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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꽁트] 몰입 가족

by 컴속의 나 2008. 7. 9.





 

몰입 가족

― 몰입의 양상들


내가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숱하게 많은 아이들을 보아왔지만 초등학교 5학년인 K 만큼 영어에 몰입하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 학교를 마치고 곧장 학원으로 달려와서는 수업 시작하기 한 시간 전쯤부터 어학실 TV에서 CNN 방송을 틀어 몰입하는 것이다. 주위에는 시선 한번 두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오직 TV 스크린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다. K의 모습이 어떠하리란 것을 쉬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학실의 격리된 부스에 앉아 구부정한 자세로 입을 벌린 체 TV 스크린에 몰입해 있는 모습을. 말도 없고 웃음도 없다. 그냥 앉아 TV에만 몰입하는 것이다.


하루는 내가 너무 궁금해서 원장실로 K를 불렀다. K의 그런 모습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몰입식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K의 행동은 결코 비정상적이지 않았다. 아니 아주 바림직한 자세였다. 그러나 어학원의 원장으로서 학부모들에게 언제나 몰입, 몰입하고 강조해 오긴 했지만, K의 그런 모습을 보자니 나도 K의 그런 모습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약간 몰려왔다.


“너무 영어에만 몰입하는 게 아니니?”

“당연한 거잖아요. 저 영어 몰입하지 않으면 아빠한테 맞아 죽어요. 아빠는 영어가 밥 먹여 준데요. 영어를 잘하지 못하면 굶어 죽는데요. 영어가 사람을 잡아먹는데요. 아빠처럼 된데요.”

“아니 아빠가 그런 말씀을 하셔? 영어가 밥 먹여 준다거나 영어 못하면 굶어 죽는다는 말은 영어가 아주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겠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아빤 제가 영어에 몰입하지 않으면 정말 절 때려요. 아빤 영어 때문에 직장을 쫓겨났다고 했거든요. 그 놈에 영어라고 영어를 저주하면서도 저에겐 영어를 하라고만 하세요.”

“네 아빠가 영어 때문에 직장을 쫓겨났다는 말은 꼭 영어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란다. 이를테면, 회사를 그만둘 나이가 되었다거나, 건강상의 이유라거나, 아빠가 개인적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다거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단다. 이 원장 선생님도 말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 어학원을 시작했단다. 영어를 못해서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는 없단다. 아빠도 만찬가지란다. 네가 영어를 잘해 주었으면 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나는 K와 이런 대화를 이끌 가면서 서글픔을 느꼈다. K에겐 아니라고 부인을 했지만 실상 영어가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는 말은 사실 같았다. K의 아버지가 영어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이나, 영어가 밥 먹여준다는 사실은 나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나 또한 영어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고 영어 어학원을 운영하며 밥을 먹고 있으니 말이다. 몰입이 어학원의 운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달고 있는 간판이 <영어 몰입식 전문 어학원>이라고 적혀있으니 말이다.


비록 먹고 살기 위해 그럴싸한 <영어 몰입식 전문 어학원>이란 이름으로 영어를 가르치고는 있지만, 왜 영어에 이토록 발악에 가까운 몰입을 해야만 하는지 여전히 이해하지도 못한다. 영어가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이 진실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잘하면 좋긴 하지만 그렇게 모두들 잘하면 정말 국가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일까? 경쟁력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일까? 그건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나는 그저 돈을 벌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몰입’이란 단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럽기까지 하다.


“아빤 술에 몰입해 있어요. 매일 매일 술이에요.”

“아빠에게 괴로운 일이 있나보구나?”

“엄마 때문이에요.”

“엄마 때문이라구?”

“예, 엄마 때문이에요. 엄마는 지난주에 집을 나가버렸거든요. 연락도 없구요. 아빠 말로는 애인에 몰입하고 있데요. 돈 없는 아빠보다 돈 많은 애인이 더 좋아 나가버렸데요. 아빤 그런 말을 하면서 또 화를 내세요. CNN만 계속 들으래요. 영어 모르면 굶어 죽는데요.”


K의 엄마를 몇 번 본적이 있다. 밀린 학원비를 내기위해 몇 번 학원을 찾아왔었고 날마다 전화를 해서 K의 진도나 성취도에 대해 직접 체크를 했다. 정말이지 귀찮을 정도였다. 어제도 통화를 했다. 그런데 가출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K의 엄마는 K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방학 때 마다 해외 어학연수를 보냈고, 전화영어를 했고, 수십만원씩을 투자해서 영어 동화 교재와 CD들을 구입했다. 몰입식 영어교육에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았다. 자식의 교육에 몰입하는 것은 모든 부모의 인지상정이지만 K 엄마는 더욱 그랬다. 그런 K의 엄마였기에 가출이니 애인이니 하는 말은 의외였던 것이다. 그녀에겐 자식인 K가 모든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엄마가 집을 나갔다니, 그게 사실이냐. 네가 잘못 알고 있겠지. 할머니 집이나 친구집에 가 계시지 않을까?”

“절대 아니에요. 아빠가 그랬어요, 이제부터 둘이 같이 살자구요. 엄마가 보고 싶어 죽겠어요. 아빠 그러던데요, 내가 영어를 잘해서 유명한 사람이 되면 엄마를 찾을 수가 있데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영어에 몰입해서 영어를 유창하게 하게 되면 엄마를 찾을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영어를 잘하면 엄마를 찾을 수 있다는 어이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K가 입을 열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몰입해 있어요. 아빠는 술에요, 엄마는 애인에요, 난 영어에요. 우린 몰입가족이에요.”    

(2008.07.07.2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