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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본영화]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by 컴속의 나 2008.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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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r.blog.yahoo.com/donjuan0203/1.html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世界の中心で, 愛をさけぶ


감독:유키사다 이사오

주연:오사와 다카오, 시바사키 코우, 나가사와 마사미



1.앞에 붙인 사족

인간에겐 특별한 발명품이 있습니다. 잡을 수 없는 시간을 (일시적으로) 잡아두는 음성, 영상매체들이 그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매체의 발전은 기록의 발전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더 생생해지는 것입니다. 말에서 문자를 거쳐 음성 기록, 영상에 이르기 까지 생생해져가는 기록의 역사인 것입니다.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만으로 부가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음악이 그렇고 영화가 그러하며 TV 프로그램들이 그러합니다. 인간들에겐 시간을 죽이거나 살리는 방식이 더욱 다양해진 셈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을 과거로 퇴색시켜버리는 시간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뉴스가 그렇습니다. 뉴스(News)는 새로운 것을 보는 듯하지만 사실은 과거의 지난 것(Olds)에 불과합니다. 사실 영상으로 보는 거의 모든 것들은 그 ‘시제’ 가 과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생방송이 그 예외에 속합니다). 그런데 뉴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아마도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의식을 깨우는 그 무엇‘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쳐 온 시간 속에는 놀랄만한 사건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뉴스란 우리가 이런 놀라운 사건과 놀라운 감정이 함께 공존하게 합니다. 한 개인에게 있어 이러한 뉴스들은 단순한 기억보다는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을 때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음성, 영상매체들은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듯 합니다. 과거를 다시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해주니까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기술은 신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불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기술이 긍정적이지 만은 않아 보입니다. 음성이나 영상으로 시간 한계의 폭을 넓혀주기는 했지만 사실 좀더 생생해진 과거에도 불구하고 돌아갈 수 없다는 그 애틋함은 더 커지는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음성이나 영상은 사진 몇 장으로 빠져드는 과거로의 추억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과거 그 자체에 빠져드는 감정’을 유발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가정을 해봅시다. 만약 한 인간을 방에 가두어 두고 죽은 자들의 소리들과 영상들만을 들려주고 보여준다면 그 인간은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이러한 상상은 여러모로 의문이나 의미를 만들어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음성이나 영상은 시간으로서의 과거가 아니라 유사 과거로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려는 인간의 강렬한 욕구를 다소 완화시켜줄 것인가? 아니면 더 큰 절망에 도달하게 할 것인가? 한 국가로 확대해 보아서 독일을 예를들어 생각해 본다면, 한 국가로서 독일이 히틀러나 유대인 학살에 집착만 한다면 독일 국민들의 정신 건강에 유익할 것인가? 유대인 학살에 관한한 ‘과거의 현재 진행형’이란 역사적 조명이나 성찰은 간과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너무 지나쳐도 좋지는 않게 여겨집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인 것입니다.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인으로도 국가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 조명이나 성찰은 학문으로 법으로 연구해서 그것의 재발을 막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실제로는 유대인들만이 아니고 동성연애자나 살인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이나 폴포트의 학살들은 영상에 의한 전형적인 뉴스의 모습입니다. 혹 알렉산더 대왕이 히틀러 만큼이나 잔인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징기스칸이나 네로 황제는 어떻습니까? 어쩌면 더 야만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기록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알렉산더 대왕, 징기스칸, 네로 황제의 이름만 남은 건 왜 일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뉴스화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등을 뼈에 사무칠 정도로 ‘현재 진행형화’ 할 수 있는 것은 영상 매체의 덕입니다. 인간은 영상 매체가 도달하는 범위내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아주 객관적인 듯 합니다. 하지만 영상 매체가 닿지 않는 범위내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주관적이고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영상매체의 한계로 의도적인 조작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기억에 의존하는 것과 영상으로 남겨진 것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을까요? 정말 기억해 두어야만 할 것들만이 영상에 남겨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선택된 것일까요? 평가하는 시점에서는 그 중요성이나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생생한 영상이 오히려 사건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주관적이고 편협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한 개인에게 있어서’ 차라리 기억들에 의존하는 것이 좀더 공정하지 않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 속에 인상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이 좀 더 중요하고 의미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솔직히 공정한 게임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공정하게 보인다고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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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영화 속으로

이 영화에서는 카셋 테이프 하나가 중요한 모티브가 됩니다. 이 테이프 하나가 구성과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씨에 비유하면 될 것입니다. 테이프는 과거를 반추케 하고 기억을 떠오르게 하니까 말입니까. 남자 주인공 사쿠(오사와 다카오)와 리츠코(시바사키 코우)는 애인 사이입니다.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사던 리츠코는 작은 분홍빛 스웨터에서 오래 된 카셋 테이프(1986.10.28)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단절하지 못한 그녀의 과거의 상처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테이프는 리츠코가 병원에서 언니로 알게 된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는 아키(나가사와 마사미)[고교시절 사쿠의 여자친구]로부터 사쿠에게 전해주라고 부탁받고 학교 신발장에 테이프를 넣으러 가다 교통사고로 전해주지 못한 아키의 마지막 테이프였기 때문입니다. 리츠코는 이 테이프 때문에 부채감속에서 살아온 여자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듣고 있는 과거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과거를 ‘재생‘ 하는 것입니다. 리츠코는 태풍 29호가 몰아치는 밤 ’재생‘의 배경이 되는 시코쿠로 떠납니다. 사쿠는 이사를 가는 리츠코를 도와주려고 리츠코의 집에 들었으나 리츠코는 이미 떠나고 없습니다. 사쿠는 리츠코의 행방을 찾다가 친구 류가 일하는 카페에서 태풍 속보를 내보내는 텔레비전 뉴스 속에서 리츠코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순간 타카마츠 공항과 태풍 29호는 사쿠에게 아키와의 추억으로 맹렬하게 빠져들게 합니다. 테이프가 리츠코를 시코쿠로 떠나게 했다면 텔레비전 태풍 속보는 사쿠를 시코쿠(과거)로 떠나게 합니다. 여기서 음성과 영상 매체가 두 남녀 주인공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후로는 사쿠와 아키의 ’뉴스’가 인상적으로 재생됩니다만 그들의 순수한 사랑이 아키의 백혈병과 죽음으로 인해 지속되지 못하는 슬픈 러브 스토리의 전형을 되풀이 합니다.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흔한 도식에 약간은 식상합니다만 젊은 날을 지탱하는 아기자기한 장식들과 슬픔의 감정은 영화를 의미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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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금속 이물질 ’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것을 좀 더 긍정적으로 좋게 말한다면 ‘창조적 모방‘ 이라거나 ‘창조적 시도’ 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저에겐 왠지 불필요한 것의 개입이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남녀간의 고전적인 러브 스토리에  카세트의 녹음기술을 덧칠을 해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등장인물들의 기억에 근거한 회상들이 카세트(워크맨)에 의해 대체되고 매개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조용히 눈을 감고 회상하는 모습과 함께 과거의 추억들이 플래쉬 백 되는 것이 일반적인 영화의 양식인 것입니다. 서로 카셋 테이프를 녹음해 주고 받는 것도 그다지 자연스럽지도 않습니다(물론 영화에서는 자연스럽게 만들고 있지만.) 만약 이 영화에서 몇 몇 장면들을 제외하고는 굳이 카세트가 없더라도 기억에 근거한 회상으로도 얼마든지 스토리를 전개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매개도 대체로 기억이나 일기장, 그림, 음악, 사진 등입니다. 아마도 이 영화의 감독은 과거를 좀 더 생생하게 현재와 공존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테이프속의 생생한 목소리가 좀 더 실감나는 감정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흐릿한 기억이 아니라 좀 더 현대적이고 좀 더 분명한 기억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듯도 합니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 사쿠가 워크맨 헤드폰을 끼고 자신의 고향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재생 버튼을 누르는 모습은 사랑이란 서정적 감정에 금속 이물질이 끼어든 것처럼 어색해 보였습니다. 물론 저만의 느낌이겠지요. ‘금속 이물질‘을 창조적인 작업인지 불필요한 덧칠인지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겠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여러분의 판단과는 별개로 앞서도 말했지만 전통적인 러브 스토리에 금속 이물질이 끼었다고 했지만 ‘이러한 시도들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볼 필요는 있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영화 <연애사진>은 ‘금속 이물질’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진기나 워크맨이나 달리 볼 필요는 없을 듯도 합니다. ‘운영의 묘‘ 를 효과적으로 적용한다면 충분히 극복될 문제가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시대는 변하고 있고 영화도 진화해야 되니까 말입니까? <연애사진>이 카메라와 사진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카세트 녹음기(워크맨)에 중심을 두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영화감독 간에 교류가 있다면 이러한 흡사한 모티브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교류가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발명한 이러한 기계들을 가지고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욕망입니다. 타임머신을 타던 영상을 보던 그 도구 외적인 의미의 공간에서 그 욕망은 크게 두 가지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현실 도피적인 욕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치유의 욕망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치유의욕망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사쿠가 찾아가는 과거라는 시간. 리츠코가 찾아가는 과거라는 시간. 그들은 과거라는 시간과 다시 ‘대화’ 를 하고자 합니다. 대화라는 말은 카셋 테이프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그들이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다시 지키기 위해 과거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러한 치유의 욕망은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만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성찰이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미래 지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미래 지향적인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냉정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깊은 감정에 빠져 워크맨 헤드폰을 쓰고 여기저기를 휘젖고(?) 다니는 사쿠와는 달리 <우평사진관> 주인 시게 아저씨의 존재는 우리가 우리의 과거(시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미있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시게 아저씨의 가슴에는 젊은 날의 부글부글 끓는 열정이 사라지고 원숙한 냉정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진관의 존재가 마치 비현실적이고 신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시간을 잡아두는 사진관이지만 초월적인 시간의 존재를 관조하는 장소이기에 그렇습니다(종교적인 의미로 확대해도 될 것입니다.) 비록 시간을 사진 몇 장으로 잡아둘 수는 있겠지만 시간을 거스러지는 못하는 인간의 종속적 위치에 대해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냉정한 관조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시게 아저씨의 모습은 조금 차갑고 쌀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독이 우리가 닮아가야 할 어떤 상징으로 제시했다면 이 시게 아저씨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제 백혈병으로 죽은 아키와 관련해서 잠시 언급하고 이 영화에 대한 감평을 끝맺기로 하겠습니다. 아키는 다재다능한 소녀입니다. 그녀에게는 소중한 꿈이 있습니다. 사쿠와의 순수한 사랑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사춘기 시절의 순수한 사랑의 감정은 절대적인 감정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해 인간들이 갖는 애틋한 감정을 유발시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불치병에 걸려 그 대상 중에 하나가 죽는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청소년기에는 자기 확장의 욕구가 큽니다. 자기 현실을 벗어나 꿈이나 이상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도 바로 자기 확장의 욕구가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키와 사쿠가 배를 타고 ‘꿈의 섬‘ 으로 가는 것이나, 그곳에서 발견한 카메라에 찍힌 호주 우룰루(호주 원주민들의 말로, 세상의 중심이란 뜻)의 사진을 보며 꼭 가보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기 확장의 욕구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렇게 자신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지는 시기에 백혈병이 아키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문제는 백혈병으로 인해 이러한 자기 확장의 욕구가 꽉 막힌 아키의 존재입니다. 살아야 할 시간이 까마득한데 벌써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대사에 그러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호주로 가기 위해 시게 아저씨의 사진관에서 죽음을 앞둔 아키는 이런 말을 합니다: “전 잊혀지는 게 두려워요. 지금의 저를 사진에 담아주세요. 사진은 영원히 남잖아요.” 그리하여 사쿠와 아키는 결혼 사진을 찍습니다. 사쿠가 언제나 가슴 아파하는 것은 아키와 마지막 꿈인 호주 우룰루에 가지 못한 것입니다. 태풍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시코쿠에서 리츠코와 만난 사쿠는 아키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함께 우룰루로 떠납니다. 비록 차가 고장나 우룰루에는 오르지 못하지만(실제 우룰루로 설정하기에는 그곳이 너무 높았던 것 같음) 근처 둔덕에서 아키의 유골을 뿌려줍니다. 그들과 함께 아키의 영혼도 자유로워 집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