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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본영화] 자토이치

by 컴속의 나 2008. 3. 23.


                                         이미지 출처:http://kr.blog.yahoo.com/jesse




자토이치

-복수의 카타르시스


어느 곳이고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또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아주 큰 잘못이 아니라면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서로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러나 때로 그 관계가 크나 큰 상처를 만들어 관계된 상대자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처가 아물어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져 원한이 쌓여가기도 한다. 복수가 피할 수 없는 행위가 되고 만다. 법의 구속이 약하고 무력이 지배하는 계급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명예를 위해서든, 가족을 위해서든 복수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복수는 약한 자들에게는 참 어려운 결단이다. 오히려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약한자들의 증오는 대체로 체념이 되기가 싶다. 집단, 특히 사악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저항은 너무나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집단과 집단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원시부족사회, 고대 국가 들간의 정복과 약탈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나 징기스칸의 정복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약한자들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특히 여성, 노약자, 사회빈곤층 등의 약자들인 경우는 증오의 감정이 집단적인 힘으로 승화되지 않는 한 복수를 꿈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약자들이 집단화 되었기에  동학혁명이나, 스파르타쿠스의 난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경우라면, 복수는 동류나 강한자들에나 가능한 행위에 국한되고 만다. 


바로 여기에서 체념에 빠져버린 복수에 대한 무수한 상상들이 발동하게 된다. 정의로운 대리자가 나타나 주기를 바라고, 자신이 영웅이 되기를 상상한다. 억울하고 비통한 감정을 대리자를 통해 상상적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들은 약자들의 한으로 응어리져 수많은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복수의 모티브는 영화의 영원한 소재이다. 아니 주제이기도 하다.


다소 벗어나는 이야기이지만, 문학의 경우, 20세기 모더니즘이 추구했던 주인공의 전형은 소외되고 고독한 개인이었다. 그것은 작가들의 예민한 시선이 근대화의 이면에서 고통 받는 소외된 인간들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도시를 떠도는 부랑자나 걸인이기도 했고 무기력한 남편이기도 했다. 고뇌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이 바로 그러한 전형이었다. 그들은 복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무기력한 인간 군상들이었다. 집단화되지 않으면 무기력한 개인으로 남아있어야 할 뿐이었다. 우리의 경우 20세기의 수많은 집단적인 투쟁이나 혁명이 바로 이러한 경우를 설명한다. 참으로 극단적인 시대였다. 집단과 개인이란 아주 이질적인 관계로 존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개인은 아주 강해졌다. 개인과 집단이 극단적이고 이질적인 성격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가 모호할 정도로 상호작용이 쉬워진 것이다. 인터넷이란 막강한 매체 때문이었다. 최근에 등장한 블로그 또한 마찬가지이다. 권력의 형성이 개인들이 모인 인터넷에 의해 탄생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www.sung-ho.pe.kr/?p=17679



다소 벗어난 글의 흐름에서 다시 돌아와, 그렇다면 영화는 어떠한가. 개인적인 판단으로, 20세기의 고전적인 권선징악의 스토리는 21세기에도 여전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보편화 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개인의 비극과 파멸을 다룬 영화도 많기 때문이다. <시민 케인>, 심지어 <람보>도 그런 부류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영화가 두드러진다. 아마도 실존주의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사회를 반영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폭력과 살인이 난무한다. 이데올로기로 다소나마 제어되던 인간의 잔인한 본성이 출구를 찾았기 때문일까? <양들의 침묵><한니발>이 그렇다. 무슨, 무슨 살인사건이니, 사이코 영화, 새디즘이니, 메조히즘이니 하면서 폭력이 난무한다. 전쟁영화와는 그 폭력의 격이 다르다. 참 잔인하다.


한국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잔인한 폭력과 살인이 빠져버리면 성립하지 못하는 영화가 부지기수이다. 복수라는 용어는 무수하게 나타난다. <복수는 나의 것><올드보이>가 그렇다. 칸느 영화제에서 그렇게도 격찬한 <올드보이>의 폭력신은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복수는 나의 것>의 경우 영화가 복수의 대중화를 선언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엄연히 법이 존재하는 민주주의의 세상에서 개인적인 복수를 용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을 선명한 영상으로 목격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화는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것일까? 아니면 법을 조롱하는 것일까? 아마도 법이 존재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조차도 인간은 상상적인 복수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소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억울한 약자들을 위해 복수를 해주는 정의로운 개인, 정의의 대리자가 나타나 사악한 집단을 보기 좋게 쓸어버리는 것을 소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 특히 약자들의 본성 속에 내재해 있는 특성이 아닐까 하며, 영화는 이러한 약자들의 소원인 복수를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충족시켜준다. 이것은 문학적인 결말이나 여운과는 다소 다른 방향이다. 바로 이러한 방향이 현실에 대한 영화의 발 빠른 반응이며 대중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토이치는 바로 이 복수의 이야기이며 복수를 위한 대리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복수를 소원하는 자들은 대체로 약자들이다. 여자들이고, 무기력한 남편이고, 사회의 빈곤층이다. 그런데 약자들 중에 약자라고 할 수 있는 맹인 낭인, 자토이치가 정의의 대리자라는 것은 약자들의 복수의 소원을 가장 극화시킬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가장 약한 자가 가장 강한자로서 복수의 칼을 날려준다는 사실은 얼마나 통쾌한 쾌감,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주는가. 즉, 복수의 대리자가 장님이라는 사실, 그의 검도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운 신비에 가깝다는 데 복수의 대리 만족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복수는 자토이치의 것! 그는 우리보다 더 불운한 장님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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