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십자가 위의 예수와 성 요한, 그리고 두 마리아 |
설명 : 엘 그레코 작, (1588), 캔버스유화, 120 x 80cm, 아테네 국립미술관 |
성경 : 요한 복음서 19,25-26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
장로님, 장로님, 우리 장로님!
K는 장로이다. K는 언제나 믿음을 굳건히 하고 그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개를 위해 교회를 찾는다. 교회는 K에게 피난처와 같은 곳이다. 믿음보다는 회개와 구원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K에게 회개는 세속적인 타락을 위해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다. 즉, K에게 신은 세속적인 타락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굳건했던 신앙의 삶 뒤에 뜻하지 않게 덮친 범법의 길로 들어서면서 K에게 신은 회개를 통해 범법을 사면 받는 용서의 신으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회개 뒤에는 또 다른 범죄가 뒤따르고, 그렇게 K의 범죄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으로 이어진 것이다. K의 회개는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른다. 범죄와 관련된 회개만도 십 수번이 넘는다.
그러나 K는 신도들 사이에서는 신앙심이 돈독한 신의 자녀고 종으로 통한다. 그들의 종교적인 판단으로 K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신을 배신하지 않았다. 세속적으로는 탕자였으나 신앙적으로는 항상 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약하디 약한 양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실한 믿음이 아니고는 그러한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신이 하찮은 인간들을 사도로 세웠던 것처럼, K를 강한 사도로 세우기 위한 시련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K의 간증은 이러한 그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준다. 회개와 함께 간증도 늘어가지만 누구 한사람 그의 믿음을 의심치 않는다.
K의 범죄는 주로 파렴치범죄에 집중되었다(K의 범죄 행각에 대해서 밝히고 싶은 생각은 없다.) K의 범죄와 관련해서 한 가지만 언급한다면 단 한 번도 세속의 법에 의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K가 그만큼 교묘해서 인지 하느님의 숭고한 뜻이어서인지는 알 수가 없다. K는 그 자신의 범죄에 대해 신의 연단이라 위안을 삼는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이다. 세속적 범죄와 신의 뜻 사이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뇌하여야 할 처지임에도 K는 설상가상으로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범죄가 필요하다는 아주 황당하고 기이한 생각해 도달한다. 즉, 회개하는 양들이 더 많아져야 교회의 십자가가 더 는다는 악마적인 믿음에 사로잡힌다. 회개하는 양들의 수를 증가시키기 위해선 세속적 유혹이 더 강해야 한다는 궤변과 같다. 세속적인 유혹이 인간들의 영혼을 더 공허하게 만들어야 한다. 더 공허해진 인간들은 교회를 더 많이 찾게 될 것이고 더 강력해진 세속적 유혹은 교회 밖으로 인간들을 불러 낼 것이다. K는 신에게 이렇게 기도한다.
그러나 신도들은 K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 오로지 회개하고 구원을 간원하는 K의 겉모습에서 신성을 볼 뿐이다. 그들에게 K의 전도 능력과 간증의 기적이 넘쳐흘러 보인다. K는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물로 세례를 한 선지자 요한의 재림이라고 믿을 정도이다. K는 언제나 도시를 관통하는 어느 큰 강의 주변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어깨띠를 두르고 강 주변 정화 활동과 선교 활동에 열성적이고, 가끔 K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강으로 들어가 부유하는 쓰레기를 줍곤 하는 모습이 다소 과장의 과정을 거치면서 선지자 세례 요한으로 비쳐진 탓이다. K가 요단강의 세례 요한에 비유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종교적인 맹목성에 가깝다.
K의 음흉한 심중의 바램 탓인지, 소소한 범죄를 포함해서 이단적이고 세속적인 타락에 영혼을 더럽히고 다시 교회로 달려가 회개하는 새롭게 형성된 기독교적인 메커니즘이 일반화되면서 교회의 십자가는 나날이 늘어만 간다. 동시에 그 늘어난 십자가들의 영험 탓인지 세속적인 타락과 그것을 부추기는 유혹은 더욱 광범위해지고 노골화되어 가긴 마찬가지다. 모텔의 찬란한 온천표시와 유흥가의 네온사인들도 늘어만 간다. 악의 골이 깊고 더욱 어두울 때 십자가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은 진실이 맞아 보인다. K의 생각대로 십자가의 수는 더 늘어나고 유혹은 더 커져가고 그 사이에서 인간들은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타락과 회개만이 존재하고 분노와 심판의 신은 사라진 듯 보인다. 용서의 신만이 그러한 인간들의 타락과 회개로 이어지는 쳇바퀴 타기를 박수치며 즐기고 있는 듯하다. 서커스를 관람하는 청중으로서의 신!
이 지점에서 K는 더욱 오만해진다. 늘어가는 십자가와 늘어가는 신도들을 보면서 K는 자신이 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착각한다. K는 신조차 세속적 타락에 빠졌다고 조롱하기까지 한다. 아니 K는 육체의 각질 속,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을 타살해 버리기 까지 한다. K의 육체의 속과 겉은 너무나도 다른 세계이다. K는 자신이 타살한 신을 짓밟고 신도들을 내려다본다.
K는 이제 요단강의 선지자 세례요한으로 형제자매들에게 평가받고, 신을 조롱하고 타살까지 하는 자칭 신을 초월한 세속적 신이라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K는 타칭 세례요한의 재림이면서 자칭 신을 초월한 세속적 신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타칭과 자칭, 세례요한과 신을 초월한 세속적 신의 탄생이다. 타칭에 의해 불려지는 세례요한은 K의 허상에 속아버린 종교적 순수의 결정체이며, 자칭 세속적 신은 K의 거짓과 불손과 위선의 결과물이다. K의 변신은 참으로 극적이고 숨 막힐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K는 현실의 특정인이 아니며 단지 상상의 인물이다. 항상 그렇지만 어떤 종교에서나 그 종교를 이용하는 사악한 인물이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인물을 상상적으로 묘사해 보았다. 즉, 기독교를 잘못 이용하는 인간에 대한 비판이지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양해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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