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팔이 소년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떠올린 것은 녀석의 몰골과 그러한 몰골을 가능케 해주는 추운 날씨와 간간이 날리는 눈발과 약간의 취기(醉氣)때문이었다.
‘아마 성냥팔이 소녀도 저러했겠지.’
녀석은 신문 꾸러미를 옆구리에 끼고 벤치 위에 앉아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고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도 무관심하게 녀석의 옆을 총총 걸음으로 지나쳐가기만 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녀석에게 액수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지폐 두 장과 함께 가지고 있던 라이터를 녀석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라이터는 어쩌다 한 번 갔던 단란주점에서 받은 것으로 겉에 상호와 전화번호가 큼직하게 새겨져있었다. 그땐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성냥팔이 소녀처럼 불이라도 피워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손에 쥐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이터를 녀석에게 준 것은 실수였다. 혹 불장난이 큰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해,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그 라이터의 뒷면에는 여자의 적나라한 나체가 그려져 있었기에 라이터를 열 서너 살 안팎의 그 철없는 소년에게 쥐어주고 나서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다음날 나는 라이터 때문에 무척이나 걱정을 했다. 어떤 면에서는 나의 생활의 무절제(?)함의 때가 묻어있는 라이터를 그 순수한 아이의 손에 쥐어준 것이 내내 마음이 걸렸고 더해, 성냥팔이 소녀의 죽음이 자꾸만 불길한 생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성냥불이 다되어 동사한 소녀처럼 녀석도 라이터 불을 피워놓고 잠이 들어 얼어 죽거나 불이 신문이나 옷에 붙어......”
나의 불길한 상상은 그렇게 이어지면서 차마 끝말을 잇지 못한 기억이 났다. 일요일이었기에 나는 윗도리를 걸쳐 입고 전날의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고 거리로 달려 나갔다. 그곳 벤치에는 녀석의 흔적조차 없었다. 나는 벤치 위에 검은 재의 흔적이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기도 했다. 라이터만이라도 어딘가에 떨어져있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실망스럽게 돌아서려다 벤치아래 돌멩이 틈 사이에서 바람에 나풀거리는 검게 탄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순간 녀석이 무언가를 태웠다고 생각하고 벤치 아래로 고개를 쑥 내밀고 보니 의외로 타다 남은 복권 조각이었다. 복권 위에 가능성을 품고 있던 숫자란 숫자들은 모조리 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다 타버린 복권을 들고 인도 위를 서성거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힐긋힐긋 보기도 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좀체 복권을 태운 녀석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난삼아 복권을 태웠단 말인가? 거액의 당첨금을 가져다주지 못한 얄미운 복권을 증오로 가득 찬 손길로 태웠단 말인가?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고자 일확천금을 꿈꾸는 소년. 소년은 평소 손으로 찢어버렸을 복권을 라이터로 체념과 분노가 동시에 밀려오는 혼란스런 심정으로 태웠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소년과 복권과 라이터가 좀 더 명확해 지는 듯도 했다. 나는 성냥팔이 소녀의 이미지를 몰고 왔던 그 신문팔이 소년의 허황된 믿음과 발버둥이 못내 안타까웠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침 준비를 했다. 직장 근처의 연립아파트였다. 30대 초반인 나를 결혼의 유혹에 빠트리는 것은 언제나 밀려드는 가사노동이었다.
“독신으로 남겠다고......빨리 장가나 갈까.”
나는 세탁기나 냉장고, 진공청소기 보다는 여자 한사람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여자들이 들으면 맞아죽을 소리겠지만). 총각 행세야 단란주점이 좋았지만 가사노동이 버티고 있는 현실에서는 총각의 꼬리를 떼고 싶었다.
나는 TV를 켜고 창문을 활짝 열고 실내를 환기 시켰다.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비명을 지르며 외쳐대던 퀴퀴하고 느끼한 그 노총각 냄새를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창문으로 실내와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겨울의 찬 기운이 들어와 무언가 새로운 각오를 용솟음치게 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특히 복권 추첨이 있는 일요일 오전에는 더욱 그러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소파에 앉아 복권 추첨을 조용히 시청했다. 복이 들어오려면 창문은 활짝 열려있어야만 했다.
나는 전날 밤에 구입한 복권을 소파 옆 옷걸이에 걸려있던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었다. 그런데 내가 분명 3장을 구입한 복권이 두 장밖에 없었다. 전 날 밤 확인하지 않고 소년에게 주었던 지폐 두 장에 한 장의 복권이 끼어있었던 것이다.
복권 추첨이 끝나고 나는 나의 가장 큰 실수는 그 복권을 녀석에게 준 것이란 걸 알았던 것이다. 나는 녀석에게 엄청난 돈을 보시했던 것이다. 무려 오억이나. 내가 가지고 있던 복권 두 장 모두 1등 번호를 가운데 두고 있는 번호들이었기 때문이었다(그 복권들은 1등 하나만 당첨되는 복권이었기 때문에 나의 충격은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아니 나는 완전히 미쳐버렸다.
“억, 억, 억, 재로 변해버렸어, 재로!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녀석은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제기럴.”
나는 온갖 욕과 저주를 녀석에게 퍼부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일어날 수도 없는 대사건이었다. 도대체 5억원을 태워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제 과거가 되어버린 그 일을 이렇게 완곡과 완곡을 거듭하며 무덤덤히 표현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열려진 창문 밖으로 획하고 자신을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 자신이 저주스럽고 증오스러웠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던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도 나는 여전히 오랜 동안을 악몽 속에 시달려야만했다. 나는 거의 1년 동안을 5억을 되새기며 살았고 엄청난 스트레스와 신경증으로 신경과를 찾기도 했다. 재로 변한 5억은 두고두고 나의 가슴에 한으로 맺힐 것 같았다.
이제 20년이 지난 지금, 녀석을 찾은 지금, 불로소득인 5억은 내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녀석의 삶은 교훈으로 전해주었다. 그 5억짜리의 복권은 재(灾)가 되었지만 노골적인 여자의 나신이 새겨져있던 라이터는 녀석의 삶에 엄청난 재(財)를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 밤에 녀석은 손을 녹이기 위해 돈이 아닌 그 복권을 근처에서 주워 모은 나무가지들과 함께 태웠고, 잠깐 신문에서 본 한 벤처기업가의 성공 기사를 보면서 성공의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그렇게 타다 바람에 날려 버려진 복권 조각이었던 것이다.
그때 불태운 복권은 재(灾)로 사라졌지만 불태운 성공의 의지는 비록 신산(辛酸)하기는 했지만 20년 동안 녀석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 라이터에 새겨져있던 여자의 나신(裸身)은 녀석의 성적인 타락이나 유혹보다는 도덕적 무장을 촉발한 특이한 정신적 효과를 가져왔던 것은 차라리 이상할 정도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녀석이 나를 찾은 것은 내게 외관상 라이터를 돌려주기 위함이었지만 라이터가 자신에게 가져다준 의미를 고마움으로 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그러나 사실 나는 부끄러웠다).
나를 찾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엄청난 재력가가 되어버린 녀석은 반복해서 언론매체를 이용했고 나 또한 그 엄청난 복권 소각(?)에 얽힌 그 녀석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라도 꼭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라이터는 아주 특색 있는 것이었고 라이터를 주고받던 상황이 우리 둘에겐 어떤 극적인 장면으로 남아있었기에 서로의 만남은 어렵지가 않았던 것이다.
"......전 그 라이터를 보면서 여자와 단란주점을 멀리하였습니다. 단란주점에 여러번 전화를 해서 누나들 좀 놓아주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저의 성공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 성공의 의미가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 도덕적이고 사회지향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저는 그 작은 라이터에서 부의 사회적 환원이란 거대한 교훈을 얻었던 것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시오."
그때 나는 복권 소각 사건을 이야기하려다 그만 두었다. 우리들의 이런 따뜻한 인간관계는 그 라이터의 교훈과 복권의 재(灾)가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나약한 신문팔이 소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지출처: blog.empas.com/jeongsg21/1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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