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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꽁트] 우아한 인생

by 컴속의 나 2008.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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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slrclup.net/Common/

 


우아한 인생


지하철을 타러 간다. 지하철을 타지 않으려면 택시나 버스를 타야하고 버스를 타지 않으려면 걸어야 한다. 자주 걷지만 신고 있는 구두 때문에 걸을 수가 없다. 굽이 떨어진 건 오늘 오후다. 오늘 오후에는 커피를 마실 시간도 없이 바쁘다. 커피가 무척이나 마시고 싶다. 좋다는 원두커피는 마다하고 커피믹서를 즐겨 마신다. 고객들이 몰려온다. 고객들이 뒤섞인다. 그런 혼란에도 일정한 질서는 있다. 번호표를 한 장씩 들고 있다. 번호표는 무언의 약속이다. 소파에 앉아도 있다. 고객들은 돈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돈을 인출한다. 돈을 예금한다. 돈을 이체한다. 통장을 보며 투덜거린다. 통장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현금지급기에도 고객들이 줄서있다. 카드를 현금지급기의 투입구에 넣고 입출금의 액수 버튼을 누른다. 비밀번호를 누른다. 단단히 닫혀있던 지급기의 뚜껑이 열리고 현금이 보인다. 돈을 센다. 돈의 형상이 망막에 와 맺힌다.


“바쁘다는 것은 그다지 나쁠 것은 없지. 아직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지.”


번호판의 붉은색 숫자가 245다. 신발 사이즈다. 고개를 숙인다. 작은 발을 내려다 본다. 고개를 든다. 그녀가 서있다. 그녀는 인상적인 붉은 스카프를 하고 있다. 진한 붉은색 입술이다.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적금 통장을 내민다. 통장 사이에는 십 만원 수표 5장이 끼워져 있다.


“이서 좀 해 달라고 했을 때 그녀는 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지.”


그녀가 수표 뒷면에 이서를 한다.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그녀의 이름은 수진이다. 전화번호는 1234-432*. 아름다운 숫자다. 숫자에도 지저분한 숫자가 있다. 그녀의 전화 번호는 아름답다. 손이 바쁜 시간에 눈으로 쉽게 외어지는 숫자이기에 그렇다. 그녀는 못생긴 것도 잘 생긴 것도 아니다. 그녀의 전화번호처럼 쿨하지도 않아 보인다.


“그녀의 입술과 스카프만큼이나 전화번호가 인상적이었지. 전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하루 종일 돈만 만지고 있으면 잔인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건성으로 돈을 세거나 서류를 처리하면서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을 한다. 전날 밤의 분위기와는 다른 직장의 오전 시간 동안 그런 생각에 쉬 빠져든다. 돈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자리. 돈을 세고 앉아있는 허깨비 같은 존재. 지나친 감정이긴 하다. 나의 존재감을 더욱 강렬하게 확인해 주는 존재는 K이다. K는 선배이자 상사이다. K가 점심을 먹고 나를 부르고 역정을 낸다. 무엇이 잘못 된 듯하다. 아침의 지각 탓이기도 하다. 서류 뭉치를 집어 던진다. 바로 이런 일이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가슴의 꿈틀거림이다.  


“점심을 얻어먹은 것으로 만족해. 그렇게 식사비를 아껴 바에서 술이라도 마시는 게 아냐? 분노나 벌레 같다는 것, 그건 감정이라는 허상일 뿐이지.”


속이 쓰려온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이다. 시간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변기에 목을 길게 빼고 구토를 한다. 침대 위에서 바로 잠에 빠져 든다. 아침 6시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두통이 심하다. 아침을 먹지 않는다. 습관처럼 인과로 연결되는 단어들이다. 술, 구토, 잠, 아침, 두통, 속 쓰림.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한다. 하얀 와이셔츠와 양복바지를 입는다. 넥타이를 매고 윗도리를 입는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는다. 거울 속에 사내가 서있다. 뒷모습을 내보이기 싫어하는 사내가 서있다. 구두를 바꿔 신으려고 한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른 구두는 수선을 위해 구두 수선점에 맡겼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거울을 뒤로 하고 빠르게 등을 돌린다. 룸을 나와 문을 잠근다. 벌레의 각질 같은 철제문을 잠근다.


지하철을 타러 간다. 지하철을 타지 않으려면 택시나 버스를 타야하고 버스를 타지 않으려면 걸어야 한다. 늦으면 뛰기도 한다. 오늘은 아무래도 뛰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