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
영화가 끝날 무렵 조카인 쇼는 마츠코를 신이라 부른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종교적일 정도로 희생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성스러운’ 마츠코가 아니라 ‘혐오스런’ 마츠코이다.
그녀가 혐오스럽다는 단서는 강가의 낡은 아파트에서 한 마리 더러운 벌레처럼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곳에서 마츠코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먹고 마시고” 하면서 “화장도 치장하는 것도 청소도 하지 않고 숨 쉬는 것도 귀찮아져 이대로 죽는구나” 할 정도로 삶을 포기한 상태이다. 마츠코는 그녀의 인생 속으로 더 이상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다.
마츠코에 대한 혐오의 시선은 마츠코의 방 옆에 살고 있는 전위적인 메탈 밴드의 멤버인 듯한 오쿠라 슈지의 것이 대표적이다. 오쿠라 슈지는 마츠코에 대해 “사회의 법칙도 이웃에 대한 예의도 다 무시했지.” 라고 말하면서 그녀에게 혐오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 혐오라는 단어, 즉 오쿠라 슈지의 시선이 현재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시선은 기성 질서의 가치관이 그것이다. 여기서 잠깐 언급하자면 이러한 기성 가치관을 대표하는 존재가 항상 흑백사진처럼 존재하는 마츠코의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마츠코의 동화적인 세계와 접촉하는 유일한 방식은 고작 미소를 띠는 정도에 불과하다. 마츠코의 남동생, 즉 쇼의 아버지 또한 아버지의 흑백사진 속에 머무는 존재이다. 마츠코의 남동생은 마츠코의 유골함을 들고 2년 만에 쇼와 재회한 날 무덤덤하게 마츠코에 대해 이야기 한다. “어떻게 봐도 시시한 인생이었어.”
마츠코를 보는 이러한 두 시선은 동일하다. 방향은 다르지만 오쿠라 슈지나 마츠코의 남동생은 마츠코의 인생에 찍힌 혐오스런 타인들의 지문을 읽지 못하는 피상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마츠코의 일생에 담겨진 ‘혐오’ 의 정체를 마츠코에게만 조준해 버린 것이다. 마츠코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왜 고통스럽게 살아왔는가? 하는 이해는 전무한 것이다.
“사회의 법칙도 이웃에 대한 예의도 다 무시했지.” 이 오쿠라 슈지의 말은 오히려 ‘사회의 법칙조차 이해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예의를 상실한 무지한 표현’ 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오쿠라 슈지가 보는 마츠코의 ‘현재’ 의 모습은 ‘혐오스럽겠지만’ 쇼처럼 마츠코의 일생에 대해 진지한 의문이나 물음 같은 것을 던지지는 않은 것이다. 만약 오쿠라 슈지가 예술(음악)을 한다면 그가 음악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지 의심스러워 지는 것이다. 단지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는 야메카와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마츠코를 ‘혐오’의 낙인을 찍은 오쿠라 슈지는 타인의 전생애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인간으로 낙인찍혀 마땅한 것이다.
글의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지만, 오쿠라 슈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색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오쿠라 슈지의 외모와 행동은 참 재미있고 웃음도 자아내고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오쿠라 슈지가 말한 ‘혐오’ 라는 단어가 마츠코를 수식하는 단어가 된다는 것은 현대의 대중문화의 속성을 말해준다고 하면 과장일까? 그 자신 혐오스런 몰골을 하고 있으면서 사회의 법칙이나 예의라는 말을 언급하며 마츠코가 혐오스럽다고 하는 태도는 대중문화의 건전성에 대한 긍정적인 변호로 읽혀짐과 동시에 대중문화의 깊이 없는 피상적인 모습으로도 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봐도 시시한 인생이었어.” 마츠코의 동생, 즉 쇼의 아버지는 가출한 마츠코와 간간히 접촉하면서도 마츠코의 일생을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시시한 인생” 이라고 못 박아 버린다. 이렇게 죽은 후에도 마츠코는 이해받지 못하고 남동생에게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처형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남동생의 오해는 현재의 마츠코의 모습만을 피상적으로 본 오쿠라 슈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세계와 가치관(기성의 가치관)으로만 마츠코를 본 결과이긴 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본 결과라는 면에서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의 삶이 마츠코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는 사실이다. 동화와는 거리가 먼 가부장적 남성의 질서에서 마츠코를 보았을 때 마츠코의 일생은 시시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남동생의 시선 또한 진지하기는 하나 전통과 기성의 가치관에 집착하는 불완전한 시선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소 감상적이긴 하지만 쇼의 시선이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선으로 등장한다. 쇼는 마츠코 고모의 일생을 결코 혐오스럽다거나 시시한 일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신과 같은 존재’ 로 보는 것이다. 혐오와 시시함으로 못 박힌 고모 마츠코의 일생에서 그 오해의 못들을 빼버리는 것이다. 마츠코의 일생에서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오쿠라 슈지와 아버지의 시선은 쇼의 진지하고 성찰하는 시선으로 대체된다. 쇼는 ‘혐오스러움’ 의 이면을 관찰하고 그곳에서 마츠코의 신성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한 때 삶의 공허함에 빠져 음악, 술, 섹스로, 마침내는 자살로 현실을 탈출하고자한 쇼가 마츠코의 일생을 통해 인간과 대중문화(음악, 술, 섹스)의 공허한 속성을 성찰하고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추락하던 젊음의 자기 비상을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또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전통과 기성의 가치(속마음은 표현하지 않았지만 속 깊은 사랑)를 통해, 이러한 자기 비상이 현실을 저버린 이상만으로는 성취 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도 이해하게 된다. 쇼의 갑작스런 진지함과 성숙함은 바로 이러한 생각의 균형에서 싹튼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약간이나마 억지스럽게 <마츠코의 혐오스런 일생>에 대한 오해를 푼 듯하다. 어쩌면 죄책감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혐오스러운 세상을 위해 혐오스러움을 뒤집어쓴 한 여자의 일생을 위해서……(*)
이미지 출처:http://www.koreafilm.co.kr/movie/today_movi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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