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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콘돔 논쟁은 없다

by 컴속의 나 2008. 10. 14.

콘돔 논쟁은 없다
-제목과 읽기의 현혹

사실 이 글은 콘돔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글입니다. 따라서 콘돔이란 단어와 관련된 것들을 상상하고 클릭해 들어왔다면 다소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글을 무시하고 바로 나가셔도 됩니다. 그리고 속았다는 모욕감과 부푼 기대에 대한 실망스러움, 욕구가 드러난 수치심 때문에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고귀한 입으로 저질스런 욕설을 퍼붓거나 증오의 댓글을 달아도 상관없습니다. 기꺼이 받아드리겠습니다.

이 글이 콘돔과는 관련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 물건으로써 '콘돔' 이 아니라 글의 제목으로써 '콘돔' 과는 아주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의도되고 계획되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해야겠습니다.

우선, 제목(기호)의 성격과 우리의 인식이 연결되는 경직성과 확정성에 대한 관찰입니다. 다시 말해, 콘돔이란 단어의 의미를 확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나아가서는 이 글의 내용을 확정적으로 추측하려는 태도에 대한 관찰입니다. 추측이란 다의미성을 뜻함에도 하나의 확정된 의미만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즉, 콘돔의 ‘성적의미‘가 글의 내용을 전적으로 규정하리라는 추측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콘돔이란 단어의 현혹에 빠져 쉽게 지나쳐버렸을 ’논쟁’ 이란 단어는 이 글을 논쟁적으로 보는 독자들의 관점에서는 아주 중요한 제목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 같은 소설은 그 제목의 의도가 아주 상징적이고 모호합니다. 에코 자신의 말대로 “제목은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어야 하지, 독자를 조직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에코는 의미가 소외되지 않고 풍성한 의미를 제공해주는 ‘장미’ 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오하게 에코는 윌리엄 수도사의 시종인 아드소를 통해 ‘장미’ 를 종교적, 심미적, 감정적인 차원등을 포괄하는 논쟁의 핵심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미를 수도승을 유혹하는 사탄적 의미나 콘돔을 성적 의미만으로 보는 경직성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예 <김밥 부인 옆구리 터졌네>와 같은 단선적인 제목으로 상상력과 의미를 확정하고 경직시키는 것은 바람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제 이 글을 쓰는 실제의 의도가 드러났습니다. 부제처럼 제목에 현혹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콘돔논쟁은 없다>라는 제목만을 보고 야릇한 내용을 상상했다면 그것은 진지한 읽기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제목이 아주 직설적이고 원색적인 것만을 찾으며 소설이나 영화나 만화를 편식하는 것은 진지하지도 않거니와 정신적으로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직설적이고 원색적인 제목을 가진 소설과 영화와 만화가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직설적이고 원색적인 제목이 가치 기준이 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것들만 ‘편식’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화의 영역은 다양합니다. 그 다양성을 체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진지와 경쾌, 순수와 감각, 정신과 육체 등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문화적 경험들을 균형 있게 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해 당혹스러웠던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스시 대혈투>라는 일본영화가 음식과 요리 실력을 겨루는 요리사들의 경쟁과 관련된 가족 영화라고 판단하고 아이들과 함께 보았다가 낭패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에는 스시는커녕 노란무 한 조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일식집에서 일어난 잔인한 살인사건과 스시칼을 휘두르는 살인자와 형사간에 벌어지는 엽기적인 대혈투를 다룬 영화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12세용이었습니다. 폭력물에 너그러운 것은 알고 있지만 스시칼을 휘두르며 형사를 죽이고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는 영화가 12세 관람가라는 것은 폭력에 대한 너무 관대한 태도가 아닌가 합니다.

한 달 전 일입니다. 일요일 날 아내가 친구와의 약속으로 외출을 하고 제가 아이 둘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할 일도 없어 인터넷으로 영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제목이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제목도 유아틱한 인형극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처음 얼마를 아이들과 함께 보다가 잠이 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아이들만 남겨놓고 안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아이들을 보는 데는 인터넷처럼 좋은 것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컴퓨터에 달라붙어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영화를 보니까 말입니다. 방에 누워있자니 신음 소리같은 것이 간간히 들려왔지만 사람이 아파도 그런 소리를 내지 않습니까. 인형극인데 뭘, 하면서 그냥 잠을 청했습니다. 너무 무딘 겁니까? 이게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리를 위해 자주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이 났습니다. 보통 인형극하면 전체관람가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의 경우도 전체관람가로 알고 아이들에게 보도록 하고 잠을 잤던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 알고 보니 그 인형극이 성인용이었던 것입니다. 관습화된 생각을 완전히 벗어났던 것입니다. 인형극이라는 형식(제목, 겉) 만을 보고 내용(속)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응당 인형극이란 전체관람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며칠 뒤 아이들이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해서 다시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 번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빠가 그러니 7살과 5살짜리 아이들은 그 영화를 당연히 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세 번을 보고나서 아이들에게 영화에 관해 물었지요. 아뿔싸, 인형들이 옷을 너무 자주 벗고 같이 붙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직접 확인해 보니 성인용이었던 것입니다. 참 황당했던 일입니다. 콘돔논쟁이란 이 글이 실망스러운 경우와는 반대의 경우가 되겠네요.

자, 이렇게 제목 또는 관습에 의해 내용을 판단하고 영화를 보게 될 때 황당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별 충격이 없다고요? 도처에 널린 것이 그런 것들이니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요? 아무튼 정작 자신은 내용 확인이나 정보도 없이 아이들에게 보여준 것은 실수라고 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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