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그림 찾기
숨은 그림 찾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교묘하게 숨겨진 그림들을 찾아내고 좋아하던 적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쉽게 찾아내지만 한 두 개의 그림은 찾기가 꽤 까다로워 시간이 많이 걸린 적도 있을 것이다. 그림 속에 기발하게 사물을 숨긴 화가의 재주에 감탄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는 찾아내고 뿌듯해 했을 것이다.
인간 세상도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라면 그림 속에 숨어있는 그림들이 있을 법하다. 그리고 인생 자체도 숨은 그림 찾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숨 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 해도 숨겨진 그림, 좀 더 말을 붙이자면 설계도가 있지 않겠는가. 콘크리트 덩어리의 건물을 하나 짓는 데도 정교한 설계도가 필요한데 콘크리트의 무기질 덩어리와는 차원이 다른 인간이란 존재에 더 정교한 설계도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자.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은 또 어떤가. 우리는 당연하게 살아가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무에 가깝다. 그야말로 우리가 찾지 못하는 숨은 그림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가시적인 현상과 불가시적인 본질로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골이 타분한 말이다. 현상이니 본질이니 하는 용어를 좀 더 현실적인 용어로 바꾸어 본다면 아마도 ‘그냥 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한 해석’ 이라고 하자. 어차피 본질이란 보이는 것에 대한 인간 해석의 한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에서의 신의 의지나 무(無) 등은 인간 해석의 산물인지 아닌지의 논란이 없지 않겠지만 이데아니 절대정신이니 존재자니 하는 것들은 결국 인간들의 보이지 않는 것, 즉 숨어있는 것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하지만 숨은 것을 찾아보려는 인간의 이러한 노력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다. 그저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게 할 수 있는 것, 성찰의 깊은 곳에서 인간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음미해 본다는 것, 여기에서 보이는 것에 대한 진지하고 엄숙한 태도가 싹트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이는 것을 무시하고 허튼 꿈만을 꾸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보이는 것에만 몰입하면서 숨어있는 것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그 얼마나 동물적인 존재로 추락하고 말 것인가. 숨어있는 것에 대한 성찰, 즉 숨은 그림 찾기를 할 수 있기에 인간은 위대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을 보이는 것에의 몰입의 시대로 규정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보편화된 성형수술이 그 좋은 예가 아닐까 한다. 즉흥성과 말초성에 근거한 감각에 삶을 의존하고 있는 것이 절정에 달해 있음을 부정할 수 있을까? 보이는 것, 즉 표피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감각에 대한 믿음이다. 예를 들면 대중문화가 깊이 있는 사색과 성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고도화된 과학 기술(컴퓨터와 카메라, 편집과 이미지) 에 의존하여 감각적인 자극을 극대화 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연예 프로그램의 감각적인 쾌락의 제공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관습화되고 일반화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는 것이다. 감각적인 쾌락이라는 그 화려한 꽃의 이면에 감추어진 숨어있는 삶의 그림을 찾으려는 노력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과학과 기술은 보이는 것을 더 잘 보이게 하고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조차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기에 더 이상 숨은 그림 찾기는 의미가 없는 일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종교의 영역조차 과학이 축소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인간에게 꼭 꼭 숨어있어야 할 것조차 과학은 유별나게 드러내 보여주는 느낌이다. 심지어 인간의 감정이나 감수성마저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되고 감정을 가진 로봇이 만들어지기까지 한다. 이제는 숨어있는 것이 자꾸만 드러나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얼마나 즉흥적이고 감각적이고 표피적인가. 과학과 기술이 제공하는 모든 것들은 대체로 감각적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놀랍도록 차갑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그렇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합리주의가 극대화되면서 이제는 [보고 즐긴다, 고로 존재한다]는 과학에 기반을 두는 과학적 합리주의가 입증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져다준다.
입증하고 볼 수 있는 것에 의지한다는 것, 다시 말해 과학과 기술, 그리고 세속적인 감각주의(이러한 표현이 가능하다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허상에 사로 잡혀 보이는 것조차 보지 못하는 이상주의 보다 보이는 것을 좀 더 합리적으로 보고 즐기는 현실주의가 뭐 나쁘고 사악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가슴이 빠진 머리처럼 머리 없는 맹목적인 가슴에 있는 것이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지나친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이 소외되는 세계에서 합리성이 유익한 역할을 할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성은 브레이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우리는 과학적인 합리주의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사색과 성찰도 없고 보이는 것에 대한 합리성도 없다. 무지가 있다. 무지하기에 고리타분한 것은 싫은 것이다. 놀고, 놀고 또 놀거나 자기중심의 미몽에 쉬 빠진다. 타인과 사회와의 관계성에 어떤 합리성도 부여하지도 못한다. 이 어정쩡한 현실 속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자. 숨은 그림을 찾아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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