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나쁜 날
김 교수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차를 타고 학교로 가는 것이었다. 구입한 자가용을 운전하는 첫날이었다. 김 교수는 문명의 이기(利器)라는 차를 여태껏 구입하지 않았다. 면허증은 오래 전에 발급 받았지만 왠지 차를 구입하는 것이 그리 마음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교통 문화에 대해 너무 회의적이었고 지하철이 편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닦달과 아이들의 성화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사실 어디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차가 없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다. 마침 이름 있는 자동차 회사에서 ‘왕창 파격 세일’ 이란 이름을 걸고 승용차를 판매했기에 내친김에 구입을 했던 것이다.
일주일 간 도로 연수를 했지만 혼자서 차를 몰고 도로를 나선 김 교수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차들을 신경쓰랴 신호등과 보행자들을 주의하랴 정신이 없었다. 학교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로터리에서는 택시와 간발의 차로 충돌을 모면하기도 했고 뒤에서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보지 못하고 우회전을 하기도 할 뻔했다. 정말이지 끔찍한 순간들이었다. 하늘이 도와 준 탓에 김 교수는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그 위험천만했던 로터리를 지나고 무사히 학교에 도착했을 때 김 교수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 숨을 내 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너무 일찍 내 쉰 것일까. 자신의 학과 건물 앞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는 순간 얼얼한 충격과 함께 쿵하는 굉음이 그의 귀로 전해졌다. 조심스럽게 후진을 한다는 것이 그만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왼쪽에 주차해 있던 흰색 그랜저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들이박고 만 것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자신의 차를 다시 주차시키고 흰색 그랜저 쪽으로 다가갔다. 박 교수의 차였다. 박 교수는 김 교수와는 앙숙이었다. 국내파인 박 교수는 유학파인 김 교수를 견제했다. 교수 세계의 학벌과 파벌 같은 것이었다. 비록 나이가 젊은 박 교수였지만 이미 오염되어 버린 늙은 교수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김 교수는 전혀 그런 걸 의식하지 않았지만 박 교수는 출세 지향적인 사고에 빠져 김 교수를 장애물로 간주하고 있었다. 김 교수는 난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박 교수를 찾아가 사고의 전말을 이야기하고 보상을 해야만 했다.
박 교수의 연구실 문을 노크했다. 박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김 교수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박 교수의 얼굴색이 달라졌다. 그를 찾아올 김 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김 교수가 사고의 전말을 이야기하자 그제서야 박 교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일었다.
“조심하지 않고선. 김 교수 어제 고사를 지내지 않았지. 오늘 사고야 액땜이라고 하겠지만 앞으로 계속 그런 사고를 낼 수는 없잖은가 말야. 당장이라도 고사를 지내야 될 걸세.”
“고사는 무슨......앞으로 조심하면 되겠지”
김 교수가 그렇게 말하자 박 교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쏘았다.
“자네 그런 생각이 화를 불러들이는 거네. 고사를 미신만으로 볼게 아냐. 내가 잘 아는 곳이 있으니 그곳에서 성대하게 고사를 지내자구, 알겠나.”
김 교수는 피해자인 박 교수가 그렇게 떠드는 바람에 미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후회가 되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김 교수는 보통 고사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사거리나 로터리 등의 도로변에서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박 교수는 자신을 데리고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도로 지점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 생각했다.
2시쯤 수업이 끝나고 김 교수는 학교 앞 가게로 가서 막걸리 한 통과 종이 컵, 실, 초, 마른 명태를 구입했다. 그것들을 차의 트렁크에 싣고 박 교수의 연구실로 전화를 했다. 박 교수가 전화를 받았다.
“어이, 김 교수. 어딘가?”
“학교 앞이네.”
“아직 좀 이른 시간인데......연구실에 학생들이 찾아와 있거든. 면담이 끝나려면 넉넉히 한 시간 정도는 필요할 텐데 어쩌지? 아, 그리고 말야, 차를 정비소에 맡겼는데 견적이 70 만원이더 구만. 새차였는데 어쩔 수가 없지 뭐.”
“미안하네......새찬데 말야. 연구실에 가 있을 테니. 그리로 연락해 주지 않겠나?”
“자네 차가 더 새차 아닌가. 그래 자네 차 견적은 얼마나 나왔던가.
“......”
“그래, 연구실로 연락을 하지. 조금 있다가 보세.”
김 교수는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싶었다. 차를 구입한 것도 괜한 허영이다 싶었다. 사고가 나고 바로 보험 처리를 하고 조치를 다 취했지만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새차를 뽑고 첫날의 사고라니,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니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위로해 주었지만 후회는 깊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사를 지내면서 앞으로 사고가 더 이상 없기만을 빌어야 할뿐이었다.
5시쯤 박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교수, 이제 슬슬 나가 보지.”
김 교수는 전화를 끊고 연구실을 나섰다. 박 교수가 이미 자신의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 교수 옆에는 2명의 여학생이 서 있었다.
‘고사를 지내는 데 학생까지 필요는 없을 텐데......’
김 교수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김 교수의 속마음을 알아 차렸는지 박 교수가 입을 열었다.
“고사를 지내려면 필요한 게 있잖은가. 그래서 애들을 불렀지. 학과에선 참 모범적인 여학생들이지.”
헌데 김 교수에게는 낯선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의 숫자가 많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미 준비 할건 다 준빌 했지. 학생들까지는 필요 없을 걸세”
“어, 그래. 준비를 다 해놓았다는 거지. 그럼 애들은 보내야겠군.”
김 교수가 학생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미 박 교수의 말을 들은 학생들이 인사를 했다. 아주 눈치가 빠른 학생들이었다. 그 중 머리가 길고 얼굴이 가냘프게 생긴 여학생 하나가 작별 인사 치곤 과감한 인사를 했다.
“교수님, e-mail 보낼게요. 교수님, 지방에서 학술회 할 때 꼭 함께 가셔야 해요.”
박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학생들이 총총히 멀어져 갔다.
그들이 탄 차는 아침에 김 교수가 무지 고생한 그 로터리를 돌고 있었다.
“박 교수, 여기가 어떤가?”
“고사 말인가? 이젠 그 고사 이야긴 그만 하세. 그냥 해본 소리라네. 사실은 말야, 자네와 함께 있고 싶었지. 정말 오랜만이 아닌가. 그리고 총장 선거가 내일 모레잖아. 겸사겸사 자네와 만나고 싶었어.”
“그랬군.”
“CNN 단란주점에서 몇 몇 교수들이 모이기로 했어. CNN 알지? 제일 서적 뒤쪽 술집 골목 말야. 거기로 가.”
김 교수는 속은 느낌이었다. 고사가 어찌 이렇게 변질이 될 줄이야. 그기다 어제가 스승의 날이지 않았는가. 김 교수는 정말이지 한 숨이 나왔다. 피해자의 요구였기에 고사라고 따라나섰지만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교수 혼자 내리게. 난 오늘 일이 있어서.”
“어어, 자네 왜 이러나 여기까지 와서. 자네가 참석한다고 했는데 그럼 인사만이라도 하고 나오면 되잖아.”
불행하게도 어둠이 대기를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차가 문제였다. 밤길을 혼자서 차를 몰고 갈 자신이 없었다. 박 교수는 난감했다. 이런 자신의 심정을 알아챘는지 박 교수가 입을 열었다.
“차는 여기 주차장에 박아 놓으면 될텐데 뭘. 자, 같이 가서 기분내자고. 아침에 있었던 일일랑 훌훌 떨쳐버리고 말이야”
그렇게 나오는 박 교수의 애원을 야속하게 떨쳐버릴 수도 없었다.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릴 수밖에.
“정 그렇다면 난 곧바로 나올 거네. 인사 정도만 하고 말이야.”
김 교수는 그들과 함께 앉아 술을 마시고 싶지도 않았고 쓸데없는 오해를 사고 싶지도 않았다. 여러 교수들이 있을 테니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오리라 다짐했다.
단란 주점은 2층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서 자동문 앞에 서자 스르륵 유리문이 열렸고 김 교수와 박 교수는 함께 실내로 발을 내디뎠다. 단란주점의 실내는 참으로 호화로웠다. 자동문의 바로 오른쪽 카운터에 중년의 여자가 앉아있었다. 박 교수를 보자 반가운 표정으로 박 교수를 향해 돌진해 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실내를 진동했다.
“이게 누구예요, 박 교수님. 자주 좀 들리지 않구요. 교수님들께선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박 교수를 안내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룸은 제법 큼직하고 고급스러웠다. 이미 테이블에는 예약된 손님들의 숫자대로 포크와 스푼, 물수건, 생수와 음료들이 놓여져 있었다. 박 교수에게 그녀가 거의 안기다시피 달려들면서 오랜만의 회포를 푸는 듯 했기에 김 교수는 눈치 없이 앉아 있을 수 만은 없었다. 마침 아랫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하면서 뒤가 마려워 왔다. 박 교수는 룸을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은 룸에서 왼쪽 끝에 있었다. 김 교수가 변기에 앉자 말자 물기 많은 변(便)이 소리를 내며 변기 속으로 떨어졌다. 김 교수는 오늘 하루라는 시간도 이렇게 빠져 나가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변은 꽉 막힌 듯한 느낌과 함께 아무리 힘을 주어도 나올 기색이 없었다. 변(便)과의 싸움으로 제법 시간과 힘을 들이고 있을 때 갑자기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화장실로 스며들면서 다급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날카롭게 들리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순간 화재가 났다고 생각했다. 화장실까지 연기가 가득하다면 이미 화재는 실내의 가연성 소재들과 함께 빠르게 번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김 교수는 재빨리 나와 화장실의 창문을 열었다. 바로 아래는 조금 전 자신의 차를 주차한 주차장이었고 자신의 차가 있었다.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화장실로 연기가 더 차 올랐다. 내실로 가서 누구를 구할 수도 없을 정도로 유독성 냄새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위기감을 느낀 김 교수는 어쩔 수 없이 창문을 통해 자신의 차 위로 뛰어내려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 교수가 뛰어내렸을 때 강한 충격이 그의 양쪽 발에 전해졌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김 교수가 눈을 떴을 때 박 교수와 다른 교수들이 그의 시선으로 들어왔다. 모두들 한마디씩 했는데 약 기운 때문인지 그들의 말을 생생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김 교수는 어찌된 영문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 위기 속에서 자신은 황망히 2층에서 뛰어 내렸건만 박 교수를 비롯해서 다른 교수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넨 너무 성급하게 뛰어내렸네. 불이 커지기 전에 다행히도 스프링 쿨러가 잘 작동해 주었다네. 자네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오신 교수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네. 물론 유독성 가스 때문에 고통스러웠긴 했지만 말야.”
박 교수의 말이 끝나자 정치학과의 마기아(馬基亞) 교수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부재자 투표도 가능하지, 그렇지.”
양 쪽 발목뼈가 부서진 김 교수는 응급실에 누워 ‘참 운수 나쁜 날’ 이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멋진 시승식(試乘式)이었다고 중얼거렸다.
'꽁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7) | 2008.10.23 |
---|---|
사랑은 아프다 (4) | 2008.10.18 |
콘돔 논쟁은 없다 (8) | 2008.10.14 |
K를 위한 변명 (1) | 2008.10.06 |
[꽁트] 신문팔이 소년 (7) | 2008.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