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소기행(便所奇行)
남녀가 한데 모여 있어야 돌아가는 이 세상에는 그와는 반대로 남자와 여자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하는 공간들이 있습니다. 바로 공중목욕탕과 화장실이 그러한 공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대체로 우리와 마찬가지라 봅니다. 이렇게 남녀를 구분하는 이유가 사회적인 금기로 관습화된 것은 나라마다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원천적으로 이성을 허용하지 않는 목욕탕과는 달리 사실 화장실은 목욕탕처럼 남녀 구분이 엄격하지는 않습니다. 너무 급한 경우에 여자가 남자 화장실로, 남자가 여자 화장실로 뛰어 들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남자가 여탕으로 뛰어들었다고 하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또한 화장실이 이성에 관한한 목욕탕에 비해 아주 너그럽다고 해도 상습적으로 남자가 여자 화장실을 들락거린다면 그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내가 있었습니다. 들락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내는 여자 화장실에 상주하면서 인기척이 끊어지는 새벽이나 늦은 밤에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나와 화장실 주위를 어슬렁거리고는 다시 여자 화장실로 살며시 들어갔습니다. 사내는 끼니도 대변기 위해서 소리 없이 해결했습니다. 끼니라고 해봤자 미숫가루 한 숟가락을 입으로 털어 넣고는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이 다였지만 말입니다. 화장실의 내벽은 온갖 음란한 낙서들과 그림들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배설물의 냄새도 고약했습니다. 사내는 하루 종일 조용히 앉아 화장실의 벽면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 움직임을 극도로 자제하고 정물처럼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간혹 몰려오는 낮잠을 깨우느라 대변기에 앉아 심호흡을 크게 하거나 사지를 뻗는 정도가 움직임의 전부였습니다. 밀폐된 공간을 좋아하는 인간 같았습니다. 어떻게 밀폐된 공간이 그 사내에겐 아주 평온하고 아늑한 공간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내의 생활공간이 마치 여자 화장실이 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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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람들이 이러한 사내의 행동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요?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이며 엽기적인 짓이라 경악할 것입니다. 사회의 일탈 행위로 격리되거나 수감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야말로 연구 대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사내가 그런 사실을 알 만큼 정상적이기에 아무에게도 띄지 않으려고 아주 은밀하게 화장실을 드나드는 것이겠지만 사실 그의 행동이 알려지고 공개가 되는 경우 사건의 심각성은 커지는 것입니다. 하이에나 같은 언론과 방송은 줄기차게 반복적으로 이 사내를 집중적으로 발가벗겨 놓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그 사내가 그러한 사실을 더 잘 알 것입니다. 그 사내는 사회 통념상 변태성욕자나 성도착자나, 파렴치범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여자 화장실에서 머무르는 고약한 짓을 하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 사내의 기괴하고 엽기적인 행동의 이유가 드러났습니다. 그 사내의 친구들, 다시 말해 도반승 둘이 화장실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화장실 밖에서 둘 중 키 작은 스님 한 분이 이렇게 소리쳤던 것입니다.
“청송스님, 동안거의 처소(處所)치고는 퍽이나 황홀경(怳惚境)이요, 화계대택(花界大宅) 이외다! 참으로 감탄이 절로 나오는 구려! 오탁(汚濁)의 연(蓮)이요, 진세(塵世)에 열반(涅槃)이로군요! ”
이제 사내라는 단어 대신에 스님이란 단어를 쓴다면 이러한 엽기적인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스님이 동안거를 위해 여자 화장실을 선택했다면 이 사회의 인식은 어떠할까요? 비록 범부의 생각으로는 그 경지를 헤아릴 수는 없겠지요. 그랬던 것입니다. 동안거를 여자 화장실에서 끝마치며 그 사내, 아니 청솔 스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일갈(一喝)했습니다. 남녀분별 분별지생, 분별계교 변태자생(男女分別 分別智生, 分別計巧 變態者生). 남녀동인, 변소위인(男女同人, 便所爲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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