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탈옥
“장미의 이름. 장미의 이름은 무엇일까? 이렇게 이야기하자면 [장미]가 아닌가 하고 피식 비웃음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장미는 장미로만 불려야 할까. 그렇다면 장미의 이름은 장미 외엔 여지가 없는 것일까. ‘장미의 이름은 장미’ 라는 말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첫째는, [장미]라고 불리는 나무의 나무격의 무시가 그것이며 둘째는, 언어란 인간 중심적이며 따라서 세계는 인간 중심적 해석의 산물이며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기만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장미는 불쾌할지도 모를 것이다. 왜 자신이 장미로 불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자신의 존재가 언어에 묶여 규정 당하는 것에 저항하고자 할 것이다. 인간은 언어라는 그물로 대상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가 없다면 인간은 세계를 인식할 수 없으며 언어가 존재하기에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은 너무나도 터무니가 없다. 세계는 인간의 언어 이전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인위적인 언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세계가 인간의 언어를 존재케 했고 언어가 인간의 인식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언어가 매개라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일치할 수 있지만 그 방향은 전혀 다르게 작용하는 것이다.“
녀석의 머리 속에는 언제나 이런 황당한 내용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언어란 지극히 인간 중심주의의 산물이며 이기적인 속성이 그대로 반영된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녀석은 언제나 언어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고 언어가 사라진 세상에서 황제를 꿈꾸었다. 황제라는 단어가 등장할라 치면 그의 말투까지도 달라졌다.
“나는 행복한 게야. 왜냐, 나는 황제이기 때문이지. 나는 이 세계를 그저 바라본다. 나는 이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계를 해석하지도 않는다.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황제의 의미는 정치와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아니라 이 새롭게 바라보기의 우월함의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의 황제는 그저 세계를 바라보지 않고 해석하고 지배하려 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언어를 세계에 덧붙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언어의 대체를 통한 대체역사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그저 바라볼 뿐이다. 언어를 버리고 말이다.”
이런 식이었다.
“포레스트 검프가 왜 위대한가. 그저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는 멍청이처럼 보이지만 결코 멍청이가 아니다. 그는 세계를 그저 보기 위해 달렸지만 사람들은 그의 뜀박질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진정 누가 더 멍청한가.”
정말이지 아전인수라도 이런 아전인수는 없다. 그저 ‘바라보는 행위’를 모든 행위들의 상석에 놓았으니 말이다. 물론 비주얼한 것이 가장 실제적일 수는 있지만 모든 감각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모든 감각들은 그것들 자체로 진실을 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황제를 위하여 신하들처럼 녀석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 주었다. 머릿속에 꽉 차있을 녀석의 허황된 생각들을 조용히 덮어두기 위한 전략인 것이었다. 반박이나 질책이라도 해댈라치면 녀석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속의 허황된 생각들을 언어로 가공하여 쉴 새 없이 내 뱉었기 때문이었다. 불필요하고 불완전한 언어를 그토록 버리기를 갈망하는 녀석이 거품을 물며 언어를 쉴 새 없이 내뱉는 것을 볼 때면 과연 인간들로부터 언어가 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녀석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저 바라보기 위해 떠난다고 했지만 도대체 그 말뜻을 신하인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언어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사물을 그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바라보기만 한다는 감각 속에 언어가 끼어든다면 더 이상 순수한 바라봄이 아닌 것이다. 언어가 부수어질 때, 때 묻지 않은 인간들의 순수함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언어로 현실을 전도하고 대체한다는 것은 진정한 혁명이 아니며 또 다른 불순함일 뿐이다.”
그저 알쏭달쏭 하기만 했고 한편으론 정신 나간 헛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는 한 그루의 나무이고자 한다. 나무는 그저 말없이 서서 바라보기만 하지 않는가. 나는 한 그루의 나무보다도 나을 게 없다. 인간은 나무처럼 살아야 한다. 나는 한 그루의 나무이고자 한다.”
우리는 그가 숲 속으로 들어갔으리라 추측해 보았다. 나무 때문이었다. 그러다 혹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리라 예상하기도 했고, 아니면 숲 속에 작은 통나무집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와 알쏭달쏭한 말을 솟아낼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추측과 예상과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녀석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단지 세상의 바람에 실려 풍문으로 그와 관련한 한 짧은 소문만이 전해져왔을 뿐이다.
영하의 어느 산중(山中) 앙상한 가지의 나무처럼 벌거벗고 두 손을 벌린 체 서서...... 나무가 되고자한 한 인간으로......얼어 죽었다는 가슴 찡한 풍문이......
언어는 인간이 탈출할 수 없는 감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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