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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와 관련하여

by 컴속의 나 2008. 8. 18.

                                        생태주의와 관련하여


1.정치적 생태주의와 생태주의 정치

생태주의의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이 창조한 문명은 생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의 평등과 해방을 부르짖는 사회주의도 그것이 간과하고 있는 여성, 식량, 환경 따위의 사각지대로 말미암아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두 말 할 것도 없다.

현재 인간 문명의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만약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제지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인류는 공멸의 위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생태주의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솔직히 늦은 감이 있다. 2040년이 되면 북극의 얼음이 다 사라진다고도 하고 인간의 자원도 고갈의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이 위기 앞에서 이념 따위는 어쩌면 사치인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생태주의를 어떻게 인류에게 확산시키고 실천을 도모하는가가 당면한 문제다. 이와 관련하여 생태주의 정치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상적인 정치행태라고 할 수 있다. 후쿠야마가 틀린 것은 생태주의 정치에 대한 통찰이 부족한 것이다. 완전한 민주주의로써 생태주의를 그는 몰랐다고 생각한다. 인간 중심의 민주주의는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상의 민주주의로 확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태주의 정치 는 가능할까?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 중심적인 역사는 그 해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인간도 그 해체의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민주주의 정치를 넘어 생태주의 정치로 나아가는 실험을 하고 현실적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면 그는 역사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최초의 인간이 될 것이다.

단지 이러한 노력이 가능하려면 정치적 생태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그 나마 가능한 일이다. 생태주의자들이 정치로 진출하여 부분적으로 정책의 방향을 생태주의로 변화시키고, 개선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녹생당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제도 정치로의 진출이 아니더라도 그린피스등의 환경 단체들이 여론을 환기시키고 정치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생태주의 정치는 소집단에서 실험될 수는 있겠으나 국가 단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며, 다만 정치적 생태주의가 어느 정도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본다.

이 세상에 인간의 행위가 정치적이 아닌 것은 없다. 아니 좀 더 좁혀서 국가 정책과 관련한 경우 그것은 당연히 정치적이란 이름을 띠게 된다. 농민의 쌀 수입 시위, 이를테면, 미국의 대량 생산된 유전자 변형 농산물에 대한 유기농 쌀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정치적인 생태주의라 부를 수 있다. 또한 생산주의와 인간중심주의 비순환적인 개발 등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가장 효율적인 정치적 생태주의라 부를 만 하다.

그러나 ‘정치적‘ 이란 단어의 함의가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정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 대립적인 존재로 위치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생산주의, 자연파괴등을 근거로 존립하고 있는 기존의 정치를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러하면 굳이 정치적이란 단어로 생태주의를 수식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정치적‘ 이란 단어는 생태주의의 본질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주의, 종교, 문화, 생명과학, 공동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생태주의를 발전시키고 강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 다양성의 원리에도 맞다.


2.정치적인 생태주의에서 ‘정치적‘ 이라는 용어의 함의가 다양성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일까?


위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정치적‘이란 말의 함의는 기존 정치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양성의 정치를 의미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기존 정치의 안티테제로 의해서며, 생태주의 그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다양성을 협소화시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종교적인 생태주의, 식량 생태주의, 문화생태주의, 생태여성주의 등 다양한 생태주의를 협소화할 위험이 있다고 본다.


3.생태주의적인 행동양식의 변화는 ‘정치적‘ 인 행위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

정치적 생태주의가 권력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정치적 생태주의는 그 용어상에서 정치권력을 지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으로의 화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다. 그것은 단순히 권력에 대한 대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대안제시를 목적으로 하기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A라는 권력을 쥐고 있는 인간이 B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정치적 생태주의는 생태주의 정치를 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생태주의 정치라는 용어 자체가 언어로만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마도 리피에츠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생태주의 정치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바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4.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5.동양정신의 언급은 이분법이 아니라 생태주의로의 진정한 환원을 의미한다.

위대한 정신들은 (이건 참 잘못된 표현이었다.) 대체로 동양에서 존재했다.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노자도, 간디도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생태주의자들이다. 희랍의 철학은 생태 사슬의 순환에서 인간을 독자적인 존재로 만들었고 이성과 합리성으로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삼는 비순환적인 생산주의를 초래했다. 그리고 산업주의의 결과로 지속 불가능한 발전을 통해 인간은 풍요 속에서 동시에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금 서구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녹색 혁명을 부르짖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인간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들의 생태주의 이론을 호들갑스럽게 받드는 지식인이 있다면 그것 또한 부끄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스스로에게 눈을 돌려보아도 생태주의는 생활 속에 존재하고 있고 있다. 왜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에서 그토록 야단법석을 뜨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민주주의는 서구가 전해준 위대한 유산이다. 산업주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제 민주주의와 산업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생태주의는 동양의 정신에서 찾았으면 한다. (*)