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쿠지로의 여름 (菊次郞の夏)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기쿠지로의 여름>은 기타노 다케시(영화명은 비트 다케시)의 명성에 걸맞는 영화입니다. 역시 다케시라는 감탄사가 튀어나오게 합니다. 감독, 각본, 편집은 물론 마사오 역의 유스케 세키구치와 함께 주연을 맡아 열연합니다.
꼭 외형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 내용의 측면에서도 사무라이와 야쿠자 일색의 기존 다케시 영화와는 달리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놀라운 일이지만(이 말은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폭력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다케시가 만드는 영화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뜻에서입니다. 물론 이 영화는 폭력이 전혀 필요 없는 영화이긴 합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어린아이들이 보는 만화 영화만큼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것도 없습니다. 폭력이 나쁘다고 하지만 만화영화의 폭력을 보면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는 느낌이 듭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에서는 폭력이 거의 사라집니다.
물론 다케시의 ‘폭력’ 이 한, 두 군데 등장하고 있지만 그리 심각하지도 않고 인간적이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면, 트럭의 앞 유리창을 깨고 도망가지만, 뒤쫓아 온 기사와 싸우는 장면은 트럭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한 마을의 축제에서 야쿠자 일당과 맞서지만 폭력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얻어터진 키쿠지로의 모습만을 보여주어 싸움이 치열했음(?)을 대충 짐작케 할 뿐입니다. 야쿠자인 ‘기쿠지로‘ 에게서 완전히 폭력을 금지하기엔 불가능하겠지요.
아무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야쿠자에게서 폭력적인 요소를 배제했을 때 어떤 인물이 될까요? 예를 들면 야쿠자를 유치원의 보모 자리에 앉혀봅시다. 또 야쿠자를 전업주부로 만들어 봅시다. 사실 이러한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은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조폭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의 여지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의 대상을 부조화/불균형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웃음이나 감동을 유발하는 것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두사부일체><조폭 마누라><달마야 놀자>등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 야쿠자를 관광버스의 관광 안내원으로 내세운다면 이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따라서 기쿠지로를 엄마를 찾는 마사오의 길 안내자로 만드는 것도 기발하고 의외의 상상이랄 수 있겠습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만약 동화 속에 야쿠자가 등장한다면 그 야쿠자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것도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입니다. 좀 사내다운 관객이라면 “야쿠자가 그럴싸한 폭력물에나 어울리지, 무슨 이런 장난을 치나!“ 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전 제 경험상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 다소 유치한(?) 노래를 부를라 치면 분위기 깬다라는 냉소적인 표현(?)을 짓는 군자들이 꼭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들이란 설운도, 태진아, 조용필, 남진, 나훈아, 이미자 류의 그 애끊는 고상한 트로트들이었습니다. 분위기 띄우기의 정수를 보여주겠다는 자세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트로트 일색의 노래방 분위기에서 갑자기 유치한 ‘마법의 성’ 이 등장한다면 분위가기 썰렁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야말로 마법에 걸린 듯 얼어붙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어떠한 종류의 분위기도 인정하는 노래방의 성숙한 문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달마야 서울 가자>의 노래방 장면이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만약 이렇게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객이라면, ”야쿠자가 백마를 탄 기사가 되었군. 아주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인데......“ 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동화 속에 등장한 야쿠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두 입장 중에서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 서고 싶습니까? 저는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습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제가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부조화/불균형)을 비일상적으로 보는 관습적이고 경직된 태도, 즉 우리가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익숙해져온 편견이나 획일화된 사고를 지양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관습을 벗어난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이 영화를 더 재미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야쿠자가 리얼하게 폭력을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동화의 나라에서 백마 탄 기사가 되는 것은 더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여러 관계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이란 말 자체에 그런 뜻이 있습니다. 관계는 지속적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다 그 관계들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저를 나아준 부모의 존재가 사라지면 그 관계도 소멸합니다. 제가 자식을 낳으면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 집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사라질 때 인간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죽는다는 것은 모든 관계의 소멸을 뜻합니다. 마치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들이 확정적이고 경직되는 것은 그다지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새삼 언급하면 잔소리로 들릴 정도로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현실은 관습화되고 경직된 관계들로 구획되어 있는 듯 합니다. 영화는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을 통해 이러한 관습화되고 경직된 관계들을 변화시키는 측면이 아주 강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친구의 관계로 유연화 되기도 합니다. 유교의 경직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으로서 말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비일상적인 남녀의 관계가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전도되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인간의 여러 관계들이 일상적인 역할을 벗어나 작동합니다.그것은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영화와는 달리 허구를 통해 현실을 허물려는 영화의 본질과도 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쿠지로와 마사오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영화 내내 느끼는 것이지만 도대체 누가 더 정신적으로 성숙한지? 도대체 누가 더 진정한 안내자인지? 도대체 누가 더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지? 이 두 사람의 여행을 통해서 더 깊이 감동을 받고 정신적으로 변화한 존재를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마사오의 여름>이 아니라 <기쿠지로의 여름>이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마사오의 여름을 위해 기쿠지로가 떠밀려 동행을 했고 안내자와 보호자의 역할을 하지만 정작 여행을 통해 변화한 쪽은 기쿠지로인 것입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조금 강요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자의 입장, 즉 “장난치나!“ 같은 냉소적인 입장은 이 글을 읽으면서는 누그러트려 주었으면 합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의 구성은 여행의 시간 흐름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전개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서 보기가 편합니다. 이러한 단순함은 영화의 재미와도 연관되면서 지루하지가 않은데, 아이의 시선을 배려한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이 영화는 소설처럼 각각의 장들이 존재하는데 마치 추억의 앨범이나 여행 기록 또는 일기장을 넘기는 듯한 효과를 줍니다. 각 장마다 영화의 압권이랄 수 있는 장면들이 숱하게 나옵니다. 여러 장으로 구성된 <기쿠지로의 여름>은 [할머니의 친구들]로부터 시작합니다.
마사오(유스케 세키구치)는 부모가 없이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9세 된 아이입니다. 여름 방학이 되었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친구들은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고 축구 교실도 여름방학 동안은 활동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학교에 찾아갔다가 축구 코치로부터 “방학인데 바다에나 다녀오렴. 재밌을거야.”란 속 모르는 소리만 듣는데, 이 학교 신(scene)에서 헛발질을 하고 넘어지고 혼자 운동장에 서있는 마사오의 모습이나 혼자 남은 집에서 밥을 먹는 마사오의 뒷모습은 아이의 작은 어깨에 드리워진 무거운 외로움 느끼게 합니다.
외로운 마사오에게 어는 날 엄마의 소포가 찾아듭니다. 그리고 소포의 겉봉투에 적힌 주소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치 현, 토요하시 구’ 주소를 가방에 넣고 엄마를 찾아 떠나지만 불량배들에게 잡히는데 이때 나타나는 기쿠지로와 그의 아내가 할머니의 친구들입니다(할머니의 친구들 치고는 너무 젊은데......) 이런 인연으로 아내로부터 여행 비용으로 5만엔을 받은 기쿠지로와 마사오는 토요하시로 떠나게 됩니다. 이 장면의 압권은 유흥가와 경륜장에서의 해프닝으로 누가 어른이고 어린이인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웃음을 자아냅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그리고 이어지는 [무서운 아저씨] 장에서는 유흥과 경륜으로 돈을 다 탕진해 버리고 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기쿠지로는 마사오가 없어진 것을 알고 근처 공원으로 찾아 나섭니다. 어린이 마사오를 전혀 고려치 않는 무지막지한 어른인 기쿠지로가 공원에서 목격하는 것은 마사오에게 이상한 짓거리를 강요하는 변태 대머리입니다. 변태 대머리는 무서운 세상의 암시로 이로서 마사오를 지켜야하는 기쿠지로의 필연적인 운명(?)이 시작된다고 할까요? 그 다음 날 아침 택시를 타고 ‘토요하시‘ 로 떠나게 됩니다. 이 후로 [이상한 아저씨][실패였다][천사의 종][아저씨가 놀아 주었다] 등의 장들이 이어집니다.
다 이야기를 해버리면 재미가 없겠지요. 자, 이제부터는 기쿠지로가 마사오와 함께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 일기장을 직접 넘겨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재미있어 눈을 떼지 못할 것입니다. “장난치나!“ 같은 냉소적인 입장만 갖고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사의 체통(3) (4) | 2008.07.28 |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 | 2008.07.27 |
[일본영화] 자토이치(3) (0) | 2008.04.20 |
[일본영화] 자토이치(2) (0) | 2008.04.14 |
[일본영화] 자토이치 (4) | 2008.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