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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2 19:19

[생각 돌아보기] 휴대폰 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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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http://kr.news.yahoo.com/servi



휴대폰 저 너머


하나의 발명품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혜택은 발명품 자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휴대폰을 예로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편리한 통신 기능 외에도 시간의 절약에서부터 편안함 등 많은  부수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휴대폰의 의미를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편리에 있다고 해도 그리 무리는 아니지 싶다. 업그레이드라는 발상 자체가 성능의 향상과 사용의 편리성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성능의 향상과 사용의 편리성이라는 것이 결국 사용자의 편리를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나 휴대폰의 진화가 가져 온 것처럼 인간은 얼마나 편해질 수가 있을까? 그 편리함의 끝은 어디일까? 인터넷이나 휴대폰의 진화를 보면 우리는 지금 인간이 궁극적으로 편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과학적인 편리는 궁극(窮極)적인 종교의 평온함 또는 경건함과 통할 것 같이 여겨질 정도다. 과학과 종교가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이나 교의에 대한 과학적인 논증이 아니라, 종교적인 정적 묵상의 평온함이 과학이 만드는 편리와 상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끊임없는 업그레이드와 기능의 향상이 정신과 육체의 편안함을 제공해 준다면 그것이 곧 종교적인 평온과 다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팽배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학이 추구하는 세상은 진정 파라다이스가 될 수 있을까?  


인간이 육체적으로 가장 편해지는 세상은 어떠한 세상일까? 아마도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세상일 것이다. 휴대폰이 없었던 세상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과학이 발달한 지금이 더욱 편해진 세상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과거에는 생명을 앗아간 아주 심각했던 질병들이 의학의 발달로 사라져 버린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푸닥거리로 질병을 고치려고 했던 무당의 권위를  의학이 대체하고 신화속의 신들의 자리를 과학적 이론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편안함의 성격이고, 그  끝이 있을까의 문제이고 그 끝이 종교적의 궁극과 상통할까의 문제인 것이다.


과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 세상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음에 반해 종교적으로는 천당이나 극락과 같은 궁극적인 내세를 제시하고 있다. 만약 과학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편안함이라면 천당과 극락 이 과학적인 현세로 제시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차이라면 내세와 현세라는 차이가 될까?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와 과학은 상통한다고 말해도 될까? 물론 이러한 생각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지만 천당과 극락이 어떤 긴장이 완화된 상태로써 과학의 궁극적인 편리와 편안과 연결 된다는 약간은 과장된 추론의 일부를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글의 서두에서 <과학적인 편리의 궁극(窮極)은 종교와 통할 것>이라고 하는 발언의 의미는 연속적인 흐름이 아니라 획일화되고 기계적인 과학에 대한 회의로 인한 종교로의 도약이나 내세의 천당이나 천국이라는 종교적 가치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 즉, 과학에 대한 회의가 종교로의 도약을 가져다 줄 것이란 측면에서 종교와 과학의 접점을 언급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육체의 편리와 더불어 정신의 편안함을 함께 제공해 주지는 못하리라는 우려 때문이다. 오히려 과학이 인간의 정신을 황폐시킬 것은 물론이고, 자연의 균형을 깰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존층의 파괴, 엘리뇨 현상, 온실효과, 산림 파괴 등 자연의 황폐화가 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적인 인간의 편리함이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세의 디스토피아나 지옥처럼 궁극적으로 지구의 멸망을 앞당길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의 편리함의 끝에 정신적인 불편이 존재하게 되고 그 정신적인 불편이 종교를 요구할 것이라는 가능성 있는 추측에서 과학과 종교의 접점을 언급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과학적인 편리가 불편이 되고 자연의 황폐함 앞에서 위기의식을 느끼는 절박함에 처할 때 종교는 더욱 가치를 발산하게 될 것이다.


과학은 계속해서 발달에 발달을 거듭할 것이다. 휴대폰은 계속해서 만들어 질 것이고 더 새롭고 편리한 것이 이전 것을 대체할 것이다. 신이 역사의 태엽을 감아놓은 이상 인간의 역사는 계속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한숨 한 번 돌리고 잠깐 쉬어가자고 한다고 해서 순순히 따를 것 같은가? 인간은 이미 브레이크 페달을 상실한 상태이다. 카지노에 빠져 돈을 탕진하듯이 편리함의 가치에 빠져 결국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저 그 엄청난 현실로서의 과학의 도덕성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는 막막한 생각뿐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종교의 가치를 음미했으면 좋겠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정적인 묵상의 미덕을 인간의 편안함으로 여겨보자는 것이다. 온갖 유행들과 버전들과 업그레이드로 정신없이, 빠르게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편안함이라면 ‘정적인 묵상’ 이 지극한 편안함임을 깨닫자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추구하는 것이 빠름이지만 결국 그 빠름은 인간의 편안함, 즉 인간 삶의 평안함, 쾌적함이라는 것, 그리고 그 평안함과 쾌적함이라는 것은 곧 여유 있고 느린 삶이라는 것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결국 느림을 위한 빠름이란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과학이 이토록 빠르게 발전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과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끊임없는 발전의 추구에만 있다면 도대체 인간은 왜 살아가는 것이며 과학은 왜 발전해야 하는 것인지 한 번 쯤 심각하게 고민해 보기도 해야 하리라고 본다. 빠름 속에서 느림을 찾아보는 것, 느림 속에서 빠름을 되돌아보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에 중요한 화두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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