 몰골 때문이었다.


‘정말 우연일까. 그녀와의 취향이 너무나도 비슷해서 일까.’


눈을 감고도 구석구석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자주 찾았던 그 모텔, 두더지 모텔. 이름도 매력적인 두더지 모텔. 그 두더지 모델을 두더지처럼 파고들었고 과감하게 땅으로 파고드는 두더지처럼 저돌적이고 정열적으로 사랑을 나누었던 두더지 모텔. 그녀도 그런 두더지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을까. 그에게 어떤 음모론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음모일 수 있다. 유혹해서 함정에 빠트릴 수 있다. 어쩌면 이 모텔 곳곳에 내가 등쳐먹었던 수많은 여자들이 잠복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짓밟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녀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그녀를 곁눈질로 살펴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본적이 없는 여자는 분명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모르는 사람을 시켜 그를 이곳까지 유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이제 빠져 나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하지만 또 그런 걱정이 기우라는 생각이 든 것은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그녀가 두더지 모텔의 주차장으로 들어서던 차를 획 돌려 나온 것이었다.


“두더지 모텔은 주인 꼴 보기가 싫어요. 생동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이죠.”


은근한 협박, 즉 그와 관련해서 어떤 행위의 인과(因果)가 게재되어 있는지는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그녀의 행동은 좋은 조짐이었다. 만약 그가 즐겨 찾던 룸의 번호까지 일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말이다. 그것을 그녀가 피해 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즐겨 찾던 방에 함께 들어 함께 목욕 비누를 사용하고 같은 침대를 사용하게 되었다면 그건 우연이 아닌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에서 갈라져 있었던 정신이랄까 육체랄까, 뭐 그런 것의 합체였을 것이었고, 그렇다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을 것이었다. 운명. 그가 남녀 관계에서 가장 멀리하는 단어가 있다면 바로 그 운명이라는 올가미였다.


‘운명이라 믿지 말라. 거짓이다.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

강을 따라 차를 빠른 속력으로 운전하면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두더지 모텔은 제게 의미있는 장소죠. 5년쯤 전이죠. 제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여행 중에 갑작스럽게 눈이 내렸고 우린 어쩔 수 없이 두더지 모텔을 찾아들었죠. 하지만 뭐, 이상하게 생각지는 말아주세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요. 정말이지 우린 순수했거든요. 아직도 기억이 나요. 403호. 그 곳 창문에서 바라보면 강과 하늘과 멀리 산들이 보였어요. 헌데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이 왜 하필 불륜이나 타락의 구렁으로 인식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모텔에 대한 인식 말이에요. 아, 사랑하는 남자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룸의 벽에는 아직도 고호의 그림이 걸려있는지......당신과 함께 그곳에서 다시 아련한 추억을 더듬고 싶었는데......하지만 난 너무 이기적이었어요.”


그에겐 다른 말은 들리지 않았다. 오직 403호와 고호의 그림이란 말만이 그의 두 귀에 메아리쳤다.


‘두더지 모텔 403호, 고호의 그림‘


도대체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용을 빼버린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담고 있던 어떤 용기(容器)같은 그 단어들이 정말 우연일수 있는가. 어떻게 우연일 수 있는가. 이제 그는 누가 어떻게 생각하던 그녀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연의 끝은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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