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를 위한 변명, 그 마을 모퉁이 작은 도서관
아마 이십년도 더 넘은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은 B라는 도시 근교의 작은 마을로 반쯤 도시화된 아직은 농촌의 풍경이 남아있던 곳이다.
그 곳은 묘하게도 삼각형의 지형을 하고 있었는데 그 꼭지점에 해당하는 지점들에 각각 동쪽으로는 도서관, 서쪽으로는 나이트 클럽, 그리고 북쪽으로는 은행이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는 그 도서관, 그 나이크 클럽, 그 은행이 가장 두드러진 이정표가 되었다. 도서관 옆 어디, 나이크 클럽 뒤쪽 어디, 은행에서 한 정거장 가서 어디 하는 식으로 말이다.
지금은 추억거리에서나 이야기 되는 지나간 시간 속에 남아있는 사실들이다. 현대식 도시가 되어버린 이곳에 이제는 도서관이 무려 20곳 , 은행이 100여 곳, 나이트 클럽이 200여 곳이 난립하고 있다. 작은 농촌 마을이 이렇게 산전벽해가 되리라고는 이십년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옛날 이곳의 도서관과 나이트클럽과 은행은 유명한 이정표라 일종의 홍보 효과 또한 컸다. 별다르게 놀이시설이 없던 곳이라 학생들은 도서관에 모여들었고 마을의 유지들은 은행을 비롯해 은행 주변에 형성된 다방촌 근처에서 커피와 쌍화차를 앞에 놓고 노닐기 일쑤였으며, 나이트클럽은 주로 외지에서 관광 온 젊은이들이나 마을의 논다는 놈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이렇게 단순했던 곳이 이제는 누구도 그 지역의 성향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도서관과 은행과 나이트 클럽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도서관에서도 놈팽이들이 지랄을 하고, 은행 근처에는 오락실과 사채업자들이 난리를 치고 나이트클럽은 학원가와 술집들이 뒤섞여 번쩍거리고 있다.
이제 이 도시에서 낭만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다. 수 많은 인간들은 쉴 새 없이 지나다니고 있지만 인간성이 상실되었다는 탄식이 터져 나오고 있다.
*
이십년 전 그 사건의 주인공은 K이다. 은행에서 큰돈을 털어 아버지의 수술비로 쓰려던 K는 조여 오는 경찰의 포위망에 밀려 도서관으로 뛰어들었던 사건이다.
그 당시 신문의 한 모퉁이에 작게 취급된 K의 강도 사건은 동시에 참 황당한 사건이기도 했다. 교회나 절로 도망간 범인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도서관으로 뛰어 들어 간 범인은 믿거나 말거나 K가 세계 최초가 아닐까 한다. K 또한 머리에 머리털이 나고 처음으로 들어 간 도서관이었다.
경찰도 이런 K의 사정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K가 도서관에 숨어있다고는 추측조차 않고 나이트클럽과 다방가 일대를 포위하고 은행에서 도시로 나가는 도로들을 차단하는 등 헛된 부산을 떨기만 했다.
만약 K가 도서관에서 나와 도서관 뒤쪽 야산으로 도망을 쳤다면 분명 K는 이 마을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은 마을이었기에 경찰도 예상하지 못한 경우였다.
K는 도서관으로 들어가 4층 자유 독서실내에 있는 캐비넷에 돈 가방을 넣었다. 도서관내 어디에서도 K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유 독서실은 숨어있기에는 주위가 너무 트여 있다는 생각이 들어 K는 아래층 자료 열람실로 내려갔다. 바깥에서 기웃거리다 보니 높은 책꽂이들이 나란히 놓여있는 것이 숨기에 알맞은 장소처럼 보였다.
K는 자료 열람실로 들어가 책꽂이 사이를 천천히 거닐었다. 28년이란 힘든 삶을 살아오면서 책은 단 한 번도 K의 손에 잡혀있던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초등학교의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한 K는 아버지가 한글 정도는 배워라고 하면서, 쓰레기통에서 주워 가져다 준 초등학교 우리말 교과서가 전부였다.
이후 책은 K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다. 그 속사정은 상당히 복잡하고 가슴이 아프지만 여기에서 다두기는 좀 적절치가 않다.
이런 K가 비록 숨어있는 곳이기는 하나 책의 오솔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건 삶의 수 없이 많은 경험들 중에서 단 한 번의 경험이었다. 수많은 책들을 보면서 그 향기를 맡으면서 천천히 걷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K가 책꽂이 사이를 걷고 있을 때 K의 시선으로 들어 온 한 아리따운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K가 걸어가는 방향에서 K를 마주보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피해 K를 지나치면서 가벼운 눈인사를 보내었다. 순간 K는 참을 수 없는 가슴의 고동소리를 들었다. K도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녀가 지나쳐 가면서 뿌려준 그녀의 체취는 도피의 불안감에 빠져있는 K에게는 마취와도 같은 것이었다. 감미롭기 이를 때가 없었다. 막다른 모서리에 몰린 쥐처럼 도피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린 K에게 이상하게 찾아 온 여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었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감정이었다. 책의 향기와 여자의 체취에 취한 K는 가슴 속 깊이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무언가에 그 자신의 육신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동시에 도피라는 극단적인 상황과 사랑이라는 애틋한 감정이 중첩되면서 K는 절규할 것만 같은 고뇌에 휩싸여들었다. K는 뒤돌아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책꽂이 앞에서 문득 문득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 그녀는 책꽂이 쪽으로 목을 쭉 빼고 한 참을 들여다보기를 되풀이 했다. 그러다 책을 빼는 그녀의 긴 손가락은 너무나도 희고 가늘었다.
그녀가 저만치 멀어지고 이내 그녀의 모습은 오른편 책꽂이 쪽으로 사라졌다. K는 서있던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책꽂이는 더욱 높아져 보였고 책들이 더욱 아득히 보였다.
별 필요도 없을 듯 한 수많은 책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이 이상한 곳이 K에겐 이상할 정도로 편안해졌다. 그리고 K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인간들은 왜 이토록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일까? 이 책들을 써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책을 쓴 사람들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 K는 앉아있는 자리에서 무심히 책꽂이를 보았다. <슬픔없는 이별>이라는 어느 소설가의 자전 소설이었다. K는 <슬픔 없는 이별>을 책꽂이로부터 빼서 한 페이지를 넘겼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나는 이 도시를 떠납니다. 그녀와의 이별이라기보다는 이 도시와의 이별이라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비록 그녀를 떠나지만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을 거두어 들인 건 아니니까 말입니다. 이 도시에 남겨진 사랑이 있는 한 이 도시 또한 영원히 나의 마음 속에서 살아있을 것입니다. 안녕!”
K에게는 뜻하지 않게 찾아든 한 소설가의 느닷없는 작별의 인사였던 것이다. 은행에서 돈을 훔쳐 죽어가는 아버지의 수술비를 마련해야 했던 K이지만, 세상에 대한 원한과 원망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사랑도 무의식 깊은 곳에 깃들어 있었던 것일까? K의 머릿속에 ‘안녕’ 이란 단어가 메아리쳤다. 안녕, 안녕, 안녕! K의 눈이 촉촉이 젖어갔다.
*
K는 호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볼펜으로 이렇게 써내려갔다.
이미지 출처:www.flickr.com/photos/86946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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