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 중심과 이탈
인간에겐 야성(野性)이 있다. 아프리카의 초원을 뛰노는 사자나 기린 같은 동물적인 야성이 있다. 그 야성 중에는 물론 온화한 초식성과 사나운 육식성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과 인간이 생존을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걸 보여준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과 살인이 끊임없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동물적인 야성간의 문제로 생각해 봄직도 하다.
문제는 인간의 육식성이 초식성보다 비대할 때였다. 힘과 무력이 지배하는 경우이다. 존재하는 인간의 제도와 법과 종교를 보면, 인간의 야수적인 육체를 지배한 정신의 성과물처럼 여겨진다. 인간의 그 사나운 육식성이 어떻게 순화되고 있는지를 제도와 법과 종교는 잘 보여준다. 만약 제도와 법과 종교의 등장에 근거해서 '인간의 역사는 야수성과 순화(純化)로 얼룩진 역사이며 또 그렇게 전개 될 것이다' 라고 한다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된 것은 스스로에게 중심(中心)을 제공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었다. 도덕과 윤리와 신과 이념을 마치 오뚜기의 중심 추처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인간을 다잡는 그 자기 희생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인간은 인간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심(中心)은 권위와 권력과 결합하여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야수적(?) 억압으로 변질되면서 인간은 자기 내부의 야수성의 통제와 조절과 억압과 더불어 자기 외부의 거대한 권력과 권위라는 감당할 수 없는 억압에 직면한 것이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한다면 내면의 욕구를 억압하고 외부의 권력과 폭력에 의해 억압당하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면에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권력과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을 온전히 맡겨버리거나 중심(中心)으로부터 이탈하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이탈은 악덕과 미덕을 다 포함한다. 먼저, 인간의 야수성에만 국한해 본다면 나쁜 의미가 선명히 드러난다. 중심에서 이탈한 새로운 야수성이 개인적인 살인과 집단적인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구속적인 중심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미덕으로 간주 될 수 있으나 동시에 가장 극단적으로 인간의 야수성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악덕으로 간주 될 수 있는 것이다. 이탈이 이러한 범죄적인 양상으로 변질되고 새로운 억압과 권위주의를 낳는 것은 인간의 정신 속에 내재된 동물적인 야수성이 잉태한 가장 최악의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경우로, 은둔과 세상과 인연을 끊는 이탈이거나 중심의 해악에 순수 비판적 이탈이라면 그는 온전히 자유로운 이탈을 이루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은 바로 이러한 이탈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탈은 인간의 야수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된다. 즉, 순화(純化)는 완전한 질적(質的) 변화가 아니라 억압에 대한 일종의 반응 양식인 까닭에 더 근본적인 질적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한 질적 변화의 중심에 종교와 부단한 자기 수양이 있다.
사족이지만, 그렇다면 현실이 완전한 파라다이스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인가? 가당한 결론인지는 모르지만 ‘불가능’ 하다. 억압은 끊임없는 이탈을 낳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 ‘완전’ 하고 절대적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그것은 수많은 철학자들의 좌절이기도 했다. 완전과 절대란 <관념>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지 현실은 결코 완전과 절대적인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해 현실에 대한 실망과 도피가 그러한 관념을 만들어 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에서 실존적으로 주어진 이 구심력(중심)과 원심력(이탈)의 충돌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인간들을 피곤하게 할 것이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굴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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