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의 체통
-일본이 진정으로 무사의 체통을 찾는 길
http://kr.blog.yahoo.com/iamjina2000/
계급(계층)에 따라 사회적인 역할이 규정되어 있어 그 계급(계층)적인 틀을 깨기라도 하면 사회 질서의 파괴로 간주되었다. 계급(계층)이 사회의 질서고 사회적인 질서가 곧 계급(계층)이기 때문이었다. 서자인 길동이 적자가 될 수는 없었고 천민이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도 가문의 의지를 거스른 결과였다.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과 함께 생매장 당하기도 한다.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잔존한다. 심지어 원시 사회에서도 제사장, 추장, 남자, 여자, 아이에 따라 사냥물의 부위가 다르게 지급되었다. 이러한 계급(계층) 사회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개인의 삶을 규정하고 의식을 지배했다. 따라서 계급(계층) 사회는 차이를 무시하는 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차이에 따라 차별하는 비인간적인 계급 사회를 벗어나 개인이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무라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무사의 체통> 또한 그 내용을 떠나서 일본 사회의 전통적인 계급(계층)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일본의 사회의 계급(계층)에서 사무라이가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임진왜란과 일제 시대로, 세계사적으로는 태평양 전쟁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그 성격이 얼마나 호전적인가는 사무라이를 반영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전쟁 범죄를 통해 이미 주지하고 있는 바이다. 사무라이 영화를 보면서 그 잔인한 무력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당사국으로서 일본의 사무라이에 대한 특성이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우선, 대개의 사무라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무라이는 정의롭다. 정의가 언제나 승리한다. 그러한 정의가 일본을 벗어나서는 왜 잔인한 악의로 돌변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크게 두 가지 이유일 텐데, 하나는 영화가 실제의 사무라이의 성격을 왜곡하고 미화했거나, 다른 하나는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이다.
첫째로, 만약 일본이 사무라이 영화를 통해 사무라이의 성격을 왜곡하고 나아가 미화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 군국주의의 과오에 대한 정당성과의 관계를 충분히 의심해 보아야 한다. 사무라이 영화의 폭력성은 결코 군국주의의 폭력성과 혼돈되거나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은 존재할 수 있을까? 사무라이 영화에서는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복수)이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서부영화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은 인간성을 좀 먹는 잘못 된 생산물(가치)이다. 영화 속의 허구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고작 정당방위 정도일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공습은 정당방위조차도 아니었다.
둘째로, 일본의 경우 타 민족에 대한 배타성은 심각한 수준이다. 아마도 군국주의화된 사무라이의 가치보다도 어쩌면 타민족, 특히 한국인과 중국인에 대한 배타성이 일본 민족의 특이성을 잉태했는지도 모른다. 일본 근대화 시절의 탈아입구의 가치나 아시아 민족에 대한 야만적인 인식이 바로 그렇다. 아무리 민족주의라는 인류 보편적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군국주의의 유래 없는 잔인성이 인류 보편적인 특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만주에서 731부대의 생체실험이나 카미카제 특공대 그리고 북경 대학살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인성은 인류의 특이성이지 보편성으로 옹호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이러한 잔인성에서는 일본 민족만의 특이성이 존재하며 사무라이의 폭력성과도 이어지는 것이다.
http://www.kochinews.co.jp/cinema/06cinema35.htm
따라서 사무라이에 대해 일도양단이나 쾌도난마식의 명쾌하고 정의로운 측면만으로 무협의 재미와 복수와 정의의 감동만을 찾는다면 사무라이에 대한 미화에 전적으로 빠져드는 위험이 있다.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은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을 비롯해 재일 한민족에 대한 차별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일본은 독일을 배워야 한다.
무사의 체통은 일본적인 인식이다. 무사뿐만이 아니라 일본인은 체통이나 명예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사무라이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할복은 체통이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극단적인 표현이다. 물론 체통이나 명예라는 가치는 모든 인간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이다. 할복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체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에게는 더욱 숭고한 가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무사로서의 체통, 아니 일본인으로서의 체통은 사실상 군국주의와 태평양전쟁으로 수치스럽게 상실했다. 체통뿐만이 아니라 인간성마저 상실해 버렸다. 아주 불의하고 잔인한 전쟁을 일으키고 인류에게 해악을 끼쳤다. 이제 일본인이 인류에게 체통을 지키는 것은 일본 민족에 한정된 배타적인 체통이 아니라 전 인류로 향하는 개방된 체통이다. 아직도 일본인의 체통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무사의 체통> 운운하는 영화를 버젓이 만든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슬픈 현실이랄 수도 있다. 일본은 역사적인 과오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고 참회하면서 잃어버린 무사의 체통을 회복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해야 한다.
무사의 체통을 지키려는 미무라 신조(기무라 타쿠야)는 사실상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의 심정을 반영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즉 사실상 강간당한 아내로 인한 무사의 체통을 지키려는 미무라의 의지는 36년 동안 침탈당한 한국인의 의지와 동일하다면 동일할 수 있다.
“시마다는 카요를 가로에게 조언해 준다고 거짓말 하고 불쌍하게도…… 카요에게 강간이나 다름없는 일을 당하게 했다. 내 속은 아직도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다.”
만약 야마도 요지 감독이 수치스럽게도 무사의 체통을 잃어버린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이 영화 <무사의 체통>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8.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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