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야성(野性)
어느 시대나 세대간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지만 요즘처럼 세대간의 단절이 심각한 적도 없지 싶다. 흔히 신세대와 구세대간의 공통적인 대화의 주제가 상실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저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가 그렇고 인터넷 그렇고 컴퓨터 게임이 그렇다. 즉 급격한 사회의 변화와 함께 급격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신세대와 구세대가 공존하는 사회의 최소 단위로서 가정은 이러한 차이를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파괴되는 가정 또한 얼마나 증가하고 있는가. 외견상 부모와 자식은 인륜, 혈연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로 서로 단단히 묶여있는 듯하지만 사회, 문화적 의식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 아닐까 한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기대는 다소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편향을 보여준다면 자식들은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편향에 저항한다. 비록 노골적인 저항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속 깊이에서 싹트는 저항의 감정은 강렬할 수 있다.
요사이 학교가 무너졌다고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가정이 무너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학교를 누가 무너뜨렸는지 모르겠지만 학생으로서의 신세대들이 책임의 일부를 면할 수 없다. 하지만 가정을 지키지 못하는 기성세대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하겠다.
신세대들은 자신들의 행위와 의식이 속박되기를 싫어한다. 이러한 속박에 대한 혐오증은 기성세대들이 끊임없이 교육시키고자 하는 속성으로서 야성(野性)이 아닌가 한다. 반항과 저항은 신세대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아닐 수 없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저항은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 맹목적인 불신에 가깝다. 이것은 동시에 기성세대들이 갖는 신세대들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과 함수의 관계에 있다. 서로 이해해 주지 않으려는 아집 때문이다. 아니 이해 할 수 없는 벽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모순의 충돌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세대차이의 벽을 허물 수 없다. 하지만 신세대들의 야성은 인간적인 특성이기 이전에 생물학적인 특성이다. 생물학적인 특성임을 이해한다면 기성세대의 아량이 더 필요하다. 곤충의 세계를 보면 그 어미가 자식들의 먹이가 되는 경우를 보지 않는가. 기성세대가 먼저 다가가 대화의 시간을 만들고 그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신세대들의 입과 마음을 열게 하고 궁극적으로 믿음을 싹트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비록 세대차이가 완전히 극복될 수는 없지만 소통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본다.
신세대들의 야성(野性)은 대체로 맹목적이다.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교육이란 이름으로, 사회제도의 관습과 전통이란 이름으로 그들의 목에 속박의 사슬을 묶는다면 신세대들의 야성(野性)은 더욱 사나워 질 것이다. 기성세대가 노력해야 한다. 먼저 아집을 꺾고 “전통은 단지 논증할 수는 없지만 정당성을 가진다” 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중심이 아닌 주변의 문화에도 마음을 열 필요가 있다. 신세대의 야성을 누그러뜨리는 것은 속박이 아니라 섬세한 관심이며 보살핌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병든 신세대들의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한다. 기성세대의 모습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그들의 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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