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토이치(2)
서부 영화에서 맹인 총잡이를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상상이라고 하면 건방진 표현처럼 들린다. 아니 무지한 표현처럼 들린다. 세상에 불가능한 상상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거나, 이성적인 합리성을 신봉하는 서양의 인식에서 맹인이 총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식의 상상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상상의 한계라기 보다는 문화의 한계에 속한다.
사무라이 영화에서 맹인 검객을 상상한다는 것은 가능하다. 상상의 무한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성격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맹인 검객을 가능하게 하는 일본적인 문화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우선 <무사의 체통>이란 일본 영화에서 맹인이 된 미무라의 정신 상태를 살펴보는 것은 맹인 검객의 탄생과 관련하여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고 하겠다. 미무라가 맹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바로 정신이었다.
“같이 죽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라. 승리는 그 가운데 있으니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한 생즉사의 정신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미무라가 스승의 도장을 찾아가 들은 이 말속에는 죽음을 무릎 쓴 결의 이상을 읽을 수는 없다. 이러한 결의가 실상 맹인 검객의 미묘한 신기를 설명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즉 미무라에서 자토이치로 이어지는 미묘한 신기를 생즉사라는 정신력 하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또는 복수심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불타오르는 복수심이 정신을 고취시킨다고 해도 맹인이 정상적인 검객을 당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분노가 정신을 혼란시키고 흐트러뜨리는 요소로 작용하기가 더 쉽다.
그렇다면 맹인 검객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일본의 긴장의 문화와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일본 문화를 축소지향적인 문화라고 말을 하지만 이 축소의 지향은 긴장감을 동반한다. 상식적인 생각으로도 확대는 이완을 축소는 긴장을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작은 공간에서 긴장을, 넓은 공간에서 이완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우가 아니겠는가?
일본 특유의 긴장문화를 만들어 낸 모체로 이어령씨는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의 사상과 세이자(일본특유의 정좌법으로 무릎을 꿇고 않는 좌세)를 들고 있다. 이어령씨는 “시간의 축소지향인 이치고이치에의 문화와 공간의 축소지향인 세이자이 문화가 일상적인 생활어에 나타난 것인 ‘잇쇼켄메이’ 라는 말이다”(축소지향의 일본인,p.215) 라고 했다.
[잇쇼켄메이(一生懸命)는 한 곳을 생명을 걸고 지킨다는 뜻으로 일본인의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정신이다. 좋은 의미로는 자신의 맡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이지만, 일본의 침략주의와 맞닿아있는 정신이기도 하다.]
정신의 축소지향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이치고이치에의 사상을 이어령씨는 ‘다도’ 와 ‘죽음’ 의 예로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도 문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넓은 공간을 축소해 다다미 4조 반의 좁은 공간으로 만든 ‘다실’ 은 두말할 것 없이 ‘공간적 축소지향’ 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응하는 ‘시간적 축소지향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다도에서 말하는 ’이치고 이치에(一期一會)‘ 라는 정신이다. 시간을 축소하면 일순이 된다. 단 한 번 밖에 없는 시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창백한 번갯불. 다도란 그 일순의 빛 속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만남이요, 그 마음이다.“(축소지향의 일본인, p, 210).
이치고이치에의 사상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이어령씨의 글을 좀 더 인용해 보기로 하자.
“다회의 만남이 일생에 단 한 번의 만남이라는 ‘이치고이치에’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곧 다실에 끌어들인다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이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단절의 벼랑이며, 다시는 재현이 불가능한 일순간의 섬광이므로 그것을 느끼며 만나는 사, 람들은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축소지향의 일본인, p.212)
이러한 긴 인용은 다도와 마찬가지로 검도, 즉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를 설명해 보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치고이치에의 정신만으로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본다. 또한 검도 지식 외적인 것으로 검도를 논하는 우스운 꼴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어령씨의 글에서 받은 어떤 통찰이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를 일부분 해석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또한 일본인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으로 유용하다는 판단이다.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는 일본적인 긴장감 또는 비장감, 즉 이어령씨가 언급한 이치고이치에의 정신과 맞닿아 놓는다는 것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고 본다. 다도(茶道)와 마찬가지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검도(劍道)의 세계에서 이치고이치에의 정신은 더욱 더 정합성을 띈다고 할 수도 있다. <무사의 체통>에서 미무라의 생즉사의 정신이란 이치고이치에의 긴장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고이치에의 정신은 자토이치에서는 더욱 세련되게(영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검을 휘두르는 행위가 차를 마시는 행위처럼 이치고이치에의 정신 속에서 일순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축소된 시간, 즉 일순, “단 한 번 밖에 없는 시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창백한 번갯불‘을 응시하거나 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검으로 ’베어내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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