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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목욕탕의 추억(2)

by 컴속의 나 2009. 1. 31.



이미지의 출처는 http://kr.news.yahoo.com/servi


터키목욕탕(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이미지 출처: http://kr.blog.yahoo.com/vsv12






목욕탕의 추억(2)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목욕탕 가는 것이 두려웠던 때가 있었다. 그 두려움은 뜨거운 물에 대한 두려움이라거나, 피가 나도록 까칠한 때밀이 타월로 등껍질이 벗겨지도록 박박 문질러대던 시력 나쁜 엄마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라거나, 욕탕에서 물속으로 머리를 강제로 밀어 넣곤 하던 삼촌의 잔인성에 대한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목욕탕 자체에 대한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아버지가 하던 작은 떡집이 망하고 말았다. 사업이 망한 결정적인 이유는 보증을 잘못 선 탓이지만, 그 이전부터 아버지의 가게는 내리막길이었다. 떡에서 쥐꼬리가 나왔을 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은 이해해주었다. 그러나 두 달 뒤 바퀴 벌레가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세 마리가 나오자 동네 사람들은 발길을 다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빚보증까지 뒤집어쓰고 만 것이다. 우리 가족은 길바닥에 한 동안 나앉아 있어야만 했다. 나는 바퀴 발레가 한 없이 원망스러웠다. 아버지는 어디 한적한 시골 마을의 외양간에라도 정착할 수 있을 만 한 돈을 구하려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셨다. 아빠의 그런 노력으로 길바닥에서의 생활을 그나마 일찍 끝낼 수가 있었다. 다행히도 여름이었기에 비록 짧은 기간이라도 견딜 수가 있었다.

이사를 간 곳은 북쪽으로는 폐광이 있고 남쪽으로는 6.25때 미군의 오폭으로 마을 주민들이 몰살되어 이제는 지명조차 사라진 곳으로 대규모 개사육장이 있었다. 동으로는 높은 산들로 막혀있고 서로는 큰 사과 과수원이었다. 나는 사과 과수원이 있는 마을 학교로 매일 아침 30분을 걸어 다녔다. 그 곳에서 정착하고 아빠와 엄마와 누나는 개사육장과 과수원으로 일하러 나갔다. 아빠와 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체 개 사육장에서 개밥과 오물을 처리하는 누나가 너무 안쓰러웠다. 그것이 생계를 위한 수단 전부였다. 물론 계절에 따라 약간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사는 마을은 집이라고는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서로 외떨어진 10호의 초가와 슬레이트집들이 전부였다. 작은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이런 곳에 공중목욕탕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물이 귀한 작은 마을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이었다. 그 온천수 위에 지어진 목조의 목욕탕이었다.

그 때 목욕탕은 내게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제는 그런 목욕탕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외관을 하고 있었다. 방금이라도 쓰러질 듯한 목조벽에 슬레이트 지붕이 덩그러니 놓여 진 단층 구조물이었다. 그 구조물을 정면에서 보면 시골의 여느 재래식 화장실의 문짝처럼 사개가 맞지 않아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삐거덕, 삐거덕거리며 을씨년스런 소리를 내는 두 짝의 볼품없는 나무문이었다. 그 문에는 붉은 페인트로 각각 남, 녀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욕실 안에는 나무 바닥에 온천수가 퐁퐁 솟아나는 작은 샘이 있고 그 샘 주위의 편편한 돌 위에 두 개의 비누와 그 옆으로 목욕용 수세미 바가지가 몇 개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마을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공중목욕탕이었다니! 그나마 공짜로 목욕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목욕다운 목욕을 하기 위해서는 그곳이 아니면 1시간을 걸어서 읍내로 나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불편을 감수하지는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곳은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산중의 음산한 폐가보다도 나에겐 더욱 무서웠다. 도대체 나는 그런 목욕탕을 한 번도 본적도 없거니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그곳에서 나는 혼자 목욕을 해야만 했다. 엄마는 저녁을 먹은 후 누나와 나를 거의 강제적으로 목욕탕으로 쫓아내곤 했다. 그것은 아빠 때문이었다.

처음 산골 마을에 정착을 하면서 아빠는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사과 농원에서 잡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빠는 술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방에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고 술만 마셔대었다. 엄마와는 언쟁이 끊이지 않았다. 알콜 중독에 무능력해진 아빠와 생활력이 강했던 엄마 사이에 고요한 샘물이 솟아날 수는 없었다. 사나운 물살에 누나와 나는 휩쓸려가지 않으려고 매일 매일 안간힘을 다해야 했다. 아빠는 술 만 마시면 신세 한탄에 엄마와의 언쟁에 폭언에 폭행을 일삼았다. 그 해 겨울, 아빠는 삶을 포기한 것 같았다.

그렇게 엄마에게 떠밀려 밖으로 나가면 사방은 흰눈으로 덮여있었고 목욕탕 외에는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 불행이었다. 목욕하는 것도 싫었지만, 이미 말한 것처럼 목욕탕 그 자체가 정말 끔찍이도 싫었던 나로서는 너무나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목욕탕까지 흰 눈을 밟으며 누나와 함께 걸어가면서 나는 누나에게 같이 목욕하자고 졸라대기도 했다. 그러면 누나는 내가 사내답지 못하다고 타박했다. 나와는 9살 터울인 누나는 내게 언제나 부드럽게 대해주었지만 목욕을 함께 하자는 말에는 완고하게 거절했다. 또한 마을 주민이라고는 10여명이 전부다 보니 나는 혼자서 목욕을 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가끔 누군가가 먼저와 있으면 내 마음이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너무나 드물었다. 아무도 없는 음산한 욕실에서 혼자 목욕하는 어린 아이의 심정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목욕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목욕이 부수적인 활동이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몸에 물을 끼얹고, 머리를 감는 동안 오싹해지는 등짝을 몇 번이나 추슬러야 했는지 모른다.

바로 그런 곳, 나의 육신과 정신을 사납게 물어뜯던 그 음산한 공중목욕탕을 떠나는 것은 내 기도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마침내 그토록 시달리던 공포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왔다. 2년 후 그 산골 마을을 떠나 한 작은 도시 변두리로 이사를 하였다. 정말 너무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허물어진 폐가 같던 공중목욕탕을 떠나게 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그 마을을 떠날 무렵 그 공중목욕탕은 전국에서 제일 큰 온천으로 변했고, 그 산골 마을은 한 순간에 벼락 부자촌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에게는 누울 수 있는 손바닥만한 작은 땅 한 평조차 없었다. 어쩌면 개발이 가져다온 더 커나 큰 불행이었는지 모른다. 더해, 아빠는 죽음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변하는 산골 마을을 보면서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 산골 마을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온천파크가 될 지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도대체 그들이 슬퍼해야 할 이유를 나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소중한 자식의 해방감에 대해서 무관심한 그들이 그저 못마땅할 뿐이었다. 오직 내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공중목욕탕을 떠나는 것이 그저 다행스럽기만 했다. 나는 정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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